그 해 겨울 우리들의 영혼은 따스하였지.
십여 년 전 이맘 때 쯤의 이야기입니다.
청담성당 교우로서 그 당시 영동세브란스 병원에 암으로 입원해 계신 안나 할머니를 뵈러 갔더니 인근교회의 목사님과 전도사님이 먼저 오셔서 기도 중 이셨다. 사연을 알고 보면 이해가 된다. 그 할머니는 미국에서 오래사시다 홀로 한국에 와서 외롭게 사신 분인데 병까지 얻고 보니 기댈 때가 한 군데도 없는 독거 노인이셨다.
평생을 독신으로 혼자 사셨다고 들었다. 그러니 자녀도 당연히 없는데다가 이곳에는 일가친척도 없다하셨다. 생계보호대상자로서 구청에서 나오는 최저 생계비로 살아오셨다. 퇴원 하셔서는 교회도 가고, 성당도 나가시고 하셨기에 병원에 계실 때는 큰집 작은집 식구들이 서로 와서 말 벗도 되어드리고 기도도 해 드렸다. 당신 입장에서는 죽음이 두려운 탓에 병마와 싸워 이기기 위해서는 지푸라기라도 잡고픈 마음에 하나님도 필요하고 하느님도 절실히 필요하다 하셨다.
병세가 점점 악화되어 재입원하여 계신 중에 전화가 왔다. 낼 모레 퇴원해야 하는데 올 수 있냐고? 퇴원 날 우리는 차에 할머니를 모시고 병원을 나섰다. 집이 어디에요? 여쭤 봤더니 청계산 자락이라 하셨다. 도착해 보니 할머니는 청계산 기도원에서 관리하는 월 칠 만원짜리 쪽방에 살고 계셨다. 그날은 꺼진 연탄불을 갈아드린 후 잠시 머물다 산을 내려왔었다.
그 즈음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었다. 친구 막달레나의 제안으로 우린 안나할머니를 위한 깜짝이벤트를 마련했다. 성탄절 낮에 요런 저런 성탄선물과 함께 고깔모자에 폭죽까지 준비했고, 마침 케익은 이 소식을 듣고 청담성당 원장수녀님(고 스페란쟈)께서 준비해 주셨다. 그날 우린 성가도 부르고 사진도 찍고 우리 세 사람만의 멋진 크리스마스 잔치를 치른 셈이다. 덕분에 모처럼 할머니 얼굴에 미소와 웃음이 번져 나왔다.
낮에 내린 눈이 얼어 청계산 기도원 기슭을 내려오는 길은 몹시 미끄러웠다. 초저녁 어둑한 날씨에 춥기도 하였지만 우리의 마음만은 그 어느 때 보다 훈훈하였다. 아픈 몸으로 쪽방에 홀로사시는 가련한 할머니,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온 고독한 삶! 잠시나마 시름을 잊고 기뻐하시던 할머니를 생각하니 찬바람이 도리어 시원하다 여겨졌다.
그리고 생각했다. 안나 할머니에게 일회성 기쁨이 아닌 참 사랑을 전해 줄 방법은 없을까? 환자와 호스피스봉사자와의 평범한 관계가 아닌 그 분에게 진실로 필요한 존재가 되어드리자. 얼마 남지 아니한 여정이지만 남은 인생을 의미 있게 해 드려서 참 기쁨을 누리게 해드려야지 하고 속으로 다짐했다. 그 때 곁에서 친구 막달레나가 거든다. "동기간도 없는 분이니 다음에 만나면 네가 동생이 되어 누님이라고 부르면 좋을 것 같다."
묵은해가 가고 새해가 되었다. 우린 다시 쪽방을 찾았다. 그새 안나할머니는 많이 수척해 지셨고 통증에 얼굴도 자주 일그러지셨다. 기도와 성가를 마친 후 잠시 기분이 상승된 틈을 기다려 내가 제안을 드렸다."안나할머니 저는 장남으로 태어나 누나가 없어 외로웠거든요. 저의 누나가 되어 주시면 안 될까요?" 대답이 없다. 재차 물었다. "제가 밉지 않다면 오늘부터 저의 누님이 되어 주세요. 허락해 주신다면 지금부터 누나라고 불러 드릴께요." 순간 멋쩍어 하시더니만 이내 좋다고 허락하셨다. 우린 동시에 분명히 느꼈다. 그 누님에게서 행복감이 피어오르는 것을,
내친 김에 가족애를 선물하자 마음먹고 아들을 만들어 드려 평생 못 들어 본 엄마 소리를 듣게 해 드린다면 얼마나 좋아하실까!
내게는 아주 싹싹하고 예의바르며 부드러운 성품의 대자가 있다. 사십 줄에 접어 든 손가브리엘 그가 내 마음에서 아들 감으로 선택되어 그에게 현 상황을 충분히 설명해주고 동의를 구했다. 그를 데리고 청계산 자락을 올랐다. 그날 안나 누님은 어머니소리를 듣고는 눈물을 지으셨다. 이제 안나할머니는 이 땅에 혼자가 아니셨다. 동생도 있고, 아들까지 낳았으니, 설날 아들 가브리엘이 엄마가 원하는 색깔의 하늘색 파카를 설날선물로 준비하여 우리와 함께 쪽방에 올라 함께 세배를 드리고 내려왔다. 우린 짧은 시간이지만 동생과 아들로서 안나누님과 정겨운 사랑을 주고받으며 즐거웠었다.
그 행복감도 잠시였다.
누님은 암세포가 뇌에까지 전이되어 홀로 생활이 곤란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곳은 연탄불도 직접 갈아야하는데 저 아픈 몸으로---. 우린 수소문하여 청주에 있는 말기암 환자의 집 '성모 꽃마을'로 누님을 모셨다. 얼마 뒤 꽃마을에서 연락이 왔다. 임종이 가까운 듯하니 한번 내려오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 가브리엘을 데리고 내려갔다. 누님이 모기소리로 묻는다. 가브리엘을 향해 손을 잡으며 "내 아들아! 왜 이제 왔니?" 정작 내 눈에 눈물은 엉뚱한 것에서 터졌다. 간호사가 설명하길 아들 생각하며 저 투명 비닐박스안의 하늘색 잠바만 자주 보셨노라고, 정말 설날 선물로 아들이 사 드린 잠바는 한 번도 입어보지 못한 채 거기 그렇게 있었다.
오는 봄기운에 겨울의 끝자락은 밀려가고 삼월 에 접어들었다.
새벽 한 시경 성모 꽃마을에서 안나 누님이 돌아가셨다는 다급한 연락이 왔다. 난 대자에게 즉시 연락했더니 자기도 가겠단다. 성당 문 앞에서 새벽 5시에 가브리엘을 만나 청주로 향했다. 꽃마을에 도착하니 시신은 청주 성모병원으로 안치하였다한다. 우린 차를 돌려 병원 영안실로 갔다. 입소원부에 우리가 동생과 아들로서 기재되어 있기에 보호자 자격으로 시신을 인도받아 청주 화장장으로 갔는데 모든 것이 여의치 않아 다른 곳을 찾다보니 충주시 안림동에있는 화구가 둘 뿐인 아주 오래 된 화장장이 연결되어 그곳에서 시신을 화장하게 되었고 충주시내에 들어와 늦은 점심을 대자 가브리엘과 함께하였다. 한줌 재는 병에 담아 성모꽃마을 제대 아래에 있는 단에 모셨다.
나는 서울에 올라와 다음날 그 누님의 주소지인 청담1동 동사무소에서 사망신고를 하려고 호적등본을 떼어보니 부모도 자식도 형제도 아무런 기록 없이 홀로 등재되어 있었다.
'정말 외톨이로 사셨구나' 그러나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본향으로 가시는 그분을 절대 외롭게 놔두지 않으셨다. 이 땅에 잠시나마 동생과 아들이 함께 했었으니까!
사망신고를 마치고나니 동사무소 직원이 말하길 보호자 은행계좌번호를 적어놓고 가란다. 그 당시 생활보호대상자에게는 장례비 보조금이 오 십만원 지급된다고 하였다. 며칠 뒤 내 통장에 입금 된 오 십만원을 인출해 청담성당 호스피스봉사회장에게 전달해 드렸고, 그 금액은 안나누님이 계셨던 청주 '성모 꽃마을'에 성금으로 전액 기탁하게 되었다.
'누님 그 때 날씨는 무척 추웠었는데 당신은 화구 속에서 얼마나 뜨거웠어요?' 그러나 저는 믿습니다. 생전에 많은 분들이 누님을 위해 기도했잖아요.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시리라 믿어요. 누님께서 두 손 모아 기도하신 아버지 하느님도, 하나님도 만났지요. 그 품에서 행복을 맘껏 누리며 지내세요. 저도 아버지가 부르시면 언젠가는 갈 곳이니깐 제 자리도 좋은 곳으로 잡아두고 기다리세요. 사랑합니다. 안나 누님!
제 곁에 저의 수호천사로서 늘 누님이 함께하심을 느낍니다.
막달레나와 후안디에고의 맞잡은 손
사순시기를 맞아
영광스러운 부활을 준비하기 위하여
오늘 나는
온전히 묻혀져 썩어져야 하는데
죽기는 싫으니,
주님,
제 욕구를 거두어 주시고
세상 것의 집착에서 저를 비워 주소서.
님께서 비워주신
그 텅 빈 공간을
당신의 영으로 가득 채워 주시어
당신이 제게 원하시는
그 일을
제가 기꺼이 하도록
저를 주관해 주소서.
님께서 쓰신 가시관을
제가 쓰고 따르오리다.
그렇게 순명하며
예수님의 발바닥이 되어
가라하시는 그곳,
저를 이끄시는 그곳에
묵묵히 예수님과 함께 동행할 때,
그때 저는 깨닫게 되겠지요.
내 머리에 얹혀진 것은
가시관이 아니라
승리의 월계관임을!
오늘도 세상에서는 온전히 죽고,
당신안에서
오롯이 부활하게 하소서.
-아멘-
첫댓글 詩人후안디에고님,
정말 잘 읽고 갑니다.
오늘 청년토크로 많이 애쓰신 그 시간
주님의 축복으로 채워지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