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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정 [辛夕汀, 1907.7.7~1974.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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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정(辛夕汀,1907-1947) 시인의 본명은 석정(錫正)이다. 전라북도 부안(扶安)군소 출생하였으며 보통학교 졸업후에 상경하여 중앙불교전문강원에서 약 1년간 불전(佛典) 연구했다. 1931년 《시문학》 3호부터 동인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한 그는 그해에 「선물」, 「그 꿈을 깨우면 어떻게 할까요」 등을 발표했고, 계속해서 「나의 꿈을 엿보시겠읍니까」, 「봄의 유혹」, 「어느 작은 풍경」 등 목가적인 서정시를 발표하여 독보적인 위치를 굳혔다. 8 ·15 광복 후에는 시작(詩作)과 후진양성에 전념했고, 저서로는 초기의 주옥 같은 전원시가 주류를 이룬 제1시집 『촛불』(1939)과, 역시 8 ·15광복 전의 작품을 묶은 제2시집 『슬픈 목가(牧歌)』(1947), 그 뒤 계속 『빙하(氷河)』, 『산의 서곡(序曲)』, 『대바람 소리』 등의 시집을 간행했다. 그의 시풍은 잔잔한 전원적인 정서를 음악적인 리듬에 담아 노래하는 데 특색이 있고, 그 맑은 시정(詩情)은 읽는 이의 마음까지 순화시키는 감동적인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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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호는 석정(夕汀ㆍ釋靜ㆍ石汀) 외에 석지영(石志永)ㆍ호성(胡星)ㆍ소적(蘇笛)을 쓰기도 하였다. 전라북도 부안 출신. 아버지는 기온(基溫)이다. 부안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향리에서 한문을 수학하였다.
그 뒤 1930년 상경하여 중앙불교전문강원(中央佛敎專門講院) 박한영(朴漢永) 문하에 1년 남짓 불전을 연구하며 회람지 [원선(圓線)]을 편집하기도 하였다. 6ㆍ25사변 이후 [태백신문사] 고문을 지내다가 1954년 전주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였으며, 1955년부터는 전북대학교에서 시론을 강의하기도 하였다.
1961년에 김제고등학교, 1963년부터 1972년 정년퇴직 때까지는 전주상업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였으며, 1967년에는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전라북도지부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그의 시작활동은 1924년 4월 19일자 [조선일보]에 ‘소적’이라는 필명으로 <기우는 해>를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뒤 1931년 [시문학]지에 시 <선물>을 발표하여 그 잡지의 동인이 되면서부터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로부터 <임께서 부르시면>, <나의 꿈을 엿보시겠습니까>,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등 초기 대표작들이 발표되었다. 이 작품들을 모아 1939년에 첫시집 <촛불>에 이어 1947년에는 제2시집 <슬픈 목가(牧歌)>를 간행하였다.
석정은 젊었을 때 미국의 삼림철인(森林哲人) 도로우(Th0reau)의 영향을 받았다 한다. 또한, 노장 철학(老莊哲學), 도연명, 타고르와 한용운에 심취해 자연에 귀의하려는 시를 추구했다. 그러한 그는 시의 소재를 거의 농촌과 자연에서 끌어와 목가적 전원시로 승화하여 명상의 경지를 개척했다. 그의 시풍은 잔잔한 전원적인 정서를 음악적인 리듬에 담아 노래하는 데 특색이 있고, 그 맑은 시정(詩情)은 읽는 이의 마음까지 순화시키는 감동적인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
그 시풍은 어디까지나 전원시답게 소박하고 간소하다. 그러나 대화의 호흡과 상통하는 운율이라든지 대화와 같은 조사법(措辭法)은 그의 독자적인 기교에 속한다.
<슬픈 목가>에서는 생활 현실로 눈을 돌려 일제말의 어두운 현실에 대한 비분과 항거의 자세를 보여 주었고, <빙하>에선 사회적 격동과 시련을, <산의 서곡>에선 위의 모든 경향을 용해시켜 심도(深度)와 진폭(振幅)을 가진 작품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비판적 안목으로 지구적(地球的) 현실을 응시, 고발하고 있다.
동양적인 의미에서 전원시인이라고 할 수 있는 그는 주로 농촌에 살면서 자연에 귀의하는 작품을 발표했는데, 그의 시에는 신비하고 그윽한 흥취가 있다. 자연에 귀의하려는 시상을 계속 추구했다는 점에서 김상용과 더불어 목가적인 ‘전원파 시인으로 불린다.
본래 전원시란 목동들이 부르는 노래로, 전원의 아름다움이나 단순하고 소박한 전원생활을 예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서양의 경우 이러한 전원시의 작자는 목동인 경우가 많았으므로 ‘목가시(牧歌詩)’라고도한다. 그러나 동양의 전원 문학은 대부분 농업 활동이 그 배경이 되며, 낙향한 선비가 주된 창작자였다.
전원적인 목가풍의 시로 30년대 시단에 우뚝 솟았던 신석정 시인. 그는 26세 때 이곳 전북 부안읍 선은리에 초가집을 지어 정원에는 은행, 벽오동, 목련, 산수유, 철쭉, 시누대, 등나무 등을 심어 놓고 ‘청구원(靑丘園)’이라 명명한 뒤 주옥같은 시편들을 쏟아 냈다. 식민지 치하의 암울한 현실에서 전원에 의탁해 나름의 울분을 삭이며 저항을 모색했던 시인의 땀과 회한이 배어든 현장이다. 시인은 그러나 덧없이 흐른 세월 속에서, 경쟁력만을 앞세운 채 정신적 유산은 제대로 추스르지 못하는 후대의 빈곤한 문화 정책 속에서 이토록 쓸쓸하게 홀대받고 있었다.
부안읍 동종리에서 한학자 집안의 3남2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난 신석정은 초등학교 때 수업료를 안낸 학생을 벌주는 일본인 교사에 항의하는 운동을 주도할 만큼 어린 시절부터 정의감이 강했다. 이 때문에 무기정학까지 당했다가 간신히 졸업을 한 그는 한학 공부와 초등학교 수학이 학력의 전부이지만 독서 편력은 넓고 깊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일찌감치 고향에서 결혼하고 지역 청년들과 더불어 동인지를 내면서 문학 수업을 했다. 그 동안 틈틈이 중앙의 신문과 잡지에 다양한 필명으로 투고도 한다. 1930년에는 서울에 올라와 조선 불교 중앙 강원에서 공부했지만 자연귀의적 정서에 젖어 있던 시인은 서울 생활을 이겨내지 못하고 고향과 전주 지역을 벗어나지 않았다.
낙향하던 해인 1931년 신석정은 [시문학]지에 <선물>을 발표하면서 등단한다. 이후 1974년 작고하기까지 40여 년 동안 첫 시집 <촛불>(1939) 이후 <슬픈 목가>(1947), <빙하>(1956), <산의 서곡>(1967), <대바람 소리>(1970) 등 다섯 권의 시집을 남겼다. 낙향한 뒤 그의 생활은 청빈한 도연명의 생활을 연상시키는 일면이 있다. 김기림은 그를 두고 "현대문명의 잡답을 멀리 피난한 곳에 한 개의 에덴을 음모하는 목가 시인"이라고 평했다. 김기림이 \'동경한다\'는 표현 대신 \'음모한다\'는 수사를 동원한 까닭은 신석정이 현실도피의 시인이 아니라 전원 속에서 나름-의 울분을 자연으로 포장했음을 서둘러서 지적하려는 의도였다고 후대의 연구자들은 분석하기도 한다. 신석정은 1940년 <차라리 한 그루 푸른 대(竹)로>라는 작품을 [문장]지에 보냈다가 검열에 걸려 원고가 되돌아오자 8ㆍ15 해방까지 붓을 꺾었다.
성근 대숲이 하늘보다 맑아
대잎마다 젖어드는 햇볕이 분수처럼 사뭇 푸르고
아라사의 숲에서 인도에서
조선의 하늘에서 알라스카에서
찬란하게도 슬픈 노래를 배워낸 바람이 대숲에 돌아들어
돌아드는 바람에 슬픈 바람에 나는 젖어 온 몸이 젖어…
-<차라리 한 그루 푸른 대로> 중에서-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투사들의 애타는 호흡이 바람을 타고 시인의 초가집에까지 날아오고, 시인은 청죽 하나를 가슴 깊이 심어 두고 식민지의 어둠을 헤쳐 가는 모습이 선명하게 잡히는 시편이다. 신석정의 시작(詩作) 전반기가 6ㆍ25를 기점으로 한 이른바 ‘靑丘園 시대’라면 중ㆍ후반기는 전주의 ‘비사벌초사 시대’로 일컬어진다. 6ㆍ25를 만나 미처 피난을 가지 못했던 시인은 부안 지역에서 인망이 높은 인물로 지목돼 인민군 치하에서 불행하게도 억지춘양의 감투를 쓴다. 식민지의 고난에서 벗어나자마자 닥친 한국 현대사의 비극은 이 시인에게 두고두고 멍에를 지우게 된다. 그는 이후 고향인 부안을 떠나 전주로 거처를 옮기고 죽을 때까지 고향을 떠나 살았다.
석양녘의 들판을 다시 가로질러 어두워지는 가을 저녁에 찾아 든 전주시 남노송동 175의 25번지 비사벌초사 또한 이미 남의 집이었다. 주택가에 고즈넉이 자리잡은 한옥의 대문을 열고 들어선 40평 남짓한 작은 정원에는 그러나 시인의 체취가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2년 전에 이사왔다는 집주인 김남용씨(46, 전주 중앙초등학교 교사)는 청구원의 주인과는 달리 시인에 대한 사려 깊은 애정으로 방문객을 환대한다. 어둑신한 정원에 불을 밝히고 올망졸망 모여 있는 수목들의 이름을 일일이 열거한다. 호랑가시나무, 태산목, 백목련, 후박나무, 메타세피아, 동백, 모과나무, 사철나무, 라일락, 남자나무, 청목, 팔손이나무, 산수유, 주목, 모란, 철쭉…. 평생을 자연과 벗하며 그 속에 시심의 뿌리를 내렸던 시인은 답답한 도심에서도 이처럼 마음의 창문 하나를 마련했던 것이다. 그는 이곳에서 시누대의 대바람소리를 들으며 날아드는 온갖 새들의 노래를 벗삼기도 하고 태산목에 꽃이 피면 정다운 사람들을 불러 그 꽃잎에 술을 부어 마시면서 한없이 호기로운 이야기로 시간을 잊었다.
그는 병상에서도 잘 알아들을 수도 없는 말로 불러 주면 이를 받아쓰도록 하여 운명하기 며칠 전까지도 시를 지었다. 시인은 와병 중에도
"내가 죽거든 무덤 앞에 태산목(泰山木)을 심어 달라"
고 유언을 남겼다. 청정한 자연에 의탁해 인간사를 노래한 이 시인의 서정적인 시편들은 여러 작곡가들이 <임께서 부르시면>(김재근, 한만섭 작곡), <산수도>(임종길), <작은 풍경>(정회갑), <네 눈망울에서는>(정회갑) 등의 노래로 되살려 냈다.
<유토피아를 꿈꾼 목가적 서정> - 김용성(金容誠): ‘문학사 탐방’(한국 일보.1982. 6. 16)
벵골의 전원적이고도 명상적인 대시인 타고르에게서 크게 영향을 받고 도연명의 <도화원기(桃花源記)>와 같은 이상향을 꿈꾸었던 신석정은 그로 말미암아 흔히 한국의 대표적인 서정풍의 목가시인으로 일컬어진다. 미상불 그의 초기 시는 현몽한 신비의 세계로 향해 가는 바람이거나 달이거나 새이고자 하는 내밀한 소망의 노래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일제(日帝) 질곡(桎梏)의 역사와 그 뒤에 이어진 혼돈의 시대를 지나오면서 그 자신이 자연과 일체가 될 수 없음을 문득 문득 깨달았던 듯싶다. 그래서 그의 말기에 이르러서는 이렇게 외치기까지 했다.
“그러므로 시는 들에 피는 꽃의 세계에서 이미 타는 가슴과 뛰는 심장으로 그 배양토를 옮겨온 지 오래다. 이리하여 시의 감흥은 우연히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도 아니요, 항상 뜨거운 가슴에서 살고 부단히 움직이는 역사와 더불어 성장하고 응결하여 탄생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석정이 세상을 떠났던 전주의 비사벌초사(比斯伐艸舍)는 옛날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지만, 아침 나절의 그 시각에는 바다 밑바닥과 같은 적막감이 흐르고 있었다. 갖가지 무성한 나무들이 40평 남짓한 정원의 하늘을 가렸다. 때마침 내리는 보슬비를 맞으며 태산목 높은 가지에 흰 꽃봉오리가 둘 함초롬히 잎을 벌리고 있었다. 남천촉의 앵두알만한 붉은 열매들이 뜰에 지천으로 깔렸고, 산수유꽃도 졌다.
『유리창에는 빗발이 얼룩지고 씻기고, 씻기고 얼룩지고 있었다. 나는 그대로 유리창에 붙어서서 어린 짐승처럼 오시시 떨고 싶었다. 창 밖엔 소란한 세상인데도 저대로 말이 없었다. 소란한 창 밖에 두고, 나는 갑자기 엷은 주정이라도 하고 싶었다』
-<창가에 서서>-
그런 마루창을 열고 노미망인 소정(小汀) 여사와 마루 끝에 나란히 앉아 뜰을 바라보았다. 소정은 마치 석정(夕汀)이라는 나무 품에 날아와 안겨 있는 작은 새와도 같았다. 들리는 것은 그의 수줍은 듯 소근거리는 지난날에 대한 하염없는 이야기와 언제 그칠지 모르게 내리는 빗소리뿐이었다.
“여긴 아주 조그마한 숲이지만, 이름 모를 산새들이 찾아와 놀고 꾀꼬리도 와서 울고 가지요. 심지어는 부엉이마저 나래를 접고 쉬어 간답니다. 그분은 현실 생활과 이재(理財)에는 눈이 어두웠어요. 오로지 글과 자연에만 심취해 살았던 사람입니다.”
석정이 전주로 이사온 것은 1952년이었고 다시 그의 마지막 거처인 ‘비사벌초사’를 마련했던 것은 61년께였다. 그러니까 그의 삶의 기간을 셋으로 보았을 때 그 하나를 전주에서 보냈던 셈이고, 그 둘은 그의 고향인 전북의 부안읍을 맴돌며 살았던 것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평생을 전북 지방에서만 지냈던,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향토 시인이기도 했던 것이다.
예전에는 전주에서 부안을 가자면 김제에서 화호와 백산을 거치는 우회로를 따라 버스로 3시간 거리였다고 하나, 지금은 김만 평야를 가로질러 죽산만 다리를 건너가는 아스팔트 길이 뚫려 불과 1시간 남짓한 거리로 가까워졌다.
석정이 태어난 것은 1907년 7월 7일. 부안읍의 묏부리인 상소산(上蘇山) 기슭의 동중리 한 조그만 초가에서였다. 그의 부친 신기온은 한학자였으며 3남 2녀 중 차남으로 본명은 석정(錫正)이었다. 그의 형은 가업인 한의(韓醫)를 이어받았으며 현재도 부안 종가에서는 「옥성당」(玉成堂)이라는 한약방을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석정의 생가는 1920년 일본 사람이 새 집을 지음으로써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그가 읍내 보통학교를 졸업한 것은 그 3년 뒤의 열일곱 살 나던 해였다. 그는 소년 시절부터 비리나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강직한 성격을 지녔던 것 같다.
『석정이 6학년 때 수업료를 안 낸다고 일인 담임선생이 미납생 하나를 전체가 보는 앞에서 꾀(옷)를 벗긴 일이 있었다. 가난의 분노에서 민족적 수치로까지 연결지은 석정은 전교생을 선동하여 스트라이크를 일으켰다. 이로 인해 무기정학을 받았다가 다음해 3월 겨우 복교를 하여 졸업을 하게 되었는데 성적은 16명중 2등이었다.』
- 허소라(許素羅): <파도에게 묻는 말>에서
하지만, 정규 교육 기관을 통해 받은 교육은 그것으로 끝이 났다. 가난한 한학자의 완고한 집안이라고는 해도 그의 형이 일본에 유학을 했고, 아우(錫雨)가 중앙고보와 전주사범 강습과를 다녔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이 사실은 그에 대한 일종의 신비성을 제공한다. 아무튼 소년 시절의 석정은 고향의 아름다운 언덕에 올라 먼 바다를 바라보며 황혼이 내릴 때까지 망연히 앉아 고독을 달래면서 시심(詩心)을 키워갔다.
그는 어느덧 기다하라 하꾸슈우(北原白秋)를 거쳐 트루게네프와 하이네에 ‘군침을 흘리는 문학 청년’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18세가 되던 24년 [조선일보]에 <기우는 해>라는 작품을 투고하여 그의 시가 최초로 활자화되는 기쁨을 안았다. 그는 1년 전에 이미 만경의 규수 박소정을 아내로 맞아 농사로 신혼 생활을 꾸려 가고 있었는데 섣불리 들어선 문학에의 길에 때때로 좌절감을 느끼고 그가 써 오던 일기와 잡문과 시 등을 불사른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그 길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아내의 결혼반지를 팔아다가 시집을 사들이곤 하였다. 한문 공부를 하는 한편 노장 철학을 섭렵해 보려고 무진 애도 써 보았고, 도연명의 소박한 시를 애독하는가 하면 , 타고르에 세계에 파묻히던 때도 바로 그때였다”(신석정: <난초 잎에 어둠이 내리면>에서)라고 밝혔다. 그러는 한편, 일본에서 새로운 사조의 세례를 받은 청년들이 주축이 되어 구성되어 있던 부안의 문학 서클인 [야인사]에서 매월 발간하는 회람지에 작품을 발표하는가 하면 서울의 조선ㆍ동아ㆍ중외 등의 신문에 시를 발표하였다.
1930년 3월 그는 보다 큰 청운의 뜻을 품고 친척이 되는 사람의 소개로 박한영 대종사(大宗師)가 서울 동대문 밖 개운사 대원암에서 연 조선불교중앙강원에 원생으로 들어갔다. 그는 거기서 30여 명의 젊은 승려 원생들을 규합하여 문학 회람지 [원선]을 만들면서 불경을 배웠다.
[시문학]이 창간되었던 그 해 [시문학사] 박용철(朴龍喆)의 요청으로 그곳을 찾아갔던 석정은 그 사이 시인 정지용과도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1931년 [시문학] 3호에 시문학동인으로서 시 <선물>을 발표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가 그 해 낙향을 한 것은 불도(佛道)에보다는 노장 사상에 더 매력을 느끼고 있었던 탓이었으며 ‘시골로 돌아가 물려받은 가난과 싸우면서라도 좀 더 인생을 건실히 살아야겠다’는 결의 때문이었다. 그는 소작농을 하여 얻은 벼로 우거하던 오막살이를 면하고 읍 변두리 선은동에 뒤터가 꽤 넓은 초가를 하나 사서 [청구원(靑丘園)]이라 명명하고 살았다. 이른바 그의 ‘청구원 시절’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 무렵 아직 시단에 등단하기 이전인 서정주가 청구원에를 찾아갔을 때 석정은 그를 매우 다정하게 맞이했다고 한다. “밤새 석류를 까 나누어 먹으면서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마침 달밤이었는데 뒤뜰에는 월견초가 그득히 퍼져 있었다”고 하는 미당 서정주의 말에 따르면 석정은 노장과 도연명에 통했을 뿐 아니라 비록 일어 번역본이지만 19세기 미국의 이상주의 또는 삼림의 시인이자 철학인이었던 헨리 데이빗 도로의 책을 탐독했고, 스피노자를 읽었으며, 프랑스의 폴 클로델과 레미 구르몽의 시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김기림이 그의 <1933년 시단의 회고>에서 ‘우리는 정지용처럼 현대 문명 그 속에서 그 주위와 자아의 내부에 향하여 특이하고 세련된 시안(詩眼)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현대 문명의 잡답(雜沓)을 멀리 피한 곳에 한 개의 ‘유토피아를 음모하는 목가 시인 신석정’을 잊을 수 없다‘고 했듯이 39년에 나온 첫시집 <촛불>에 석정은 아련한 피안 저쪽에 하나의 애틋하고도 아름다운 세계를 꾸며 놓았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깊은 삼림지대를 끼고 돌면
고요한 호수에 흰 물새 날고
좁은 들길에 야장미(野薔薇) 열매 붉어
멀리 노루새끼 마음놓고 뛰어다니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39> 1~3연-
그러나 이 목가의 신화도 점점 암담해 가기만 하는 역사적 현실에서,
『태양이 가고
빛나는 모든 것이 가고
어둠은 아름다운 전설과 신화까지도 먹칠하였습니다』
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의 목가는 <슬픈 목가>로 변질되었다. 석정의 사위인 최승범(崔勝範) 교수(전북대)는 “40년대의 숨막히게 어둡던 시대에도 시작(詩作)만은 계속하여 47년에 <슬픈 목가>를 펴내게 되었다. 그것은 장만영(張萬榮) 시인의 말대로 잃어진 자연을 그리워하는 애달픈 엘레지이다”라고 평한다.
45년 해방이 되었으나 그의 가난한 생활이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30년대초부터 서로 문통을 하다가 동서지간이 된 장만영이 서울로 올라오라고 했으나 끝내 서울행을 단념했다. 51년 전주로 근거지를 옮긴 이후 그는 「태백신문사」에 3년간 편집 고문으로 있었고, 그 뒤 전주고등학교와 김제고, 정년퇴직까지 전주상고 등에서 교편을 잡는 한편, 전북대학교에 강사로 나가 시론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면서 꾸준히 시작에 몰두하여 시집 <빙하> <산의 서곡> <대바람 소리>를 냈다.
석정은 후기에 이르러 시관(詩觀)에 많은 변모를 보였다. 가난에 대한 인간주의적인 동정과 내부에서 끓어오르는 지사적인 열정이 그로 하여금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부르짖게 했다.
“오불관언으로 역사와 현실을 외면하고(중략) 고독과 절망과 허무를 배설하는 것을 유일한 순수문학인 것처럼 나르시스적 대화를 일삼으며 살아가는 것을 오늘날 시인의 예의로 삼을 수가 없습니다.”
허소라는 석정 시가 이와 같은 현실 인식의 측면에서도 연구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6ㆍ25 동란의 비극을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체험한 석정은 그 뒤 거의 10년마다 한번씩 개인적인 수난의 고통 속에 생을 이어갔다. 역사의 흙탕물 줄기는 그의 정신세계를 여러 번 짓밟고 지나갔다. 서울 1969년 5월 어느 날 남산을 내려오면서 ‘눈물이 피잉 돌았다’던 석정은 그의 마지막 <비가(悲歌)>를 읊는다.
『‘루오’의 그림처럼
어둡게 살아가지만
눈부신 햇볕을 원하는 건 아니다.(중략)
그저
소라껍질을
스쳐가는 바람결처럼
차마 눈 감을 수도 없거늘,
아아, 하늘이여
피가 돌 양이면,
저어 야물딱진
민들레꽃을 피워 내듯이
어서 숨을 돌리게 하라.』
석정은 73년 12월 전북문화상 심사를 하는 자리(도청)에서 고혈압으로 쓰러져 병석에 있다가 이 듬해 7월 6일 비가 억수로 쏟아지던 날, 68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