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각, 그리스 신전 아닙니다
[대한민국 문화유산 탐방기] 덕수궁 석조전, 준명당, 즉조당
서울 한복판,많은 이에게 가깝고도 아직은 낯선 덕수궁이있습니다.직접 그아름다움을 두눈으로 확인하고,덕수궁을 두발로 느끼며 발견한 이야기들을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덕수궁의숨겨진 면면들을 쉽고 재미있게 풀어가며,이 고궁이 지닌 매력을 전해드릴 예정입니다. [박배민 기자]
이 기사는 2편 큰 불에도 살아남았는데... 덕수궁의 잃어버린 문에서 이어집니다.
📌 사적 '덕수궁(德壽宮)'
주소: 서울 중구 세종대로 99 (정동)
시대: 조선, 대한제국
덕수궁 연혁
1592년 이전: 월산대군 사저
1593년: 정릉동 행궁으로 사용
1611년: 경운궁으로 개칭
1897년: 대한제국 황궁으로 사용 시작
1904년: 대화재 발생 (중화전 등 대부분 전각 소실)
1906년: 대대적 중건
1907년: 고종의 황위 이양 후, 덕수궁으로 개칭
1910년: 석조전 완공
대한문과 중화전을 지나 덕수궁 깊숙이 들어가 보니, 우리 궁궐에서 만날 거라 생각지 못했던 낯선 풍경이 시야를 가득 메운다.
대한제국의 꿈, 석조전
눈앞에 돌로만 만들어진 건물이 우뚝 서 있다. 문명을 건설하는 게임에서 불가사의를 건설하는 것처럼 갑자기 솟아난 듯하다. 조선 궁궐 속에 있는 건물이라기엔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목재 하나 보이지 않는다. 나무가 주 건축 재료인 한국 전통 건축에서 만나기 어려운 모습이다. 지구 반대편 아테네에 옮겨 놓으면 주변과 잘 어우러질 것 같은 이 건물은 바로 석조전(石造殿)이다. '석조전'이라는 이름 자체가 '돌로 만든 건물'을 뜻한다.
턱을 추켜 올려 지붕으로 시선을 향해보자. 지붕에서도 중앙 삼각형 부분을 살펴보자. 이곳을 페디먼트(Pediment)라 부른다. 고대 그리스 신전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그것이다. 삼각형 가운데 부분을 보니, 올림픽 월계관 같은 무늬 사이로 어린 아이만 한 꽃이 새겨져 있다. 처음 봤을 때는 매화인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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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쪽 측면에서 바라 본 석조전(24년 5월 추가 촬영) |
ⓒ 박배민 |
정답은 대한제국의 왕실을 상징하는 오얏꽃이다. 요즘은 잘 쓰이지 않는, 오얏이라는 말이 썩 낯설다. 요즘 말로는 자두나무꽃이다. 왜 자두나무꽃을 새겼을까? 의문의 답은 조선 시조에 있다.
조선은 이성계가 세운 나라였고, 이성계의 성씨인 '이(李)'는 한자로 '오얏 이/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이화무늬, 즉 자두나무 꽃이 들어간 것이다. 참고로 창덕궁 인정전 용마루에서도 오얏 무늬를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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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석조전 내부(1938년) |
ⓒ 국립중앙박물관 |
석조전은 시작부터 완공까지 정확히 10년이 걸렸다. 광무(고종) 황제가 근대 국가의 모습을 갖춘 대한제국의 창대한 미래를 꿈꾸며 1900년에 짓기 시작해서 1910년에 완공되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1910년은 대한제국이 국권을 피탈 당하며 역사 속으로 사라진 해이기도 하다.
새로운 황궁이 완공되었지만, 새 황궁은 새 국가를 위해 일할 수 없었다. 고종이 살아 있는 동안 석조전은 연회나 만찬을 여는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고종 서거 이후로는 1933년에 덕수궁을 일반인에게 개방하면서 석조전을 미술관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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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조전과 분수대가 있는 앞 마당. 지하층이 나무에 가려 2층 건물로 보이기도 한다. (24년 5월 추가 촬영) |
ⓒ 박배민 |
사실 석조전의 건립 목적에 대해서는 여러 이견이 존재한다. 궁내부 서기관 이노우에 마사지(井上雅二)의 기록을 근거로 박물관으로 사용하려 했다는 주장(우동선, 「경운궁(慶運宮)의 양관(洋館)들)」과 총세무사청으로 사용하기 위함이라는 주장(김태중, 「개항 이후 총세무사가 주관한 관영 공사 기구에 관한 연구」) 등이 병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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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복궁도(景福宮圖)를 통해 수평적 확장을 추구하던 전통 건물 양식을 확인할 수 있다. |
ⓒ 서울역사박물관 |
석조전은 3층 건물이다. 외부에서 계단을 지나 진입할 수 있는 1층은 접견실과 홀, 2층은 황제와 황후의 사생활 공간이었다. 지하층은 궁녀와 내시 같은 시종들이 거처하는 곳이었다. 석조전이 기존 궁궐과 다른 새로운 점이 여기에 있다.
조선에서는 임금과 신하의 분리를 추구해, 애초에 건물 자체를 따로 사용하게 만들었다. 또한 왕이 나랏일을 보는 공간(편전)과 사생활 공간(침전)이 다른 건물로 분리되어 있었는데, 석조전에서는 신하와의 분리, 업무와 사생활 공간이 모두 하나의 건물로 합쳐졌다. 수백 년 동안 이어오던 전통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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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조전 기둥 사이 탐방객(24년 5월 추가 촬영) |
ⓒ 박배민 |
지붕을 올려다 보고 있으니 햇살에 눈 시리다. 손바닥으로 햇살을 가리며 석조전 발코니로 숨어 든다.
복녕당 아기씨와 준명당
석조전 동쪽 발코니와 고작 몇 m 정도를 두고 가까이 붙어 있는 건물이 하나 있다. 여타 조선 궁궐처럼 생긴 이 건물은 준명당이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덕수궁으로 돌아 오며(1897) 지은 전각 중 하나다. 준명당은 외국에서 온 사신을 맞이하거나 신하와 만나는 접견실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준명당을 볼 때 내 머리 속에 가장 명확하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유치원'이다.
고종에게는 육십이 넘어 얻은 딸이 하나 있었다. '복녕당 아기씨'로 불렸던 덕혜옹주다. 영화 <덕혜옹주>에서 손예진이 연기한 그 옹주가 맞다. 고종은 늦둥이로 태어난 덕혜옹주를 얼마나 아꼈는지, 그녀를 위해 덕수궁에 유치원까지 마련했다. 그 유치원이 바로 준명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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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 덕혜옹주의 돌 기념 사진 / (우) 황실 가족. 덕혜옹주 왼쪽에는 순종, 오른쪽에는 고종이 자리하고 있다. |
ⓒ 고궁박물관 |
준명당 정면 기단의 댓돌을 보면 일정한 간격으로 구멍이 파여있는 걸 볼 수 있다. 이 구멍은 과거 난간이 설치되어 있던 흔적이다. 아장아장 귀엽게 걸어 다니는 덕혜옹주가 혹여나 다칠까 염려한 고종이 난간을 설치했던 것이다. 덕혜옹주의 구름 조작 같은 손을 잡고 걷는 고종의 따듯한 눈빛을 상상해본다.
필자도 일하며 매달 초등학생 아이들을 만난다. 아이들이 작은 참새처럼 조잘조잘 이야기를 건네 오고, 맑은 눈망울로 날 바라볼 때면, 비록 내 딸이 아니어도 그 사랑스러움에 마음이 단숨에 녹아내린다. 하물며 늦은 나이에 얻은 자기 딸을 바라보는 고종의 마음은 오죽했을까 싶다.
즉조당 - 선(線)적인 감상에서 면(面)적인 감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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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터 넘어로 보이는 즉조당 정면 모습 |
ⓒ 박배민 |
준명당과 복도각으로 연결된 옆 건물로 열댓 걸음 옮겨보자. 대청마루가 좌측으로 치우쳐져 있는 이 건물은 즉조당(卽阼堂))이다. 28살 능양군이 광해군을 몰아내고 제16대 조선 국왕 인조(재위: 1623년 ~ 1649년)로 올라선 곳이 바로 이 즉조당이다. 눈치챘겠지만, '즉조'는 '왕위에 올랐다'는 뜻이다. 즉 인조의 왕위 등극을 기념하기 위해 붙인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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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쪽에서 바라 본 즉조당 앞 공터. 공터 바깥으로 석어당 측면이 보인다. (24년 5월 추가 촬영) |
ⓒ 박배민 |
인조대 이후로 그 자리를 계속 지키오던 즉조당은 태극전, 중화전 등으로 불리다 1902년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중화전이 건립되며 원래의 이름 '즉조당'으로 돌아갔다. 덕수궁을 오래 시간 지켜보던 즉조당은 1904년 화마를 피하지 못하고 스러졌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즉조당은 이때 다시 세워진 120여 년 전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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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즉조당 앞 공터는 출입할 수 없어, 즉조당을 선(線)적으로만 관람할 수 있다. |
ⓒ 박배민 |
즉조당을 둘러볼 때마다 뒤따르던 궁금증이 하나 있다. 즉조당(+준명당)은 중화전의 남북 축 선상을 따라가며 중화전 바로 뒤에 위치해 있다. 그리고 두 건물 사이에는 네모난 공터가 있다. 공터에는 잔디가 깔려 있고, 아무것도 없이 그저 괴석만 서너 개 놓여 있다.
현재 모습만 봐서는 원래 공터인지, 건물이 있던 곳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그런데 마당처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공터가 아니고 기단석을 3개쯤 쌓아 올려 탐방객의 출입을 거부하고 있는 공터이다. 이 때문에 탐방객은 준명당과 즉조당 정면을 따라 좌우 1차원적 선(線) 이동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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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즉조당 앞 공터에 세 줄 정도 기단이 올라간 것을 볼 수 있다. (24년 5월 추가 촬영) |
ⓒ 박배민 |
덕수궁에 찾아갈 때마다 궁금했던 부분인데, 자료를 찾아보니 최소한 1907~1910년 사이부터 비어 있던 공간인 듯하다. 왜냐하면, 이 당시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도면에서도 즉조당을 위한 담장만 세웠을 뿐 특별히 무언가 설치된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명헌태후(明憲太后, 헌종의 계비) 홍씨의 71세를 기념한 진찬례를 기록한 <진찬의궤>(1901)에도 현재 공터 위치는 담장만 둘러진 마당으로 나온다.
의궤 속에서도 높낮이가 없는 마당으로 표현될 뿐,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처럼 단이 올라가 있진 않다. 복원 관련 문제가 없다면 이 공터의 높이를 낮춰 보면 어떨까? 탐방객이 전후좌우로 움직이며 즉조당과 준명당을 입체적으로 감상할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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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강점기 즉조당 모습. 기단을 올린 공터가 없다. |
ⓒ 국립중앙박물관 |
숨결을 부여하는 방문객
정현종 시인은 <방문객>에서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라고 말했다. 이는 사람 대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덕수궁에게도 사람이 찾아오는 것은 단순한 방문 이상의 큰 의미를 지닌다.
우리의 발걸음이 닿는 순간, 덕수궁은 과거의 이야기를 현재로 소환하고, 그 안에 담긴 역사는 새로운 해석과 시선으로 다시 태어난다. 세종대로 99번지를 찾는 모든 이는 이 공간의 또 다른 한 페이지를 써 내려가며, 덕수궁을 끊임없이 재탄생시키는 주인공이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외부 매체에도 함께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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