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기수원지 정문을 들어서면 누구나 ‘아!’ 하고 감탄사를 연발하게 된다. 길 좌우에 하늘을 찌를 듯 웅장한 모습으로 늘어서서 보는 이를 반기고 있는 나무, 히말라야시다에 압도되어서다. 또 히말라야시다 안쪽 좌우 숲속에는 아토피와 스트레스 등에 치료 효과가 있는 피톤치드가 가장 많이 뿜어져 나온다는 편백나무가 촘촘히 들어서 있다. 법기수원지 수림지 안에 조성된 대표적인 나무는 총 7종에 644그루(편백 413그루, 히말라야시다 59그루, 벚나무 131그루, 추자(가래)나무 25그루, 반송 14그루, 은행나무 3그루, 감나무 1그루)다. 모두 수원지 댐 건설 당시 심은 것으로 수령이 90여 년에서 130년(2020년 기준) 이상 된 나무들이다.
총길이 260m‧높이 21m의 법기수원지 댐은 흙으로 만들어졌다. 일제강점기인 1927~1932년 5년에 걸쳐 건설됐는데, 1927년 12월 20일 동아일보에 양산 법기리 상수원지 기공식 소식과 함께 수몰지 주민의 이주 대책 및 생계 문제를 거론한 기사가 크게 실리기도 했다. 법기수원지는 1932년 완공 이후 한 번도 개방된 적이 없다가 2011년 7월 15일, 전체 680만㎡ 가운데 댐과 수림지 2만㎡에 한해 전격 개방이 이뤄졌다. 79년 만에 처음으로 비경을 드러낸 것이었다. 댐 우측 아래 보이는 석조 건축구조물은 취수 터널이다. 출입구 상부에 일제강점기 조선 총독을 지낸 사이토 마코토의 글씨 ‘源淨潤群生’*이 새겨진 돌이 보인다. 사이토 마코토는 독립운동가인 강우규** 의사의 폭탄 투척에도 살아남아 우리 민족문화 말살 정책을 편 장본인이다.
비록 일제 주도로 댐이 건설됐지만 실제 댐 건설의 주역은 댐 건설에 강제 동원된 우리 선조들이라 할 수 있다. 93년간(2020년 기준) 근현대사 격랑 속에서 온갖 풍상을 견뎌낸 법기수원지는 드디어 근대문화유산이 되었다. 역사는 현대와의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발전적 미래로 나아간다. 이 문화유산을 아끼고 보살펴 역사적 교훈의 본보기로서 후손들에게 물려줘야 하는 이유다.
법기 수원지는 현재 부산시 선두구동과 노포동, 남산동, 청룡동 일대 7000가구의 식수원이다. 정수 없이 먹을 수 있는 청정 수질을 자랑한다. 수원지 안에는 침엽수림인 측백나무와 편백을 비롯해 개잎갈나무 등이 숲을 이루고 있다. 둑 위에 있는 140년 된 반송나무가 특히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곳은 천연기념물 제327호인 원앙이 70여 마리 이상 발견되는 등 희귀 동식물과 반딧불이가 서식하는 생태계의 보고寶庫이기도 하다. 수십 년간 상수원 보호를 위해 일반인들의 출입이 철저하게 통제되다가 지금은 일반 시민도 수려한 자연 풍광과 산림욕까지 즐길 수 있는 명소가 됐다.
댐 중앙에는 댐 마루를 향해 123개의 층계로 이뤄진 계단이 사선으로 가로지른다. 이 계단을 따라 댐 위로 올라가면 수원지의 호수면 우측에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운 취수탑을 감상할 수 있다. 또 댐 마루에는 우아한 자태가 일품인 수령 140년 이상의 법기 반송 7그루가 있다. 이 반송을 당시 어른 스무 명이 목도해 댐 위로 옮겨 심었다 하니, 심을 당시 벌써 나무의 수령이 60년 이상임을 알 수 있다. 뭐니 뭐니 해도 법기수원지의 아름다움은 댐 마루의 반송과 호수가 어우러져 그려내는 그림 같은 풍경이다. 이와 함께 주변 산들이 부르는 미풍의 노래에 은빛 물결로 잔잔히 미소 짓는 호반의 풍광은 가위 한 편의 시라 할 것이다.
*원정윤군생源淨潤群生
‘깨끗한 물은 많은 생명체를 윤택하게 한다’는 뜻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총독을 지낸 사이토 마코토가 쓴 글씨로, 왼편의 세로로 새겨진 ‘子爵 齎藤實’은 사이토 마코토 자신의 이름과 작위를 가리킨다(자작은 작위 명으로, 사이토 마코토는 자작 작위를 1925년 일본 왕실로부터 받았다). 이 글은 1932년 법기수원지 댐 완공 때 석각한 것이다.
사이토 마코토는 일본의 정치가이며 해군대장으로 1919년 조선 총독에 임명돼 문화정치를 추진한 인물이다. 일제강점기 두 차례(3대 1919~27년, 5대 1929~31년)의 조선 총독을 역임한 뒤 1932년 일본 5‧15 사건 후 내각 총리대신이 됐다. 1936년 일본 군부의 급진파 청년 장교들에게 친영미파親英美派로 지목돼 암살당했다.
3‧1운동을 비롯한 독립운동이 크게 전개되자 일제는 기존의 통치방식을 ‘무단정치’에서 유화 정책인 ‘문화정치’로 전환하는 술수를 구사했다. 이는 실제로는 헌병을 경찰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을 뿐 오히려 군 병력을 증강하는 허울만의 문화정책이었다. 3‧1운동과 제1차 세계대전 후 세계를 휩쓴 민족자결주의 조류에 밀려 한때 문화정치라는 기만적인 동화정책이 나왔지만 기실 그 본질은 민족문화의 말살에 있었다는 뜻이다. 일제는 특히 식민지 교육정책을 통해 우리 민족문화를 왜곡하고 그들의 문화를 미화하는 한편, 우리 어문語文의 사용 금지, 일본어 사용 강요, 일본식 성명 강요 등 그 수법이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만큼 악랄하고 야만적이었다. 동화정책이 어떤 형태나 수법으로 행해지든 지배 민족의 식민지 동화정책이 일정 부분 성공한 사례는 세계 역사에 드물다. 이 기간 많은 지식인이 변절했고 우민화 정책이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법기수원지 댐이 비록 일본의 강제통치 시기에 일본 주도로 건설됐다 하나 댐 건설을 위해 동원된 우리 선조의 힘으로 만들어진 것임은 명백한 사실이다. 부끄러운 역사지만 역사는 역사이므로 알 것은 알아야 한다. 이 교훈을 바탕으로 우리는 역사가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도록 부국강병에 힘을 쏟아야 하는 것이다.
**강우규 의사
1919년 9월 2일 사이토 마코토가 조선 총독으로 취임해 남대문역(현 서울역)에 도착했을 때 한국의 독립운동가 강우규 선생이 폭탄을 투척했지만 아쉽게도 그를 처단하지 못하고 그 일행 중에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이름 하여 ‘강우규 의사 항일 의거 사건’이다. 강 의사는 조선 총독 부임 환영 행사를 마치고 막 관저로 떠나는 사이토 마코토의 마차를 향해 민족의 분노와 독립의 염원이 담긴 폭탄을 힘껏 던졌다. 사이토 마코토를 죽이지는 못했으나 현장에 있던 신문기자, 수행원, 일본 경찰 등 37명의 사상자를 냈다. 사상자 중에는 총독부 정무총감과 만주철도 이사, 미국 뉴욕시장의 딸 등이 포함됐다. 65세 노인의 나이를 무색게 한 강 의사의 폭탄 투척은 우리 민족의 강렬한 독립 의지를 세계 만방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거사 보름 뒤 9월 17일 강우규 선생은 누하동에서 일제의 앞잡이 한국인 순사 김태석에게 붙잡혔다. 이듬해 서대문 형무소에서 사형을 당하면서 순국 직전 ‘단두대 위에도 봄바람은 있는데, 몸은 있어도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상이 없으리오’라는 사세시辭世詩를 남겼다. 이 사건 가담자로 강우규 외 5명(최자남 허형 오태영 장익규 한인곤)이 더 있었으며 장익규와 한인곤은 심한 고문으로 옥사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다. 지금 그 역사의 현장인 서울역에 강우규 항일의거비가 있다.
평안남도 덕천 출신의 강우규(1855~1920) 선생은 1910년 8월 대한제국이 멸망하자(庚戌國恥) 곧바로 가족들을 먼저 러시아로 이주시키고, 자신은 1911년 봄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망명했다. 1915년 우수리강을 건너 지린성 라오허현(繞河縣‧현 헤이룽장성 라오허현)으로 거처를 옮겨 독립운동 기지를 개척하고 1917년 봄 신흥동新興洞에 신흥동에 광동학교光東學校를 설립, 민족교육을 실시했다. 1919년 3월 국내의 만세시위 소식을 접하자, 라오허현 신흥동 동포 400~500여 명을 모아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했고, 4~5월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결성된 대한국민노인동맹단大韓國民老人同盟團에 가입한 뒤 라오허현 지부 책임자가 됐다. 노인동맹단은 3‧1운동 직후인 3월 26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 김치보金致寶의 집에서 조직된 단체다. 독립운동 청년들을 지원할 목적으로 결성된 까닭에 회원의 나이는 46~70세까지 제한됐다.
강 의사는 신한촌에서 2대 조선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가 곧 경질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신임 총독을 처단하기로 결심한다. 신흥동 근처 청룡靑龍에서 러시아인에게 영국제 수류탄 1개를 구입한 강 의사는 폭탄을 부녀자의 월경대처럼 바지가랑이에 차고 일본 경찰의 감시를 따돌린 뒤 의사를 감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