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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가정의 달이 시작되었다. 연휴를 맞이하여 필자가 두가지 질문을 준비하였다.
첫번째 질문은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에 있었던 서원이 무엇인지 물어보면 우리 한산이씨 일가님중에 아시는 이가 거의 없을거라 필자는 생각한다.
아마 아시는 분이 혹시 있다면 그 분은 우리 한산이씨 중에서 보학공부를 가장 많이하신 권위자 중에서도 최고의 경지에 있으신 분이라고 필자는 혼자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해본다.
사실 그 많큼 아시는 분이 없으며 대부분 영해 영덕에 있는 괴시리로 목은이색이 출생한 유적지가 아닌가라고 생각할것이다.
사실은 정답이 아니며 이곳은 영해의 단산서원이다.
이곳은 1631년(인조 9) 목은 이색(李穡)을 모셨으며, 1667년(현종 8) 봉황산(鳳凰山) 근처의 가사리(현재의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죽장면 가사리)로 이건함과 동시에 가정 이곡(李穀)을 추가 배향하다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된 뒤 복원되지 못하였다.
두번째 질문은 목은 이색의 영정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부분은 아시는 분이 많이 있다. 5월 5일 서울 수송영당에서도 다례제를 하고 목은 이색의 영정을 자주 보았기 때문일것이다.
물론 안동에도 서산서원이 있고 현재 경북 안동시 일직면 원리에 있는 것으로 1771년(영조47)에 서산영당으로 창건되어, 한산 이씨(韓山李氏)의 선조인 목은(牧隱) 이색(李穡)과 입향조(入鄕祖)인 수은(睡隱) 이홍조(李弘祚)의 위패를 모셨는데, 후에 서산서원으로 승격하고, 내부에 숭덕사(崇德祠)를 세워 이색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목은 이색의 영정에 대해 외손 양천 (미수) 허목은 기언(記言) 제9권 상편
도상(圖像)에서 목은화상기(牧隱畫像記)를 이야기 하였다.
목은 이 문정공(李文靖公 이색(李穡))의 화상은 호서(湖西) 한산군(韓山郡)에 위치한 문헌서원(文獻書院)에 있다.
화상의 찬(贊)은 권양촌(權陽村 권근(權近))이 지었고 그 뒷면에 ‘영락(永樂) 갑오년(1414, 태종14) 9월 하순에 문인 권근이 씀’이라고 쓰여 있다.
덕산현(德山縣)에 있는 이씨의 고택에도 문정공의 영당(影堂)이 있다. 이 영정에는 연도가 정덕(正德) 갑술년(1514, 중종9)으로 되어 있어, 화상을 처음으로 그린 연도를 알 수가 없다.
우리 태조(太祖)께서 선위(禪位) 받으신 다음 해인 홍무(洪武) 26년 계유년(1393, 태조2)에 공이 별세하였으니, 양촌이 찬을 쓴 것은 별세한 지 수십여 년 지나서이다.
영락 갑오년에서 정덕 갑술년까지는 124년이고, 홍무 계유년에서 현재 숭정(崇禎) 후 10년(1654, 효종5)까지는 약 300년이다.
영정은 애초에 두 본이 있었다.
한 본은 머리에 치관(豸冠)을 쓰고 허리에 서각대(犀角帶)를 두른 붉은 관복에 수염과 머리가 반백인 모습인데 지금 서원의 소장본이 이것이고, 영당에 모셔져 있는 본도 이 본을 모사(模寫)한 것이다. 다른 한 본은 촌로(村老)의 복장이다.
아, 슬프다. 문정공이 유리(流離)할 때에 읊은 감회시(感懷詩)를 읽어 본 적이 있는데, 고려가 망한 뒤에 자신을 촌로와 같이 생각하였으니 당시의 그림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인데 안타깝게도 이 본은 세상에 전해지지 않는다.
서원에 있는 본은 만력연간의 병란(兵亂 임진왜란) 때 잃어버렸는데 뒤에 사신이 일본에서 이것을 돌려받았다.
이때 일본의 부로(父老)들이 영정을 돌려주며 “이것은 옛 귀인의 화상이니 그 자손에게 돌려주십시오.”라고 하였다.
기이하다. 이는 귀신이 한 것이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옛 화상은 오랜 세월에 마멸되어 비단이 삭고 찢어져 아래의 절반 정도가 없어졌다.
금상 5년 겨울에 문정공의 자손들이 화상을 받들고 서울로 와 두 본을 모사하여, 한 본은 태창동(太倉洞)에 있는 이 중추(李中樞 이현영(李顯英))의 고택에 봉안하고 또 한 본은 구본과 함께 문헌사당(文獻祠堂)에 다시 모셨다.
갑오년(1654, 효종5) 동지에 외손 양천(陽川) 허목은 삼가 쓰다.
중제(仲弟) 의(懿)가 중림 찰방(重林察訪)으로 있을 때 모사하였다.
사예(司藝) 이전(李䆄)이 이 일을 주관하였다.
[주-D001] 124년 : 100년인데, 잘못 계산한 것이다.
출처번역 한국고전번역원 | 하운하 (역) | 2006
牧隱畫像記
牧隱李文靖公圖像。在湖西韓山郡之文獻書院。其贊。權陽村之作也。書其後曰。永樂甲午九月下澣。門人權近記。德山縣李氏舊莊。又有文靖公影堂。其影子所記年月。正德甲戌云。不知其初傳畫在某年。我 太祖受禪之明年。公歿。當洪武二十六年癸酉。陽村之贊。蓋在數十餘年之後。自永樂甲午。至正德甲戌。其間一百二十四年。自洪武癸酉。至今去崇禎已十年。蓋三百年。影子初有二本。一本豸冠犀帶緋袍。鬚髮斑白。今書院所藏本是也。影堂本。從此本傳之也。一本田野之服。悲夫。嘗誦流離感懷詩。亡國之後。自同田父野老。見當時之畫可知。恨此本不傳。書院本。當萬曆兵亂失之。後有奉使者得於日本。其國之父老持贈曰。此古貴人圖畫。還寄其子孫云。異哉。此鬼神爲之。非人事之所期者也。古畫淪落歲久。綃剝裂。亡其下一半矣。五年冬。子姓諸族。奉圖像入京。摸寫二本。一本。奉安於太倉洞李中樞舊第。一本。幷舊本。還奉文獻祠堂。甲午冬日至。外裔子孫陽川許穆。謹識。
仲弟懿重林時所摸畫。
李司藝䆄幹此事。
그런데 위 부분도 아시는 분이 있을 수 있고 이와 아울러 양촌 권근선생이 쓴 목은 이색 선생 화상찬은 우리 한산이씨라면 모르면 한산이씨 목은 이색 할아버지의 후손이 아닌 것처럼 취부되며 대종회를 비롯하여 각 화수회 가정 곳곳에 전시나 기타의 형태로 보관중이거나 게시되어 있다.
그만큼 우리 후손에게는 중요한 것이기에 애지중지 모시고 있고 목은 이색의 영정은 그 가치만큼이나 나라의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하지만 양촌 권근선생이후 목은 이색의 영정을 수없이 많은 한산이씨 후손들이 바라보고 숭조돈목이나 존모의 표상을 보았지만 그 이후 문집이나 기타의 방법으로 목은 이색 영정을 표현한 후손의 글은 좀처럼 찬한이가 드물고 설령 있었다 하더라도 열 손가락이 부끄러울 정도일 것이다.
별칭이 소퇴계 대산 이상정과 소산 이광정 형제가 영해의 단산서원의 영정을 보고 쓴 것 빼고는 거의 찾기가 힘이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목은 이색 선생의 영정을 지키며 그 주변에 사는 것은 선조에 대한 존모와 더불어 옛날에는 아무에게나 허락되지 않는 일이기에 그 문중의 가장 큰 성현이나 대학자 추앙받는 이가 아니면 좀처럼 불가한 일이었다.
안동의 서산서원 즉 서산영당에도 이런 경우가 있었다. 우리 한산이씨 수은공파 소호문중 후손들은 서산서원 주변에 살았었고 평생을 그 주변에서 목은 이색의 영정을 지키며 살았다. 그리고 그 목은 이색 영정의 가장 가까이 사는 분은 아무나 허락이 되지 않았다. 바로 최후의 보류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분이 우리 한산이씨 수은공파에 있었으며 영정을 보며 찬하셨고 소산 이광정의 목은선생연보를 석정공 이수학과 함께 증보하였고 평생 1892년 졸하실때까지 목은선생연보를 증보완성하셨으며 서산영정을 평생 바라보며
목은 이색의 존모하는 마음을 글로 지어셨다.
필자가 한자번역이 최고의 권위에 도달하지는 않았지만 번역을 하면서 느끼는 감정은 포은 정몽주의 단심가 이후 심광세의 해동역사의 단심가로 판명되었지만 이것보다 나름 애절하며 그 지조와 절개가 이래서 삼은의 으뜸이구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있다.
그 만큼 최고 중의 최고라는 생각이 들지만 국문으로 표현을 다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겨두며 특출한 이가 나타나 보완해 주면 더할나위 없이 기쁠 것 같다.
바로 그 주인공이 대학자 대은 이수영이며 서산영정에 경(존모)을 표현한 영정 한시이다.
대은 이수영의 후손인 세분의 손주 휘 완규, 휘 택규, 휘 안규. 도 서산서원주변에 사셨고 휘 안규의 자이신 휘 영구는 서산서원의 가장가까운 최근방에 사신것은 이런 경위가 있다는 것을 아시는 이가 많지 않고 그 당시의 상황을 글로 표현을 아니하면 아는 이가 드물기에 사료로 남겨두고자 한다.
물론 일제치하 상황과 대은 이수영 증손이신 휘 영구 할배가 1970년대 졸하시고 근대화로 소호를 떠나면서 많은 상황이 변하였지만 그래도 현대 상황에서 진정한 한산이씨라면 필자의 내용이 무엇을 나타내는지는 알 수 있을 거라 판단해 본다.
서산영정( 목은 이색 영정 )에 차운하여 존모 ( 경 )하다
저자 대은 이수영(형)
서산의 (목은 이색의 영정)아름다운 기운 꿈에서도 찾아가는것을 좋아하였다네
진실한 형상 의젓하고 점잖아 벽상( 고려의 가장 높은벼슬)에 오르셨네
잘정돈된 의관 법도로 오시니 송악(개성)도 뉘우치고
고요한 눈동자(머리가 반백) 띠를 찾니 충절(죽교 삼은의 으뜸)의 마음뿐이었네
봉황천인의 모습 조선에도 아름답게 여기었고
큰 문벌 외따로서있는 소나무 (고송- 목은 이색)에 석음(불길한 현상)이 모여들었다네
단청(붉은 관복-조선의 건국에 협조)이 있어도 머물지 않았고
보상을 위한 곧지않는 난초(조선의 건국협조 유혹- 절개와 지조)는 임금의 거문고 소리도 슬프하게 하였다네 (소용없었다네 - 고려말 삼은의 으뜸 충절인 절개와 지조를 끝까지 지키셨다는 표현)
따라서 이 시는 어쩌면 목은이색 영정을 보며 찬한 현존하는 조선말 마지막에 쓰여진 최고의 보물 중 하나가 아닌가 싶다.
이후의 한시는 이전에 게시하여 한 번더 게시하였고 거의 모든이가 알지만 한번더 게시해 보았다.
목은 선생 화상찬(牧隱先生畫像讚) [문인 권근(權近)]
빼어난 천품의 수미함으로 / 挺天資之粹美
성학의 정미함을 궁구하니 / 窮聖學之精微
가슴속이 깨끗하여 / 胸襟洒落
밝은 광채를 발하도다 / 瑩徹光輝
실천은 독실함에 극을 이루고 / 踐履極於篤實
문장은 발휘함에 절묘하였네 / 文章妙於發揮
증점(曾點)의 광은 아니로되 영귀의 흥취가 있었고 / 匪點之狂而有詠歸之興
유하혜(柳下惠)의 화 같으나 불공의 비난은 없었기에 / 猶惠之和而無不恭之譏
학자들은 태산과 북두처럼 우러러 사모하고 / 學者仰之如山斗
국가에서는 시초와 거북처럼 의지하였네 / 國家倚之如蓍龜
재상이 되어서도 평소의 지조를 변치 않았고 / 膺大拜而不變其塞
험난함을 당하여도 위엄에 굴하지 않았도다 / 履大難而不怵於威
충심이 더욱 신실하여 / 赤心彌諒
평소의 지조 안 바꾼 건 / 素節不移
참으로 공이 스스로 한 말이거니와 / 眞公所以自道之辭也
강한이 도도히 흘러가 듯 / 若夫江漢滔滔
운연이 뭉게뭉게 일어나듯 / 雲煙霏霏
구양수(歐陽脩)와 한유(韓愈)를 따라잡아 / 追逐歐韓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으니 / 並駕齊馳
후세에 공의 문장을 보는 이가 / 後之觀者
내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리로다 / 知吾言之不欺也
[주-D001] 증점(曾點)의 …… 있었고 : 광(狂)은 뜻만 크고 행실이 거기에 미치지 못함을 이르는데, 공자(孔子)의 문인(門人) 가운데 증점 같은 사람이 바로 여기에 해당하였다.
영귀(詠歸)의 흥취란 공자가 문인들에게 각각 자기 소원을 말하라고 했을 적에 증점이 말하기를, “늦은 봄에 봄옷이 이루어지거든 관자(冠者) 5, 6인, 동자(童子) 6, 7인과 함께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을 쐬고 시를 읊으면서 돌아오겠습니다.”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先進, 子路》
[주-D002] 유하혜(柳下惠)의 …… 없었기에 : 노(魯)나라 대부(大夫) 유하혜는 화(和)하기로는 성(聖)의 경지였으나, 그는 또한 남의 선악(善惡)에 대해서는 전혀 상관하지 않은 오만함이 있었으므로, 맹자(孟子)가 그를 불공(不恭)하다고 말한 데서 온 말이다. 《孟子 公孫丑上, 萬章下》
출처번역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2000
대산집(大山集) 제3권
시(詩)
영해 단산서원의 목은 선조 영정을 읊다〔寧海丹山書院牧隱先祖影幀韻〕
혜화와 점락은 아득하여 찾을 수 없지만 / 惠和點樂杳難尋
한 폭의 비단으로 옛 벽에 임해 있네 / 一幅名綃古壁臨
올려 보면 천년 전의 모습에 홀연 놀라니 / 俯仰忽驚千載面
채색으로 칠분의 마음을 잘도 묘사하였네 / 丹靑能寫七分心
노란 꽃은 울 밖에 아직도 모습 그대론데 / 黃花籬外猶眞相
푸른 대는 강가에 저절로 저녁 그늘 지네 / 綠竹江干自暮陰
대아는 아득하니 어디를 거슬러 찾을까 / 大雅微茫何處泝
남겨진 〈의란곡〉을 거문고에 실어 볼 뿐 / 猗蘭遺曲上玄琴
[주-D001] 영해(寧海) …… 읊다 : 목은은 이색(李穡, 1328~1396)의 호로, 대산의 선조이다. 이 시는 1766년(영조42) 단산서원(丹山書院)에서 이색의 영정을 모사할 때에 지은 시인 듯하다.
대산의 동생인 이광정(李光靖)의 문집인 《소산집(小山集)》 권1에 이 시와 같은 운자를 사용한 〈단산서원에서 목은 선조의 영정을 다시 모사할 때에 지은 시에 차운하다〔次丹山書院改摹牧隱先祖影幀韻〕〉라는 작품이 있으며, 현재 안동의 목은영당에 보관되어 있는 영정에 “숭정삼갑신후병술사월상한개모(崇禎三甲申後丙戌四月上澣改摹)”라는 내역이 기록되어 있다.
[주-D002] 혜화(惠和)와 점락(點樂) : 유하혜(柳下惠)의 화(和)와 증점(曾點)의 낙(樂)을 말한다. 유하혜는 춘추 시대 노나라의 대부로 성인에 버금가는 현자(賢者)로 일컬어졌는데, 《맹자》 〈만장 하(萬章下)〉에서 “유하혜는 성인 중 화한 자이다.〔柳下惠聖之和者也〕”라고 하였다.
증점은 공자의 제자로, 《논어》 〈선진(先進)〉에서 공자가 제자들에게 “너희들을 알아준다면 어찌하겠느냐?”라고 묻자 대답하기를 “늦은 봄에 봄옷이 완성되면 어른 대여섯 명과 어린이 예닐곱 명과 함께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 쐬고서 노래하며 돌아오겠습니다.”라고 하였고, 공자가 이를 듣고서 감탄하며 허여하였다.
이색(李穡)의 영정에 적혀 있는 권근(權近)의 화상찬(畫像贊)에 “증점의 광 같진 않으면서 읊조리며 돌아온 흥취 있었고, 유하혜의 화 같으나 공손하지 못하다는 비난은 없었네.〔匪點之狂而有詠歸之興 猶惠之和而無不恭之譏〕”라는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주-D003] 채색으로 …… 묘사하였네 : 초상으로 그 사람의 모습을 잘 표현하였음을 말한다. 정이(程頤)가 《역전(易傳)》을 짓고서 문인들에게 주며 “단지 7분만 말한 것이니, 배우는 사람들은 반드시 다시 스스로 살피고 궁구해야 한다.
〔只說得七分 學者更須自體究〕”라고 하였는데, 문인인 장역(張繹)이 그에 대한 제문을 지으면서 그의 말을 인용하여 “선생의 말씀으로 문자에 드러난 것은 7분의 마음이 있고, 단청으로 그려진 것은 7분의 용모가 있다.〔先生有言見於文字者 有七分之心 繪於丹靑者 有七分之儀〕”라고 하였다.
《二程全書 附錄 祭文》 글이나 그림으로는 그 사람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이 7분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주-D004] 의란곡(猗蘭曲) : 공자가 지었다는 〈의란조(猗蘭操)〉로, 현자가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을 노래한 금곡(琴曲)이다. 공자가 제후에게 등용되지 못하고 위(衛)나라에서 노(魯)나라로 돌아가는 길에, 깊은 골짜기에서 향기 나는 난초가 무성한 것을 보고 향초가 왕 곁에 있지 못한 것을 불우한 현자에 비유하여 지었다고 한다. 《古今事文類聚 後集 卷29 作猗蘭操》
출처번역 한국고전번역원 | 이정원 (역) | 2015
안동서산영당 목은 이색 영정을 지키며 찬한 조선의 마지막 지킴이 대학자 대은 이수영과 공이 졸한 이후에도 마지막까지 그곳을 떠나지 않고 최근방 가까이에서 사셨던 휘 영구를 기리며 후손 해은 이대원 연휴에 한문번역을 통해 목은 이색 영정을 생각해 보다.
2019.5.5 서울 수송영당 다례제날 해은 이대원 짓다
출처 대은유고
#한산이씨 #목은 이색 # 안동 서산서원 # 서울 수송영당# 양촌권근 # 안동권씨 # 미수 허목 # 소퇴계 #대산 이상정 # 소산 이광정 # 대은 이수영
첫댓글 아우님 장문의 고귀한 글 발췌하고 번역 하느라 수고 많았네 오늘도 또 다른 지식을 얻게됨에 감사함을 표 하네 늘 건강하시고 편안 하길 바라네
형님 즐거운 연휴보내십시요 감사합니다
https://m.terms.naver.com/entry.nhn?docId=536534&cid=46622&categoryId=46622
중국어를 할 수는 없지만 한국에 사는 중국어 박사님의 도움으로 중국의 박사님의 답장이 왔다.
700-800년 동안 아마 우리나라 한산이씨 중에서 한번도 시도해본적이 없었을것 같은 생각은 들지만 한두번 한국인 교수님들이 본적이 있다고는 하나 그 사본을 보지못해 정확히 알수없는 내용이 올해 꼭 찾아져서 내 살아생전 내손에 눈으로 라도 보면 좋겠다고 나의 마지막 소원에 가깝다고 솔직히 이야기하고 중국어 박사님에게 간곡히 부탁하여 그 자료를 찾고 있다고 한다.
너무 오래되어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중국의 옛날 모든 기록을 관리하시는 박사님이라서 희망을 가져는 본다.
# 가정이곡 # 목은이색
조상의 흔적을 찾아 올린 수고로움에 고맙다는 답글을 다네
젊은이가 이렇게 한다는것이 너무 고마울뿐 도움이 되지 못하는 안타가운
마음이네 나도 10대에는 원리 서산서원 옆에 살았지만
아부지가 소호리로
한약방을 옮기 시면서
소호리에
살면서 어린 나이에
아무것도 모르며
성장했네 아부지가
돌아가시니 전 종손
장원 (현 종손 동수 부) 종손께서
이제 문중일 보실 어른이 없다고 하신 말씀이 생각되네
그후 장원 (종손)숙부
상복(당시 군위군수) 형님이 문중 일을 하신것으로 아네
이제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었으나
사람의 도리를 못하고
이렇게 카페에서 라도
자네가 올린 선조님의
자취를 알게되니 고마울
뿐이네
숙부님 또한 대단하신분이시지요 그래도 가까이에서 사신것은 그 만큼 보람돠고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창곡공 이현영은 우리 한산이씨 해산공 이문영의 사촌아우인데 이곳에 영정이 보관되었다고 기록하는데 해산공과 매우친하게 지내셨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기를 바랍니다. 숙부님 어버이날이 다가오다보니 큰집에 와서 형님에게 물어보고 오산의 의미를 알았습니다. 즐거운 마지막 연휴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해은 이대원 큰집에 갔구나
안부 전해주시게
떨어저 살다보니
자주 만날 기회도 없고
늘 궁금하기만 하네
매일 운동가는
대구 두류공원 금봉산을 돌아 성당못에서
11시30분에 폰으로 찰깍
@雪山(이윤복) 네 알겠습니다 즐거운 공휴일보내십시요 숙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