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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성화의 의미.
ㆍ성화를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
ㆍ세상에서 완전한 성화는 가능한가?
ㆍ성경은 왜 완전을 이루라고 명령하는가?
(1) 성화의 의미.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1:15)
①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8:29)
ⅰ. 자녀들은 보통 그 부모와 닮은 점을 지닌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자녀인 신자들도 하나님을 닮아야 한다.
ⅱ. 성화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님을 많은 인류 가운데 그 첫아들로 묘사하고 있다. 예수님을 첫아들이라 함은 그리스도를 닮은 많은 그리스도인의 출현을 요구하는 말씀이다.
② 성화는 두 부분에서 진행된다.
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이미 죄 사함을 받고 법적으로는 무죄의 신분, 곧 의의 신분을 얻었지만 영혼의 죄성은 여전히 남아 있어서 실제적인 죄를 짓고 있다.
ⅱ. 성화는 두 부분에서 진행된다. 하나는 내면적인 것으로 죄의 본성이 제거되고 성격이 바뀌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외면적인 것으로 하나님을 향한 헌신과 선행이 발전하고 성장하는 것이다. 인간의 내적인 변화는 반드시 외적인 생활의 변화를 수반해야 한다.
ⅲ. 우리나라 여성들은 아침저녁으로 화장을 한다. 아침에 화장하는 시간은 평균 17분이라고 한다. 영혼의 죄성을 씻는 일에 얼굴 화장하는 정도의 열심만 있어도 축복 받은 인생이다.
(2) 성화를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
성화는 성령의 사역이지만 결코 강요에 의해서 또는 기계적으로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성화는 인간의 협조와 내적 투쟁의 결단을 필요로 한다.
① 날마다 세심한 죄의 고백과 사죄를 위해 간구한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6:12)
a.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를 자백한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시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1:9)
ⅰ. 이사야는 자신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면전에 있음을 알게 되자 먼저 자신의 죄를 고백하였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6:5) 하나님은 이사야의 죄의 고백을 ‘용서’로 응답하셨다.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사6:6-7)
ⅱ. 윤동주의 시 ‘참회록’ 가운데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는 시구는 언제 읽어도 마음이 ‘찡’하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잘못은 잘 보지만 자기의 잘못은 잘 보지 못한다. 다른 사람의 잘못은 쌀 속의 돌처럼 골라내지만 자기의 잘못은 노름꾼이 속이고 화투를 감추듯 감추어버린다. 그러나 성경은 남보다 우리 자신의 죄의 자백을 강조한다. 우리는 모든 가면과 위선의 옷을 벗어던지고 철저한 자기 고백을 해야 한다.
ⅲ. 죄를 인정하지 않고 고백하지 않는 것은 죄를 짓는 것보다 더 나쁘다. 고집스럽게 죄의 고백을 하지 않는 이스라엘을 향해 예레미야는 “여호와께서 이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이 땅에 거하는 자를 이번에는 내어 던질 것이라 그들을 괴롭게 하여 깨닫게 하리라 하셨느니라”(렘10:18)고 경고했다.
b. 자백은 성경의 관점에서 죄를 인식하고 고하는 것이다.
(a) 자백은 하나님과 함께 자신의 죄를 바라보는 것이다.
ⅰ. 자백은 전치사 ‘…함께’와 동사 ‘말한다’의 결합어다. 곧, 사람의 수준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내게 어떻게 말씀하는가’의 관점에서 죄를 인식하는 것이다.
ⅱ. 실로 우리의 죄는 하나님의 말씀의 안경을 쓰고 볼 때 비로소 그 실체가 드러난다. 왜냐하면 우리의 본성은 태생적으로 부패했고, 우리는 근본적으로 영적 소경이기 때문이다.
(b)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양심의 표준을 늘 하나님의 말씀에 맞추어 놓고 있어야 한다.
ⅰ. 양심이란 시비와 선악을 분별하는 내면의 기준이다. 그러나 사람마다 양심의 기준이 다른 것이 현실이다. 인간의 양심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개인적인 입장에 따라 얼마든지 변화될 수 있는 메커니즘이다. 토머스 홉스는 그의 책 ‘리바이어던(괴물)’에서 양심(良心)이란 말이 사람들에 의해 타락되어 버렸다며 “사람들은 자기 나름의 의견에 완고하게 집착할 경우, 혹은 불합리한 의견을 집요하게 주장하는 경우에 자신의 의견에 양심이라는 거룩한 이름을 붙인다. 기껏해야 자기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정도에 불과한 것을 양심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마치 진리를 알고 있다는 듯이 주장한다. 그것은 남의 의견을 바꾸어 놓으려 하거나 혹은 자기 의견에 반대하면 불법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느껴지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고 말한다.
ⅱ. 이처럼 타락한 인간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비시키는데 명수이며, 자신을 정죄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잠잠하게 만드는 ‘합리화의 대가’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선한 양심’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선한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살아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죄책감을 느낀다.
(c) 선한 양심’에 의한 죄책감은 인생을 불행하게 만드는 병적인 현상이 아니다.
ⅰ. 죄책감 자체는 영적 건강의 증거다. 고통은 질병이 있음을 알리는 신호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심각한 질병을 알리는 경보체계이다. 만약 육체가 고통을 느끼는 능력을 상실한다면, 우리는 중한 질병을 앓고 있으면서도 전혀 모르고 지낼 것이다. 마찬가지로 만약 우리의 양심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마비되어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영적으로 병든 것이다.
ⅱ. 선한 양심은 ‘하나님의 내적 음성’이며, 우리의 행동의 감시자이다. 루터의 말처럼 우리의 양심이 하나님의 말씀의 포로가 될 때 비로소 우리의 삶에는 변화가 일어난다. 지미니 크리켓은 피노키오에게 “항상 네 선한 양심이 너의 인도자가 되게 하거라”라고 말한다.
ⅲ. 무디는 “나는 여태껏 내 자신만큼 나에게 괴로움을 안겨준 사람은 본적이 없다”라고 고백했다. 대개의 사람들은 남에게는 서릿발 같은 기준으로, 나에게는 봄바람 같은 기준으로 죄를 따진다. 우행호시(牛行虎視)란 말이 있다. ‘소걸음과 호랑이의 관찰’이란 뜻이다. 행보는 소처럼 성실과 인내로 걷되, 자신의 죄는 호랑이처럼 예리한 눈으로 살피라는 얘기다.
ⅳ. 인생의 최고의 도(道)는 말씀을 통한 ‘선한 양심’의 회복이며, 또한 ‘선한 양심’에 의해 자신이 죄인이며 우주 안의 ‘인간 오점(汚點)’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c. 이교도의 명상법은 자신의 실체, 곧 자신의 죄와 그 깊이를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다.
ⅰ. 이교도의 수행 방법인 명상법은 주로 ‘호흡’과 ‘무념(無念)’을 의존하여 진정한 ‘나’의 모습을 관찰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 대신 오직 ‘호흡’에 온 정신을 집중하는 호흡 우상숭배일 뿐이다. 이것이 바로 이교도의 명상법의 오류이다.
ⅱ. 물론 이교도의 명상법은 가끔 우리를 놀라운 깨달음으로 이끌기도 하지만 그것은 항상 왜곡된 깨달음을 동반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간성 자체의 부패를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양심은 망가진 신호등이다. 빨간불을 켜야 할 때 파란불을 켜고, 파란불을 켜야 할 때 빨간불을 켜고, 어떤 때는 파란불과 빨간불을 동시에 켠다.
ⅲ.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명상을 통해 자신의 삶과 내면을 바라보고 죄를 인식한다.
d. 자백은 죄를 혐오하고 버리는 결단을 포함한다.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28:13)
ⅰ. 자백은 단순히 자신의 잘못을 아뢸 뿐만 아니라 죄와의 결별을 선언하는 것이다. 우리가 죄를 고백하면서도 수없이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는 자리에 떨어지는 것은 내 안에 그 죄에 대한 수치심과 그 죄를 당장 끊어버릴 의사가 확고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우리가 스스로 자기를 용서하는 것이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는 것은 아니다.
ⅱ. 경제학에 ‘함몰비용’(매몰비용)의 원리가 있다. 잘못된 사업이라는 판단이 서면 과거에 퍼부은 돈에 연연할 필요가 없이 과감히 버리라는 것이다. “이미 상당한 비용이 치러진 사업들인데 이제 와서 어쩌겠다는 것이냐”는 식의 태도는 더 큰 손실을 불러올 뿐이다. 또한 지난날의 실패에 대한 자책감에 억눌려 유망한 사업을 새로 시작하지 못하는 것도 큰 손실이다. 중요한 것은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원을 어디에 쓸 것인가, 쓸 가치가 있는가의 여부이다.
ⅲ. 마찬가지로 죄를 깨달으면 그 죄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 그로 인해 앞으로 어떤 곤란이 예상될지라도 끊어버려야 한다. 고름은 결코 살이 되지 않는다. 몸을 썩게 하는 종기는 비단보로 덮어 숨길 게 아니라 아픔을 참고 터뜨려 짜내어 독소를 없애고 깨끗하게 소독해야만 그곳에서 생명의 새살이 돋아난다. 영혼의 손실은 지금까지 지불한 대가로 충분하다. 그래도 모르겠다면 겪어보는 수밖에 없다.
ⅳ. 한편 우리가 회개하고 나서도 죄책감에 억눌려 우울한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그것 역시 인생의 큰 손실이다. 바울은 “오직 한 일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빌3:13)라고 말씀한다. 중요한 것은 나의 현재와 미래를 가치 있게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ⅴ. 오늘날 신앙의 가장 큰 문제는 예수님을 ‘죄로부터 구원해준 구세주'로 알기보다 '지옥으로부터 구원해준 구세주'로 아는 것이다(아더 핑크). 그래서 신자들은 죄를 버리려 하지 않고 적당하게 죄와 타협하며 살려고 한다. 맹자는 “부끄러운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을 했다. 복음은 ‘3R', 곧 자책(Remorse)과 회개(Repentance)와 갱신(Renewal)이다.
e. 자백은 예수님을 의지함으로 한다.
“한 제비는 여호와를 위하고 한 제비는 아사셀을 위하여”(레16:8)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6)
ⅰ. 구약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은 죄 용서를 받기 위해 속죄일에 두 염소를 제물로 취했으며, 그 중 제비를 뽑아 “한 제비는 여호와를 위하고 한 제비는 아사셀을 위하여”(레16:8) 사용하도록 하였다.
ⅱ. ‘여호와를 위한 염소’는 속죄제를 드리기 위한 염소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하여 받는 염소이다. 대제사장은 이 염소를 잡아 그 피를 가지고 지성소 안에 들어가 속죄소 위와 앞에 뿌렸다.
ⅲ. 한편 ‘아사셀(특정 장소 혹은 추방된 마귀로 해석함)을 위한 염소’도 마찬가지로 속죄의 염소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사셀 염소 위에 손을 얹고 자신들의 죄를 전가시키고 난 후에 이 염소를 광야로 끌고 가는데, 이때 이 염소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지고서 땅 끝까지 추방되는 것이다. 이 염소는 백성들의 죄를 멀리 옮겨다가 죄의 본원(本源)인 아사셀에게 돌려보내는 것을 상징한다.
ⅳ. 예수님은 구약성경의 속죄의식의 실체이시다. 예수님은 죄 없는 분으로써 역사와 온 세상의 모든 죄의 짐을 전가 받으시고 “영문 밖”으로 끌려 나가셨다(히13:11-13). 요한은 예수님을 향하여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라고 고백했다. 그리고 그분은 아무로부터도 도움을 받지 못하고 비참하게 죽도록 내버림을 당하였다. 실로 그분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하여 대신 받으시는 한편, 자기 백성들의 죄를 아주 멀리 옮겨놓으셨던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6).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공로로 인해 우리의 죄악들은 말소되어 하나님 앞에서 더 이상 기억되지 아니하고 우리의 채무증서는 폐기되었다.
ⅴ. 오늘날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서 자기 백성들을 위한 대언자로 계신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2:1).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는 처음 구원받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구원 이후에도 항상 ‘그리스도를 인하여’, ‘믿음을 통하여’, 그리고 ‘은총으로써’ 자신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
f. 때로는 형제들 앞에 죄를 시인한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약5:14,16)
ⅰ. 우리는 경우에 따라 형제 앞에서 서로의 죄를 고백할 필요가 있다. 사실 우리가 혼자서 죄를 고백하는 한, 모든 것은 어두움에 덮여 있을 것이고, 따라서 고백한 죄를 계속 반복하는 ‘자기기만’의 사슬을 벗어나기가 어렵게 된다. 이것이 대부분의 인간의 현실이다.
ⅱ. 따라서 야고보는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약5:16)고 권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실재 앞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하는 것이다. ‘서로 고하며’란 말씀은 병자만이 죄를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병자를 위해 기도해 주는 장로도 자신의 죄를 고백함으로 하나님 앞에 용서받으라는 뜻이다.
ⅲ. 타인 앞에서의 죄의 고백은 체면과 수치심 때문에 시도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죄를 고백할 때 따르는 그 정도의 죄 값에 대해서는 기꺼이 지불할 각오를 해야 한다. 물론 이것은 죄 사함에 있어서 우리의 공로가 필요하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죄의 고백을 좀 더 적극적으로 확실하게 하자는 것이다. 또한 죄를 끊고자 하는 의지를 좀 더 굳세게 하자는 것이다. 마지막 날 최후의 심판의 빛 아래서 나의 죄가 사람들 앞에 드러나는 것보다 오늘 나의 형제들 앞에 드러나는 것이 훨씬 가벼울 것이다. 우리가 자신의 죄를 형제에게 고백할 수 있다는 것은 은총이다. 그것으로서 우리는 마지막 심판의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ⅳ. 단, 고백은 아무에게나 하면 도리어 상처를 입을 수 있으므로 목회자나 아주 믿을 만한 형제에게 하는 것이 좋다.(본훼퍼의 ‘신도의 공동생활’) 부끄러운 일들은 제 가슴에 자책의 못으로 되 날아와 박혀 있으므로 뽑아버림으로 치유 받아야 한다.
g.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쳤으면 그를 만나 용서를 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5:23)
ⅰ.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잘못을 범했을 경우에는 하나님께 죄를 자백할 뿐만 아니라, 직접 당사자를 만나 사과하고 화목하는 단계까지 나아가야 한다.
ⅱ. 영국의 아프리카 노예무역은 1562년 존 호킨스가 시작했다. 그는 아프리카 서부 해변인 시에라리온에 배 세 척을 끌고 가 잡아들인 흑인 원주민들을 카리브해의 스페인 정착민들에게 팔아넘겼다. 이후 300여 년 동안 영국인들이 아프리카에서 붙잡아 배에 태워 미국과 남미로 끌고 간 흑인만 300만 명이 이르렀다. 영국의 노예무역은 1807년 노예거래금지법이 만들어지면서 불법이 되었다. 그러나 밀매매는 한참 계속됐고 1879년대가 돼서야 끝났다. 2006.6월, 최초의 노예상인 존 호킨스의 후손 앤드루 호킨스가 아프리카를 찾아가 감비아 사람 2만5000명 앞에 무릎을 꿇고 선조의 잘못을 대신 빌었다.
ⅲ. 2007.3월 양손이 쇠사슬에 묶인 백인 6명이 한 흑인 여자 앞에 무릎을 꿇고 “씻을 수 없는 백인 선조들의 죄를 깊이 사죄합니다”며 용서를 빌었다. 흑인 여자는 백인들을 껴안고 “고맙다”며 용서했다. 노예거래 금지법 제정 200년을 기념해 성공회가 주도한 노예무역 참회 행사였다.
h. 용서 곧 사죄의 확신.
(a) 용서의 확신은 약속의 말씀을 믿음으로 부여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자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9)
ⅰ. 많은 신자들이 사죄의 확신을 갖지 못하고 여전히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다. 곧, 예수님의 대속이 우리의 죄를 충분히 덮을 수 있다는 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산다. 그래서 자신의 죄책을 해결하기 위하여 스스로 다소의 배상을 하려고 생각한다.
ⅱ. 이에 대한 성경의 답은 단호하다. 성경은, 만일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신다고 분명히 말씀한다. 우리는 이 약속의 말씀을 믿고 의지할 때 비로소 사죄의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된다.
ⅲ. 루터의 소교리문답해설 193문은 “모든 신자들이 그의 사죄나 구원에 대하여 확실성을 가진 이유가 무엇입니까?”에 대해 “하나님의 약속이 확실한 까닭입니다”고 답한다.
(b) 참된 용서의 확신은 죄를 버리는 결단을 한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약2:19)
ⅰ. 사죄의 확신은 우리에게 마음껏 죄를 지을 수 있는 면허장을 주는 것은 아니다. 참 믿음은 우리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요구한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죄를 버리는 행위이다.
ⅱ. 어떤 신자는 입술로 죄를 고백하고 나서 그 죄를 버리지 않았으면서도 하나님께서 사죄의 느낌과 평안을 주셨다고 말한다. 그런 말은 성령을 슬프시게 한다. 하나님은 진실로 회개치 않는 자들에게 평안을 주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것은 잘못된 평안이요 거짓 평안이다. 잘못된 마음의 평안은 영혼의 독이다. 그것은 죄를 짓는 일에 담대하게 만든다. 부끄러운 일도 처음이 어렵지, 자꾸 하면 망설임도 없게 된다. 야고보는 행위가 따르지 않는 믿음을 '헛것‘이라고 선언한다.
② 죄에 대해 치열한 투쟁을 한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히12:4)
ㆍ우리는 죄와의 싸움에서 항상 배고파야 한다. 러시아 월드컵 축구에서 독일이 한국에게 2:0으로 짐으로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그들은 “우리는 세계 챔피언이야.”라는 마음으로 경기에 임했다. 그들은 자만으로 배가 불렀으며 간절함이 없었다. 그리고 승리에 너무도 배고픈 한국에게 뼈아픈 패배를 했다.
③ 진리를 따라 산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이 하여”(벧전1:22)
ⅰ. 천사가 요한에게 말씀을 주면서 “갖다 먹어버리라”(계10:9)고 말한다. 이 말씀의 뜻은 “잘 이해하고 그대로 순종하라”는 것이다.
ⅱ. 우리는 자신이 실행할 수 있을 만큼만 성경을 믿는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 대해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르치시기 위해서 그렇게 위대한 일들을 행하신다면, 우리도 배우기 위해서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ⅲ. 무디의 성경책에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도처에 ‘T.R’이라는 글자가 씌어져 있었다고 한다. ‘T.R’이란 “실험해 보았더니 입증되었다”는 뜻이다.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책임을 지신다.
④ 그리스도의 형상에 대한 소원과 비전을 가진다.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3)
ⅰ. 그리스도의 형상은 신자의 일생의 작업이다. 하나님을 닮는 것은 즉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성화란 성도들이 회심 이후부터 시작하여 일생을 통하여 하나님을 닮아가는 과정을 가리킨다.
ⅱ. 바울은 자기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 위해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2:31)고 선언했다.
ⅲ. 나무(수목)는 매일 죽음으로서 성장한다. 나무의 안쪽 부분인 목질부는 죽은 세포이다. 목질부는 뿌리에서 흡수한 물을 모세관 현상을 통하여 위로 통과시키는 물관부이다. 이 죽은 목질부 세포조직을 통하여 나무는 물을 나무 전체로 공급하며 성장하게 된다.
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완전을 추구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후7:1)
a. 이 두려움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경외감이다.
ⅰ.이것은 완전한 인격과 압도하는 힘과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신비를 가진 분과 마주칠 때 생기는 두려움이다.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과는 너무도 달라서 그 앞에 서면 한 없는 왜소와 무능과 무기력과 불완전과 총체적인 허무를 느끼며, 동시에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이 같은 두려움은 인간이 하나님을 대할 때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사람이 너무 기쁘고 감격스럽고 놀라면 떨리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이 같은 떨림은 마땅하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시2:11)
ⅱ.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거룩한 경이감에 사로잡혀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 모세는 하나님이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셨을 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얼굴을 가리는 것뿐이었다. 야곱은 벧엘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하고 두려움을 고백했다. 욥은 하나님의 현존을 체험하고 자신의 입을 가렸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위엄을 목격하고 자신에게 ‘화’를 선언했다. 요한은 교회들 사이에 거니시는 예수님을 뵈었을 때 엎드려서 죽은 사람처럼 되었다. 베드로는 예수님더러 떠나달라고 요청했다(눅5:2-9). 그는 예수님에게서 단순한 권능 이상의 것을 감지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성을 인지하였으며, 인간 이상의 ‘타자성’에 직면하자 두려움을 느꼈다.
ⅲ. 성경은 “여호와를 경외함이 너의 보배니라”(사33: 6)고 말씀한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은 경건한 두려움이요, 마음을 치유하는 두려움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느끼는 수준 높은 행복감이다.
b.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서 오는 두려움이다.
ⅰ. 이것은 내가 성령을 근심케 하고 하나님을 실망시키지 않을까 하는 데서 오는 두려움이며, 또한 하나님께 좀 더 친밀하게 다가가지 못하고 혹시나 멀어지지는 않을까 하는 데서 오는 두려움이다.
ⅱ. 그러나 일부 신자들은 하나님보다 세상이나 사람을 더 두려워한다. 그것은 하나님보다 세상과 사람과 자신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 주님은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22:37)고 명하신다.
c.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다.
ⅰ. 나무는 자신의 역사를 나이테를 통해 제 몸 속에 기록한다. 나이테는 동심원으로 되어 있는데 그 문양이 나무마다 다 다르다. 식물학자들은 나이테의 문양을 보고 나무가 지금까지 어떤 환경에서 살았으며 어떤 일을 겪었는가를 다 읽어낸다. 나무를 세로로 잘랐을 때 드러나는 결의 무늬들도 나이테와 같다. 그 결은 나무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ⅱ. 우리 인생도 심판의 날 그 모든 행적이 드러날 것이며, 자신의 믿음생활에 대한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물론 믿는 자들은 죄 용서를 받은 신분이므로 형벌의 심판이 아니라 상급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그 의가 영원히 있으리로다”(시112:1)
⑥ 시험을 잘 참고 견딘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1:2-4)
ⅰ. 인간은 자연인과 중생인으로 나뉜다. 그리스도인은 처음은 육신의 부모로부터, 다음은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다.
ⅱ. 주의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과거에 몰랐던 시험을 만난다. 하지만 무서워할 필요는 없다. 원목은 자르고 대패질해야 가구가 되고, 가죽은 무두질해야 옷이 되고, 원석은 깎고 다듬어야 보석이 된다.
⑦ 성령님께 절대적으로 의존한다.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5:16-24)
ⅰ.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주께서는 성령님을 통해서 이 세계와 그리고 인간들의 마음과 심령 속에 임재하시며 활동하신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창1:2)
ⅱ. 성령님은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호흡이요,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신적 능력이며,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갈2:20)를 바라보고 믿고 따르게 하시는 분이시다.
ⅲ. 성령님은 이 세상의 다른 어떤 존재보다도 더 실재(實在)적인 분이시다. 또한 성령님보다 나와 더 가까운 분은 없다. 부모나 남편이나 아내보다 더 가까운 분이시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나와 항상 함께 계시며 또한 나를 가장 잘 아시기 때문이다. 그 분은 나의 실패도, 실수도, 그리고 숨으려는 나의 몸부림도 다 아신다. 나의 약점도, 나약한 의지도 다 아신다.
ⅳ. 그러므로 세상에서 가장 슬기로운 자는 성령님을 의지하고 그 앞에 자기의 짐을 내려놓고 사는 자이며,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자는 성령님을 무시하고 사는 자이다.
(3) 세상에서 완전한 성화는 가능한가?
① 완전 성화는 이 세상에서 불가능하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빌3:13,16)
ⅰ. 회심한 신자들은 완전하게 성화 되도록 명령받는다. 신자들의 경주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충분히 이르기까지 자라야 한다.(엡4:13)
ⅱ. 신자의 성화는 미완성(未完成)이다. 우리는 죽는 날까지 성화와 씨름하며 사자의 용맹으로 고독한 ‘자기 혁명가’의 길을 변함없이 가야 한다. “의인은 사자 같이 담대하니라”(잠28:1)
② 성도는 살아있는 한 죄와 더불어 끊임없는 투쟁을 해야 한다
“나의 행하는 것은 내가 알지 못하나니 곧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악을 행함이라”(롬7:15)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히12:9)
ⅰ. 아무리 완벽한 신자라도 여전히 죄 용서를 받기 위해 기도해야 하고, 보다 더 완전해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ⅱ. 우리는 모세, 다윗, 베드로, 바울 등의 인물의 생애를 통해서 그들이 어떻게 죄에 대항하여 어떻게 싸웠는가를 본다. 또한 우리는 그들이 때때로 어떻게 실패했는가도 본다. 그러나 그들은 그때마다 이전보다 더욱 성장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죄와 더불어 끊임없는 투쟁을 해야 한다. 그것은 처음부터 죄를 안 지으려고 노력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 지은 죄를 고백함으로 죄 사함을 받고 그 죄를 버리는 것이기도 하다.
ⅲ. 우리는 당면한 영적인 경주를 위해 죄의 짐을 내려놓고 영혼의 몸을 가볍게 하는 일에 주력해야 한다. 우리는 죄와의 싸움에서 실패와 승리를 반복하면서 이전보다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③ 만약 누가 완전 성화에 이르렀다고 말한다면 그는 스스로를 착각하거나 진리를 갖고 있지 않다.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전7:20)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리라”(요 일1:8,10)
ⅰ. 인간이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이행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완전주의자들이 있다.
ⅱ. 예컨대 로마가톨릭교회의 교리에 의하면 세례는 “인간 본성의 죄책과 부패를 제거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행할 수 있도록 사람에게 선행적 은혜를 수여한다”고 한다. 이러한 교훈의 극단적인 형태가 ‘여공(餘功)’이다.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는 수준 그 이상까지 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소수 성도의 ‘초과된 의’가 많은 죄인을 연옥의 고통에서 구해 주는 수단이 되게 만들고 있다.
ⅲ. 역사적으로 경건한 신앙인들은 ‘완전 성화’ 교리를 유해(有害)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진실로 신자는 아무리 율법을 잘 준수한다 할지라도 여전히 완전을 추구하는 존재일 뿐 무죄한 인간이 될 수는 없다. 신자의 생활은 육신과 성령의 요구 사이에 끊임없는 싸움을 피할 수 없으며, 죄의 고백과 사죄를 위한 기도가 계속적으로 요구되고 있다.
ⅳ. 바울은 노년에 자신을 가리켜 아직도 완전에 도달하지 못하고 목표를 향해 달음질하는 자로 고백하고 있으며, 루터의 유명한 신앙고백은 ‘의인인 동시에 죄인’이다. 우리는 여전히 자신의 죄와 씨름하고 있는 죄인인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스도에 의해서 의인이 될 수 있을 뿐이다.
④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요일3:10)
ⅰ. 어떤 사람들은 요일3:10을 인용하면서 성도의 ‘완전 성화’를 주장하기도 하지만 이는 성경의 전체적 교훈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ⅱ. 여기서 “죄를 짓지 아니한다”는 말씀은 문법적으로 볼 때 완료시제(계속적인 행동의 진행을 가리킴)이다. 이는 전혀 죄를 짓지 아니한다는 뜻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죄의 지배 아래 있지 아니한다는 뜻이다. 곧, 죄를 짓더라도 그것을 뉘우치고 그 죄의 길에서 떠난다는 뜻이다.
ⅲ. ‘생각하는 사람’을 조각하여 유명해진 로댕에게 어떤 청년이 “어떻게 하면 이런 훌륭한 조각품을 만들 수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로댕은 “큰 돌을 가져다가 불필요한 부분을 하나하나 제거하고 필요한 부분만 남겼더니 이런 조각품이 생겼다.”고 답했다. 우리는 인생의 조각가이다. 우리 모두에게 하나씩의 돌이 주어졌다. 일생 동안 이 돌을 껴안고 불필요한 것을 제거하고 필요한 부분만 남기는 일을 계속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 생을 마치는 날, 보다 아름다운 조각품을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한다.
(4) 성경은 왜 완전을 이루라고 명령하는가?
ⅰ. ‘완전’이란 믿는 자의 이상이다.
배들이 북극성을 바라보고 항해를 하지만 북극성에 도달한 배는 없다. 그와 같이 ‘완전’이란 믿는 자가 바라보고 나아가는 꿈이요, 비전이다.
ⅱ. ‘완전’을 향해 가는 과정 자체가 소중하다.
우리가 비록 이 땅의 삶에서 완전에 이르지 못한다 할지라도 완전을 목표로 삼고 노력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며,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최고의 가치 있는 일이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빌2:12-13)
ⅲ. 비전 없는 백성은 망한다.
“묵시(비전)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잠29:18)
영어 성경은 “비전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라고 번역했다. 나라가 망하는 것은 외부의 침략보다 내부의 부정부패로 인해서였음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향한 자기완성은 믿는 자들에게는 꿈 중의 꿈이어야 한다.
첫댓글 우와~!!
엄청난 연구군요. 수개월은 걸렸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