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전자책 읽는 재미에 푹 빠져 지낸다. 본의 아니게 한 해에 두 번씩이나 이사하게 되었을 때, 이삿짐 가운데 책이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커서 미니멀 라이프를 고려한 적이 있었다. 앞으로 모든 서적은 종이책 대신 전자책으로 전환해서 책더미로부터 해방되어 보겠다고 마음먹었더랬다. 하지만 종이책에 대한 오랜 향수와 익숙함에서 벗어나 실행에 옮기기란 쉽지 않았다.
남편이 고국 방문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앙증맞게 생긴 전자책 단말기(e-book reader)를 사 왔다. 전자책 읽기 전용으로 나온 기기이다. 평소 전자책과 종이책을 병행해 읽는다는 K 작가가 '책은 역시 자신의 흔적을 남길 수 있고, 정취가 있으며, 온전히 소유하는 느낌이 드는 종이책이다.'라고 피력했었다. 그 영향 때문인지 전자책에 대한 기대는 사실 그리 크지 않았다. 6인치 화면에 150그램 무게의 얄팍한 외관을 지닌 전자책 단말기는 한 손으로 들어도 거의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수백 권 분량의 책을 저장할 수 있다는 이 기기가, 과연 전자책을 종이책의 기능과 이미지처럼 재현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책장을 펼치는 순간, 그러니까 화면을 켜고 다운로드받은 최초의 전자책을 여는 순간, 나는 신세계에 들어서는 듯한 경험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는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없을 줄 알았다. 지난해 받은 눈 수술로 인해 조명이 맞지 않으면 책 읽기조차 어려운 상황이 되고 말았다. 햇볕 좋은 낮에야 겨우 책을 읽을 수 있었고 그마저도 1시간쯤 지나면 눈앞이 어른거려 책장을 덮어야만 했다. 잠자기 전 달콤한 독서를 포기한 지는 이미 오래였다. 은퇴 후, 꿈에 부푼 계획 중 하나가 독서였건만, 제동이 걸리니 무슨 낙으로 살아가나 싶은 한탄이 절로 나오곤 하였다. 그런데 낯선 전자책을 펼치면서 단말기에서 나오는 광선이 내가 우려하던 컴퓨터나 스마트폰에서 나오는 부류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을 때, 그동안의 가슴앓이를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그것을 통한 독서는 종이책을 읽을 때와는 다른 편안함을 내게 안겨주었다. 글의 분량이 화면 크기만큼만 나와서 눈 어른 거림도 일어나지 않고 가독성이 훨씬 좋았다. 게다가 글자도 내 눈에 맞게 확대하거나 굵게 조정하는 것이 자유로워 낮이고 밤이고 내가 원하는 시간대에 독서 활동을 하는 데 전혀 무리가 없었다.
온라인 인터넷 서점인 전자책 사이트에 가입했다. 책을 구입하는 건 일단 보류하고 빌려 보는 것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사이트마다 북클럽이란 형태의 도서관을 운영하고 있어 달마다 소정의 금액만 내면 전자책을 다운로드 받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가입한 사이트는 첫 달 무료에다 매월 오천 오백 원을 내면 그곳에 소장된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다. 가입한 지 두 달째 되는 지금, 무려 열 권이 넘는 책을 읽을 수 있었으니 이만하면 가히 기대 이상의 수확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원하는 책이 더는 없을 경우, 언제든지 다른 사이트로 옮겨 새로 가입할 수 있다. 그러면 새로운 곳의 북클럽이 보관하고 있는 책 역시 충분히 접하게 된다. 대체로 북클럽에는 출판된 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책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신간 도서가 드문 게 흠이긴 하나, 고전을 비롯해 웬만한 책은 비치하고 있는 편이라 아직은 도서 구입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만약 신간을 읽고 싶다면 바로 구입하여 가상의 서재에 영구히 꽂아 두고 읽는 방법을 선택하면 될 테니까.
한때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독서 모임을 가진 적이 있었다. 1년 치 토론할 책이 선정되면 모임의 리더가 고국에 책을 주문하여 돈을 송금하고 배편으로 우송하는 번거로움을 담당하곤 하였다. 만약 그때 각자가 전자책 단말기를 가지고서 온라인 서점에서 전자책을 구입하거나 북클럽을 이용할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편리하고 좋았을까 싶다. 전자책도 종이책과 마찬가지로 책갈피를 끼워 둘 수 있고 중요한 구절에는 밑줄을 그을 수 있다. 그리고 특별한 부분에는 메모도 남길 수 있다. 비록 종이책처럼 책장을 넘기는 손맛이 없고 필기구를 쓰지 않는 면이 생소하긴 하지만, 이 또한 익숙해지면 자연스러워지리라. 어쨌거나 미래에 전자책 단말기를 지닌 사람들과 독서토론을 하고 있을 광경을 상상하니 은근한 설렘이 움트는 듯하다.
전자책 단말기가 포기할 뻔한 독서를 향한 열정에 다시금 불씨를 지폈다. 종이책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영역을 보완해서 새로운 독서의 장을 열어 준 전자책과 단말기의 출현에 고마움을 표시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덕분에 삶의 질이 달라졌다. 포기하고 살아야 하나 싶었던 것을 다시 해낼 수 있다는 기쁨이란 충분히 말로 다 표현하기 부족하다. 최근에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전자책 단말기를 홍보하고 다닌다. 나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보다 더 기쁜 소식이 어디 있을까 하여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하는 중이다. 전자책이 더 낫다, 종이책이 더 낫다는 걸 저울질하려고 하는 게 아니다. 삶에서 익숙한 방식을 벗어나 새로운 것을 시도하면, 자신의 앞날에 또 다른 효율적이며 가치 있는 길이 열릴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이다.
선택의 폭이 넓어진 세상에 살고 있음을 행운이라 여긴다. 이제 여행을 떠날 때는 가방에 읽을 책 몇 권씩 챙기지 않고, 전자책 단말기 하나만 달랑 들고 가도 그 속에 저장된 책을 실컷 읽게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