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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경제용어
황구첨정(黃口簽丁)
정의
정해진 군역자 수를 채우기 위하여 어린 남자아이에게도 군역을 부과하던 행위를 비꼬는 말.
개설
각종 기관에서 양인 군역자를 확보하려는 활동을 활발히 하면서 15~59세에 해당하는 장정 이외에 어린이를 군역에 넣어 군포를 대납시키는 일이 빈번해졌다. 황구첨정은 백골징포(白骨徵布)와 함께 양역변통이 시작되는 17세기 후반부터 빈번하게 사용되었다. 백골징포란 이미 죽은 자에게 군포를 부과하여 그 부모나 친척에게 부담을 전가하는 것이었다. 나중에는 첨정이나 징포를 생략하고 그냥 황구(黃口)·백골(白骨)이라고 표현해도 황구첨정이나 백골징포를 가리키는 의미로 이해되었다[『정조실록』 2년 10월 23일].
내용 및 특징
국법으로는 5세 미만의 황구유아(黃口乳兒)나 14세 이하의 어린아이를 군적(軍籍)에 등록시키면 이에 관련된 서리는 물론 수령까지도 문책이나 처벌을 받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양역변통이 한창 논의되던 시기의 정책은 가능한 한 많은 수의 양정(良丁)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나이 어린 아이들까지 군역 대상자로 파악하게 되었다.
1676년(숙종 2)에는 “15세가 차지 아니한 자에게 역(役)을 정하는 것이 부당할 듯하나, 궐액(闕額)은 많고 군역 대상자인 한정(閒丁)은 부족하므로 부득이 11세 이상으로써 역을 정”하도록 하는 「양정사핵절목(良丁査覈節目)」을 공표하였다[『숙종실록』 2년 6월 15일]. 여기서는 “5세부터 10세까지의 무리는 따로 기록하고 책으로 만들어 그 연한이 차기를 기다려서 차례로 그 부족한 숫자에 따라 역을 정할 것”도 명시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호적상에 현존하는 호구(戶口)를 많이 등재하지 못하고 양인 남성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취해진 정책이었다. 황구첨정을 불법적인 것으로 인정하면서도 정책 중에는 이미 어린아이를 군적에 올릴 여지를 주고 있었던 것이다.
변천
군역 정원을 줄이고 실제로 경제적 부담 능력이 있는 자들로만 군역에 충당하려는 방향으로 정책이 바뀌면서 황구첨정의 불법성이 더욱 강조되었다. 도망을 가거나 하여 군역을 피하는 경우에는 그 사람의 친척이나 이웃에게 군역을 징수하는 족징(族徵)·인징(隣徵)의 무리한 방법이 동원되었다. 불법적인 군역 충정 사례로서 황구첨정과 백골징포가 이러한 현상과 함께 거론되었다.
군역자를 개별적으로 일일이 확보하기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지방 행정구역의 리(里) 단위로 군역을 대정(代定)하는 이정법(里定法)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또한 지역 단위로 군역을 공동 부담하는 이징법(里徵法)도 제시되었다. 이들 방법이 실시된다면 개별 군역자를 확보하는 것에서 나아가 황구첨정·백골징포의 행위도 없어질 수 있었으나, 그 방법이 실현된 곳은 많지 않았다.
개별 군역자를 확보하는 방안에 대신해서 일찍부터 호적상의 모든 호구에게 호포(戶布)·구포(口布) 등을 부과하여 군역을 일괄 징수하는 체제로 전환하려는 논의가 진행되어 왔다. 이 방안이 논의되는 과정에서 황구첨정이나 백골징포의 폐단이 사라질 것이라는 주장이 관용구처럼 따라다녔다. 그러나 현실적인 군역정책은 군역 부담을 반으로 줄이고, 지역 단위로 소속별·역종별 군액(軍額)을 고정화하여 소속 기관에서 그 이상의 징수를 요구하지 못하도록 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18세기 말 이후로 지역에 따라서는 군포를 지역공동체의 공동납으로 해결하는 곳이 생겨났다. 정군(正軍)의 명부인 군안(軍案)이 허구화되었다고는 하나, 번(番)을 서거나 훈련을 하는 군병으로 징발하는 경우에는 여전히 개별 군역자를 충당하는 원칙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군액이 지역별로 정해지면서 지방관청은 지역별 군액에 맞추어 군역 재원을 상납·충당하기만 하면 되었다.
19세기에는 납포와 징병에 대한 지방관청의 자의적 운영이 문제되기는 하였지만, 백골징포나 황구첨정의 우려는 점차 언급하지 않게 되었다.
참고문헌
『거관대요(居官大要)』
『조선민정자료(朝鮮民政資料)』 목민편(牧民篇)
김옥근, 『조선 왕조 재정사 연구 Ⅲ』, 일조각, 1988.
김준형, 「18세기 이정법의 전개: 촌락의 기능 강화와 관련하여」, 『진단학보』 58, 1984.
후포(後木)
정의
군포 등을 납부할 때 그 수송비와 서류 처리 비용 등으로 내던 수수료.
개설
국가기관에 소속된 공노비(公奴婢)의 공포(貢布)나 군보(軍保)의 군포, 그리고 대동포(大同布) 등을 납부할 때 정해진 분량에 더해서 수송비와 서류 처리 비용 등을 후포로 소속 기관에 납부하였다. 베가 아니라 면포로 납부하는 것을 후목(後木), 동전으로 납부하는 것을 후전(後錢)이라 칭하였다. 후포는 정해진 세금이 아니어서 세금 운영의 중앙집권화가 절정에 달하던 18세기 말까지도 국가의 공식 문서에 표면화되지 않았다.
내용 및 특징][변천
후목이라는 표현은 공노비의 신공(身貢)에 덧붙여 내는 잡비(雜費)로 많이 사용되었다. 1656년(효종 7)에 “노비의 공포는 비록 2필이라고 하나 후목·인정(人情)·노가(路價) 등이 원공(元貢)보다 갑절이나 되니, 이 무리들이 감내하기 어렵다.” 하였다[『효종실록』 7년 3월 15일]. 또한 1712년(숙종 38)에도 성균관은 “공노비 신공은 후목까지 합쳐 3필인데, 그 부담이 무겁고 이름이 천하기 때문에 온갖 방법으로 사천(私賤)이라고 가탁하거나 양인(良人)을 모칭(冒稱)하여 유망(流亡)하고 흩어져 옮겨 다니는 것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고 아뢰었다. 공노비의 유지가 어려운 이유를 신공 수수료에 두었던 것이다[『숙종실록』 38년 2월 7일].
조정에서 대동면포나 군포를 거둘 때 후포 문제가 표면화된 것은 18세기 말 『부역실총(賦役實摠)』이 편찬될 때였다. 이 책자에는 본래 정세(正稅)에 해당하는 부세 원액(原額)뿐 아니라, 부가적인 잡비도 일부분 기록되었다. 세금 납부 수수료까지 중앙정부가 파악하려는 움직임 속에서 후포가 거론되었던 것이다. 이 당시의 잡비는 주로 동전으로 납부되었으므로 ‘후전(後錢)’이라는 용어가 주로 사용되었다.
1798년(정조 22) 중앙 관서와 군문(軍門)의 군역 및 그 후전 부담이 불균등하다는 지적이 나왔다[『정조실록』 22년 10월 12일]. 또한 식년(式年)마다 장부를 다시 정리할 때 주는 정채(情債) 역시 받는 곳에 따라 많고 적은 차이가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이에 중앙 기관들이 똑같이 포목을 거두어들이게 하는 동시에 후전과 감채(勘債)에 대해서도 적당히 규정을 정해 절목(節目)으로 명시하자고 하였다. 그리고 그 절목의 하나는 중앙 관서에 비치하고 다른 하나는 해당 읍(邑)에 비치해서 그대로 준수하게 하자는 방안이 거론되었다.
참고문헌
『부역실총(賦役實摠)』
김덕진, 『조선 후기 지방 재정과 잡역세』, 국학자료원, 1999.
정연식, 「18세기 결포론의 대두와 결미절목의 제정」, 『국사관논총』 47, 1993.
경제 > 재정 > 잡세/(보)민고(세)((補)民庫(稅))
정의
조선후기에 지방관청에서 국세 이외의 잡역 및 기타 관용잡비를 조달하기 위하여 법이 아닌 각 지방군현의 관행에 따라 설치된 재정기구.
개설
대동법의 시행 후에도 대동작미에서 제외된 왕실과 중앙·지방관부의 진상과 공납 및 요역 명목의 본색잡역(本色雜役)이 적지 않은 규모로 외방인들에게 부과되고 있었다. 지방관청에서는 이들 잡역을 곡물이나 동전의 잡역세로 환산하여 대신 거두었다. 또 지방의 재정 상태는 법정 재원의 잠식과 상납(上納)과 읍용(邑用)에 소요되는 지출 수요의 증가로 악화되고 있었다. 그 부족한 재정 경비를 보충하기 위해서 지방관청에서는 곡물이나 금전을 징수하고 있었다.
지방관청에서는 잡역세 운영에서 민관 모두의 편의를 위하여 세목별로 각종 전담기구를 설립해 나갔다. 그러한 기구들은 공역(公役)을 수행한다 하여 공고(公庫)로 불리었다. 이들 잡역세 운영기구들은 계속 증설되어 비슷한 기능의 기구들이 남설(濫設)되고 있었다. 그 결과 많은 재정기구들이 설립되어 지방관청의 조직 구성을 크게 팽창시키었다. 잡역세 운영기구들은 설립 당시의 취지를 잃어버리고 점차 폐해를 일으키고 있었다. 각 기구들이 무분별하게 자금을 거두어들여 주민들의 조세 부담을 무겁게 하거나, 상호 대출·차입하여 재정 운영을 어렵게 하였기 때문이다. 파행적인 세정 운영으로 재정 모순은 악화되었고 백성들의 세금부담은 더욱 가중되었다. 이에 기구들을 통폐합하여 합리적인 재정 운영을 시도하기도 하였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러한 조선후기 지방관청의 잡역세 운영기구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민고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선후기에 각 지방관청은 잡역세로 운영되는 여러 종류의 재정기구를 두고 있었다. 그중에 민고라는 이름의 기구도 있었는데, 한 고을의 민역(民役)이나 공용(公用)을 조달하는 기구였다.
민고는 대동법 시행 이후에 지방민, 지방관, 지방 양반 3자의 협력으로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잡역의 분정과 지방재정의 열악화로 인하여 강화되고 있는 잡역세를 효과적으로 관리함으로써 관과 민 모두에게 편의를 주기 위해 마련된 것이었다.
이러한 목적 때문에 민고는 거의 모든 군현에 설립되어 있었지만, 그 기능과 명칭 및 설립 시기는 군현의 형편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법제적인 기구가 아니라 지방관청에서 사사로이 설립한 기구였기 때문이다.
민고는 설립 당시 및 초기에는 특정한 용도 또는 제한된 용도만을 담당했고 재정의 규모도 작았다. 그러나 후대로 갈수록 잡역이 민고에 집중되고, 일부 재정기구들이 민고로 통합되고, 여러 기구와 직임이 각자 부담하고 있는 용도가 민고에 귀속됨으로써 민고의 담당용도는 증가했다. 재정체계의 집중으로 민고의 담당용도가 늘어나면서 재정 규모도 자연히 증가할 수밖에 없었고 민고 재정이 전체 지방 재정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정은 민고의 재정구조와 관청 내 모든 기구들의 재정구조를 비교해 보면 쉽게 확인된다. 민고는 지방관청 내 기구들 중에서 가장 방대한 예산으로 진상, 경영납, 관용비 등 다양한 지출활동을 한 데 반해, 나머지 기구들은 재정의 규모가 민고에 크게 미치지 못하고, 세출내역에서도 특정 잡역 혹은 일부 공공경비를 조달하는 데 그쳤다.
한편 민고는 관청 내의 여러 기구에 자금을 지원하고 공공자금을 이식·보관하는 일도 맡고 있었다. 다산정약용(丁若鏞)이 전세 외에 최대의 부세는 민고세이고, 민고세는 부역의 최대라고 하였던 말이나, 지방관청의 각종 상납비와 읍용비가 민고에서 나온다는 여러 암행어사의 지적은 이 상황을 말해 준다. 민고는 당시 최대의 지방 재정기구로 성장하였던 것이다.
그리 많지 않은 자금을 가지고 특정 잡역이나 공용만을 조달하는 기능에 머물고 있는 다른 재정기구와 민고는 동일하게 취급될 수 없었다. 당국에서 지방 재정의 문제를 거론할 때마다 민고를 예의주시하여 그 어떤 문제보다 우선 지적하고 그 개선책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지방의 유력계층들은 향권(鄕權)과 관련하여 민고의 운영권 향배에 깊은 관심을 가져 수향(首鄕)과 수리(首吏)로 하여금 민고의 감관(監官)과 색리(色吏)를 맡도록 하였다. 중앙과 지방 모두에 의해 민고는 중요 부서였고, 민고의 재정활동은 주목을 받았다.
내용 및 변천
민고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중앙 차원의 법제적인 기구가 아니라 지방군현의 사설기구이기 때문에 그 운영내역은 지역마다 크게 달랐다. 다양한 운영내역을 짜임새 있게 제시하기란 어렵고 그것을 이해하는 것도 번거롭다. 따라서 하나의 사례를 집중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운영내역을 이해하는 데에 훨씬 도움이 된다. 이러한 점에서 전라도순천부(順天府) 사례를 제시한다.
순천 향교 서고에는 작성 시기(1790년)와 내용이 똑같은 2부의 『보민고절목(補民庫節目)』이 양호한 상태로 보관되어 있다. 원칙적으로 관청에 보관되어야 할 이 문서가 향교에 보관되어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처음에 민고는 잡역세 운영에서의 민관 편의를 위해서 설립되었지만, 18~19세기에 들어와 무거운 잡역세 징수와 부당한 자금 사용으로 지방민의 수탈을 가중시키는 기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때문에 민고의 수입과 지출은 민생의 고락과 직결되는 문제로 부각되었고, 부당한 지출과 무거운 과세에 대한 주민들의 반발 또한 상당하였다. 주민들의 반발은 순천 지방 양반들의 향촌 지배질서 유지에 위협적인 요소로 떠올랐다. 이러한 상황에서 순천 지방 양반들은 민생의 안정을 통한 향촌 질서의 유지를 위해 민고 문제에 깊은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순천 지방 양반들은 향교를 거점으로 향촌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향교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순천 지방 양반들이 민고의 운영에 간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절목이 향교에 보관되었던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절목이 향교에 보관되어 온 또 다른 이유로 향교 관련 양반들이 민고를 운영하는 직책을 맡았던 점을 들 수 있다. 민고의 운영 직책은 도유사(都有司)·도감(都監)·색리·고자(庫子) 4계층으로 구성되었다. 고자는 관노비들이 맡았고, 색리는 향리들이 맡았다. 도감은 향청의 좌수를 역임한 자 중에서 차출되었다. 즉 향청을 중심으로 향권을 지배하고 있던 향임(鄕任)이 도감을 맡았던 것이다. 민고 운영의 최고 책임자인 도유사는 향망(鄕望)이 임명하였고, 이들을 향임과 구별하여 유임(儒任)이라고 불렀다. 유임이란 순천 지방의 명문 양반을 지칭한다. 이들은 주로 향교의 교임(校任)을 독점하여 향권을 지배했다. 즉, 향교를 독점하여 향촌활동을 하던 순천 지방의 명문 양반들이 민고의 최고 직책인 도유사를 맡았던 관계로 절목이 향교에 보관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순천 민고는 적어도 17세기 중엽에 설립되었다. 설립 초기에는 보민창(補民倉)이라 하여 민역을 담당했다. 1790년 순천 민고의 총 수입은 돈 1,166냥, 쌀 51석, 나락 28석, 콩 15두였다. 이들 수입은 토지 8결당 돈 1냥을 거둔 결렴(結斂), 관내 6개 장시에서 거둔 장세(場稅), 민고 소유 토지의 소작료인 민고전(民庫田), 사조곡을 면리에 분급한 이자인 사조모(社租耗), 감영에서 상납할 물품의 비용으로 내려 준 회감(會減)으로 이루어졌다.) 순천 민고의 세입은 계속 증가하였다. 세입의 증가는 바로 세출의 팽창을 의미한다.
1790년 순천 민고의 세출내역을 보면, 진상비, 중앙관청과 감·병·수영 상납비, 칙사 구청비에 자금을 사용하였다. 또 수령 행차비, 공문서 작성·발송비, 봄·가을 제사비, 각종 시험장 관리비, 수령 부의비, 신구 수령 영송비, 향교 보조비, 군대 훈련비, 민고 운영비 등에 자금을 사용하였다. 세출은 계속 확대되었고, 세출의 팽창은 매년 수입을 초과 지출하는 가하(加下)를 야기하였다. 가하는 여러 차례 추가 징수하는 가렴(加斂)을 유발하였고, 그것은 순천 지방의 심각한 민폐가 되었다.
순천에서는 민폐의 요인이 되는 민고의 세출 팽창 원인을 과다한 중앙관청과 감‧병‧수영 상납액에 있다고 보았다.) 실제 1790년에는 수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1,300냥 이상을 상납비로 사용하였다. 이에 순천에서는 본래 순천의 담당이 아니었던 경영(京營)의 분정을 삭감해 주도록 감영에 여러 차례 요청하였다. 이러한 순천의 상황과 요청에 대해서, 좌의정채제공(蔡濟恭)은 민고 폐단의 원인이 감영에 있다고 지적하였고, 정조(正祖)는 수령들이 법을 지키지 않고 부정을 저지르고 있으므로 감사로 하여금 폐단을 조치하라고 지시하고 암행어사에게 민원에 따라 민고 폐해의 원인을 개선하라고 지시하였다. 즉, 중앙에서는 민고폐의 책임이 감영과 수령에 있다고 보았고, 민고폐를 감사와 수령으로 하여금 해결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이 중앙의 인식과 지시에 대해 감영에서는 영납물의 일부를 돈으로 내도록 허용하였고, 각 읍의 민고폐는 거의 동일함으로 순천의 경우 읍용비를 절약하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다고 하였고, 수령과 관속들이 부정을 저지르지 않도록 절목을 엄격하게 다시 작성하도록 하였다. 또 진상과 경영납 물종비로 이미 회감을 내려 주었는데 어찌 결렴을 실시하느냐고 꾸짖기까지 하였다.
중앙에서는 민고폐의 책임을 감영과 순천에 전가하였고, 감영에서는 다시 순천에 전가하였다. 중앙과 감영 모두 민고폐의 본질적인 문제, 즉 상납분의 증가에 대한 언급은 회피하고 책임 떠넘기기에만 급급하였다. 민고폐의 해결 방안을 순천 스스로 강구하도록 했음을 알 수 있다. 또 감영에서는 상납 물종가로 회감을 내려 주었다고 말하고 있으나 회감액은 실제 상납비의 극소량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민고에서 담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민고 폐단에 대한 중앙과 감영의 소극적인 태도 때문에 순천에서는 민고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는 방법 외에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세입을 증대하거나 읍용비를 삭감하는 길뿐이었다.
지방관청에서는 민고 폐단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여러 각도에서 시도하였다. 민고의 운영규정을 새로이 마련하고 그것을 정비하는 작업과 함께 엄격하게 준수하는 방안도 추진하였다. 또 세출의 삭감책과 세입의 증대책을 강구하였다. 중앙과 감영에서도 군현의 노력에 관심을 드러내었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들은 세출의 팽창, 세입의 한계, 개선의지의 결여로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갑오·광무개혁기에 지방제도가 개편될 때에 폐지되었다.
의의
민고는 방만한 재정체계를 흡수·통합하여 조선후기 최대의 지방 재정기구로 성장하였다. 지방의 유력계층들은 향촌의 지배권력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민고의 운영권을 장악하려 하였고, 지방관청에서는 부족한 재정을 민고를 통해 조달하고 있었다. 하지만 후에는 관아의 자금 조달을 합리화하는 기구로 전락하여 백성들의 조세부담을 가중시켰고 민중 항쟁을 불러일으켰다.
참고문헌
김덕진, 『조선후기 지방재정과 잡역세』, 국학자료원, 1999.
김덕진, 『조선후기 경제사 연구』, 선인, 2002.
김용섭, 『증보판 한국근대농업사연구』 (상), 일조각, 1984.
장동표, 『조선후기 지방재정연구』, 국학자료원, 1999.
김현구, 「18·19세기 거제부의 해세 운영과 민고」, 『부대사학』 19, 1995.
양진석, 「18·19세기 제주의 수취제도와 특징」, 『탐라문화』 24, 2004.
<사진: 『순천보민고절목』(순천 향교 소장, 1790년)>
가하(加下)
정의
조선시대의 재정 운영에서 예산으로 정해진 액수보다 더 지출하는 것.
내용
조선시대에 중앙과 지방에 있는 각급 기관은 양입위출(量入爲出)이라고 하는 예산제도에 의하여 매년 재정을 운영하였다. 양입위출이란 들어오는 수입을 토대로 나가는 지출을 정하여 1년 단위로 수입과 지출을 하는 회계제도(會計制度)를 말하였다. 이 1년 단위 회계 안에서 전체 수입을 다시 분기나 월별로 나누어 지출하였다. 그런데 1년 단위, 혹은 분기나 월 단위의 정해진 예산을 초과 지출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를 가하(加下)라고 하였다. 가하가 행해지면 초과 지출분 만큼을 규정 외로 다시 추가 징수하는 가렴(加斂)이 행해졌다. 따라서 가하가 발생하면 정상적인 재정 운영이 어렵게 되는 문제가 동반되었던 것이다.
가하는 재원이 현물에서 현금으로 들어와 재정 규모가 방대해진 조선후기에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각급 기관에서는 가하를 예방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였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태에서 국가 재정이 취약해지고 중간층의 수탈이 만연된 19세기에 가하는 연례행사로 나타나 재정 운영을 파행적으로 몰고 갔고 대민 수탈을 가중시켰다. 가하가 발생하면 다른 재무 기관에서 지원하여 채워 주는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지만, 도리어 지원 기관까지 함께 영세해지는 악순환을 불렀다.
용례
民庫設置與否 弊端有無 關問於道內列邑 晋州 尙州 巨濟 金海 昆陽 陜川 永川 南海 新寧 泗川 三嘉 安義 居昌等十三邑 有補民 雇馬 差役等庫 創設久遠 而各樣公用 於斯取辦 故創始之初 或自本官添補 或自民間鳩聚 錢則存本殖利 穀則作錢買屯 而第其財力有限 酬用漸煩 每年加下 無路充補 目前姑幸牽補 來頭難保無弊 [『정조실록』 14년 5월 26일]
참고문헌
김덕진, 『朝鮮後期 地方財政과 雜役稅』, 國學資料院, 1999.
결가(結價)
정의
조선시대에 토지 1결에 대하여 매기던 세금.
내용
조선시대에 토지에 부과는 세금을 전세(田稅)라고 하였다. 원래 1결당 풍흉과 비옥도에 따라 4~20두(斗)였으나, 인조대에 풍흉에 관계없이 4두로 고정되었다. 여기에 선조대에 훈련도감이 신설되면서 삼수미(三收米) 1두 2승이 추가되었고, 광해군대에 대동법이 실시되면서 대동미 12두가 추가되었고, 영조대에 균역법이 실시되면서 결작(結作) 2두가 추가되어 결당 19두 2승이 국가에 내는 토지세였다.
그런데 국세의 하나인 군역과 환곡이 토지세로 편입되고, 여기에 인정잡비·선가·관용잡비·주인역가·진상첨가 등 각종 명목이 관속들에 의하여 부과되어 지방관청의 수입으로 들어갔다. 그리하여 결가(結價)가 후대로 갈수록 증가하여 5·60~7·80냥은 물론이고 100냥 가까이 되는 곳도 있어 농민 항쟁의 주요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용례
領議政李裕元曰 我國田稅 輕於什一 祖宗朝深仁厚澤 洽於民髓 誕啓萬億年靈長之祚 爲守牧之臣 孰敢不憧憧靡懈 敬遵遺制 而近來結價 日以增加 古之田七畓八 今則積爲五六十兩 或多至七八十兩 駸駸然莫可捄其弊源 此固無他 所謂邑區處官雜費 面捄弊等許多名色 添付於其間 使終歲耕作之民 收其所藝 盡輸於官 已極哀矜 [『고종실록』 11년 7월 30일]
참고문헌
『목민심서(牧民心書)』
고동환, 「19세기 부세운영의 변화와 그 성격」, 『1894년 농민전쟁연구』 1(한국역사연구회), 역사비평사, 1991.
이재룡, 「朝鮮初期 田稅制度硏究」, 『韓國史學』 4, 1983.
정선남, 「18·19세기 田結稅의 收取制度와 그 運營」, 『韓國史論』 22, 1990.
결렴(結斂)
정의
조선시대에 토지에서 결을 단위로 거두는 정규세에 덧붙여 각종 명목으로 돈이나 곡식 및 현물을 거두어들이던 일.
내용
조선시대의 세금은 원칙적으로 토지·사람·가호를 대상으로 각각 일정액이 부과되었다. 그런데 토지세의 경우 정규세 외에 추가로 부과되는 것이 있었는데 이를 결렴(結斂)이라고 하였다. 결렴은 세금이 토지에 집중되기 시작하는 중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해서, 후기에는 그 경향이 더욱 심화되었다. 이러한 추세 속에서 전세, 삼수미, 대동미, 결작 등의 정규세 외에, 지방관청에서 상납이나 관용(官用)의 용도로 적지 않은 재화를 토지에서 거두어 물의를 일으켰다. 아전들이 포흠한 공전(公錢), 경사(京司)의 구청(求請), 영문(營門)의 복정(卜定), 저리(邸吏)의 역가(役價), 공곡(公穀)의 부족분 등등이 그것이다.
용례
如京司之各樣求請也 營門之隨時卜定也 京營邸吏之添役價也 公穀會減之補不足也 種種名色 難以枚擧 而官無切膚之苦 吏有乘機之利 自結斂而至於戶斂 [『정조실록』 22년 9월 14일]
참고문헌
『목민심서(牧民心書)』
결미(結米)
정의
조선후기에 균역법의 시행으로 토지에서 세금으로 걷는 결당 2두의 쌀.
내용
일정 기간 직접 복무를 원칙으로 하는 군역(軍役)이 16세기에 들어와 수포제(收布制)로 전환되었다. 17세기에 이르러 중앙과 지방의 각급 기관은 실제로 군역을 담당하는 사람을 경제적으로 보조하는 다수의 군보(軍保)를 두었다. 그런데 군보가(軍保價)는 기관에 따라 크고 작음의 차이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수령·아전들이 갖가지 농간을 저질러 군역의 폐해는 심각하였다. 이에 변통론이 제기되어 1750년(영조 26)에 균역법으로 귀결되었다.
균역법은 군보 1명당 1년 군포 2필을 1필을 줄였고 그로 인한 각급 기관의 수입 감소분을 결작(結作)·해세(海稅)·은결(隱結)·선무군관(選武軍官)으로 보충하였다. 결작은 평안·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에서 토지 1결당 쌀 2두 혹은 돈 5전을 내도록 한 것이었다. 그래서 쌀로 내는 것을 결미(結米) 또는 결작미(結作米)라고 하고, 돈으로 내는 것을 결전(結錢) 또는 결작전(結作錢)이라고 하였다.
용례
上取覽良役節目 節目有十條 (중략) 二曰結米 西北兩道外就六道田結 每結收米二斗或錢五錢定式 [『영조실록』 26년 7월 2일]
참고문헌
『균역사실(均役事實)』
『균역청사목(均役廳事目)』
『균역청등록(均役廳謄錄)』
정연식, 「18세기 結布論의 대두와 結米節目의 제정」, 『國史館論叢』 47, 1993.
차문섭, 「壬亂以後의 良役과 均役法의 成立」 上·下, 『史學硏究』 10·11, 1961.
결호역(結戶役)
정의
조선시대에 토지와 가호에 부과된 잡다한 역.
내용
조선시대에 전세는 토지에, 공물은 가호에, 요역은 사람에 부과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중 공물과 요역은 대동법에 의해 대동미(大同米)로 대체되어 토지에 부과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아울러 대동법은 유치미(留置米)를 떼어 주어 지방관아로 하여금 대동미 외의 추가 부과를 금지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원칙적으로 대동법 하에서는 치(雉)·계(鷄)·시(柴)·탄(炭)이나 칙수(勅需)·능역(陵役)을 제외하고 어떤 명목의 현물 징수나 인력 징발도 금지되었다.
그러나 지방관청은 부족한 재원과 상급 기관의 요구 및 수령·향리들의 필요에 의하여 물건과 인력을 토지나 가호에 부과하였다. 이를 결역(結役)이나 호역(戶役)이라 하고 합쳐서 결호역(結戶役)이라고 하였다. 결호역이 많아지면서 전체적인 민역(民役)이 가중되고 있다는 지적이 일었고, 아울러 본색(本色) 분정으로 인한 폐해가 드러나 현물·인력을 곡물·동전으로 대신 거두어들였다.
용례
金尙星疏中所陳 不過量入而出 此乃人人之恒談 至於良役二疋減給一疋 以結戶役雜費一結三兩 一戶一兩代捧充數者 亦有窒礙之端 [『영조실록』 9년 12월 20일]
참고문헌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작공(京作貢)
정의
조선후기에 각 도의 각 읍에서 상납물을 현물 대신 그에 해당하는 값으로 중앙관청에 직접 보내거나, 중앙관청에서 그 값에 해당하는 금액을 유치미와 같은 급대 세금에서 감하여 전문 납품업자를 통해 물품을 마련하는 것.
개설
경작공(京作貢)은 상납의 책임이 있는 군현민, 내외 관료와 왕처럼 국정 책임자, 또한 공물주인·시전인·서울 사람으로 표기되는 상인층에 의해 추진되었다. 이들은 지방에서 진공하는 향공(鄕貢)의 폐해를 제거하기 위하여 대동법 시행에도 불구하고 잔존한 토공(土貢), 방납(防納), 읍공(邑貢), 영공(營貢)을 경공으로 바꾸었다. 특히 영작공을 경작공으로 전환하는 사례가 많았는데, 1777년(정조 1)에 강릉부사 유의양(柳義養)이 강릉의 공삼가(貢蔘價)를 영저의 삼상배(蔘商輩)들이 매년 더 받아가 읍민들이 피해를 입고 있으니 경작공으로 옮겨 달라고 청하였던 것이 그 한 사례가 된다.
내용 및 특징
1747년(영조 23)에 행대사성 홍상한(洪象漢)이 경작공으로 인하여 장차 외방 진헌물이 모두 없어질 것이라고 염려할 만큼 경작공은 성행하였다. 경공(京貢)으로 이작(移作)된 물품은 공인(貢人), 전인(廛人), 계인(契人)에게 돌아갔다. 그러므로 조선후기 공인권과 전·계의 신증설은 이러한 경작공의 성행과 연관되어 있었다. 이 같은 경작공의 확대에는 서울 유통 구조의 발달을 이용하여 사적인 이익을 노린 작공배들의 노력이 크게 작용하였다.
변천
경작공 또한 본래의 취지를 벗어나 많은 문제들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와 관련하여 관부와 작공배가 결탁하여 작공가(作貢價)를 높이어 군현의 재정 부담을 무겁게 한 경우가 있었다. 가령, 이전에 자원하여 영공을 경공으로 전환한 강원도 삼공(蔘貢)의 경우 삼가의 증가로 호렴과 결렴을 행하고 그것도 모자라 번전(番錢)과 이전(利錢)을 거두니 지탱하기 어려운 고통이라고 하였다. 또 경작공의 성행으로 지방의 수공업이 몰락할 지경이었는데, 각처 소용의 초립(草笠)을 해당 기관으로부터 값을 받고 제조·상납하던 개성의 초립청(草笠廳)이라는 관영 수공업소가 서울 상인들이 초립계를 결성하여 이작으로 경공한 바람에 폐쇄되고 말았다. 이러한 문제들 때문에 경작공을 혁파하고 본래대로 환원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었지만, 경작공은 중단되지 않고 계속 확대되었다.
의의
대동법의 시행에도 불구하고 서울에 상납해야 하는 진상과 공물이 상당히 많이 남아 있었다. 그러한 물품을 지방군현에서는 직접 상납하기도 하였지만, 경작공이라고 하여 업무 추진의 편의를 위해 중앙기관에 돈으로 대신 납부하면 그곳에서 서울 상인을 통해 조달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경작공은 서울의 유통경제 발달을 전제로 출발하였지만, 운영 과정에서 민폐를 끼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강만길, 『조선후기 상업자본의 발달』, 고려대학교 출판부, 1973.
김덕진, 『조선후기 지방재정과 잡역세』, 국학자료원, 1999.
김동철, 『조선후기 공인연구』, 한국연구원, 1993.
오성, 『조선후기 상인연구』, 일조각, 1989.
오미일, 「18·19세기 새로운 공인권·전계 창설운동과 난전활동」, 『규장각』 10, 1987.
德成外志子, 「조선후기의 공물무납제」, 『역사학보』 113, 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