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사복 벗어던지고, 선혈의 태극기를 높이 들고 만세운동
노종해(CM리서치)
![](https://t1.daumcdn.net/cfile/cafe/99D24B375B60614E2A)
▲ 정호석 권사(본처 사역자, 평신도전도인. 현, 장로)
한국 기독교가 민족사의 중심에 정착되고 표출시킨 사건은 무엇보다도 3.1운동이었다. 3.1운동은 우리 민족과 정체성을 이루고 구원이 기독교에 있음을 인식시켜준 중요한 사건이다. 실제로 한국기독교는 선교초기부터 자유와 독립, 정의와 평등을 가르쳐왔고 근대시민의식을 일으키는 중추역할을 해왔다. 이러한 면모가 드러난 사건이 바로 3.1운동이다.
당시 기독교인구는 25만 명으로 총인구에 1%정도이지만 민족대표 33인 중 16명이 서명 참여하였고 전국 어디서나 교회와 미션스쿨, 기독교학교는 3.1운동의 통로요 주체가 되었음을 더 논증할 필요 없는 주지의 사실이다. 3.1운동은 한국기독교사에 있어서 최초로 민족과 일체감을 이루어 대동단결해 나간 중요한 사건이다.
이러한 사실은 평신도로써 서강-마포지역에서 지역주민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일으키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룬 정호석(鄭浩錫) 권사의 만세운동에서도 볼 수 있다. 당시 감리교회 "권사"는 본처 사역자로 평신도 전도인이며, 오늘날 "장로"이다.
대한문 지키는 순사로 순사복 벗어 던지고 만세운동에
정호석은 1885년 11월 10일 생으로 3.1운동 당시 34세로 일본 총독부 순사로 재직하는 분으로 대한문을 지키는 순사(巡査)였다. 정호석은 서강감리교회(西江監理敎會 창립1902년, 현 담임;임태일 목사) 창립 교인이며, 속장, 권사, 전도사로 본처사역자였다. 1905년도에는 서강 앞 밤섬을 건너 염창교회(鹽倉敎會)를 개척한 분이기도하다.(孫元學:鹽倉敎會三十年史, 1938.pp2-3)
정호석은 평소에 일본 제국주의의 혹독하고도 악랄한 민족수탈행위를 지켜보며 울분을 삭이고 있었고 고민하다가 3.1운동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만세대열이 대한문 앞에 이르렀을 때 순사복(巡査服)을 벗어던지고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3월 5일에는 자신이 거주지역인 마포에서 만세운동을 일으키다가 체포되었다.(朴殷植:韓國獨立運動之血史, p160)
정호석 권사의 재판 기록을 보면 그의 신앙과 과감한 결단과 만세운동의 열열한 활동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정호석 권사의 주소는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 동막리 34번지이고, 직업은 조선총독부 순사보로 되어있다. 재판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피고 정호석은 동년(1919년) 3월 5일 오전 9시 반 경 고양군 용강면 동막 상리 34번지 자택에서 자기 왼손 무명지를 깨물어 그 출혈을 접시에 받아서 이 혈액을 붓에 찍어 흰 무명에 태극장을 그리고 이를 죽봉에 매어 자택을 나서서 조선독립시위운동의 기세를 크게 올려 인심을 선동하고자 하여 동년 동막사립 흥영학교(興英學校)에 이르러 태극기를 휘두르며 조선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동교직원인 피고 박성철, 오정엽에게 대하여 참가할 것을 요구하며 이들도 찬동하여 그 학교 생도 10명을 인솔하고 동교로부터 동면 공덕리에 이르는 동안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행진한 자로서 이상의 행위 중 피고들이 수차의 치안방해 행위는 모두 계속할 의사에서 나온 것이라”(獨立運動史資料集 第五輯:三一運動裁判記錄,1971. p110)
상해임시정부, “독립신문”에 보도되어(1919.9.13.)
또한 이 사실은 3.1운동 직후 상해에서 발행된 독립신문 “옥중비화“(獄中秘話)에도 보도되었다.(獨立新聞, 1919年9月13日字)
“3월 1일이라 열광한 군중은 대한문을 넘쳐 덕수궁 내로 밀물같이 밀어 닥쳤다. 대한문을 지키는 한 명의 순사가 있었으니 이는 고양군 동막리에 거(居)하는 정호석씨이다. 씨(氏)는 이날 시민의 열성에 깊이 감동된바 있어서 가만히 집으로 돌아가 군도(軍刀)를 빼어 단지(斷指)를 결행할 즈음에 모친에게 발견 중지 되었다가 재차 입으로 무명지를 잘라 임갈(淋渴)한 선혈로 양목2폭에 쓰니 하나는 태극기요 또 하나는 독립만세의 네자이다. 이윽고 장죽에 높이 달고 동리 소학교에 들어가 80여 명의 학생들과 직원이 호응하여 시위운동을 개시하고자 서소문에 도착하여 출장하였으나 체포되었다. 신문(訊問) 시 경관이 사택에 출장하여 단절한 손가락을 강요하였으나 그 부인은 종내 내어 놓지 않았다.”(“獄中秘話(五)”. 獨立, 第八號, 大韓民國元年九月十三日)
![](https://t1.daumcdn.net/cfile/cafe/9970633D5B5D4BB017)
▲ *상해,임시정부 발행-"독립신문" 1919년9월13일자, "옥중비화"
평신도사역자, 교육활동 헌신, 순교자 기념관에
정호석 권사는 체포되어 징역 1년6개 월의 선고 받고 복역 후 더욱 민족구국의 신앙을 가지고 평신도 사역자로 서강교회(西江敎會)와 지방, 연회 일에 참여하였으며, 서강의법학교(西江의법學校, 현 서강초등학교) 교사로 봉직하며 민족교육활동과 사회활동에 앞장서신 분이다. 정호석은 해방 후 “장로”가 되었고, 6.25전란 중 납북되어 순교하였다. 정호석 장로는 경기도 용인 <한국 기독교 순교자 기념관>의 “납북 일자와 장소가 확실치 않은 장로”로 즉, “정호석 서울 서강교회 장로” 명단에 올라 있다.
정호석는 마포 서강교회 권사요, 본처 사역자 평신도 전도인으로 1905년, 서강 광흥창(西江 廣興倉) 부근에서 밤섬을 거쳐 강건너 염창에 첫 예배를 드리고 염창교회를 개척한 분이다.(孫元學: 鹽倉敎會 33년사, 1938年 刊行. p12-13.)
우리는 한국기독교인들의 투철한 민족의식과 동포애를 엿 볼 수 있으며 민족구국을 위해 대동단결하여 이끌어 나간 지도력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신앙이 바로 한국기독교의 자리임을 잊지말아야 한다.(rch)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dangdangnews.com%2Fnews%2Fphoto%2F201302%2F20757_38912_1951.jpg)
▲ *용인, <한국 기독교 순교자 기념관> 입구 기념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