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 선생님께
‘그리스도께서 능동(율법준수) 순종으로 얻으신 의義(공효)’와
‘그 의義의 전가’ 개념이 없으셨을까?
朴埰同 (2019.03.16.22:20)
{바른 믿음} 정이철 <존 칼빈 신학에는 그리스도 율법 순종의 의 사상이 전혀 없다.>
http://archive.fo/ESqaI
이단들처럼 난독증에 사로잡혀 “그리스도께서 율법 아래 나셨다.”는 바울 사도 진술에 담긴 의미를 독해 못 하는 정이철 목사, 확증편향에 사로잡힌 정이철 목사 눈에는 ‘그리스도께서 이른바 “능동 순종”으로 얻으신 의’, ‘그리스도께서 “지키면 살리라.”는 율법을 지키심으로 얻으신 의義(공효)와 그 공효의 전가’를 서술한 {기독교 강요} 다음과 같은 내용들은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굵은 글씨는 강조하려고 제가 굵은 글씨로 씁니다. 밑줄과 배경색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원광연 목사님께서 우리말로 옮기셔서 크리스챤다이제스트사에서 펴낸 {기독교 강요}에서 옮깁니다.
다음은 {기독교 강요 제2권} [12장] <3항>에서 옮깁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한 둘째 요건은 이것이었다. 곧 사람이 불순종 때문에 잃어버린 상태가 됐음으로 순종으로 그것을 시정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만족하게 하고, 죄에 대해 형벌을 치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해 우리 주님께서 참사람으로 오셔서 아담의 인격과 이름을 취해 아담을 대신해 아버지께 순종을 이루시며, 우리 육체를 대표해 의로우신 하나님 심판을 만족하게 하는 값으로 내어놓으시고, 그 육체로써 우리가 치러야 할 형벌을 값으로 치르신 것이다.
다음은 {기독교 강요 제2권} [16장] <5항>에서 옮깁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묻기를 “그리스도께서는 과연 어떻게 해서 죄를 제거하셨고,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분리된 상태를 없애셨으며, 또한 의義를 얻으셔서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를 향해 자비와 친절을 베푸시게 만드셨느냐?”고 한다. 이에 대한 우리 일반적인 답변은 곧, “우리를 위해 그분께서 복종의 전全과정을 통해서 이를 이루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울의 증언으로 증명된다.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9) 또 다른 구절에서 바울은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한 그 용서의 근거를 그리스도 전全 생애에까지 확대하고 있다.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 ··· 려 하심이라.”(갈 4:4~5)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세례 시에도 자신이 아버지 명령을 순종으로 시행함으로써 의義의 한 부분을 이뤘다고 단언하셨다(마 3:15). 요컨대 종의 형체를 취하신 때부터 그분께서는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 해방의 대가를 치르기 시작하신 것이다.
…(중략)…
그렇기 때문에 이른바 “사도신경”이 그리스도 탄생부터 그분 죽음과 부활에 이르기까지를 ㅡ완전한 구원의 모든 것이 거기에 있다.ㅡ 단번에 가장 적절한 순서대로 다루고 있다 하겠다. 그러나 물론 그분께서 그분 생애에서 드러내 보이신 순종의 나머지 부분도 지나쳐버려서는 안 된다. 바울은 그 시초부터 마지막까지 모든 것을 포괄해 이렇게 말한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7~8) 심지어 죽음 그 자체에서도 그리스도의 기꺼운 순종이 매우 중요하다. 자발로 드리지 않은 희생물은 의義를 이룰 수가 없었을 것이니 말이다.
다음은 {기독교 강요 제2권} [16장] <13항>에서 옮깁니다.
그러함에도, 우리는 그리스도 죽음을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 산 소망이 있”(벧전 1:3)다. 그분께서 다시 사심으로써 죽음을 이기신 자로 나타나심과 같이, 우리 믿음이 죽음을 이기는 것은 오직 그분 부활에 있다.
다음은 {기독교 강요 제2권} [17장] <5항>에서 옮깁니다. 가로속 글은 제가 더합니다.
다음과 같은 바울 사도 말씀도 매우 중요하다.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갈 2:21) 이를 근거로 우리는 누구든지 율법을 지키는 자에게 주실 그것(의義, 의롭다 하심)을 그리스도께 구해야 한다고, 혹은 ㅡ결국 같은 것이지만ㅡ 하나님께서 우리 행위에 대해 우리에게 약속하신 바를 ㅡ“사람이 이를 행하면(율법을 지키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영생을 얻으리라.)”(레 18:5)ㅡ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해 얻는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안디옥에서 행한 설교에서도 이 사실이 분명하게 확증되고 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세의 율법으로 ···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것이다(행 13:39). 만일 의義는 율법을 지키는 것에 있다면,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 짐(율법을 지키는 것)을 지시고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셔서 마치 우리가 율법을 지킨 것처럼 만드셨으니, 그리스도께서 그 공로로 우리를 위해 자비를 얻으셨다는 것을 과연 누가 부인하겠는가?
갈라디아에서 가르치는 내용도 같은 목적을 지닌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사 ···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 ··· 려 하심이라.”(갈 4:4~5) 우리가 지불할 수 없는 것을 친히 지불하셔서 우리를 위해 의義를 얻으시기 위함이 아니라면, 그리스도께서 율법 아래에 계신 목적이 과연 무엇이었단 말인가? 그리해 행위로 말미암지 않는 의義의 전가에 대한 논의가 이어지는 것이다(롬 4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