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 부산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곧바로 수도권에 왔다. 부산에서 직장을 알아볼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스펙하나 없이 지방대 졸업장하나 덜렁 가지고 학자금대출을 갚아야하는 긴 여정을 앞둔 나로선 취직확률이 일단 높은 수도권으로 가는 것이 맞다고 판단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도시 부산을 좋아했지만 떠날 땐 망설임이 없었다. 등록금과 생활비를 혼자 벌어 대학을 다니느라 휴학을 반복하며 경제적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기에 어디든 빨리 취직을 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커서였는지도 모르겠다.
당시 사귀고 있던 남자친구가 군포에 살고 있어 근처 투룸을 알아봤고 둘이 가진 돈을 합쳐 보증금을 마련해 계약을 했다. 세탁기와 냉장고는 중고매장에서 저렴하게 구입하고 책상, 서랍장 같은 것도 인터넷에서 가장 싼 걸로 주문했다. 초라한 자취방이었지만 낯선 장소에서 새로운 시작을 해야 하는 시기에 내 곁에 남자친구가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집이 정리된 후 곧장 여기저기 이력서를 넣고 면접을 보러 다니다 3월에 마포에 있는 정책홍보대행사에 인턴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렇게 본격적인 내 수도권생활은 시작되었다.
20대 초반부터 장거리연애를 해온 남자친구와 함께하는 수도권 생활이기에 크게 외롭진 않았다. 건너편엔 남자친구의 친구들이 살고 있어 자주 우리집에 모여 밥을 먹기도 했다. 초반엔 회사생활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어 부산을 그리워할 새가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가슴 한 켠에 구멍이 커져가는 걸 느꼈다. 남자친구가 요리를 잘해서 곧장 맛있는 음식을 자주 만들어 주기도 하고 둘이서 여기저기 맛집도 찾아다녔지만 우리 둘은 늘 외식을 한 후 수도권 음식을 욕하기 바빴다. “설탕 맛밖에 모르는 멍청한 서울놈들!” 이라며. 남자친구 또한 대구가 고향이라 나와 함께 경상도 음식에 길들여져 있었기에 서울음식이 도통 입에 맞질 않았다. 그렇게 불평을 이어가다 내 가슴 한 켠에 있는 구멍을 메워줄 음식, 돼지국밥이 떠올랐다.
부산의 음식! 하면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돼지국밥이다. 나에게도 너무나 익숙한 음식이고 또 좋아하는 음식이라 부산에 살 땐 주 1~2회는 꼭 먹는 음식이었다. 부산엔 어딜 가나 돼지국밥집이 있었고 맛있는 식당을 찾기가 어렵지 않았다. 뜨끈한 국물, 고기, 김치와 함께 밥을 먹어야만 한 끼 식사를 제대로 했다고 생각하는 내게 돼지국밥만한 음식은 없었다. 수도권에 와서 계속 마음이 허한 와중에 돼지국밥이 떠올랐고 생각보다 내가 정말 돼지국밥을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 서울에 없을 리가 없지! 라는 마음으로 수도권에서도 열심히 돼지국밥집을 찾았다. 하지만 없었다. 정말 없었다.
서울사람들은 일단 돼지국밥을 먹지 않고 순대국밥, 설렁탕 같은 걸 더 많이 먹는 모양이었다. 어쩌다가 찾은 돼지국밥집의 경우 국물이 너무 밍밍하고 깊은 맛이 부족했다. 찾다 찾다 지친 나는 결국 포기하고 1년에 1~2번은 꼭 부산에 내려가 2~3일 내내 돼지국밥집탐방을 하기 시작했다. 부산에 살 땐 서면 국밥골목에 있는 곳만 갔는데 타지로 오니 부산에 있는 돼지국밥 맛집이 더 잘 보였다. 부산에 살 때 좀 더 열심히 다양한 돼지국밥을 먹으러 다니지 않은걸 후회했다. 역시 뭐든 가까이 있을땐 소중함을 모르는 법일까. 언제든 갈수 있었던 바다, 돼지국밥 말고도 내가 너무 좋아하는, 그리고 수도권에서는 결코 찾을 수 없는 맛의 밀면, 떡볶이, 족발, 회, 꼼장어... 먹고 싶은 부산음식을 떠올릴수록 슬퍼졌다.
매년 부산에 내려가 돼지국밥을 먹고, 다시 수도권에 돌아와 돼지국밥을 그리워하는걸 반복한지 올해로 8년이 되었다. 수도권으로 올라와 함께 동거를 시작한 남자친구와는 1년 9개월 후 결혼을 했고 난 직장을 몇 번 더 옮겼고 아이를 낳아 기르며 지금은 경기도 광명에 살고 있다.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40만원의 투룸에서 살던 우리는 현재 22평 아파트에 전세로 살고 있으며 얼마전 아파트 청약에 당첨되어 2년 6개월 후 입주를 앞두고 있다. 우리가 구입할 아파트는 8년 동안 남편과 내가 열심히 살았다는 증명을 해주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수도권에 살며 일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기르는 내내 남편과 나는 둘 다 경상도음식을 그리워했고 그게 사실은 수도권살이의 팍팍함을 벗어나 우리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었음을 깨달았다.
평균 2~3시간의 긴 출퇴근시간, 그리고 그 시간 내내 견뎌야하는 지하철 안의 갑갑함, 치솟는 집값으로 인한 스트레스, 맞벌이를 하며 아이를 키우는 고단함, 불안정한 직장에서의 스트레스... 수도권의 삶이 힘들수록 내가 자라온 고향이 그리워졌다. 고향에서 계속 살았어도 고단하긴 마찬가지였음을 알지만 내 힘듦의 원인은 모두 내가 고향을 떠나서라고 괜히 믿고 싶어졌다. 그리고 돼지국밥만 한 그릇 먹으면 이 고단함을 잠시 잊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수도권으로 와서 좋은 일도 많이 생겼고 행복한 기억도 많이 쌓아갔지만 마음 한켠의 구멍은 결코 메워지지가 않았다. 그것은 고향을 떠난 자의 숙명인걸까. 지금 살고 있는 지역에서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키운 이후엔 둘이 지방에 가서 살자는 이야기를 남편과 종종 한다. 맛있는 돼지국밥집이 많은 동네에 사는 삶. 내 인생 후반부에는 꼭 이루고 싶은 소박하고 간절한 꿈이다.
첫댓글 눈팅냥님의 글을 읽고 있을 때는 모르지만 없어지면 단박에 알아채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았어요. '없어진 것'을 알아가는 게 생각보다 쉬운 일은 아닌 듯해요. 저는 중간중간에 숫자들이 배열되는 부분을 재미있게 읽었어요. "보증금 *원에 월세 *만원 투룸에서 살던 우리는 현재 전세 *억 *천만원의 아파트에 살고 있으며 얼마전 아파트 청약에 당첨되어 *년 *개월 후 입주를 앞두고 있다."와 같은 부분이요. 괜히 다시 눈으로 짚어가며 읽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요. ㅎㅎ 잘 읽었습니다:)
꼼꼼하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전세금액은 투룸의 가격과 비교되면 더 좋을 것 같아 넣었는데 이게 너무 개인정보같아서 다시 수정했어요 ㅋㅋㅋ 저의 정보를 어디까지 공개하는게 좋은건지, 글을 쓸때 최대한 솔직하게 쓰고싶은데 또 다 이야기할수는 없는거니까... 이게 참 어렵네요...ㅜㅜ (댓글은 수정하지않으셔도 돼용!^^) 더 고민해볼 부분같습니다. 잘 읽어주셔서 감사해용~^^
@눈팅냥 헛 ㅎㅎ 저도 그럼 별표로 바꿔놓겠습니다:)
@다인(김정인) 아이쿠 넵넵 감사해요! ^^
눈팅냥님 저도 부산 출신이라 오늘 같이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돼지국밥이 한번씩 생각이 납니다. 주로 학교 앞에서 먹었는데 김이 솔솔 오르는 국밥위에 부추를 잔뜩 얹어 먹으면 괜히 건강해지는 기분이 들었지요. 그리운 고향음식들이 하나 둘 떠오르는 글이었어요. 타지에서 애쓰며 살아오신 눈팅냥님께도 응원의 박수를 보내드리고 싶네요.
힝 따뜻한 응원에 마음이 찡해져요. ㅠㅠ 저 정말 돼지국밥이 너무 먹고싶어서 막 자주 울컥울컥해요... 그건 부산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커서라는걸 나중에 알았어요... ㅜㅜ 감사합니다!! ^^
제겐 계속 살고 싶은 고향이 누군가에게는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이 글을 읽으며 새삼 또 알게 됐어요. 그렇게 종종 까먹는 게 많은 것 같아요. 다양한 경험과 생각을 간접적으로 마주하면서 저를 돌아보게 하는 게 좋아서 계속 이 수업을 듣는가봅니다.
맞아요 ㅎㅎㅎ 계속 타인의 이야기를 들어야 까먹고 있던걸 돌아보게되는... 그게 글을 쓰고 읽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한것같아요. ^^
부산에서 서울 올라와 취업한 게 저랑 같아서 더더욱 공감하며 읽었어요. 부산 있을 땐 아주 가끔 먹던 돼지국밥이 서울에 없으니 더 먹고 싶더라고요. 서울에서 먹으면 그 맛이 아니겠죠? '수도권살이의 팍팍함을 벗어나 우리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었음을 깨달았다' 는 결론으로 가는 과정이 설득력 있게 다가왔어요. 다 읽고 난 뒤 따뜻함이 느껴지는건 고된 서울살이를 함께 해준 남편의 존재 때문인것 같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나이든 부부가 함께 돼지국밥 먹는 장면이 상상됐어요 ^^
따뜻하게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ㅜㅜ 불가사리님도 부산살다 서울와서 취직하신거라니 너무 반가워요!! 어르신들이 고향사람들 반가워하는 마음을 저도 이제는 이해하게되었어요 ㅎㅎㅎ 남편이랑 가능한 지금처럼 사이좋게 잘 지내서...ㅋㅋㅋ 나이들어서도 같이 돼지국밥먹으러 다니고파요^^
부산이 고향인 제 친구도 수도권에는 부산 그 돼지국밥이 없다며 눈팅냥 님처럼 친정 때마다 먹고 오더라고요. 고향의 맛이라며... 그래서 더 재미있게 읽었어요. 저도 첫 아이를 타지에서 낳고 길렀는데, 임신 중에 친구들 시켜서 고등학교 때 같이 먹던 학교 앞 즉석떡볶이 포장해오라고 했었는데, 막상 다시 근처에서 사니 먹고 싶은 생각이 잘 안 들더라고요. 어떤 마음인지 알 것 같아요.
소박한 인생 후반부 꿈 꼭 이루시기를~~ ^^
재미있게 읽으셨다니 뿌듯뿌듯~^^ 감사해요! 추억의 음식이라는게... 또 다시 먹어보면 기대와 다른 경우도 있고 그런 것 같아용. 전 며칠 전 부산에 다녀와서 돼지국밥 먹었는데 여기가 엄청 맛집이라 손님은 여전히 많았지만 아니글쎄! 밥이 뜸을 제대로 안들인건지 퍼석퍼석하더라구용 ㅠㅠ 국물과 고기는 맛있었지만... 뭔가 추억을 오롯이 간직하기란 이토록 힘들구나... 괜히 그런생각했어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