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권짜리 장편소설 <차크라바르틴>(살림)은 1995년 계간 <상상>이 주관한 제1회 상상문학상 당선작이었다. 석가모니 말년의 인도를 배경으로 삼는 이 작품은 성과 속, 종교와 권력, 정신과 물질 사이의 대립과 수렴이라는 묵직한 주제의식과 흥미진진한 사건 전개, 남성적인 힘을 두루 갖추고 있다.
제목으로 쓰인 ‘차크라바르틴’은 인도의 민중들이 부족과 계급으로 찢기고 나뉜 세상을 바로잡아 만세의 평화를 가져다줄 이로 기다리는 세속의 제왕을 가리킨다. 이는 유난히 종교에 친연성을 보이는 인도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의 비의를 일깨워줄 정신적·종교적 지도자로 상정하는 붓다와 대립되는 개념이다. 소설 <차크라바르틴>은 2500년 전 인도 땅에서 서로 맞서는 세속적 구원의 길과 신성적 구원의 길을 통해 두 가지 세계관을 대비시킨다.
<차크라바르틴>에서 신성과 정신의 세계를 대변하는 인물은 말할 나위도 없이 고타마 싯다르타, 곧 석가모니다. 석가족의 카필라국 태자 출신으로 29세에 출가해 35세에 정각을 이룬 그는 천축의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인간과 우주의 운행에 관한 진리를 설파한다. 그와 함께 말라국 태생의 대장장이 춘다도 싯다르타보다는 못하겠지만, 그 나름으로는 종교적·정신적 가치를 추구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카필라성의 초청으로 붓다의 다르마(진리)를 표상하는 대종의 주조 임무를 맡은 그는 갖은 난관을 뚫고 마침내 대종을 완성한다. 이들의 반대 쪽에서 세속적·정치적 가치를 추구하는 두 인물이 비유리 왕과 나무크시아다.
천축에서 가장 강대한 나라인 코살라국의 왕자인 비유리는 약관의 나이에 국왕인 아버지를 죽이고 태자인 친형을 제물로 삼아 왕위에 오른 다음 석가족의 카필라국을 필두로 천축의 이웃나라들을 정복해 천하통일을 꿈꾼다. 대장장이 춘다의 아들로 그 역시 아버지의 계급과 직업을 이어받아 대장장이가 되어야 할 운명을 타고난 나무크시아는 그 운명을 거스르고 스스로 비유리 왕의 친위대장으로 변신한다. 이 소설의 진짜 주인공이라 할 나무크시아는 차크라바르틴이라 그가 믿어 마지않는 비유리 왕을 도와 평등과 평화를 핑계 삼은 전쟁과 살육의 무간지옥을 연출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막강한 힘을 지닌 비유리 왕과 나무크시아는 카필라국을 정복하고 석가족을 사실상 멸문한다. 그러나 차크라바르틴을 향한 비유리와 나무크시아의 모험이 그 성공의 절정에 이른 듯한 순간, 섭리는 대역전극을 마련해 놓는다. 비유리는 석가족 무사의 손에 암살당하고 그와 함께 나무크시아는 권력의 정점에서 미끄러져 반군의 수괴로서 척살 당한다.
동국대 국문과에 다니던 1978년 <불교개론> 교재에서 읽은 한 구절이 소설을 낳은 씨앗이 되었다는 게 작가의 말이다. 처음엔 200자 원고지 300장짜리 중편으로 썼다가 성에 안 차 1800장짜리로, 다시 5000장이 넘는 대작으로 늘렸다가 가지를 쳐서 3400장 남짓의 작품으로 마무리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15년. 전교조 사태로 해직돼 5년여간 소설에 본격적으로 매달릴 수 있었던 것은 전화위복의 한 실례라고 할 수 있겠다.
그는 말했다. “비유리 왕의 군대가 카필라성을 유린하는 대목에서는 1980년 5월 광주가 떠올라 눈물을 훔치며 썼습니다. 당연히, 붓다가 재앙 뒤의 카필라국을 찾아가서 하는 말을 고르느라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소설에서 붓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단지 그대들과 손을 맞잡고 함께 울기 위해서 왔고, 함께 슬퍼하고, 함께 분노하기 위해서 온 것이니라. (...) 차별도 없고 폭력과 무지도 없는 저 평등과 평화와 지혜의 땅을 향해 나아가야 하지 않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