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민테른과 좌파 독립운동가
“노동자국제주의(코민테른)는 독립운동을 하는 좌파활동가들에게 있어 죽음을 불사하고 지켜야 할 활동의 대원칙”이라는 문장을 읽고 1920년대 좌파활동가들은 코민테른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을까? 논문을 찾아보니 차혜영의 「모스크바 극동피압박민족회의 참가기를 통해 본 혁명의 기억」을 읽게 되었다. 여기서는 김단야가 쓴 극동피압박민족대표자대회(=극동인민대표대회=원동회의, 1922년 1월 21일부터 2월 2일까지)를 중심으로 정리하며 살펴보고자 한다.
극동피압박민족대표자대회는 “1920년 ‘제2차 코민테른 국제대회’에서 채택한 “민족, 식민지문제에 관한 테제”에 입각, 극동의 피압박민족 문제를 다룬 회의로 146명 참여인원 중, 한국대표단은 23개 단체 대표 50여 명의 참가자로 구성되었고, 참석국 중 가장 많은 인원이었다. 이 시기는 1917년 신생소비에트의 성립 후 1920년 레닌 자금이 일부나마 상해 임시정부에 유입되며 조선 독립운동의 지원군으로 받아들여지고, 워싱턴회의(1921) 결과가 한국 근대 민족운동에 좌절감을 준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당시 식민지 조선은 계파를 가리지 않고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되었던 김규식이나 여기에 관여했던 여운형 그 외 몇몇 상해임시정부와 구미위원부 관계자들이 이 회의에 참석했다.”(5)
김단야는 조선일보의 신문기자로 일하면서 1925년 1월 22일부터 1925년 2월 3일까지 「레닌회견인상기-그의 서거일주년에」를 11회 연재한다. 그는 “소련을, 역사발전의 합법칙성을 눈앞에서 현현시키는 승리의 결과물로 보는 시각, 그리고 당시 공산혁명의 승리에 환호하는 격앙된 감정과 공감의 환희를 현재화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회의 전반부가 개최된 모스크바나, 후반부가 진행된 구 러시아제국의 수도 페트로그라드를 쓰면서, 이런 기쁨과 감격을 회고한다. 그는 극동회의 개회가 선언된 크레믈린 궁전을, “전 세계에 권위를 떨치던 로서아 황실의 인간행락을 다하든 그의 궁전 안에 동양의 망명가, 무산자가 모임을 이루게 된 것은 실로 꿈속에 꿈가튼 사실이었다(2회)” 고 회고한다.”(14)
김규식씨가 담화 중에 잠간 막힌 말이 있었다. 그때에 레닌은 얼른 그 막힌 말을 일러주었는데 그것은 곧 도움(SUPPORT)이란 말이었다. 물론 김규식씨가 영어에 대한 어학이 부족해서 그랬을 것은 아니다...서로 도웁는 말을 하기는 좀 거북하였섰든 것이다. 그래서 잠간 주저하는 동안에 눈치 빠른 레닌은 얼른 그 말을 계속 식혀준 것이다. (8회)
이 글은 “조선인 일행 중에 영어에 가장 능통한 김규식과 레닌이 ‘피압박 약소민족 혁명의 지원’문제에 대한 영어로 대화한 부분이다. 영어에 능통한 김규식이 ‘도움’이라는 단어를 몰랐을리 없지만 강대국 소련 그리고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조선, 그들이 혁명의 미래를 놓고 ‘서로 돕자’라고 대화하는 지점, 거기서 김규식을 멈칫하게 한 현재적 지위, 그것을 알고 받아 도움을 약속하는 레닌. 이 장면은 사실상 조선인 참여자들이 이 극동회의에서 보고자 했던 혁명의 약속이고, 민족주의, 사회주의, 한일합방이전 활동한 구세대, 3.1운동 이후 등장한 신세대 가리지 않고 조선인 50여명을 모스크바로 끌어들인 혁명의 약속이었다.”(16)
그리고 김단야는 “이것이 세계혁명의 수령이요 만국무산계급의 구주인 니콜라이 레닌과 동양약소민족과 압박받는 군중을 대표한 혁명가 망명가의 처음 된 회견이오 동시에 마즈막 된 회견이다.(7회)” 라고 원동회의의 세계사적 의의 부여를 한다. 김단야는 이 대회가 끝내고 2월 20일 청년대표로서 가장 감명을 준 레닌을 만난다. “아! 레닌이 살던 그런 나라가 그리웁다. 레닌의 죽은 그 땅이 그리웁다. 아! 언제나 과연 나의 압헤도 평탄한 길이 열릴 것인가(11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