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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빈둥빈둥님의 번역본입니다.
THE CAPITALIST SYSTEM
by Michael Bakunin
This pamphlet is an excerpt from The Knouto-Germanic Empire and the Social
Revolution and included in The Complete Works of Michael Bakunin under the
title ``Fragment.'' Parts of the text were originally translated into
English by G.P. Maximoff for his anthology of Bakunin's writings, with
missing paragraphs translated by Jeff Stein from the Spanish edition,
Diego Abad de Santillan, trans. (Buenos Aires 1926) vol. III, pp. 181-196.
이 팜플렛(소책자)는 knouto-Germanic Empire 와 social Revolution ( Michael Bakunin이 완성한 ), " Fragment.", "유고"에서 발췌했다.
본문의 원래의 영문 번역자는 G.P maximoff ( 바쿠닌의 글모음을 낸 ) 이며 놓친 몇몇의 절들은 jeff stein 의 스페인판을 번역했다.
Diego Abad de santillan , 번역 (Buenos Aires 1926) vol. III , pp 181-196
Is it necessary to repeat here the irrefutable arguments of Socialism
which no bourgeois economist has yet succeeded in disproving?
반박할수 없는 사회주의에 ( 필연성, 정당성에 ) 대한 논쟁을 다시 할 까닭이 있을까?
어떤 부르주아지 경제학자도 아직 그 반론에 성공치 못한것을..
What is property, what is capital in their present form?
부란 무엇인가? 무엇이 현재의 자본의 모습을 만들었는가?
For the capitalist and the property owner they mean the power and the right,
guaranteed by the State, to live without working.
자본가들과 부의 소유자들에 있어 그것들은 힘과 정의를 의미한다 . 지위를 유지해주기도 하고
노동없이 살수 없게도 해준다.
And since neither property nor capital produces anything when not fertilized by labor
- that means the power and the right to live by exploiting the work of someone else,
the right to exploit the work of those who possess neither property nor capital and who
thus are forced to sell their productive power to the lucky owners of both.
그러나 부와 자본 모두 노동자의 밭갈이(노동)없이는 아무것도(힘과 정의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
- 이말은 힘과 정의는 누군가의 노동이라는 공헌이 없이는 살아갈수 없음을 말한다.
노동의 공헌인 정의는 부나 자본이 아닌 부와 자본를 가지지 않은 요컨데 그들의 노동력을 부와
자본을 가진 소유자에게 팔기를 강요당하는자들의 소유다.
Note that I have left out of account altogether the following question: In
what way did property and capital ever fall into the hands of their
present owners?
(그러나) 나는 그동안 전적으로 냉대받아온 질문을 해보려한다.
어떤 방식으로 부와 자본은 그 현재소유자들의 손으로 가져갈수 있게 되었는가?
This is a question which, when envisaged from the points of view of history, logic, and justice, cannot be answered in any other way but one which would serve as an indictment against the present owners.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역사와 논리 정의의 관점에서 보았지만 현재의 소유자들을 기소하는것 말고는 어떤 다른 방법으로도 해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이다.
I shall therefore confine myself here to the statement that property
owners and capitalists, inasmuch as they live not by their own productive
labor but by getting land rent, house rent, interest upon their capital,
or by speculation on land, buildings, and capital, or by the commercial
and industrial exploitation of the manual labor of the proletariat, all
live at the expense of the proletariat. (Speculation and exploitation no
doubt also constitute a sort of labor, but altogether non-productive
labor.)
나는 그것에 대해서 나의 말함을 부의 소유주와 자본가들로 한정할려한다. 그들은 생산적 노동을 하고 있지 않고 삶에도 불구하고 대지와 집를 ( 노동자에 ) 빌려주거나 (줌으로서 이윤을 얻거나)자본으로부터 이자를 얻고 혹은 땅과 집 자본에 투기하거나 금융적인 혹은 산업적인 수단을 통해노동자 즉 부를 가지지 못한 무산자들을 착취한다.(자본가들의) 모든 삶이란 무산자들의 희생에서 온것들이다.
{
착취와 지출은 의심할 나위없이 (자본가들의) 노동를 구성한다 허나 그것은 전적으로 비생산적 노동이다.
}
I know only too well that this mode of life is highly esteemed in all
civilized countries, that it is expressly and tenderly protected by all
the States, and that the States, religions, and all the juridical laws,
both criminal and civil, and all the political governments, monarchies and
republican - with their immense judicial and police apparatuses and their
standing armies - have no other mission but to consecrate and protect such
practices. In the presence of these powerful and respectable authorities I
cannot even permit myself to ask whether this mode of life is legitimate
from the point of view of human justice, liberty, human equality, and
fraternity. I simply ask myself: Under such conditions, are fraternity and
equality possible between the exploiter and the exploited, are justice and
freedom possible for the exploited?
나는 모든 시민사회에서 이러한 삶의 방식이 너무나도 큰 존경(신뢰)를 받고 있음을 너무나도잘 알고 있다 그것은 명백하고 부드럽게 모든 국가를 지키고 있다. 그리고 국가, 종교, 사법상의법률, 범죄자와 시민, 모든 정치적 단체, 전제정이나 공화정 - 그리고 그들과 함께하는 거대한 사법과 경찰 기구와 그들의 군대들 - 들은 어떤 다른 사명없이 이것을 신성화 하고 보호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존재하는 이러한 강력하고 존경되어지는 권위들에 대해 용납할수 있는지 나는 나는 내스스로 묻곤한다. 이 체제의삶은 인간의 정의와 자유와 평등과 인간의 근원적 (동족애)형제애에 과연 적합한지 말이다.
나는 다시 나에게 단순하게 묻는다 이 상황에 대해 동족애(愛)와 평등의 가능성이 착취자와와 피착취자 속에서 가능한지 정의와 자유가 착취속에서 나올수 있는지
Let us even suppose, as it is being maintained by the bourgeois economists
and with them all the lawyers, all the worshippers and believers in the
juridical right, all the priests of the civil and criminal code - let us
suppose that this economic relationship between the exploiter and the
exploited is altogether legitimate, that it is the inevitable consequence,
the product of an eternal, indestructible social law, yet still it will
always be true that exploitation precludes brotherhood and equality.-
It goes without saying that it precludes economic equality. Suppose I am
your worker and you are my employer.
우리 한번 가정해보자 보자 부르주아지 경제학자들과 모든 정의를 숭배하는 법률가 문명과 형사법의 사제들은 이 것을 지원하고 있다 - 우리는 착취자들과 그들사이에 경제적 연관이 있음을 가정할수 있으며 이로인해 착취는 전적으로 합법적임을 알수 있다 그것은 피할수 없는 결과이며 그러한 관계들은 영구적이다 아직은 아닐지라도 착취가 평등과 형제애를 파괴할 것이라는 것은 절대적인 진실일것이다. (평등과 형제애)이는 경제적 평등이 이루어 지지 않는다면는 가능하지 않다. 이제 나는 당신의 일꾼이며 당신은 나의 주인입니다 라는 관계가 상상될것이다.
If I offer my labor at the lowest
price, if I consent to have you live off my labor, it is certainly not
because of devotion or brotherly love for you.
만약 나의 노동이 가장 낮은 값어치를 요구받는다면 만약 내가 당신의 삶을 부양한다는데 동의 한다면 이것은 결코 당신에 대한 헌신이나 형제애 따위가 아닐것이다.
And no bourgeois economist
would dare to say that it was, however idyllic and naive their reasoning
becomes when they begin to speak about reciprocal affections and mutual
relations which should exist between employers and employees.
그리고 어떤 부르주아 경제학자도 감히 그것에 대해 말하지 못할것이다
(내가 가장 낮은 가격에 노동력을 팔아야 하며 고용주에 헌신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
어쩄거나 목가적이고 소박한 그들의 논증은 그들이 현존하는 고용자와 노동자
간의 대등한 호의와 상호간의 관계들에서 이야기 되는 것이기 떄문이다
No, I do it
because my family and I would starve to death if I did not work for an
employer. Thus I am forced to sell you my labor at the lowest possible
price, and I am forced to do it by the threat of hunger.
아니 그럴수는 없다. (역)둘은 결코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평등한 관계일수 없다.
왜냐하면 만약 내가 고용자들을 위하여 일하지않는다면 나의 가족과 나는 죽을만큼 굼주릴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노동력을 가장 낮은 가력에 팔도록 강요될것이며 나는 배고품이라는 협박으로 이를 강제 당할것이다.
But - the economists tell us - the property owners, the capitalists, the
employers, are likewise forced to seek out and purchase the labor of the
proletariat. Yes, it is true, they are forced to do it, but not in the
same measure.
Had there been equality between those who offer their labor
and those who purchase it, between the necessity of selling one's labor
and the necessity of buying it, the slavery and misery of the proletariat
would not exist. But then there would be neither capitalists, nor property
owners, nor the proletariat, nor rich, nor poor: there would only be
workers. It is precisely because such equality does not exist that we have
and are bound to have exploiters.
그러나 - 경제학자들은 우리에게 말한다 - 부의 소유자들 자본가들 고용자들도 모두 마찮가지로 무산자들인 노동자들을 위해 희생(공헌)을 강제 당하고 있다라고 말이다. 맞다. 이것은 분명 옳은 이야기다. 그들은 그렇게 하도록 강제당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동일하지 않다. 그것들이 평등하다면 (노동을 제공하는 쪽과 노동을 구입하는 쪽 , 노동을 판매하길 원하는 자와 노동을 사기를 원하는 자) 노예와 최악의 상황의 무산자들은 존재할수 없다.
그때라면 자본가도 부의 소유자도 무산자도 부유한자도 가난한자도 그들은 될수 없다. 그들은 오직 노동자가가 될수 있을뿐이다. 이는 정확하다. 왜냐하면 평등은 (우리가 소유하거나 ) 결코 우리가 우리의 착취자들에 묶여 있는한 가능치 못하기 떄문이다.
This equality does not exist because in modern society where wealth is
produced by the intervention of capital paying wages to labor, the growth
of the population outstrips the growth of production, which results in the
supply of labor necessarily surpassing the demand and leading to a
relative sinking of the level of wages.
이 평등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현대(modern) 사회에 있어 풍요(부)는 자본이 노동의 가치를(임금을) 조정하는데서 만들어지기 떄문이다 .인구의 성장은 생산의 성장보다 크며 이 결과로서 노동의 공급이 부정할수 없을정도 상승함으로인해 임금의 하향화가 요구되고 유도되었다
Production thus constituted,
monopolized, exploited by bourgeois capital, is pushed on the one hand by
the mutual competition of the capitalists to concentrate evermore in the
hands of an ever diminishing number of powerful capitalists, or in the
hands of joint-stock companies which, owing to the merging of their
capital, are more powerful than the biggest isolated capitalists.
생산은 독점과 부르주아 자본의 착취로 구성되며 이는 자본가들의 상호 경쟁을 통해 점점 더 소수의 강력한 자본가들로 수렴되거나 고립된 자본가들에 비하여 좀더 강력한 자본을 합친 합작회사들로 수렴된다.
(And the small and medium-sized capitalists, not being able to produce at the same price as the big capitalists, naturally succumb in the deadly struggle.)
(중소규모의 자본가들은 거대자본가들과 동일한 가격에 생산하지 못한다 이들이 (저항속에서) 거대자본가들에 굴복당하는 것은 자연스러운것이다. )
On the other hand, all enterprises are forced by the same competition to
sell their products at the lowest possible price.
반면에 모든 계획( 경제학자들의 이론들 )이란 그들의 상품을 가장 낮은 가격에 동일한 경쟁속에서 판매하게 하는 것이다.
It [capitalist monopoly]
can attain this two-fold result only by forcing out an ever-growing number
of small or medium-sized capitalists, speculators, merchants, or
industrialists, from the world of exploiters into the world of the
exploited proletariat, and at the same time squeezing out ever greater
savings from the wages of the same proletariat.
이전에 말했던 자본의 독점은 두가지 모습만을 만들어 낼것이다
중소자본가들 , 투기꾼 , 상인 , 기업가 세계의 착취자들이 무산를 착취하게 하는것 무산자들에 임금을 최대한 적게 주고 그들을 (노동력)을 짜내는 것이다.
On the other hand, the mass of the proletariat, growing as a result of the general increase of the population - which, as we know, not even
poverty can stop effectively - and through the increasing
proletarianization of the petty-bourgeoisie, ex-owners, capitalists,
merchants, and industrialists - growing, as I have said, at a much more
rapid rate than the productive capacities of an economy that is exploited
by bourgeois capital - this growing mass of the proletariat is placed in a
condition wherein the workers are forced into disastrous competition
against one another.
이러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산자 대중은 인구의 증가를 이루었다. - 우리가 알고 있다 싶이 빈곤은 인구증가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햇다 - 그리고 중소자본가(전에 소유자였던 , 자본가엿던 , 상인이었던 , 기업가엿던자들)들의 무산자로서의 탈락으로 인하여 또한 증가했다 내가 말했듯 경제의 급속한 성장 (자본 생산의 급격한 증가)는 브루주아지 자본의의 증가와 같다 , 이 다수 무산자들의 숫자의 증가는 어디서든 간에 서로간의 노동자들의 비참한 경쟁을 강요했다.
/// 자본의 집중은 다수의 이전의 중소자본가엿던 자들의 노동자로의 탈락을 가속화 시켰다 무산자, 임금노동자의 증가로 인하여 결론적으로 노동자들의 비참한 경쟁을 만들어 냈다 ///
For since they possess no other means of existence but their own manual
labor, they are driven, by the fear of seeing themselves replaced by
others, to sell it at the lowest price.
그들의 수공(숙련된)의 노동력의 존재는 단지 그것외에는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한다.그들은 다른자들이 자신의 자리를 언제든 대체할수 잇다는 공포에 그는 언제나 최악의 가격의 자신의 노동력을 팔게 강제 될것이다.
This tendency of the workers, or rather the necessity to which they are condemned by their own poverty, combined with the tendency of the employers to sell the products of their workers, and consequently buy their labor, at the lowest price, constantly reproduces and consolidates the poverty of the proletariat.
그것은 노동자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일이다 아니 오히려 그들이 가진 빈곤은 그들이 유죄선고를 받기위한 필수품이다. 고용자들의 경향은 노동자에게 상품을 판매하고 그결과로 노동을 가장 낮은 가격으로 사는 행위의 결합이며 끊임없이 재생산과 무산자의 빈곤을 강화한다.
Since he finds
himself in a state of poverty, the worker is compelled to sell his labor
for almost nothing, and because he sells that product for almost nothing,
he sinks into ever greater poverty.
그가 그 자신의 빈곤상태에 빠졋음을 알게 된 순간 , 노동자는 노동이 그의 노동력을 아무것도 아닌값에 팔도록 강요당할것이고 그는 그 생산품을 아무런 가치없이 팔게 될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가 자신의 더욱더 큰 빈곤함으로 빠져들어갈것이다.
Yes, greater misery, indeed! For in this galley-slave labor the productive
force of the workers, abused, ruthlessly exploited, excessively wasted and
underfed, is rapidly used up. And once used up, what can be its value on
the market, of what worth is this sole commodity which he possesses and
upon the daily sale of which he depends for a livelihood? Nothing! And
then? Then nothing is left for the worker but to die.
그렇다 이것은 커다란 비극이다! 이 겔리선의 노예의 노동 -노동자들의 생산적 힘-은 오용과 무자비한 착취와 과도한 낭비와 영양부족으로 급작스럽게 낭비된다.그리고 한번 써버린 것들 시장의 가치를 갖지 못하는 것들 그가 매일판매하고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매일판매하는 것인 노동의 가치가 없어지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것이 없어지면 노동자는 버려질것이고 죽음을 맞게 되는것이다.
What, in a given country, is the lowest possible wage? It is the price of
that which is considered by the proletarians of that country as absolutely
necessary to keep oneself alive.
주어진 국가의 가장 낮은 임금은 무엇인가? 이것은 그가 국가에서 삶아갈수 있는데 가장 필수(최소)적인 임금으로 생각할수 있다.
All the bourgeois economists are in agreement on this point. Turgot, who saw fit to call himself the `virtuous minister' of Louis XVI, and really was an honest man, said:
모든 브루주아지 경제학자들은 이 점을 논쟁한다. 튀르고 스스로를 루이 14세의 자비로운 시장이라 불렀던 정직했던 남자는 말했다.
``The simple worker who owns nothing more than his hands, has nothing else
to sell than his labor.
단순노동자는 그의 손에 있는 것만을 소유하며 그의 노동력만을 팔수 있을뿐이다
He sells it more or less expensively; but its
price whether high or low, does not depend on him alone: it depends on an agreement with whoever will pay for his labor.
그는 많이도 적게도 아니게 그의 노동력을 판매한다. 그러나 이것의 가격은 높을떄도 낮을때도 있고 그에게 의존되지 않는다 이것은 (역)시장의 필요가 아닌 ) 그의 노동을 사는 사람의 결정에 의한것이다.
The employer pays as little as possible; when given the choice between a great number of workers, the employer prefers the one who works cheap.
고용자들은 가능한한 가장 낮은 비용을 지불할뿐이다. 언제나 고용자는 많은 수의 노동자들에서 고용을 결정할수 있고 가장 싼 노동자를 찾을수 있다.
The workers are, then, forced to lower their price in competition each against the other. In all types of labor, it necessarily follows that the salary of the worker is limited to what is necessary for survival.'' (Reflexions sur la formation et la distribution des richesses)
노동자들은 그들의 노동의 가격을 다른 노동자와 경쟁해서 가장 낮은 가격에 낮추어지길 강요당한다. 이것은 모든 노동자들의 형태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노동자들의 생존을 위한 최소의 임금만을 가지게 만들었다.
()
J.B. Say, the true father of bourgeois economists in France also said:
``Wages are much higher when more demand exists for labor and less if
offered, and are lowered accordingly when more labor is offered and less
demanded.
J.B 세 , 프랑스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의 아버지라 하는 자의 이야기다.
임금은 수요가 노동보다 높으면 높아지고 노동이 수요보다 높다면 이는 낮아진다
It is the relation between supply and demand which regulates the
price of this merchandise called the workers' labor, as are regulated all
other public services.
노동자의 노동이란 이름의 상품과 다른 모든 공공의 서비스가 이 수요와 공급의 관계에 관계한다.
When wages rise a little higher than the price
necessary for the workers' families to maintain themselves, their children
multiply and a larger supply soon develops in proportion with the greater
demand. When, on the contrary, the demand for workers is less than the
quantity of people offering to work, their gains decline back to the price
necessary for the class to maintain itself at the same number.
노동자들의 가족를 유지하는 것보다 아주 조금 임금이 오른다면 그들의 아이들은 증가할것이고 더 큰 인구의 공급은 더 큰 수요를 낳는다. 반대로 노동자들은 좀더 적은 양의 일을 하기를 요구받으며 그들의 이익은 감소하여 이전과 같은숫자를 유지할수 있을정도 만큼의 임금으로 돌아가게 된다
The
families more burdened with children disappear; from them forward the
supply of labor declines, and with less labor being offered, the price
rises... In such a way it is difficult for the wages of the laborer to
rise above or fall below the price necessary to maintain the class (the
workers, the proletariat) in the number required.'' (Cours complet d'
economie politique)
가족들은 아이들의 죽음에 대한 염려를 더욱 해야 한다. 그들의 앞에 노동이 적게 공급되고 적은 노동이 요구되고 가격이 오른다고 한다면 ..... 이런식으로 노동자의 임금의 증가와 감소에 따라 무산자와 노동자계급의 숫자의 요구의 유지는 어렵게 된다.
After citing Turgot and J.B. Say, Proudhon cries:
튀르고와 J.B 세의 인용이후 프루동은 외친다.
``The price, as compared
to the value (in real social economy) is something essentially mobile,
consequently, essentially variable, and that in its variations, it is not
regulated more than by the concurrence, concurrence, let us not forget,
that as Turgot and Say agree, has the necessary effect not to give to
wages to the worker more than enough to barely prevent death by
starvation, and maintain the class in the numbers needed.''
이 가격은 가치 ( 진정한 사회적 경제의 가치 ) 는 본질적으로 변화할수 있으며 그 결과로서 본질적으로 변한다. 그리고 이것은 변덕스럽다 이것은 규제라기 보다 동시작용이다. 우리는 트뤼고와 세의 (아래의 것) 동의에 대해 잊지 말아야 한다. 노동자에게 기아로 인한 죽음을 막을정도의 임금을 주는 것이 요구되는 것이 아닌 그 숫자를 유지하는 것을 요구한다는것을
The current price of primary necessities constitutes the prevailing constant level above which workers' wages can never rise for a very long time, but beneath which they drop very often, which constantly results in inanition, sickness, and death, until a sufficient number of workers disappear to equalize again the supply of and demand for labor.
지금의 최초의 요구들에 대한 가격은 노동자들의 임금이 오랜 기간 결코 인상될수 없는 상태에 있다.
그러나 아래로 자주 추락하며 변함없이 기아와 병과 죽음이 노동자들을 사라지게 하기 까지 노동의 공급과 수요가 일치 할떄까지 그렇다.
What the economists call equalized supply and demand does not constitute real equality between those who offer their labor for sale and those who
purchase it.
경제학자들이 수요와 공급의 균형이라 불리는 관계는 실질적으로는 노동의 판매와 사는 자 사이의 균형이 아니다
Suppose that I, a manufacturer, need a hundred workers and that exactly a hundred workers present themselves in the market - only one hundred, for if more came, the supply would exceed demand, resulting in lowered wages.
가정을 한번 해보자 나는 공장주이며 100명의 노동가 필요하고 정확한 100명의 노동자가 현제 시장에 있다 - 오직 100명이 만약 더 이상이 온다면 공급은 수요를 넘어서게 되며 이는 가장 낮은 가격으로 임금이 결정되는 현상을 낳을 것이다.
But since only one hundred appear, and since I, the manufacturer, need only that number - neither more nor less - it would seem at first that complete equality was established;
그러나 오직 100명이라면 공장주는 오직 - 많고 적음도 없이 - 딱 그수의 사람이 필요할것이다 이것은 완
벽한 균형이 확립되었다 할수 잇을것이다.
that supply and demand being equal in number, they should likewise be equal in other respects. Does it follow that the workers can demand from me a wage and conditions of work assuring them of a truly free, dignified, and human existence?
저 공급과 수요의 균형은 그수로 이루어졌고 그들은 다른 이들과 마찮가지로 동일한 존경을 가져야한다. 노동자는 나의 수요에 대해서 임금과 노동조건에 대해서 진정으로 자유롭게 협상( 보증 ) 할수 잇으며 당당하며 인간답게 살수 있는것이 당연할것이다.
Not at all!
말도 안됀다!
If I grant them those conditions and those wages, I, the capitalist, shall not gain thereby any more
than they will. But then, why should I have to plague myself and become ruined by offering them
the profits of my capital? If I want to work myself as workers do, I will invest my capital somewhere else, wherever I can get the highest interest, and will offer my labor for sale to some capitalist just as my workers do.
만약 내가 그들이 (요구하는 ) 환경과 그들이 ( 요구하는 ) 임금을 준다면 자본주의자인 나는그들에게 이제 더이상 아무것도 얻을수 없을것이다. 그러나 그 경우 왜 내 자신에게 재앙인 나의 파산을 불러올 일을 그들의 이익을 내(자본가) 재산으로 바치는 일을 하겟는가? 만약 내가 다른 노동자들과 동일하게 내 스스로 일한다면 나는 이제 다른 노동자들과 마찮가지로 나의 노동력을 누군가의 자본가에게 바쳐야 할것이다.
If, profiting by the powerful initiative afforded me by my capital, I ask
those hundred workers to fertilize that capital with their labor, it is
not because of my sympathy for their sufferings, nor because of a spirit
of justice, nor because of love for humanity.
만약 나의 자본이 나에게 이윤에 대한 강력한 동기를 부여할만한 하다면 나는 이 100명의 노동자들에게 그들의 노동으로 나의 자본을 풍족하게 하라고 요구할것이다. 이것은 나의 그들의 고통에 대한 동정이 아니며 또한 정의에 대한 정신도 아니고 인간성에 대한 사랑도 아니다
The capitalists are by no means philanthropists; they would be ruined if they practiced philanthropy. It is because I hope to draw from the labor of the workers sufficient profit to be able to live comfortably, even richly, while at the same time increasing my capital - and all that without having to work myself.
자본가들은 자선사업가들이 아니다 그들은 그들이 파산하려 하고자 하지 않는다면 자선을 베풀지 않을것이다 그러하기에 나는 노동자들의 노동으로 편한하고 부유한 삶을 살수 있게 만드는 충분한 이익을 끌어내고자 할것이며 나의 자본을 늘릴것이다 -내 스스로 일하지 않고도 말이다
Of course I shall work too, but my work will be of an altogether
different kind and I will be remunerated at a much higher rate than the
workers. It will not be the work of production but that of administration
and exploitation.
물론 나또한 일할것이다. 그러나 나의 노동은 전혀 다른 종류의 것들이고 나는 다른 노동자들과 비교도 할수 없을정도로 많은 보수를 받을것이다. 이것은 생산적인 일은 아니다 이것은 경영과 개발 이라 하는것이다.
But isn't administrative work also productive work? No doubt it is, for
lacking a good and an intelligent administration, manual labor will not
produce anything or it will produce very little and very badly.
그러나 행정적 일 또한 생산적 일이 아닌가라고 말할수 있지 않을까? 의심할봐없이 ( 그또한 노동이라 할수 있다 ) 그렇다. 선의와 지식이 부족한 관리자는 육체 노동자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하게 하거나 아주 조금만들게 하거나 최악으로 만들게 할수 있다.
But from the point of view of justice and the needs of production itself, it is not at all necessary that this work should be monopolized in my hands, nor, above all, that I should be compensated at a rate so much higher than manual labor.
그러나 정의와 생산에 대한 요구라는 그것자체에 초점을 맞춘다면 이 (관리직)의 일이 다른 누구도 아닌 육체노동자보다 많은 돈을 받는 나의 손에 독점될 까닭은 결코 없다.
The co-operative associations already have proven that workers are quite capable of administering industrial enterprises, that it can be done by workers elected from their midst and who receive the same wage.
협동조합의 연합은 이미 완벽한 유능함을 공업 기업의 관리에서 보여주었다
이는 노동자들이 그들의 중앙(의 관리)을 동일한 임금을 받는 그를 선출할수 있었게 떄문이다.
Therefore if I concentrate in my hands the administrative power, it
is not because the interests of production demand it, but in order to
serve my own ends, the ends of exploitation. As the absolute boss of my
establishment I get for my labor ten or twenty times more than my workers
get for theirs, and this is true despite the fact that my labor is
incomparably less painful than theirs.
그런까닭에 내가 경영상의 힘을 내손에 집중하려 한다면 그것의 생산 요구에 대한 관심이 까닭이 아니라 나의 최종적 소유를 위해서 이며 결국 착취로 끝날것이다.
나의 시설(공장)의 최정적인 보스인 나는 나의 노동을 10번이고 20번이고 나의 노동자들이 그들이 하는 것보다 더 일할것이다. 이것은 나의 노동이 노동자들보다 지극히 적게 고통스럽다는데도 불구하고 진실이다.
But the capitalist, the business owner, runs risks, they say, while the
worker risks nothing. This is not true, because when seen from his side,
all the disadvantages are on the part of the worker.
그러나 자본가 사업의 소유자들은 위험을 무릅쓴다. 그들은 이야기 한다. 노동자들의 위험은 전혀 없다 . 이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입장에서 본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불이익은 오직 노동자의 경우에만 있는 것이다.
The business owner can conduct his affairs poorly, he can be wiped out in a bad deal, or be a victim of a commercial crisis, or by an unforeseen catastrophe; in a word he can ruin himself.
사업의 소유자들은 그의 일을 좋지 않게 될수 있다. 그는 좋지 않는 계약을 정리하거나 상업 위기의 희생자가 되거나 생각지 않은 파국을 맞을수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그는 그 파멸할수 있다는 것이다.
This is true. But does ruin mean from the bourgeois
point of view to be reduced to the same level of misery as those who die
of hunger, or to be forced among the ranks of the common laborers?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이 브루주아지의 시점에서 파멸한다는 것은 배고품에 의하여 죽는 보통의 노동자계급에 강제되어지는 것들과 같은 수준의 비극이겟는가?
This so rarely happens, that we might as well say never. Afterwards it is rare that the capitalist does not retain something, despite the appearance of ruin.
이것은 아주 드믈다 우리는 결코 그렇지 않다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이후에 파멸에도 불구하고 자본가들이 전부를 잃는 경우는 아주 드믈다.
Nowadays all bankruptcies are more or less fraudulent.
최근의 모든 파산들은 크거나 작거나 모두 사기(고의적인 거짓된 파산)이다
But if absolutely nothing is saved, there are always family ties, andsocial relations, who, with help from the business skills learned which they pass to their children, permit them to get positions for themselves andtheir children in the higher ranks of labor, in management ; to be a state functionary, to be an executive in a commercial or industrial business, to end up, although dependent, with an income superior to what they paid their former workers.
만약 모든 것을 잃었다 하더라고 그들은 가족의 유대와 사회적 관계는 -즉 그들의 아이들의 일의 기술을 가르쳐주고 그들의 지휘를 얻게 해줄수 있으며 그들의 아이들이 장차 관리직으로 될수 있게 만들어주는 -도움을 줄수 있다.
The risks of the worker are infinitely greater.
(그러나 )노동자들에게 이 위험(자본가들의 파산에 위험)은 무한하다.
After all, if the establishment in which he is employed goes bankrupt, he must go several days and sometimes several weeks without work, and for him it is more than ruin, it is death;
무엇보다도 그를 고용한 기업이 파산되었을때 그는 몇이나 몇주 동한 일을 갖지 못할뿐만 아니라 이로 인하여 그는 파멸하며 죽게 될것이다.
because he eats everyday what he earns. The savings of workers are fairy tales invented by bourgeois economists to lull their weak sentiment of justice, the remorse that is awakened by chance in the bosom of their class. This ridiculous and hateful myth will never soothe the anguish of the worker. He knows the expense of satisfying the daily needs of his large family.
왜냐하고 그는 매일 버는 돈으로 먹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이 절약을 한다는 것은 브루주아 경제학자들이 자신의 정의의 대한 감정을 약하게 만들기 위하여 만들어낸 동화와 같은 이야기다.
가책은 그들의 의식을 가슴속에 일꺠울수 있다. 이 우스운 그리고 증오스러운 환상은 결코 그들의 계급의 심신을 달래주지 못한다. 그는 그의 커다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 (비용)을 지출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If he had savings, he would not send his poor children, from the age of six, to wither away, to grow weak, to be murdered physically and morally in the factories, where they are forced to work night and day, a working day of twelve and fourteen hours.
만약 그가 절약을 해야 한다면 그는 그의 불쌍한 아이들은 여섯살도 되기전에 쇠악해 질것이며 연약하게 자라게 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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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으로 인해 아이들은 밤낮으로 일하는 공장의 12-14시간의 노동을 견디지 못하고 육체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공장에서 죽게 될것이다 이것은 살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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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it happens sometimes that the worker makes a small savings, it is
quickly consumed by the inevitable periods of unemployment which often
cruelly interrupt his work, as well as by the unforeseen accidents and
illnesses which befall his family.
만약 언젠가 노동자들이 조금의 절약(저축)을 하게 된다면 이는 피할수 없는 실직기간동안 빠르게 소비 될것이다. 그의 일은 얼마나 잔혹하게 방해 받겠는가
뜻하지 않는 사고와 병과 그의 가족에 일어나는 온갖 일로
The accidents and illnesses that can overtake him constitute a risk that makes all the risks of the employer nothing in comparison: because for the worker debilitating illness can destroy his productive ability, his labor power. Over all, prolonged illness is the most terrible bankruptcy, a bankruptcy that means for him and his children, hunger and death.
사고와 병이란 노동자가 가질수 있는 위험이란 고용자의 그것과 비교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노동자는 병으로 인한 쇠약으로 인하여 그의 생산능력을 그의 노동력을 상실할수 있으며 무엇보다도 장기적인 병은 심각한 파산상태에 이르게 만들것이다. 이 파산의 의미는 그와 그의 아이들이 배고품과 죽음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
I know full well that under these conditions that if I were a capitalist,
who needs a hundred workers to fertilize my capital, that on employing
these workers, all the advantages are for me, all the disadvantages for
them. I propose nothing more nor less than to exploit them, and if you
wish me to be sincere about it, and promise to guard me well, I will tell
them:
나는 이 상황에 대해 충분히 잘 알고 있다 내가 자본가이며 100사람의 노동자가 나의 자본을 기름지게 하는데 필요하다 하자 이 노동자 고용하는데 있어 모든 이익은 나를 위해서 모든 불이익은 그들에게 주며 고용하고 있다. 나는 그들에게 착취(고용)하는 것 이상 혹은 이하의 것을 제안하지 않을것이다 만약 당신이 나에게 바라는 성실한 착취(고용)을 위한다면 당신은 나를 더욱더 보호하기를 약속할 것이이며 나는 그들에게 그렇게 말할것이다.
``Look, my children, I have some capital which by itself cannot produce
anything, because a dead thing cannot produce anything. I have nothing
productive without labor.
보라 나의 아이들이여 나는 조금의 자본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은 아무것도 만들이 못한다. 왜냐하면 죽은 것들은 아무것도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생산적인 나의 노동외에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
다.
As it goes, I cannot benefit from consuming it unproductively, since having consumed it, I would be left with nothing.
마찮가지로 나는 -비생산적인- 소비로부터 아무런 이익을 낼수 없다. 그것을 소비하면 나는 아무것도 없이 버려질것이다.
But thanks to the social and political institutions which rule over us and
are all in my favor, in the existing economy my capital is supposed to be
a producer as well:
그러나 감사하게도 사회 정치적인 조직은 우리를 지배하고 있으며 이것은 모두 나에게 호의적이다 . 현
존하는 경제에서 나의 자본은 (자본자체가) 생산을 잘 해내고 있음을 가정하고 있다.
it earns me interest. From whom this interest must be taken - and it must be from someone, since in reality by itself it produces absolutely nothing - this does not concern you.
이것을 나의 이익을 벌어준다 이 이익이란 - 이것은 다른 이들로부터 올수 밖에 없다. 현실적으로 이것(자본)은 어떤 무엇도 생산할수 없기 때문이다.- 당신에 관계하지 않는 다른 것으로 부터 가지고 온것이다.
It is enough for you to know that it renders interest. Alone this interest is insufficient to cover my expenses.
이것은 당신도 알다시피 이익을 만들어낸다. 홀로 이 이익은 부적당한 나의 지출을 덮는다.
I am not an ordinary man as you. I cannot be, nor do I want to be, content with little. I want to live, to inhabit a beautiful house, to eat and drink well, to ride in a carriage, to maintain a good
appearance, in short, to have all the good things in life.
나는 당신과 같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나는 조금의 만족을 누리는 것을 할수 없다. 나는 아름다운 집에서 살고자 하며 좋은 음식과 음료를 누리며 자가용을 타며 외굔을 좋게 꾸미고자 한다. 간단히 말해서 삶의 최고를 누리는 것이다.
I also want to give a good education to my children, to make them into gentlemen, and send them away to study, and afterwards, having become much more educated than you, they can dominate you one day as I dominate you today.
나는 또한 나의 아이들에게 좋은 교육을 시킬것이며 그들을 신사로 만들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좀더 많은 교육을 위해서 보낼것이며 그들은 언젠가 내가 그랬던것처럼 내일의 그것을 지배할것이다.
And as education alone is not enough, I want to give them a grand inheritance, so that divided between them they will be left almost as rich as I. Consequently, besides all the good things in life I want to give myself, I also want to increase my capital. How will I achieve this goal? Armed with this capital I propose to exploit you, and I propose that you permit me to exploit you.
아니 교육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나는 거대한 상속을 자식들에게 줄것이고 그것은 그들에게 나뉘어 지겠지만 나만큼이나 부유하게 될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밖의 모든 좋은 삶의 것들에 대해서 나는 나자신에게 주어지길 원하며 나의 자본이 증가되길 원한다. 어디가 나의 목적을 이룰수 있는 점인가?
자본으로 부장한 나는 당신을 고용하길 제안하고 당신의 하락하에 당신을 착취하길 제안한다.
You will work and I will collect and appropriate and sell for
my own behalf the product of your labor, without giving you more than a
portion which is absolutely necessary to keep you from dying of hunger
today, so that at the end of tomorrow you will still work for me in the
same conditions; and when you have been exhausted, I will throw you out,
and replace you with others.
당신은 일할것이고 나는 모으고 충당하며 당신의 노동으로 인한 생산을 판매를 할것이며 당신에게 배고파 죽지 않을정도의 조각만을 제외하고는 당신에게 주지 않을것이다. 그래서 내일의 마지막도 당신은 아직도 나를 위해 동일하게 노동하게 될것이다
: 당신이 완전히 소모되어졌 (일하지 못하게 될때) 을때 나는 당신을 버릴것이고 그자리를 다른 사람으로 채울것이다.
Know it well, I will pay you a salary as small, and impose on you a working day as long, working conditions as severe, as despotic, as harsh as possible; not from wickedness - not from a motive of hatred towards you, nor an intent to do you harm - but from the love of wealth and to get rich quick; because the less I pay you and the more you work, the more I will gain.''
너무 잘 알고 있다 , 나는 당신에게 가장 적은 임금과 가장 긴 노동시간 , 노동조건은 노예와 같은 전제정에의 그것과 같은 가능한 최대한의 가혹한 것이 될것이다. ; 이것은 사악함에서도 당신을 증오하는 감정도 당신을 해치려는 의향도 아닌 단지 부에 대한 사랑과 좀더 빨리 부자가 되기 위해서 ; 왜냐하면 나는 당신에게 (적게)지불하며 당신은 좀더 일하며 더 일해야 나는(부유함을) 얻을수 있기에 그렇다"
This is what is said implicitly by every capitalist, every industrialist,
every business owner, every employer who demands the labor power of the
workers they hire.
이것은 은연중에 모든 자본가들 , 모든 산업가들 , 모든 상업의 소유자들 , 모든 고용자들 즉 노동력을 노동자로부터 그들의 고용으로 부터 요구를 하는 이들이 이야기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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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가들은 위에 내용에 은연중에 대해 자주이야기 한다. 노동자들을 굶주리게 할수록 자신이 얻는것이 많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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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t since supply and demand are equal, why do the workers accept the
conditions laid down by the employer?
그러나 수요와 공급이 동일했음에도 왜 노동자들은 그러한 조건을 고용주로 부터 받아 들었을까?
If the capitalist stands in just as great a need of employing the workers as the one hundred workers do of being employed by him, does it not follow that both sides are in an equal position?
만약 자본가에 대해서도 그가 백사람에 노동자에게 했던것 처럼 요구될수 있을까?
둘은 동일한 위치에서 있을수 잇을까?
Do not both meet at the market as two equal merchants - from the
juridical point of view at least - one bringing a commodity called a daily
wage, to be exchanged for the daily labor of the worker on the basis of so
many hours per day;
결코 둘은 시장에서 동일한 상인으로 만날수 없다. - 작은부분을 원칙상으로 보면 - 하나의 상품을 갖는다는 것은 하루의 일당으로 (교환될수)말할수 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하루의 노동자가 몇시간을 일하는가의 교환된다;
and the other bringing his own labor as his commodity
to be exchanged for the wage offered by the capitalist? Since, in our
supposition, the demand is for a hundred workers and the supply is
likewise that of a hundred persons, it may seem that both sides are in an
equal position.
그의 노동력에 대한 가짐이 그의 일용품과 같은 자본가들의 임금의 제공으로서 교환되어질까? 종종 우리의 상상아래서 100명의 노동자의 요구와 100명의 사람의 공급과 이것이 동일하게 보일수 있을까을 상상해볼수 있다. 이것은 마치 둘의 자리가 동일하게 보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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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노동 공급과 수요가 동일하다면 우리는 둘이 서로 동일한 권리를 가질거라 상상한다. 그러나 자본가에게 있어서 노동력의 수요는 이윤을 얻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지만 노동자에 있어서는 생계의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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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f course nothing of the kind is true.
물론 아무것도 진실이 아니다.
What is it that brings the capitalist to the market? It is the urge to get rich, to increase his capital, to gratify his ambitions and social vanities, to be able to indulge in all conceivable pleasures.
무엇을 자본가들이 이 시장(거래)에서 갖고 가는가? 이것은 부자가 되길 제촉하고 그의 자본을 불리고 그의 야망과 사회적 허영을 충족시키고 모든 상상할수 있는 기쁨을 만족시킨다.
And what brings the worker to the market?
그리고 노동자들이 이 시장(거래)으로부터 가져가는건 뭔가?
Hunger, the necessity of eating today and tomorrow. Thus, while
being equal from the point of juridical fiction, the capitalist and the
worker are anything but equal from the point of view of the economic
situation, which is the real situation.
배고품 오늘과 내일의 식사에 대한 간절함이다 . 원칙적으로 평등하다라는 건 단지 소설에 불과하다 자본가와 노동자는 경제적 상황이나 진실된(보이는) 상황이나 결코 평등하지 않다.
(역 만약 평등하다고 한다면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것인가? 노동자와 자본가의 그 커다란 경제적 사회적 차이와 욕구의 충족의 차이는 어떻게 설명할것인가?)
The capitalist is not threatened with hunger when he comes to the market; he knows very well that if he does not find today the workers for whom he is looking, he will still have enough to eat for quite a long time, owing to the capital of which he is the happy possessor.
자본가는 그가 시장에 있는한 배고품으로 인해서 멸종되는 일은 없을것이다.
;그는 보고 있는 오랜기간동한 잘 먹었으며 자본을 그가 행복해지는 소유를 가진 노동자를 찾지 못한다는 것을 그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역)자본가는 결코 자기 소멸 에 의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노동자가 자본을 소유하여 성공했다는 신화는 현재도 그 자체로 극히 신화적인 상황이다. )
If the workers whom he meets in the market present
demands which seem excessive to him, because, far from enabling him to
increase his wealth and improve even more his economic position, those
proposals and conditions might, I do not say equalize, but bring the economic position of the workers somewhat close to his own - what does he
do in that case?
만약 노동자가 현재 시장의 노동 수요가 그에게 과도하다고 요구되는 것을 만나게 된다면 즉 오래전부터 그에게 부여된 그의 부를 성장시키고 좀더 높은 경제적 위치를 상승키며 이 계획과 상황이 가능하다는 것이라면 이러한 상황이 가능하다면 나는 이제 평등을 말하지 않을것이다. 그러나 노동자의 경제적 지위에 대해 얼마간 이상의 그의 소유라는 것은 닫혀있다 -그가 그렇게 된 경우를 본적이 있는가?
He turns down those proposals and waits.
After all, he was not impelled by an urgent necessity, but by a desire to improve his position, which, compared to that of the workers, is already quite comfortable, and so he can wait.
이제 그는 제안과 기다림을 접을것이다.결국에 그는 긴급한 궁핍에 재촉당하지 않을것이고 그의 지위를 다른 노동자보다 높히겠다는 욕망대신 이미 완벽히 편안하므로 그는 기다릴수 있을것이다.
And he will wait, for his business experience has taught him that the resistance of workers who, possessing neither capital, nor comfort, nor any savings to speak of, are pressed by a relentless necessity, by hunger, that this resistance cannot last very long, and that finally he will be able to find the hundred workers for whom he is looking - for they will be forced to accept the conditions which he finds it profitable to impose upon them.
그리고 그가 이제 기다리게 된다면 그의 일의 경험은 저항적인 노동자를 가르칠수 있을것이며 자본과 편안함과 비참한 궁핌함과 배고품을 이야기하는 절약을 소유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저항은 오랜기간 지속될수는 없을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00사람의 찾고 있는 노동자들은 발견하게 될것이다. - 그들은 유리한 짐을 지는 상황을 수락하는 것을 강제 당할것이다.
If they refuse, others will come who will be only too happy to accept such conditions. That is how things are done daily with the knowledge and in full view of everyone.
만약 그들이 제안에 대해서 거부한다면 다른이들은 매우 기뿐마음으로 이 상황을 수락할것이다. 모든이들의 시야와 지식은 얼마나 하루적인가!
If, as a consequence of the particular circumstances that constantly
influence the market, the branch of industry in which he planned at first
to employ his capital does not offer all the advantages that he had hoped,
then he will shift his capital elsewhere
만약 변합없이 시장에 영향을 주는 고용을 통하여 최초로 자본에 이득을 주지 않는 계획을 하는 산업의 가지라는 특별한 상황이 있다면 그는 그의 자본을 다른곳으로 옮이기를 희망할것이다.
;thus the bourgeois capitalist is not tied by nature to any specific industry, but tends to invest (as it is called by the economists - exploit is what we say) indifferently in all possible industries.
이런식으로 부르주아지 자본가들은 자연적이거나 다른 특수한 산업에도 메이지 않을것이며 ( 이것은 경제라고 불린다 - 착취 우리가 그것을 부르는 것이다 ) 모든 가능한 산업의 무관심한 투자에 메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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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요구에 의하여 한 산업의 노동자의 수가 충분히 부족하여 임금이 올라갈수 있다. 그러나 이는 계속되지 못한다. 자본가들이 이제 그 산업에 이윤이 만족할만큼 나오지 않는다 라고 생각된다면 그러한 상황을 지속하는 것이 아닌 기꺼이 자본을 빼내어서 다른 곳으로 그 자본을 옮기게 될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투자라는 경제학적인 이름으로 기꺼이 자본을 옮겨 공장을 페쇄하게 될것이고 이런식으로 착취는 그 수요가 크거나 적거나를 떠나 지속될것이다.
///
Let's suppose, finally, that learning of some industrial incapacity or misfortune, he decides not to invest in any industry; well, he will buy stocks and annuities; and if the interest and dividends seem insufficient, then he will engage in some occupation, or shall we say, sell his labor for a time, but in conditions much more lucrative than he had offered to his own workers.
마지막으로 우리 한번 생각해보자 조금의 산업상의 무능을 배우거나 불운을 배움으로서 그는 어떤 산업도 투자를 하지 않기로 결정햇다. ; 그는 주식과 연금을 살것이고 이익과 배당이 불만족했으므로 그는 우리가 말하는 그의 노동력을 얼마간 파는 직업에 속박될것이다. 그러나 그 상황이란 그가 그의 그동자들에게 요구햇던 것보다 훨신 양호한 것이 된다.
The capitalist then comes to the market in the capacity, if not of an
absolutely free agent, at least that of an infinitely freer agent than the
worker. What happens in the market is a meeting between a drive for lucre
and starvation, between master and slave. Juridically they are both equal;
but economically the worker is the serf of the capitalist, even before the
market transaction has been concluded whereby the worker sells his person
and his liberty for a given time. The worker is in the position of a serf
because this terrible threat of starvation which daily hangs over his head
and over his family, will force him to accept any conditions imposed by
the gainful calculations of the capitalist, the industrialist, the
employer.
자본가는 얼마나 자유롭게 노동자에 대해서 할수 있는가에 따라 시장에 올것이다. 시장에서는 부정이익과 아사사이에서 주인과 노예사이들이 만난다. 법률상에서는 둘은 서로 같다고 한다. 그러나 경제적으로는 노동자들은 자본가의 노예이다. 시장의 계약이 끝나기전까지 노동자는 어디서나 그의 자신과 그의 자유를 팔아야 한다. 현제 노동자의 위치는 노예다. 왜냐하면 이 가능스럽고 잔혹한 기아가 그와 그의 가족들의 목을 메달기 위해 조여들어오고 있기 떄문이다. 그는 어떤 상황이라도 즉 자본가 즉 그를 고용자와 산업가들이 그를 향해 주는 어떠한 상황이라도 받아들이도록 강요될것이다.
And once the contract has been negotiated, the serfdom of the workers is doubly increased; or to put it better, before the contract has been negotiated, goaded by hunger, he is only potentially a serf; after it is negotiated he becomes a serf in fact. Because what merchandise has he sold to his employer?
그리고 계약을 협상할때 노동자의 노예상태는 두배로 는다.계약전에 이미 협상은 끝나있으며 그 결론은 배고품이다 그는 오직 노예의 가능성을 가진다. 그후 협상은 그의 노예상을 단지 그러하다 정의한다 왜냐하면 고용자에게 팔린 그의 상품 때문이다.
It is his labor, his personal services, the productive forces of his body, mind, and spirit that are found in him and are inseparable from his person -
이것은 그의 노동이다. 그의 개인적인 용역이며 그의 몸과 마음 영혼이 가진 생산적 힘 즉 그에게서 나오는 그와는 분리할수 없는 것이다.
it is therefore himself. From then on, the employer will watch over him, either directly or by means of overseers; everyday during working hours and under controlled conditions, the employer will be the owner of his actions and movements.
이것은 그 자체로 그인것이다. 이에 따라서 보면 고용자는 직접적으로 혹은 멀리서건 간에 그를 바라볼것이다. 매일 노동하는 시간 혹은 노동하지 않는 시간이던간에 고용자는 그의 행동과 움직임을 소유했다 할수 있을것이다.
When he is told: ``Do this,'' the worker is obligated to do it; or he is told: ``Go there,'' he must go. Is this not what is called a serf?
언젠가 그가 말한다. “이것을 해라“ 노동자는 그것에 복종한다 ; 그가 말한다. ”그곳에 가라 “ 그는 그곳에 갈것이다. 이것이 노예라 부르지 않을 수 있는가?
M. Karl Marx, the illustrious leader of German Communism, justly observed in his magnificent work Das Kapital2 that if the contract freely entered into by the vendors of money -in the form of wages - and the vendors of their own labor -that is, between the employer and the workers - were concluded not for a definite and limited term only, but for one's whole life, it would constitute real slavery.
독일의 저명한 사회주의 지도자인 칼 막스는 잘 알려진 저작 자본론 2권에서 말한다
시장에서의 돈에서 그리고 시장에서의 노동력에서 시작되는 자유로운 계약은 한정적이며 영워나지 않은 계약으로 끝날것이다. 그의 전생예가 진정한 노예의 삶으로서 구성되지 않는다면 말이다.
//번역 수정 필요//
Concluded for a term only and reserving to the worker the right to quit his employer, this contract constitutes a sort of voluntary and transitory serfdom. Yes, transitory and voluntary from the juridical point of view, but nowise from the point of view of economic possibility. The worker always has the right to leave his employer, but has he the means to do so?
기간이 끝날때 만이 노동자들이 휴식을 취할 때 만이 그의 고용자로부터 정당하게 탈출한 것이며 이 계약은 자발적인 그리고 농노제의 종류 잠시적인 것으로 구성된다 그렇다 잠시간으로 그리고 자발적인 법률의 범주에서 본다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점는 경제의 가능성에 대한 측면이 아니다. 노동자는 언제나 고용자를 떠날 수 있음은 정당하다고 한다.허나 그가 그렇게 한다는것은 무엇을 의미한단 말인가?
And if he does quit him, is it in order to lead a free existence, in which he will have no master but himself? No, he does it in order to sell himself to another employer. He is driven to it by the same hunger which forced him to sell himself to the first employer.
만약 그가 고용자를 떠나서 자유롭게 존재하게 되었다라고 할때 그가 어떠한 주인을 가지지 않게 될수 있을까? 아니 그는 다시 그자신을 다른 고용주에게 팔아야 한다. 그는 동일한 배고품의 상황을 그가 그의 첫 번째 고용주에게서 했던것과 같은 그것을 강요당할것이다.
Thus the worker's liberty, so much exalted by the economists, jurists, and bourgeois republicans, is only a theoretical freedom, lacking any means for its possible realization, and consequently it is only a fictitious liberty, an utter falsehood.
이 노동자의 (규정된 정치적인)자유란것은 너무나도 고귀하신 경제학자님들과 법률가들 브루주아 의원님의 오직 이론상에서의 (무조건적 자연적)자유속에 있으며 현실성과 논리성은 전무하다 이것은 오직 소설속의 자유이며 전적으로 그른것이다.
The truth is that the whole life of the worker is simply a continuous and dismaying succession of terms of serfdom -voluntary from the juridical point of view but compulsory in the economic sense - broken up by momentarily brief interludes of freedom accompanied by starvation; in other words, it is real slavery.
진실은 노동자의 삶이란 간단히 지속적이며 두려운 노예상황의 연속이며-법리학자들의 관점에서 볼때 이것은 자발적이다 그러나 이것은 강제적인 상황이다 경제적으로 볼떄 -잠시간의 그러한 상황의 이탈인 자유의 짧은 순간에는 기아를 동반된다. 다른말로 하자면이것은 진정한 노예의 상황인것이다.
This slavery manifests itself daily in all kinds of ways. Apart from the vexations and oppressive conditions of the contract which turn the worker into a subordinate, a passive and obedient servant, and the employer into a nearly absolute master - apart from all that, it is well known that there is hardly an industrial enterprise wherein the owner, impelled on the one hand by the two- fold instinct of an unappeasable lust for profits and absolute power, and on the other hand, profiting by the economic dependence of the worker, does not set aside the terms stipulated in the contract and wring some additional concessions in his own favor.
이 노예상황은 그 스스로가 매일 모든 방법으로서 명확하게 만든다. 이는 다른문제로 하고 초초함과 압제적인 상황에서 계약은 노동자를 수동적이며 순종적인 비참한 하위의 노예로 고용자들은 절대적인 주인으로 만들며 주인이 이윤과 절대적인 힘에 대한 본능을 접고 다른한편 으로는 경제적에의 이윤에서 노동자에게 의존하면서 계약에서의 명시된 기간을 어기지 않고 조금의 양보를 짜낸다.
// 번역 수정 필//
Now he will demand more hours of work, that is, over and above those stipulated in the contract; now he will cut down wages on some pretext; now he will impose arbitrary fines, or he will treat the workers harshly, rudely, and insolently.
이제 그는 좀더 많은 시간을 일하길 요구할것이며 이것은 계약서에 명시된 이상으로 노동하는것이다. 이제 그는 임금을 어떤 구실을 대면서 임금을 깍게 될것이다 ; 이제 그는 임의의 벌금을 부과하거나 노동자들은 거칠고 무례하고 오만하게 대하게 될것이다.
But, one may say, in that case the worker can quit. Easier said than done. At times the worker receives part of his wages in advance, or his wife or children may be sick, or perhaps his work is poorly paid throughout this particular industry. Other employers may be paying even less than his own employer, and after quitting this job he may not even be able to find another one.
그러나 어느하나가 말하길 이러한 상황은 노동자들이 탈출할수 있다. 쉽게 말하자면 그렇단 거다. 언젠가 노동자가 그의 임금의 일부를 올려받고자 하거나 그의 아내나 아이가 아프거나 아마도 그의 노동이 더 이상 공장의 부속으로서의 가치가 없어질때 그렇다. 다른 고용주들은 아마도 이전의 고용주가 했던것보다 더욱 적은 금액만을 그에게 줄것이다 그리고 그가 직업을 그만둔다음에는 그는 아마도 다른 누군가를 찾지 못할것이다.
And to remain without a job spells death for him and his family. In addition, there is an understanding among all employers, and all of them resemble one another. All are almost equally irritating, unjust, and harsh.Is this calumny? No, it is in the nature of things, and in the logical necessity of the relationship existing between the employers and their workers.
그리고 직업이 상실했다는것은 곧 그와 그의 가족의 죽음과 같은 말이다. 또한 그들은 그들을 둘러싼 모든 고용주들이 나를 고용했는 그 고용주와 같다는 것을 알수 있을것이다. 모든 그들은 동일하게 비위에 거슬리고 불공평하며 거칠다. 이것이 중상모략이라고 생각하는가?아니다 이것은 지금의 자연스러운 상태이며 논리적인 필요에 의한 노동자와 고용자를 구성하는 관계이다.
NOTES:1. Not having to hand the works mentioned, I took these quotes from la Histoire de la Revolution de 1848, by Louis Blanc. Mr. Blanc continues with these words: ``We have been well alerted. Now we know, without room for doubt, that according to all the doctrines of the old political economy, wages cannot have any other basis than the regulation between supply and demand, although the result is that the remuneration of labor is reduced to what is strictly necessary to not perish by starvation. Very well, and let us do no more than repeat the words inadvertently spoken in sincerity by Adam Smith, the head of this school: It is small consolation for individuals who have no other means for existence than their labor.'' (Bakunin) 메모들 :
2. Das Kapital, Kritik der politischen Oekonomie, by Karl Marx; Erster Band. This work will need to be translated into French, because nothing, that I know of, contains an analysis so profound, so luminous, so scientific, so decisive, and if I can express it thus, so merciless an expose of the formation of bourgeois capital and the systematic and cruel exploitation that capital continues exercising over the work of the proletariat. The only defect of this work... positivist in direction, based on a profound study of economic works, without admitting any logic other than the logic of the facts - the only defect, say, is that it has been written, in part, but only in part, in a style excessively metaphysical and abstract... which makes it difficult to explain and nearly unapproachable for the majority of workers, and it is principally the workers who must read it nevertheless. The bourgeois will never read it or, if they read it, they will never want to comprehend it, and if they comprehend it they will never say anything about it; this work being nothing other than a sentence of death, scientifically motivated and irrevocably pronounced, not against them as individuals, but against their class. (Bakun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