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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소망이 있나이다 / 애 3:17-33, 벧전 1:13-21
이 세상에서 그 누구라도 슬픔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번도 고난이나 불행을 당한 적이 없다고 지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나? 만일 있다고 한다면 그는 틀림없이 위전자이거나 아니면 인생을 아직 모르는 풋내기일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예외없이 인생고를 맛보며 살고 있다. 예수를 믿는 신자라고 해서 이 세상에서 당하는 고통과 좌절을 피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고난을 어떻게 다루며 극복하느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신앙의 사람이 고난을 이겨내는 방법은 세상 사람들의 방법과 뚜렷이 구별이 된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점에 있어서 우리에게 좋은 모범이 되고 있다.
오늘 봉독한 하나님 말씀을 보면 예레미야 선지자가 처음에는 믿음이 무섭게 동요되는 시험을 당한다. 그리고 얼마 자나니 아니하여서 그는 절망의 밑바닥까지 떨어져 버린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가 절망의 늪에서 하나의 신비스러운 전환점을 맞아 다시 믿음의 자리로 돌이오고 있는 것이다. 본문을 주의해 보기 바란다. 1-17절까지는 예레미야의 믿음이 뿌리채 흔들리는 과정을 그리고 있고, 18-20절까지는 절망의 늪에 빠져있는 상황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21절에서 드디어 하나의 전환점을 발견하고, 22-33절에서는 믿음을 되찾아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리로 올라오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누구나 잘 아는 사실입니다만 생각과 현실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어려운 문제를 앞두고 ‘때가 되면 그럭저럭 넘어가겠지. 아마 견뎌낼 수 있을 거야’라고 생각을 하지만 막상 문제에 부닥치면 걷잡을 수 없이 여러운 상황에 휘말려 결국은 기력을 잃고 곤경에 빠질 때가 적지 않다.
예레미야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예레미야는 위대한 선지자로서 하나님을 통해서 계시를 받고 예언을 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장차 유대나라에 임할 하나님의 진노와 마지막 종국의 비참함이 얼마나 극심하리라는 것을 그림을 보듯이 환하게 예견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마음 속으로 ‘막상 그날이 오면 얼마나 비참할까? 과연 내가 견뎌낼 수 있을까? 그러나 믿음을 가지고 이겨야 해. 백성들과 함께 쓴 잔을 마시며 끝까지 인내할 수 있을 거야’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비극의 순간이 다가오자 예레미야는 사람이 너무나 달라져 버렸다. 3년이 넘도록 계속된 기근으로 마른 막대기처럼 비틀어져 여기저기 쓰러져 있는 시체들을 볼 때, 잔인무도환 군인들이 임심한 여인의 배를 칼로 가르는 끔찍한 장면을 목격했을 때, 어린아이들을 돌담에다 메어쳐 죽이는 것을 보았을 때,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 불길에 휩싸이고, 성전의 기구들이 전부 약탈당하는 사건을 보았을 때, 예레미야는 그의 몸이 마치 눈물의 저수지가 된 것처럼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 속에서 헤어날 기력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예레미야가 과거에 생각하던 것과는 다르게 실제로 엄청난 일을 직접 당하고 보니, 그렇게도 좋던 그의 믿음이 뿌리채 흔들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예레미야는 소위 선지자였다. 하나님과 직접 이야기하는 선지자인데도 어려운 문제를 앞에 놓고는 그의 믿음이 심하게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어떻게 이 사실을 알 수 있나? 누구에게나 믿음이 흔들릴 때 나타나는 증세가 있다. 그 증세란 바로 마음 가득히 불평을 담고 하나님을 향해 쏟아놓는 것이다. 예레미야와 같은 선지자는 하나님을 향해 절대로 불평하지 않을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았다. 그도 역시 고난을 당하면 약해지는 한 인간으로서 불평하는 말을 기록하고 말았다.
그러면 본문을 주목해 보라. 주어가 잘 나타나지 않는 우리말의 특성 때문에 다소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번역이 다른 성서를 보면 예레미야가 ‘그’라는 주어를 17번 이상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면 ‘그’가 누구를 가리키나? 바로 하나님을 지칭한다. 이것은 그의 믿음이 약해지면서 나타난 원망과 불평의 화살을 전부 다 하나님을 향해 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내용을 쉽게 표현하면 이렇다. ‘하루종일 나를 매로 때리는 자도 하나님이요, 나를 어둠에 가두어 둔 자도 하나님이요, 마치 곰처럼 엎드려 기다렸다가 나를 사정없이 찢어 놓은 자도 하나님이야. 그가 나에게 쑥을 짠 쓴잔을 마시게 하였고, 그가 내 마음의 평강을 다 앗아가 버렸으며, 그가 나의 영광을 전부 다 약탈해 갔고, 그가 내 앞길을 다듬은 돌로 단단히 막아 놓으셨으며, 그가 활을 당겨 마치 과녁을 맞추듯이 내 허리를 맞췄어. 이 모든 일들을 하나님이 한 거야!’ 예레미야 선지자의 입에서 이런 불평이 나오리라고 상상할 수 있는가? 그처럼 믿음 좋은 사람의 입에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소리가 시냇물처럼 쏟아져 나오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레미야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예레미야는 우리의 거울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약한 우리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우리도 큰 문제를 앞에 놓으면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 같았던 믿음이 사정없이 흔들리면서 하나님을 원망할 때가 있다. ‘예수를 믿어도 별 수 없구나. 지금까지 기도도 많이 했는데 하나님이 안들어주시는 거야. 내가 이렇게 당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직도 내 죄를 용서하지 않고 저주하시는 까닭이야. 차라리 안믿었으면 좋았을뻔 했어!’라고 거침없이 독기서림 불평을 내뱉을 때가 있다.
이렇게 불평을 시작한 사람이 가는 곳이 잇다. 절망의 늪이라는 곳이다. 예레미야도 이 늪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본문 18절이 그 심정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힘과 여호와께 대한 내 소망이 끊어졌다 하였도다.’ 그런데 절망을 하는 순간에 반드시 찾아오는 반갑지 않은 손님이 있다. ‘하나님도 필요없고 이젠 다 소용없어’라고 중얼거릴 때 꼭 찾아오는 불청객이 누군인줄 아나? 예레미야가 그의 체험을 가지고 잘 가르쳐주고 있다. 19절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이 말을 예레미야가 과거에 당한 갖가지 고초와 재난을 새삼스럽게 기억하고 낙심이 된다고 하는 말이다. 여기에서 절망하는 자에게 찾아오는 불청객이 누구인지 알 수 있다. 그것은 ‘기억’이라는 것이다. 절망의 늪에 빠지면 이상하게도 기억이 되살아나는 일들이 많아진다. 예레미야의 경우도 절망에 빠지니까 생각하지 않아도 될 것들이 자꾸 떠올랐던 것이다.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들이 자꾸 눈 앞에 떠오르고 그것들이 쉴새없이 자신을 괴롭히는 것이다. 희망을 잃은 사람에게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들이 떠오르는 것은 지독한 고문이라고 할 수 잇다. 이런 경우에는 기억이라는 것이 마귀의 하수인의 역할을 감당한다. ‘기억’이라는 탈을 쓴 마귀의 하수인은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의 이름과 사건들을 빽빽이 적은 앞치마를 두르고 등장한다. 언젠가 자신이 범했던 죄악들,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원한맺힌 사람들의 이름들, 기억이 날 때마다 허탈감에 빠지게 하는 실패했던 사건들을 조목조목 나열한 추잡한 앞치마를 두르고 손에는 쑥을 짜서 만든 즙을 담은 잔을 들고 찾아오는 것이다. 이것이 기억이라는 존재이다. 마귀의 하수인은 사나운 얼굴로 잔을 내밀면서 빨리 마시고 죽으라고 충동을 한다. ‘너는 이제 희망이 없어! 이거나 마시고 죽어. 너는 죄인이야! 너 과거에 범한 죄를 생각해 봐. 어찌 네가 복을 받겠니? 너는 죽어 마땅해. 죽어, 죽어! 너는 죄인이야! 너 과거에 범한 죄를 생각해 봐. 어찌 네가 복을 받겠니? 너는 죽어 마땅해. 죽어, 죽어!’ 이것이 기억이 주는 잔인한 고문이다. 이렇게 되면 지금 처해 있는 상황에서 좋은 모습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나쁜 상황만 계속해서 생각이 난다. 그동안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할 수 있었던 사람들에게 다시금 원한에 사무치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정말 몸서리 쳐지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큰 교훈을 하나 얻는다. 그것은 우리 모두 겸손하라는 것이다. 예레미야와 같은 탁월한 믿음의 사람도 절망하며 불평을 했다. 하물며 우리 같은 신앙인은 말할 필요도 없다. 우리 모두가 예레미야의 약점을 다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결코 교만해서는 안된다. 우리도 절망을 하게 되면 예레미야처럼 정신적인 고문을 피할 수가 없다. 그것은우리가 믿음이 흔들릴 때 마귀가 사용하는 도구이다. 우리의 믿음은 종종 나뭇가지에 달려 바람에 흔들리는 꽃송이와 흡사한 것을 볼 수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흔들린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해야 한다. 자기의 어떤 직분이나 많은 사람들이 보내는 칭찬에 넘어가서는 안된다. 어떤 것으로도 우리의 신앙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보장을 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를 마지막까지 지탱할 수 있게 하는 힘이 된다.
그런데 이제 대단히 중요한 사실을 예레미야로부터 발견하게 된다. 절망의 상황에서 갑자기 돌변하는 하나의 전환점이 나타나는 것이다. 20-21절에서 이 전환점을 발견할 수 있다.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그가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라고 했는데 무엇을 담아두었는지를 밝히고 있지 않다. 이 말 앞에 ‘이것을’이라는 말로 시작한다. 여기서 ‘이것’은 22절 내용을 말하고 있다고 본다. 그래서 이 구절을 새롭게 번역을 해보면 이렇다. ‘오 하나님이여! 갑자기 내 중심에 생각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와긍휼입니다. 그리고 그 자비와 긍휼 때문에 아직도 우리가 완전히 망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오히려 소망이 있습니다.’ 아무튼 절망 가운데거 몸부림치고 있는 순간에 갑자기 예레미야에게 큰 전환점이 하나 생겼다. ‘이것’ 곧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다는 사실을 마음에 담아두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은혜의 빛이다. 이 빛이 어둠을 밝히기 시작하면서 그의 생각도 점차 바뀌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니, 내가 이렇게 절망만 하다니... 아직 내가 죽지 않고 살아있는데... 아직도 내가 건재하고 있는데... 우리나라 백성들이 다 망한 것은 아니야. 몇 년 전에 바벨론으로 잡혀간 친구들이 거기에 그대로 살고 있고, 또 하나님이 나에게 분명히 약속한 것이 있지. 70년만 지나면 하나님께서 다시 우리 민족을 고국으로 돌아오게 하시고 불타버린 저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고 국가를 회복할 수 있다고 약속하셨어. 그것이 있는데 왜 내가 이렇게 절망하고 있지?’ 갑자기 예레미야에게 소망스러운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캄캄한 곳에서 한가닥의 빛을 발견한 것이다. 그의 내면 깊은 곳을 꿰뚫은 이 빛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던져주시는 소망의 닻줄을 잡은 것이다.
존 번연이 쓴 ‘천로역정’을 보면 이 내용과 흡사한 장면이 나온다. 번연은 16세기에 영국에서 가장 위대한 종교지도자였고 소설가였다. 그는 영국 국교회가 너무 비성서적이고 잘못된 방향으로 기울어지자 국교회를 떠나 복음을 외치다가 12년 이상 감옥살이를 했다. 그가 옥중에 하나님 말씀 한권만 가지고 들어가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저술한 책이 바로 천로역정이다. 이 책은 한 사람이 예수믿고 난 다음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까지 격게 되는 신앙생활의 과정을 꿈의 이야기에 비유하여 기록한 책이다. 이 작품에 나오는 크리스천이라는 주인공은 모든 신앙인을 통칭하는 인물로 그려져 있다. 그래서 이 책을 보면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그 순간까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려면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전진해야 하는가를 마치 그림을 보듯이 실감나게 깨달을 수 있다. 이 책의 내용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다. ‘크리스천’이 ‘소망’이라는 친구와 함께 천상을 향하여 열심히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길이 너무 험하고 힘들어서 조금 수월한 길을 찾다가 샛길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래서 크리스천이 소망을 유혹하여 그 샛길로 들어섰다. 처음 볼 때는 아주 좋아보이던 길이 얼마 안가서 험준한 골짜기로 통하는 좁은 길이 나왔다. 그래서 간신히 골짜기에 다다르니 갑자시 폭우가 쏟아지며 홍수가 나서 길이 막혀버렸다. 돌아설 수고 없고 앞으로 갈 수도 없는 딱한 처지가 되었다. 날은 어둑어둑 저물어 간다. 할 수 없이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웅크리고 앉아 날이 새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나 피곤을 이기지 못해 자신도 모르게 잠에 곯아 떨어지고 말았다. 아침에 눈을 뜨자 무서운 거인이 크리스천과 소망 앞에 서 있었다. 그 거인의 이름은 ‘절망’이었다. ‘너희들은 내 땅에 무단 침입한 녀석들이야. 오늘 내가 너희들을 가두어 버리겠어!’라고 하면서 절망은 두 사람을 끌고가 지하실 감옥에 가두어 버렸다. 그리고 일주일 동안 무섭게 매질을 하여 두 사람은 거의 죽게 되었다. 그 다음에 절망은 독약이 든 잔을 내밀면서 두 사람이 마시고 자살하라고 명령을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 말을 듣지 않고 버텼다. 하루는 절망이 찾아와서 날이 밝으면 뒷마당에 끌어내어 갈기갈기 찢어 죽이겠다고 협박을 하였다. 그 말을 들은 크리스천과 소망은 마지막 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힘없이 감옥 바닥에 쓰러져 있다가 어느 순간 벌떡 일어나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새벽이 다가올 즈음 크리스천이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면서 이렇게 외쳤다. ‘지금쯤 자유로이 걸어다닐 수 있었을 내가 이런 악취가 풍기는 지하실에 갇혀 있다니, 이게 무슨 꼴인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냐? 이 의혹의 성안에 있는 자물쇠는 어느 것이나 열 수 있다는 보장을 받은 언약의 열쇠가 내 품 속에 있는데, 그것이 나에게 있는 줄도 모르고 이처럼 고생을 하다니...’ 크리스천은 급히 소망을 깨웠다. 그리고 자신의 품 속을 더듬어 언약의 열쇠를 끄집어 냈다. 이 열쇠를 감옥 문의 자물쇠 통에다 슬그머니 넣고 돌려 보았다. 소리없이 감옥문이 열렸다. 그곳을 빠져나간 그들은 대문도 쉽게 열 수 있었다. 그리고 날이 새기 전에 크리스천과 소망은 절망의 성에서 도망칠 수 있었다.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하나?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우리는 절망이라는 무서운 함정 속에 빠져 기억의 회초리에 사정없이 맞아 만신창이가 될 때가 있다. 이때 크리스천이 갑자기 생각해 낸 것처럼, 우리에게도 언약의 열쇠가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이 언약의 열쇠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한다. 그래서 절망 중에 있을 때 갑자기 하나님의 말씀이 기억날 때가 있다. 하나님이 던져주시는 한줄기 빛이다. 이 빛으로 말미암아 보장받은 언약의 열쇠를 사용하기만 하면 반드시 고통스러운 절망의 문은 열리는 것이다. 절망의 모퉁이는 소망의 길로 통하는 전환점이 된다. 왜냐하면 절망의 그 자리에 주님이 함께 하셔서 종국에는 소망의 길로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은 불가사의한 분이다. 우리가 불평하고 괴로워할 때는 가만히 계시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절망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헤맬 때에도 침묵을 지키신다. 그 침묵이 얼마나 무서운지 주님이 우리를 내버리신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러다가 우리의 힘이 탈진하고 더 이상 소망이 없다고 생각되는 가장 마지막 순간에 이르게 되면 우리에게 갑자기 어떤 생각을 불러일으켜 주신다. 영혼을 깨우는 하나님의 말씀이나 우리를 소생시키는 어떤 동기를 심어주신다. 바로 이 순간이 절망이 찬송으로 바뀌게 되는 전환점이 되는 것이다.
사업을 하는 어떤 분이 불경기로 인하여 고전을 면하지 못했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기진맥진하여 밤중에 돌아온 남편을 유심히 살피던 아내가 잠자리에 든 다음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한숨만 내쉬고 있는 남편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여보, 당분간은 고생할 수밖에 없겠지요. 그렇지만 우린 건강이 있잖아요. 당신이나 나나 아이들 모두 건강하잖아요.’ 캄캄한 밤중에 반짝 빛나는 불빛같은 부인의 말 한마디에 남편은 어려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고 한다. 이러한 전환점은 참으로 중요하다. 절망하는 성도에게 있어서의 전환점은 고난의 자리에서도 함께 동행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던져주시는 빛이요, 언약의 열쇠이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혼자 내버려두지 않는다. 더욱이 믿음이 흔들리는 절망의 골짜기를 혼자서 걸어가라고 내버려두지 않는다.
깊은 진리가 담겨있는 교훈적인 이야기를 소개한다. 제리 포웰은 ‘모랄 머저리티’라는 유명한 보수주의 정치운동을 하는 목사인데 맨하임 베긴 전 이스라엘 수상과 친분이 두터운 사이였다. 그래서 한번은 두 사람이 사석에서 만나 담소를 나누는 자리에서 포웰 목사가 베긴 수상에게 ‘이스라엘이 중동전에서 기막힌 승리를 거두었는데 그 비결이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잠깐동안 베긴 수상이 생각을 하다가 ‘그것은 우리 이스라엘 군대의 용기, 특별히 지휘관의 용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참 의미있는 말 한마디를 들려주었다. ‘우리 이스라엘 지휘관들은 전선에 나갈 때 부하들에게 절대로 사용해서는 안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앞으로 전진!>이라는 명령입니다. 그대신 <나를 따르라!>라는 명령을 사용합니다. 이것이 우리 이스라엘을 승리하게 만든 비결입니다.’ 예수님을 군대의 지휘관에 비유할 수 있다. 예수님은 우리를 앞서 보내시며 뒤에서 ‘앞으로 전진’ 하고 외치기만 하시는 분이 아니다. 예수님은 앞장을 서시며 ‘나를 따르라’ 하시는 분이다. 세상을 살아갈 힘을 잃어버린 곳에서도 문득 소망의 말씀이 떠오르는 것은 예수님이 앞장서서 우리를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야곱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죄를 범하고 도망가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꿈을 통하여 하나님이 나타나서 ‘내가 너와 함께 하고, 네가 어디를 가든지 너와 함께 하마’라고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었다. 야곱이 잠에서 깨어나서는 하나님이 그 자리에 함께 계시는 것을 전혀 몰랐다고 고백했다. 하나님은 야곱처럼 죄짓고 도망가는 사람에게도 함께 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아는가?
예레미야가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의 무궁함을 회상하고 절망의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게 되자 그의 영적 상태가 얼머나 급변하고 있는지 다음의 구절에서 잘 알 수 있다. 23절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아침마다 새로운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어두운 골짜기에서 빠져나오는 것이다. 드디어 그는 다시 신앙의 사람으로 회복되었다. 24절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여호와가 자기의 일부분이라고 하지 않고 자기 기업의 전부라고 고백하는 것은 흔들리던 믿음이 확고해진 것을 의미한다. 32-33절 ‘그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이 말씀을 다시 말한다면 ‘하나님은 내가 고생하는 것을 좋아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잠깐 선한 뜻이 있어서 허용하신 것 뿐이다. 그러므로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를 평안하고 형통한 자리로 다시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 예레미야는 참으로 믿음이 강한 새사람으로 회복되어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놀라운 수준에까지 도달한 것이다.
우리도 예레미야와 다름없는 약한 사람들이다. 앞으로 우리의 남은 생애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난의 길에서 완전히 제외시켜 주신다는 보장을 하신 적이 없다. 그러나 분명한 보장은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이다. 우리의 힘으로 일어날 수 없는 순간에 우리의 중심에 갑자기 생각나는 놀라운 말씀을 주셔서 그 어려운 절망에서 일어날 수 있도록 붙들어 일으켜 세우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기 바란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이 놀라운 은혜를 인생의 순간순간마다 체험하며 살아가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1998-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