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 조미숙
모처럼 기다리던 비가 왔다. 가까운 나주에 홍수주의보가 내려졌고 여기저기 피해가 많다는 뉴스도 있었지만 내심 반가웠다. 이 비 그치면 가을이 온다지 않느냐? 거짓말처럼 선선해졌다. 선풍기도 켜지 않고 이불 덮고 잤다.
늦잠을 자고 일어나 보니 비는 오지 않는 것 같다. 유달산에 가려고 주섬주섬 준비하니 보물이(반려견)가 낌새를 알아채고 바짝 달라붙는다. 잠깐 망설였다. 지금 산 상태가 몹시 질퍽거릴 텐데 저걸 데려가면 난리가 날 것 같다. 물론 갔다 와서 목욕시키면 그만이지만 차에서 난감하겠다 싶기도 하고 귀찮기도 해서 모른 척하고 나왔다. 보물이의 애처로운 눈길이 눈에 밟힌다.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향수 냄새가 훅 끼친다. 나로 모르게 얼굴이 찌푸려진다. 평소 향수를 싫어한다. 더군다나 코를 찌르는 강한 향에는 머리가 지끈거린다.
주차장에서 바로 계단을 오르자 계곡물 소리가 졸졸졸 난다. 평소 물이 없는 산이라 비 온 뒤에만 들을 수 있다. 습도가 높은 숲에는 특유한 향기가 가득 찼다. 화학 물질과 기압 변화, 기억 등 여러 요인이 만들어 낸 결과라고 한다. 축축한 땅을 밟는 내 발길에 젖은 나뭇잎이 흙에 짓이겨진다. 밤새 비바람에 여기저기 나뭇잎과 열매가 떨어져 있다. 목련 열매 몇 개를 주머니에 넣는다. 다음 달 열매 수업에 써야겠다.
주말 유달산 둘레길은 혼잡한데 오늘은 한가롭다. 백합나무 커다란 잎이 노랗게 단풍 들어 떨어져 나뒹굴고 있다. 하루 만에 가을이 오다니 그저 자연의 힘은 신비롭기만 하다. 가을꽃들이 어서 오라고 반긴다. 수까치깨꽃이 고개를 숙이고 노랗게 웃고, 으아리도 하얀 얼굴을 수줍게 내밀고 있었다. 화려한 유홍초가 빨갛게 유혹하고 그 옆에서 나팔꽃이 청초하게 노래한다. 나비가 되어 이곳저곳 날아 본다.
내 앞에서 어떤 여자분이 노래를 크게 틀고 가고 있다. 그런데 걸음걸이가 불편하다. 그보다 조금 더 앞에는 남자분이 가는데 아마도 부부 같았다. 걸음도 불편한 아내를 버려둔 채 걷는 사람이 얄궂어 보였다.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가끔 뒤돌아본다. 그 사람들을 배경으로 저녁마다 만나는 부부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운동 시간보다 좀 더 이른 시간에 나가면 두 분이 꼭 손을 붙잡고 걸어온다. 아내가 항암 치료를 받았는지 짧은 머리를 하고 있다. 그분은 나와 같이 운동한다. 낯을 가리는 성격이라 안면은 있어도 인사를 하며 지내지는 않지만 두 사람을 볼 때마다 저렇게 늙어가야 한다고 생각하곤 했는데 오늘 산에서 본 부부는 참 정이 없어 보인다.
한참 땀을 뚝뚝 흘리며 걷고 있는데 어디선가 달큰한 냄새가 난다. 가만히 보니 길에 보라색 꽃잎이 수북이 떨어져 있다. 칡꽃이다. 넓은 잎으로 왕성하게 세력을 뻗치고 무자비하게 다른 나무를 감고 오르며 숨통을 조이는 이기적인 식물이지만 꽃은 참 매력적이다. 향기에 견주어 덕이 부족하다고나 할까?
숨을 거칠게 쉬면서 모퉁이를 돌아 오르는데 갑자기 의자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있었다. 처음에는 잘못 본 줄 알았다. 이렇게도 몰상식한 사람이 있을까 싶다. 산에서는 금연인 것도 모르나, 아니면 안하무인인가? 내가 조금만 의협심에 불탔다면 어른이고 뭐고 한바탕 난리 피웠을 텐데. 역겨운 담배 냄새도 기분이 몹시 나쁘다. 숲이 젖어 있어서 천만다행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화가 치민다.
점심 먹고 카페에 갔다. 사장님이 추석에 멜론이 많이 들어왔다고 깎아서 같이 내왔다. 상큼하다. 향긋한 커피에 마음이 푸근해진다. 패드에 몇 자 두드리다 시장 보고 들어오니 보물이가 정신없이 반긴다. 미안한 마음에 산 것 냉장고에 넣자마자 산책에 나섰다. 아직 풀잎에 빗방울이 맺혀 있는 젖은 땅에서 마음껏 코를 벌름거린다. 다른 개들이 남긴 흔적을 찾아 정신없이 다닌다. 다리가 더러워져 집에 들어와 바로 목욕시켰다. “목욕”이라는 말만 들어도 도망가는 녀석을 씻기고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털 말리고 품에 안았더니 상큼한 샴푸 향이 내 코를 간지럽힌다.
첫댓글 수까치깨꽃, 신비스러운 이름이네요. 어떻게 생겼을까, 이름으로 혼자 모양을 그려봅니다. 식물을 잘 아는 분들이 참 부럽습니다. 넉넉해 보여서요.
앙증맞게 피는 노란 가을꽃이랍니다. 고맙습니다.
숲해설가라는 걸 실감할 수 있는 유려한 글이군요.
향기에도 정말 여러 종류가 있다는 걸 글에서 느낍니다.
저도 산에서 담배 피는 사람, 정말 싫어합니다.
음악 틀고 가는 사람도요.
숲의 정적을 깨는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향기로운 사람으로 남지는 못해도 악취는 풍기지 말아야 할 텐데요.
운동하는 길지 않은 시간에 참 많은 향을 경험했네요.
쓰고 보니 그렇네요. 끊임없이 냄새를 풍기고 맡고 그러는 거 같아요.
목포 서부초등학교 혜인여중 다닐 때 유달산으로 소풍 갔었지요.
유달산 둘레길 저도 걸어보고 싶은 글입니다.
보라색 칡꽃이 산책길에 보이면 잠깐 멈춰 바라보다 걷네요..
여러모로 유달산이 가까이 있어 좋네요.
와, 비 온 뒤 참 다양한 향기를 맡으셨군요?
'향기에 견주어 덕이...' 선생님만이 표현할 수 있을 듯요.
또 과찬이네요.
고맙습니다.
선생님의 글을 읽으며 유달산을 같이 걷습니다. 괜스레 코가 벌름거려집니다. 가슴도 크게 열어보구요. 그리고는 산길에서 꼴불견 사람을 만나면 어떡할까 생각합니다. 칡꽃 향기도 잘 맡았습니다. 고맙습니다.
언제 유달산 같이 걸을 날 있겠죠? 고맙습니다.
나도 매일 아침 산책을 하는데 무슨 노래를 그렇게 크게 듣고 다니는지
의아해 하곤 합니다.
그니까요. 자연의 소리를 들어야 하는데 안타까워요.
이렇게 매번 자연의 향기를 맡고 산책하는 숲해설사 선생님은 행복하시겠어요. 부럽습니다.
저는 선생님이 더 부러운데요. 고맙습니다.
'숲해설사' 제가 참 해보고 싶은 일입니다. 선생님 글에서는 언제나 자연의 향기가 물씬 배어 있습니다. 부럽습니다.
꼭 공부하시길 바랍니다.
자연에서 많이 배웁니다.
아마 향수를 늘 뿌리다보면 코가 둔해져서 한두 방울 더 뿌리게 되나봐요. 저도 공연장에서 향수 진하게 뿌린 사람 옆에 앉게 되면 공연에 집중할 수가 없더라구요..
향수 없이도 향기 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언감생심이네요.
글이 차분해서 읽어 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