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 노트 38 죽는 것은 태어났기 때문이다
< 수행 노트는 1996년도부터 미얀마 마하시 명상원의 수행지도 스승과 한국인 수행자들의 수행면담을 기록한 내용입니다. 참고는 수행자를 돕기 위한 묘원의 글입니다. >
질문 : 수행을 하면서 모든 것이 원인이 있어서 생긴 결과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렇게 알게 되니 과연 창조주가 있어서 모든 만물을 만들었는가에 대한 의문이 생깁니다. 또 몸과 마음을 나의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에 대한 회의가 생깁니다.
답변 : 창조주가 모든 것을 만들었다고 하나, 그 창조주는 누가 만들었는가? 이는 결국 어떤 창조주가 만들지 않았다는 말이다. 창조주가 만들었다면 일정부분 창조주의 책임도 있다.
보는 것도 내가 있어서 보는 것이 아니다. 모두 원인과 결과에 의해 일어난 일이다. 보는 것도 간단한 일이 아니다.
보는 것은 네 가지 조건이 결합되어서 보는 것이 성립된다.
첫째, 눈이라는 감각기관이 있어야 한다.
둘째, 보이는 대상이 있어야 한다.
셋째, 빛이 있어야 한다.
넷째, 아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이처럼 보는 것 하나가 네 가지 조건에 의해 보는 것이지 내가 있어서 보는 것이 아니다. 이 중에 하나라도 없으면 보는 것이 성립될 수 없다. 여기서 아는 마음도 조건 중의 하나일 뿐이지 이것이 나의 마음이 아니다.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은 막을 수 없다. 이것은 몸과 마음이 생겨난 원인에 대한 결과일 뿐이다. 여기에 나의 힘이 작용할 수 없다. 모든 것이 원인에 의한 결과다.
먹는 것도 대소변을 보는 것도 모두 마찬가지로 내가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살기 위해서 먹는 것이고 대소변을 보는 것 모두가 원인에 의한 결과의 과정일 뿐이다. 인간의 모든 동작이 순간순간 생기고 사라지는 무상한 것이다.
아름답지 않은 것을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내 것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나의 코나 침이나 또 다른 분비물도 내 것이기 때문에 더럽다고 생각하지 않으나 내 몸에서 떨어지면 더럽게 느낀다. 왜냐하면 나의 것이라고 하는 집착 때문에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입 안의 가래침이나 입 밖의 가래침이나 내용물은 똑같다. 그래서 이 몸 전체가 실제로는 더럽고 추하고 메스꺼운 것인데 내 것이라는 것 때문에 아름답게 보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의 성품은 무상, 고, 무아다. 이 세상이나 몸과 마음이나 무상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 무상하니까 괴로움이다. 괴로움이 있는 한 행복은 없다.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무아다. 그러므로 몸과 마음이 아름다운 것은 하나도 없다. 무상, 고, 무아와 더러움을 자세하게 알아차리면 집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어머니 배속에 태어날 때도 고통스럽고, 좁은 공간에서 자랄 때도 고통스럽고, 태어날 때도 고통스럽고, 성장할 때도 모두 괴로움이다. 이것이 일어나서 사라지는 무상의 괴로움이다. 누구나 늙고 병들고 죽는다. 태어난 존재는 반드시 사라져야 한다.
< 참고 >
지혜가 성숙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창조주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는 증명할 수 없기 때문에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단지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이때는 “지금 창조주에 대한 의문이 생겼네”하고 이런 사실 자체를 즉시 알아차려야 합니다. 창조주가 있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있는 것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도의 기본이 되는 연기를 공부하면 조금 다른 견해를 가질 수 있습니다. 수행을 하면 모든 현상은 조건에 의해 생긴 것이라는 지혜가 납니다. 이때의 조건은 원인과 결과입니다. 한 인간의 몸과 마음은 자체적 조건에 생성과 소멸되는 과정을 거칩니다. 이것이 바로 원인과 결과에 의해 진행되는 것으로 여기에는 어떤 외부적 힘이 개입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때의 조건을 어떤 인격체인 창조주라고 보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조건을 창조주라고 하면 이 또한 그만인 것입니다. 다만 여기에는 깨달음을 얻어 윤회가 끝나는 해탈의 자유는 없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현안은 인간의 괴로움을 해결하는 것입니다. 나의 가장 중요한 현안인 괴로움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추론적인 것에 매달려 사유해서는 안 됩니다. 몸과 마음을 가지고 살면서 생긴 문제는 오직 몸과 마음에서 답을 얻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몸과 마음이 아닌 다른 대상에서 답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못합니다. 모든 것이 증명될 수 있고, 그래서 실현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막연한 믿음에 인생을 걸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선택도 오직 자신이 결정할 문제라서 다른 어느 누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는 자아를 강조하는 것이었습니다. 누구도 자아가 없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붓다께서 오랫동안 몸과 마음을 통찰한 결과 자아가 없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러한 발견이 무아입니다. 무아는 최고의 지혜가 나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붓다께서 깨달음을 얻은 방법인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 인류사에 많은 구도자들이 무아를 발견하여 해탈의 자유를 얻어 윤회의 괴로움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사물의 궁극의 이치인 무아는 생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지혜입니다. 오직 수행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지혜입니다. 그래서 붓다께서는 내가 직접 경험했으나 두려워말고 이 길로 오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무아는 붓다의 가르침대로 실천하여 자신의 체험을 통해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생각으로는 알기 어려운 지혜입니다. 여기에는 맹목적 믿음이 아닌 확신에 찬 믿음이 필요합니다.
2. 질문 : 수행을 하면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또 이 수행을 해서 도과를 성취하면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생깁니다.
답변 : 누구나 태어나면 죽는다. 죽음에는 네 가지의 종류가 있다.
첫째, 수명이 다하면 죽는다.
둘째, 업이 다하면 죽는다.
셋째, 수명과 업이 다하면 죽는다.
넷째, 자연재해나 뜻하지 않은 사고로 죽는다.
지혜가 나면 사는 것이 즐거움이 아닌 괴로움이라고 안다. 수행을 해서 좋아할 것이 없는 이 몸에 대한 집착을 끊으면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되고 다시 윤회를 하지 않는다. 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위빠사나 수행이다. 이처럼 몸과 마음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 열반이다.
< 참고 >
수행의 궁극의 목표는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열반입니다. 열반이란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란 번뇌가 불타서 소멸한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열반이 아니고서는 괴로움이 계속됩니다.
살아있는 생명은 모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갖습니다. 여기에는 나라고 하는 자아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아가 있으면 더 이상 다다를 것이 없는 사물의 이치를 거부합니다. 그래서 태어나서 죽는 무상을 거부합니다. 이것이 어리석음에 의해서 생긴 욕망입니다.
죽는 이유는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이렇게 단순한 명제로 정리해야 합니다. 붓다께서는 태어나면 죽는다는 단순한 논리를 연기법을 통해 알았습니다. 하지만 누구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이런 명쾌한 논리를 회피합니다. 그래서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포입니다. 진리는 지금 여기에 있으며, 몸과 마음에 있으며, 단순한 것에 있습니다. 이러한 진리는 다른 때 다른 곳에서 찾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복잡한 것에서 찾지 말고 단순한 것에서 찾아야 합니다.
이제 죽음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서 어떻게 죽는가를 두려워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죽을 때의 마음이 다음 생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죽을 때의 마음은 인식할 수 없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평소에 먹던 마음이 죽을 때의 마음이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선한 일을 하면 현재에도 두려움 없이 행복하고, 죽을 때도 두려움 없이 행복하게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다음 생도 즉각 영향을 받습니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죽을 때의 마음이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무상, 고, 무아의 지혜가 나서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이 되면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어 다시 태어나지 않습니다.
죽음은 등잔불에 비유합니다. 등잔불이 꺼지는 것은 네 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첫째, 기름이 없어서 꺼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살고 싶은 의욕이 없어서 죽는 것에 비유합니다.
둘째, 심지가 다 타서 꺼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몸에 병이 나서 죽은 것에 비유합니다.
셋째, 기름과 심지가 다 타서 꺼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수명이 다하여 죽은 것에 비유합니다.
넷째, 바람이 불어서 꺼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재해나 뜻하지 않는 사고로 죽는 것에 비유합니다.
이처럼 누구나 예외 없이 어떤 이유로건 죽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불가피한 죽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가장 이상적이 죽음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선한 일을 한 사람은 지혜가 나서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어차피 당할 일이라면 의연하게 대처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결과를 맺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