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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여원재-고남산-매요리-사치재
0. 위치 : 전라북도 남원시 산동면, 운봉읍 0. 코스 : 여원재-고남산-통안재-유치재-매요리-사치재 (상행)
일기예보와는 상관없이 아침부터 짙은 구름이 잔뜩 끼어있다. 유성 쪽 하늘에 붉은 빛이 감돌면서 예사롭지 않아 유심히 바라다보니 커다란 아침달이 살며시 드러냈다가 서둘러 구름 속으로 사라진다. 섣달 보름달이 아직 남아 있었던 거다. 아직 만삭이니 저 달이 몸을 풀고 점점 야위어 완전히 사라지면 음력으로 병술년 한 해도 역사 속으로 슬그머니 묻혀버리고 내게는 갑년이라는 아주 뜻 깊은 정해년 새아침 설날이 밝아올 것이다. 오늘은 남원의 고남산(846m) 일원이다. 고남산(高南山)은 남원에서 북동쪽이고 운봉 여원재에서는 북쪽으로 3km 지점에 우뚝 솟아올랐다. 지리산 인터체인지를 빠져나오니 대뜸 논밭에 눈이 허연 것이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대전과 이렇게 일기 차이가 있나 싶어진다. 산행기점인 여원재에서 하차하였다. 여기서 여원재 라는 유래를 잠시 더듬어보자. 고려 말에 침투한 왜군이 이곳에 살던 주모의 젖가슴을 만지작만자작 거리며 희롱했다.
수모를 당한 주모는 비분하여 부엌칼로 자신의 젖가슴을 도려내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이야기가 알려지자 한민족(韓民族)의 절개를 지킨 그녀의 정신을 높이 기리며 그 자리에 비석을 세우고 제각을 지었으니 여원재(女院峙)라 부르게 되었다. 그런데 목숨을 끊을 때 몸에서 흘러나온 물이 아래 마을 밭에서 자라는 풀을 쪽(藍)빛으로 변하게 하였다 하여 남평리라고 한다. 이 처럼 마을이나 고개 하나에도 나름대로 일화를 담고 있다. 산행은 마을길을 돌아 산자락을 타고 오른다. 오르는 길 내내 흙길로 바위 하나 없으니 경관은 변변치 못하다. 오로지 소나무만 빽빽하게 들어서 군락을 이루었다. 그렇다고 수령이 오래된 것도 아니다. 벌목 후 다시 일어서고 있는지 싱그러우나 너무 총총해 간벌이 필요하지 싶다. 경제성이 없는 만큼 손길이 쉽사리 닿지를 않는 모양으로 아쉬움으로 남는다. 낙엽지고 눈이 수북한 겨울엔 파랗게 얼은 하늘과 함께 소나무는 더 짙푸르다.
겨울산은 수시로 많은 변화를 가져온다. 같은 산자락이라도 한 쪽은 양지로 눈이 녹아 질척거리고 다른 한 쪽은 음지로 그냥 쌓인 눈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미끄러지기 일쑤다. 그뿐이랴 멀쩡해보여도 낙엽 속에 유리알 같은 얼음이 잠복하고 있다가 골탕을 먹이기도 한다. 참으로 조심하고 또 조심을 할 일이다. 그래서 하루에도 수없이 음지 양지를 오가면서 고통을 겪으며 색다른 체험을 하는 겨울산행의 야릇한 묘미를 느끼기도 한다. 정상에 산불감시시스템을 설치하여 산의 위엄이나 신령스러움을 지우고 있다. 아래에 헬기장이며 한국통신의 거대한 중계소시설까지 자리를 잡았다. 정상빗돌도 어인 까닭인지 오십 미터쯤 아래에 세워놓아 의아심을 갖게 한다. 그나마 권포리 쪽이 작은 분지로 펼쳐지고 물 빠진 갯벌처럼 엎드린 크고 작은 등성이마다 음양을 살려 눈이 덮여있는 모습이 사로잡고 조감도라도 보는 것 같아 잠시 아름다운 모습에 취하여 위안을 준다.
그 너머로 희뿌옇게 지리산 자락이 보이며 왼쪽으로 운봉의 바래봉이 있어 멀지 않은 봄을 기다리며 철쭉은 벌름벌름 설레는 가슴으로 힘을 북돋우고 있으리라. 도로를 건너 산자락을 타고 매요리 마을로 들어섰다. 도로 곁에 폐교가 된 초등학교 건물이 오늘 따라 초라하기 그지없다. 그래도 그간 수많은 출신들이 각지로 퍼져나가서 나름대로 힘껏 날갯짓을 펼치며 꿋꿋하게 자리매김하고 있을 터이고 가끔은 이곳을 떠올릴 것이다. 618봉을 올라서니 사치재에서 88고속도로가 맥을 끊어놓는다. 어둠침침한 작은 통로로 슬금슬금 빠져나갔다. 복성이재로 봉화산으로 계속 올라야 하지만 여기서 대간은 일단 멈춘다. 다소 거리가 짧고 볼거리조차 없어 좀은 싱거운 마음에 아쉬움을 안는다. 이처럼 백두대간이라고 심산유곡에 산줄기가 높고 빼어난 경관을 지니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우람하게 솟아서 늠름하니 꿋꿋하게 뻗어나갔다고 그냥 대간의 맥을 잇는 것도 아니다.
이번 구간은 그나마 고남산이 우뚝 솟아있다. 그러나 별나고 깜찍스런 바위라도 있어 마음에 각인되면 좋으련만 찾아볼 수 없다. 기껏 소나무나 가꾸고 있을 뿐 백두대간이란 이름값을 하기에는 너무 빈약하여 실망감을 안겨준다. 하지만 평범함 속에 비범함이 있고 모래 속에도 금이 묻혀있듯 그래도 백두대간 길목을 어엿하게 지키고 있음에야 나름대로는 그만한 역할에 자긍심을 품고 있을 터다. 썩어도 준치요 굶어도 양반이라 했다. 감명 깊게 다가서며 넉넉함이 있고 긴 것이 있고 특출 난 것이 있고 마음 설레게 하는 것이 있으면 상대적으로 부족한 것이 있고 짧은 것이 있고 뭔가 평범한 것도 있다. 모두가 저울로 단 것처럼 똑같거나 자로 잰 것처럼 고만고만하다면 오히려 너무 단조로워 금세 싫증나면서 그것이 그것이다 하지를 않겠는가. 다행히 자연은 같은 듯 결코 같지 않다. 뭔가 차별화를 하는 셈이다. 그만큼 개성을 지니고 기대하는 마음도 있는 것이다.
*. 2007년 02월 03일 입춘 전날 3시간 50분 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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