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고민, 왕의 지혜
경주 건천읍은 경주의 서북쪽 방향에서 영천시로 이어지는 지역이다. 전통적인 농업지역이지만 공단이 조성되면서 2차산업과 3차산업이 다양하게 공존한다. 금척리 고분군과 단석산의 마애불상, 여근곡, 석탑 등의 문화유적들이 신라시대의 화려한 역사문화를 자랑하고 있는 유서 깊은 지역이다. 신라 최초의 왕 박혁거세와 최초의 여왕이 된 선덕여왕과 관련된 전설이 서려있는 곳이이기도 하다.
신라를 건국한 박혁거세는 신의 나라 사람으로 표현되고 있다. 인간세상과 하늘나라를 드나든 것으로 기록되고 있지만 역시 인간으로서의 한계성을 탈피하지 못했다. 그는 인간세상을 잘 다스릴 수 있도록 금척을 선물 받았다. 그러나 중국에 빼앗기지 않기 위해 제대로 사용하지도 못하고 땅에 묻어야 했다. 이런 것을 보면 여지없는 하나의 약한 인간이었다. 금척리 30여기의 고분군 앞에 서면 왕의 깊은 고뇌가 느껴진다.
선덕여왕의 지혜가 번득이는 흔적도 건천에 있다. 여자의 음부를 닮은 여근곡이다. 지금도 멀리서 바라보면 지형이 꼭 그러하다. 신기한 일이다. 여근곡 맞은편에는 선덕여왕이 꽃놀이를 다녀간 부운지가 있다.
현실의 세계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스런 일들이 삼국유사와 역사서를 통해 기록으로 전하고 있다. 믿지 않을 수도 없게 흔적들이 눈앞에 존재하고 있어 혼란이 온다. 박혁거세가 금자를 묻어 두었다는 금척리 고분군, 선덕여왕이 지혜로 적군을 물리쳤다는 여근곡이 있는 건천읍으로 역사기행을 떠나본다. 신라시대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보물 용명리 삼층석탑과 신라시대로부터 명맥이 이어지고 있는 천연기념물 경주개 동경이의 내력도 함께 찾아 나선다.
◆박혁거세의 고민
경주시가지에서 영천으로 이어지는 국도변 건천읍 금척리에 30여기의 신라시대 고분이 무더기로 모여 있다. 사적 제43호로 지정된 금척리 고분군이다. 처음에는 50여기의 고분군으로 형성되어 있었지만 멸실되고 지금은 30여기가 12만7천406㎡ 부지에 밀집돼 있다. 고분은 외형상으로 원형토총이다. 원형토총 2기가 맞붙어 있는 표형분도 있다. 고분의 크기는 경주시내의 평지 고분들보다 조금씩 작다. 모두 적석목곽분으로 조성됐다.
신라 초기 박혁거세가 신비한 힘을 가진 나라의 보물 금척을 숨기기 위해 조성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하늘이 내린 지도자 박혁거세가 금으로 만들어진 자를 하늘로부터 선물로 얻었다. 금척은 아픈 사람들을 낫게 하고 죽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는 신비한 힘을 가진 신라의 보물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중국의 황제가 신하를 보내 금척을 빌려오라고 했다. 박혁거세는 금자를 보내면 다시 돌려받을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하고 신하들과 의논한 끝에 땅에 묻기로 했다. 50여기의 거대한 무덤을 만들고 누구도 알 수 없게 금척을 하나의 고분 속에 넣었다. 중국 사신은 빈손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금척은 묻은 사람이 죽자 신라에서도 위치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 없어져 영원히 묻히게 됐다.
박혁거세는 알에서 태어났다는 난생설화로 유명하다. 박혁거세를 왕으로 옹립한 육부촌장들은 모두 하늘에서 강림했다는 천강설화가 함께 전해지고 있다. 모두 신령스런 기운을 가진 사람이다. 그러나 60여년간 신라를 다스렸던 신령스런 힘을 가진 박혁거세도 중국에 저항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금척리 고분군들에 대한 신비는 풀리지 않고 있다. 아직 이 고분들에 대해 본격적인 학술적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1952년 국립박물관에 의해 파괴된 고분 2기가 조사돼 금귀걸이와 곱은옥 등이 출토됐다. 1976년 고분군 사이의 밭에서 소고분들이 발견되어 문화재관리국 경주사적관리사무소가 발굴했다. 1981년에는 민가 보수 중 파괴된 소고분들이 드러나 국립경주박물관이 발굴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발굴에서 고분들은 경주식의 적석목곽분으로 확인됐다. 세환식 금귀걸이 1쌍, 호박환옥 1점, 기타 철기와 토기 조각들이 출토됐다. 이러한 유물들은 경주지역 고분에서 출토된 것과 같아 축조시기도 대체로 경주고분군과 비슷한 시기일 것으로 추정된다.
고분군은 일제강점기에 도로가 가운데로 나면서 양분됐다.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고분군 발굴작업을 시도하자 10여일간 폭우가 쏟아지면서 일대가 물바다로 변해 발굴을 포기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어 신비스러움을 주고 있다.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신령스런 힘을 가진 금척에 대한 궁금증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마을이름도 금척리로 짓게 한 금척리 고분군 주변에는 개망초가 군락으로 피어 5월이면 장관을 이룬다. 박혁거세의 고민이 개망초 안개꽃으로 피어나고 있다.
◆선덕여왕의 지혜
경주 건천읍 신평리에 신라때부터 전해지고 있는 여근곡(女根谷)이라는 곳이 있다. 맞은편에서 바라보면 여성신체의 신비스런 부분을 닮은 계곡이다. 선덕여왕의 지혜가 전설로 전해지는 곳이기도 하다.
여근곡은 선덕여왕 5년 636년 여름에 영묘사 앞 큰 연못인 옥문지에 난데없이 두꺼비들이 모여들어 싸우는 일이 생겼다. 이를 두고 선덕여왕이 두꺼비의 눈이 성난 것같이 생겼으므로 병란이 날 조짐이라 해석했다. 이어 여왕은 알천과 필탄 두 장군을 불러 2천명의 군사를 주어 경주 서쪽에 있는 여근곡에 가서 백제의 복병을 치라고 지시했다. 두 장군이 여근곡에 이르니 백제의 장군 우소가 거느린 500여명의 복병이 있어 쉽게 물리쳤다. 이것은 옥문(玉門)을 여근(女根)으로 해석해 여근은 음(陰)이므로 남근(男根)이 여근 속으로 들어가면 토사(吐死)한다는 음양설을 인용 해석한 것이다.
건천사람들은 여근곡을 ‘소산’으로도 부른다. 지금도 여근곡에는 작은 샘이 솟고 있다. 여근곡의 샘을 휘저으면 주변 마을의 여인들이 바람난다는 속설도 전해지고 있다.
◆부운지 나왕대
경주시에서 영천으로 이어지는 산업도로를 달리다가 서라벌공원묘원으로 진입하면 마을 입구에 부운지라는 연못이 있다. 여곡이 바라보이는 맞은편이다. 부운지 남쪽으로 이어지는 언덕에는 주변 경관이 아름다워 신라 27대 선덕여왕이 찾았다는 전설이 서려있는 나왕대가 있다. 여왕이 나왕대의 봉우리에 오르자 갑자기 구름이 몰려와 주변 골짜기를 뒤덮었다. 선덕여왕이 머물고 있는 정자만이 구름 위에 떠있는 모습을 연출했다. 왕이 머물렀던 정자에 라왕대(羅王臺)라는 글자가 새겨진 좌대가 있었는데 지금은 도난당하고 없다. 마을 주민들이 모형을 본떠 부운지 제방에 복제품을 설치해 두고 있다.
선덕여왕이 다녀간 이후로 마을이름을 부운마을로 불렀다. 또 라왕대와 이어진 연못을 부운지로 부르게 됐다. 부운지에는 최근까지 연꽃이 없었다. 1998년 준설작업 이후 하나씩 생겨난 연꽃이 지금은 연못 80%를 뒤덮고 있다. 신라시대 연꽃들이 저수지 바닥에 가라앉았다가 준설로 다시 살아났다는 것이 주민들의 추측이다. 천년 만에 잠들었던 연꽃이 다시 부활해 꽃을 피우는 것이다. 지금 부운지 주변은 연꽃과 더불어 천연 자생 꽃들이 어우러져 사진촬영 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용명리 삼층석탑
경주 용명리 마을 깊숙한 곳에 깨끗하게 생긴 삼층석탑이 있다. 신라시대 조성된 높이 5.6m 석탑이다. 2층 기단 위에 3층으로 탑신부를 형성한 통일신라시대 석탑으로 보물 제908호로 지정됐다. 석탑 주변에는 ‘용명사(龍明寺)’라고 불렸던 절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절터에 민가가 들어서면서 절의 흔적을 확인할 수가 없다.
옛날에는 마을이름이 명장리(明莊里)였고 석탑의 이름을 ‘명장리 삼층석탑’이라고 불렀다. 용명사라는 절 이름 역시 확실한 것은 아니다. 절터를 ‘명장사터’라고도 부르지만 역시 확실하지 않다.
석탑은 2층의 받침돌 위에 3층의 탑신부를 올린 일반적인 석탑이다. 받침 부분에 약간의 손상이 있을 뿐 거의 완전한 상태이다. 받침돌은 여러 장의 돌로 구성되었다. 위아래 받침돌 모두 2개의 모서리 기둥과 가운데 기둥이 새겨져 있다. 탑신부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구성되었다. 지붕돌의 층급 받침은 5단으로 신라 석탑의 전성기 때 양식이 그대로 반영되었다.
상륜부는 복발, 앙화 등의 머리장식을 받치는 3층 지붕돌 위의 노반만 남아 있고 그 이상은 없어졌다.
석탑은 1943년에 해체 수리되었다. 당시에 탑신부에서 불경이 발견되었다고 전하지만 현재 누가 보관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불경은 통일신라시대나 고려시대에 이루어진 사경으로 짐작된다. 석탑 안에는 사리장엄이 봉안되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장엄구의 행방 역시 알 수 없다. 이 석탑은 각 부재의 결구 수법이나 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에 성행한 원당과 같은 성격의 사찰에 건립된 석탑으로 추정된다.
◆천연기념물 경주개 동경이
경주 건천읍 용명리 삼층석탑이 있는 탑골 용명마을이 2014년 동경이 마을로 지정됐다. 천연기념물 540호 동경이 연구소가 마을 가운데 들어섰다. 동경이는 꼬리가 없거나 짧은 특징을 가진 용맹하고 영리한 개로 삼국사기, 동경잡기, 증보문헌비고 등의 자료에서 신라시대부터 키워지던 순수 토종으로 분류 소개되고 있다. 진돗개와 풍산개, 삽살개가 지역을 대표하듯 동경이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면서 경주지역 명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동경이는 옛 문헌에 자주 등장하면서 신라고분에서도 토우로 발굴되는 등 그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크다. 토우와 함께 황남동 고분에서는 멧돼지와 싸우고 있는 모습의 동경이도 출토됐다. 현재 경주에서 사육되고 있는 경주개 동경이는 단미(短尾), 무미(無尾)를 특징으로 하는 문헌 기록과 외형적으로 일치하고 있다. 유전자 분석결과 한국 토종개에 속하는 고유 견종으로 밝혀져 2012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아울러 경주개 동경이는 개체 이력관리, 질병관리, 번식관리, 혈통관리를 위한 시스템 구축과 운영 등 체계적인 보호 관리를 통해 300여 마리가 사육되고 있다. 사)한국경주개동경이보존협회가 설립돼 연구와 보존을 위한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보존협회는 연구와 홍보활동을 동시에 펼치고 있다. 2014년에는 뽀빠이 이상용을 동경이 홍보대사로 위촉했다.
동경이는 아직은 개체수가 많지 않아 일반에 분양되지 않고 있다. 동경이 사육마을로 지정된 용명리에서 일부주민들이 분양받아 사육하고 있으며 용맹하고 현명해 치료도우미로도 우대받고 있다. 용명리 동경이마을에 들어서면 우뚝 선 삼층석탑과 함께 벽마다 꼬리가 짧은 동경이 그림이 그려진 모습을 볼 수 있다. 동경이의 힘찬 목소리가 한적한 시골마을에 기운을 불러일으키며 신라시대로 초대한다.
(2016.10.10)
첫댓글 지혜로운 왕의 선택으로 백성이 행복했던 그때처럼
대통령의 지혜로운 선택을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