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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산과 연산동고분군,역사, 시편,탐방팀
학창시절의 그 열정으로 탐구하고 살자!
배산은 높은 산이 아니다. 256m. 연제구와 수영구의 경계가 되는 산이다. 그러나 알찬, 역사가 오롯하다.
➡️ ️이재익 <봄날 배산에 오르다>, <봄날 배산에 오르다>2
황령산 방향
연제구 방향
연제구 방향
동쪽 용화보궁/ 서쪽 멍에정 / 남쪽 망해정 / 북쪽 잔메정 등 정자가 여럿 있다.
멍에~ 잘룩한 고개 모습이 소의 목에 걸쳐서 쟁기나 수레를 끌 수있게 하는 꾸루러진 나무 도구를 말한다.
배산성지 발굴 현황
좌측 금련산(415) 가운대와 오른쪽 황령산(428)
광안대교
벚꽃 필 무렵 황령산(428m)
동국여지승람에는 누를황(黃)자 황령산, 동래부 읍지에는 거칠황(荒)자, 황령산
연산동 고분군 18기.
5세기 후반 부터 6세기 전반 무덤.
왕릉은 아니고, 이 지역 세력가 토호들의 무덤
복천동 고분 보다는 시기가 늦다. 복천동 쪽이 다 소진된 후에 여기로 옮겨 사용한 것 같다.
3호분이 크게 보인다,.
연산동고분군
일제시대도 발굴이 있었고, 근년에도 오랫동안 발굴이 있었다. 2017년에야 다시 정비됐다. 아직 존재를 모르는 시민들이 많다.
동래의 역사
동래東萊는 삼한시대 변진독로국弁辰瀆盧國의 옛터로서 신라에 병합되면서 거칠산군으로 되었다가 신라 경덕왕 16년(757) 동래군으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東萊라 함은 동쪽의 내산萊山을 말하는 것으로 이는 신선이 산다는 봉래산蓬萊山의 약칭으로 풀이되고 있다.
고려 현종 9년 (1018) 동래현으로 되었다가 조선 태조 1년(1392) 동래진이 되었으며, 명종 2년 (1547) 국방과 대일외교의 중요성을 인정하여 도호부로 승격되어 당상관인 정3품 문관이 목민관으로 부임하였다.
그 뒤 임진왜란 최초의 패전지라는 이유로 일시 현으로 격하되었다가 선조 32년 (1599) 다시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일제 침략기인 1910년대 행정구역 개편으로 동래부는 동래군으로 되었다가1942년 부산부에 편입되어 동래출장소로 개편되었다.
지금의 동래구는 1957년 부산시 동래구로 행정구역이 개편된 후 급격한 도시발전에 따라 남구, 해운대구, 금정구, 연제구, 수영구 등이 분구됨으로써 면적이 많이 축소되었으나 부산역사의 중심축으로서 그 뿌리를 그대로 이어오고 있다.
연산자이아파트
벚꽃 필무렵
배산 정상이 보인다.
배산 정상이 보인다.
봄이 무르익는다.
까치들의 놀이터. 무엇을 먹는지. 열심히 쪼아먹는다.
<봄날 배산에 오르다> 2
이재익
배산의 북서쪽 용머리 내미는
연산동 고분군으로 오른다.
풍만한 젖가슴 사이로
그대의 입술을 바라보듯
고분 사이로 흐드러진 벚꽃을 바라본다.
이래도 봄을 그냥 보낼거냐고
다그치며 꽃들의 군단이 다가온다.
아. 북망산천 욕망산천 이리도 가까운가?
질경이 민초 무심히 역사의 자드락길 거닌다.
여기 백골진토 이 분들 우리 선조들
향토개척 그 터전 위에 번영있다네. //
초록색 배산 둘레길 . 약 2km. 40분
참나무 신록이 싱그럽다.
아카시아 나무 기형모습
때죽나무꽃(추은수)
봄이 무르익는다.
홍가시나무 새순이 단풍처럼 붉다.
꽃창포가 피는 5월
토끼풀, 클로버
배산의 남쪽 기슭에 위치한 부산남일고등학교 교정의 <진리탐구>비.
학정 이재익 시인은 1999년 부터 6년간(2005년 2월까지) 청춘을 받쳐 이 학교에서 근무했다.
그 당시(2001년 경)에 배산을 관찰하고 배산의 역사를 읊은 학정 이재익 시인의 시다.
<봄날 배산에 오르다> 는 이재익 제1시집 < 함께 가는 길> 에 실려있다.
1. 토성이다 석성이다 학술적 논란은 중요하지 않다. 모두 허물어졌다는 데 비애를 느낀다.
2. 동래지역 부족국가 시대 거칠산국 유적으로 보았다.
3. 고려시대 선인 김겸효가 살았다. 배산일대의 아름다운 경관은 겸효대로 알려졌다.
겸호대는 부산 8대에 속한다.
* 부산 8대 ; 해운대, 태종대. 오륜대, 몰운대, 의상대 (범어사), 강선대(사상), 신선대(신선대 부두 위, 오륙도 부근), 그리고 연제~수영구 배산의 겸효대
4. 망미동~토곡~연산동 일원의 큰 도로는 과정로, 토곡~수영강변은 고려 정과정곡을 지은 정서의 귀양처.
정서가 배산에 올라와서 수도 개경을 향하여, 의종 임금에게 망배를 올렸다고 추정한다. 따라서 정과정곡을 이 산에 올라와서 구상했다고 보았다. 의종은 끝내 이모부인 정서를 풀어주지 않았다. 결국 무신의 난으로 의종이 귀양가고 난 후에 20년 만에 풀려났다.
5. IMF구제금융시대 2000년대 초기에 많은 실직자들 취로사업으로 연제구와 수영구 주민 수백명이 이 산을 가꾸는 데 투입되는 것을 관찰했다. 그들은 정자도 짓고, 나무 가지치기도 하고, 길도 내면서 산을 가꾸었다.
그들의 한이 서려있는 이 배산이다.
"햇송순이 뼘을 웃자란 어린 소나무
가지친 덩그란 윗둥과 ~"
세상에 대한 한풀이로 어린 소나무 조차 가지치기를 한 모습이 윗둥만 덩그랗게 남겼다. 나무에게 분풀이라도 한 것처럼~
거칠산국도 신라 거도 장군 속임수 작전으로 망했고, 억울한 누명으로 20년간이나 귀양살이를 한 정서의 한과, 취로인부들의 한이 서려있다. 그 한은 저 광안대교의 멋진 현수교 다리가 쭉~욱 뻗어서 다 풀어주고 있었다.
정서의 정과정곡
내 님믈 그리자와 우니다니 산접동새 난 이슷하요이다.
아니시며 그츠르신 달 아으 잔월효성(殘月曉星)이 아르시리이다.
넉시라도 님은 한데 녀져라 아으 벼기시더니 뉘러시니잇가
과(過)도 허물도 천만(千萬)업소이다. 말 힛마러신뎌 슬읏븐뎌 아으
니미 나를 하마 니즈시니잇가 아소 님하 도람드르샤 괴오쇼서.
뜻을 새겨 풀어보면
우리 님을 그리워하여 늘상 울고 있는 나는
저 접동새(두견새)와 비슷도 합니다.
참이 아니고 거짓으로 꾸민 것인 줄을
아! 저 새벽 하늘에 비쳐주는 조각달과 샛별만은 알고 계실 것입니다.
넋이라도 우리 님이 계시는 곳에 가고 싶습니다.
아! 우기시던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지나친 일도 허물도 나에게는 털끝만도 없습니다.
뭇사람이 시기하여 남을 참소하는 말이신데 슬픕니다.
아! 우리 님이 나를 이미 잊으셨습니까?
아 우리 님이시여 나의 이 간절한 마음을 들어 주셔서
제발 나를 전과 같이 사랑하여 주시옵소서.
정서 그 분은 누구인가?
1. 동래정씨 시조는 정문도이다. 양정 하마정, 화지공원에 묻혔다. 동래지역 호족이다.
(* 정묘사 세계표에는 정문도 부는 지원, 조부는 회문이다. 안일호장 정회문이 동래정씨 시조로 돼있음)
2. 고려 중앙 정계 등장의 시작은 아들 대 정목이 중앙에서 과거에 급제하여 정3품 까지 오른 분으로 첫 벼슬이다.
3. 정항은 정목의 아들로 종2품까지 올라갔다.
4. 정서는 정항의 아들로 문음(5품이상 귀족자제가 과거 없이 관직에 나아갈 수 있는, 소위 아빠 찬스) 로 5품 내시낭중이 되었다. 그보다도 인종의 동서가 되었던 것이 중요하다. 인종의 왕후 공예태후의 여동생 남편이 된 것이다.
잘 나가다가 어려움을 겪었다. 인종의 아들 의종이 즉위했기 때문이다.
의종은 좀 모자라는 인물이었다. 왕제 대녕후 경을 받드는 모반사건이 일어났는데, 정서도 가담됐다는 누명이 씌워졌다.
의종은 이모부인 정서에게 말했다 "잠시 고향 동래에 가 있으면 곧 풀어드리리다." 그러나 끝내 풀어주지 않았고 망미동 수영강변에서 거쳐하며 정과정곡을 짓게 된 것이다.
5. 이 노래는 처음 악학궤범에서는 <삼진작>이라고 불렸고, 나중에 후세인이 <정과정곡> 이라고 고쳐 불렀다. 고려가요는 대개 작가를 알 수없는데. 정과정곡은 작가를 알 수있고. 그 제작 동기를 알 수있는 유일한 노래이다.
6. 20년 후 1170년 무신의 난이 일어난 후, 의종이 몰락하고나서야 풀려났다.
7. 정서가 간지 어언 800 여 년의 긴 세월이 흘렀다. "인생인 짧고 예술은 길다" 는 명구가 실감난다.
별 하나 하나 마다 추억, 사랑, 쓸쓸함, 동경, 시~ 관념에 젖다가 결국 별을 보고 어머니 어머니가 문득 보고싶군요.
처지가 무척 어려운가 봐요. 누구나 사람은 모두 어른 아이!!
산벚나무가 낸 길을 차마 갈 수 없을 정도로 엄숙하고 성스럽게 봅니다.
▼ 재편집
사람이 하늘 만큼 위대하기도 하고~ 차마 사람 아닌 사람은 아예 제끼고 하는 말.
멀리 있어도 영혼이 서로 섞여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도 있지요.
인생만사가 새옹지마라~
차달숙 이 분은 학정의 지인이다.
이제 오느냐? 밥은 먹고 다니냐? 따뜻한 이불 밑에 손을 넣어라.
그 정겨운 말 어디서 더 들을지?
고향도 변하고, 고향사람도, 부모님도, 다 가신 지금~
그저 마음만 아립니다.
거칠산국, 정서, 겸효대~ 학정의 시와 통하는, 역사가 묻어 납니다.
주민의 시라서 전문 시인은 아닐 지라도, 광안리 해수욕장 등 애향심이 덤뿍~ 정겹다.
아! 배산 겸효대 애향심이여, 배산의 빛은 작지 않다. 시민의 건강 휴식처,
본 시인의 장황한 이 자료제작도 배산의 빛을 얘기하려 한 것이다.
진달래 향기, 보리 냄새, 아름다운 나비, 종달새, 배꽃, 그리운 생각, 이런 것들 봄의 빛깔과 노래로 배열했군요.
들릴 듯 말 듯 그 노래는 무슨 노래일까?
자기가 듣고 싶은 그 음성, 노래, 그 모습이지요. 지금은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먼 곳의 그 음성 그 노래 소리들이 화려한 봄날을 침착하개 만들어 줍니다. 중심을 잡아 줍니다.
해설피~ 해가 저물 무렵 / 해저물 무렵 풀뜯고 배가 부른 소가 이유를 알 수없는 긴 울음소리를 뱉지요. 지나고보니 그 소리 마져 마음을 울리는데 하물며 아버지, 아내. 가족이야 오죽 그리웁겠습니까?
잘 안보이는 부분, 하늘에는 [성근]별 , 새벽이 오는 군요. 서리까마귀는 가을 까미귀.
탐방팀 기념촬영
잠시 실례, 기념 사진만 찍겠습니다.
황사가 심한 날이다.
오둑하니 혼자 앉아서!
수직감이 돋보인다.
학정은 열심히 설명한다.
학정은 열심히 설명한다.
15분이 30분이 되고~
가만, 어디 보자!
광안대교
1. 광안대교는 1994년 동아건설이 착공했다. 부도가 나서 몇 년 중단 됐다. 삼환기업이 인수해서 완성했다.
2. 광안대교는 총 7,420m. 현수교 부분은 당시 국내 최장인 900m. 다리 양쪽 접속교는 4,678m.
3. 우람한 주탑 기둥은 그 높이가 116m(기초와 해수면 위 7m 포함)
4. 국내 최초의 해상 2층, 왕복 8차선 교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