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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동문화연구회 홈페이지 사이버서당 한학자열전1 (2008.6 / 동년 9.26일 보완)
心齋 趙國元先生 行錄
- 박람강기의 고전학자
심재선생은 필자의 外祖考이시다. 국학계에는 선생을 자주 뵙던 선배들이 여러 분 계신다. 이 글을 쓰기에 앞서 이 분들을 뵙고 넉넉히 취재하여야했으나 그러지 못하였다. 결국 필자가 아는 만큼만을 옮길 수밖에 없으니, 매우 송구한 일이다. 그런데 필자가 더욱 망설이는 이유가 있다. 생존 시의 선생을 회고하면, 이름 석 자를 남기지 않으려고 애쓰시던 분이 아니었던가 싶을 정도로 당신 자신을 내세우지 않으셨다. 때문에 이 글이 과연 선생을 위한 일인지 주저되는 것이다. 다른 한편에는, 이 글이 아니면 선생 같은 분이 계셨다는 것을 알릴 기회가 없겠다는 생각도 함께 교차한다. 그리하여 송구함을 무릅쓰고 이 글을 내보인다. 선생에 대하여 필자가 알지 못하는 것이 많다. 선배 제현들이 이어서 바로 잡아 주시기를 간청한다. - 안병걸
(사진제공 : 한국고전번역원)
1.
선생의 자는 士禎이고 별호는 心齋이다. 1905년 4월 14일(음력)에 출생하시어 1988년 5월 20일,84세로 세상을 떠나셨다. 출생지는 경기도 용인군, 에버랜드 북쪽 초입에서 가까운 포곡면 유운리 송골에 舊址가 남아 있다. 1930년을 전후하여 선영 가까운 안성군 삼죽면 동평리로 옮겨가서 몇 해를 지내시다가, 1938년에 충청도 공주로 이거하셨다. 해방 뒤에는 수원 신풍동을 거쳐 서울 흑석동, 서교동, 망우동, 반포동 등지에서 몇 해씩을 거주하셨다.
선생의 본관은 漢陽이다. 인조 효종 연간에 대제학에 이조판서를 거쳐 판중추부사에 오른 龍洲 선생의후손이다. 용주공의 6대손인 휘릉참봉 趙錫耇공은외아들趙濟賢공이아들을두지못하고일찍세상을떠나자, 족손 인식을 아들의 養子로 삼아 가문을 잇게 하였다.
趙寅植공(1830~1911, 호는 錦湖)은 1848년 19세 소년으로 進士가 되어 일문의 촉망을 받았다. 성균관에서 이 분은 오늘날의 학생회장에 해당하는 掌議의 소임을 맡았다. 老論 閥閱이 좌지우지하던 그 시대에 南人 출신 儒生으로서는 아주 드문 일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얼마 뒤 養祖考, 祖妣와 養母, 생가 모친의 喪故가 연이었고, 그 때마다 禮制를 마치느라고 大科에 응시할 시기를 놓쳤다. 금호공 또한 아들을 두지 못하여 生庭 조카 鍾綸(1868~1949, 호는 梳洲)을 양자로 삼았는데, 선생은 소주공의 2남 2녀 중 장남이다. 그런데 선생의 아우 澤元씨는 다시 소주공의 생가로 출계하였고, 이 때문에 선생은 이 가문의 7대 獨子가 되었으니, 댁은 참으로 자손이 귀한 가문이었다.
선생의 양조고 금호공은 고종 때에 이조판서를 지내고 輔國崇祿大夫의 자품을 받은 性齋 許傳선생의 조카사위이면서 문인이다. 금호공의 배위 陽川許氏는 許輔國丈의 계씨인 진사 許儔공의 無男獨女인데, 일찍 양친을 여의고 백부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자녀가 없던 보국장은 이 조카따님을 친자식처럼 길렀다고 한다. 금호공은 星湖 李瀷선생, 順菴 安鼎福선생, 下廬 黃德吉선생, 性齋선생 등, 朝鮮後期以來 京畿지방에 면면히 이어온 南人實學系列의 文翰을 이었다.
2.
선생 댁은 본래 서울 南山 아래에서 舊韓國 末期까지 世居하였다. 그러나 선생이 태어나기에 앞서 田庄이 있는 龍仁으로 이거하였다. 어수선한 시국을 피한 것이라고 한다. 이때의 이주를 결행한 선생의 부친 소주공은 大東亞戰爭 시기 日帝의 집요한 회유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創氏改名을 拒否하였고, 해방 뒤인 1949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도 保髮을 하였던 꼿꼿한 어른이셨다.
이 가문은 살림이 매우 유족하였다. 필자의 先妣 말씀에 의하면, 한해 소출이 육백 석 정도였다는데, 농지가 넓지 않은 경기지방에서는 이 정도로도 천석꾼으로 불렸다고 한다. 살림이 넉넉한데다가 소주공은 度量이 매우 넓은 분이었다. 용인 유운리 송골 댁에는 雲松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는데, 사랑채에는 늘 손들이 끊이지 않았다. 京鄕의 過客들이 자주 찾아왔고, 용인 광주 이천 등 인근 지역에 사는 姻婭親族들의 회합장소였다. 구한국에서 承旨 벼슬을 하였던 李寀공, 寒梅라는 별호를 가진 趙漢元공, 진사 安鍾曄공, 진사 丁大升공등가까운문중어른들이며칠씩묵으면서고사를담론하고시문을주고받았다.
이런 분위기에서 성장한 선생은 자연스럽게 예전 문물을 익히 들었다. 선생은 소시부터 한번 보고 들은 것은 오래 기억하였고, 게다가 書法을 매우 좋아하였다. 歐陽詢과 黃山谷의 書體를 익혔는데 사랑어른들이 풍월을 읊으면 이것을 받아 기록하는 일은 소년 심재의 몫이었다.
선생은 소시에 족친인 寒梅丈에게 배우다가, 조금 자란 뒤에는 郭先生이라는 분을 독선생으로 모셨다고 한다. 이 분은 嶺南 분으로서 舊韓末의 마지막 文科에 及第하여 벼슬살이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분을 모시고 공부하기는 혼인을 하신 13세까지였다. 이에 앞서 소년 심재는 지금 용인 구성면에 있는 龍仁鄕校의 백일장에서 장원을 차지하였는데, 그때 소년 심재를 눈여겨 본 參奉 沈雲倬공이 사위로 삼았다고 한다. 선생의 장인 참봉공은 인조임금 때의 간관으로 이름난 汎齋 沈大孚공의 후손인데, 삼천 석의 재산을 가진 당시 용인고을 제일의 거부였다.
그런데 이 시기는 1917~8년경으로서 大韓帝國이 衰亡한 지 7~8년이나 지났던 때였다. 세상이 바뀐 지 오래되었으므로 옛 학문은 사회적 효용이 없어진지 이미 오래 되었다. 그러나 선생은 서울 가까운 곳에서 생장하였으면서도 신학문은 하지 않으셨다. 실상 신학교에 전혀 다니지 않으셨던 것은 아니다. 평생 보발 하셨음에도 소주공은 작은 아들 택원씨를 中東學校에 입학시켰는데, 이때에 선생도 아우와 함께 다녔으나, 한 달여 만에 다시 고향으로 되돌아가셨다고 한다. 당시 이 학교의 崔奎東교장은학생들에게선생을소개하면서, “이미 공부를 많이 한 선생님 같은 학생이니 각별히 지내라.”고 하였다고 한다. 택원씨는 뒤에 신문학에 참여하여 일시의 문단에 이름이 났었다고 한다.
그러나 선생은 독학으로 일본글이나 영어를 깨우쳐 영어책이나 일본책을 읽어 냈다고 한다. 안성 동평리 평장굴에서 사실 때에도 서울은 물론 중국 상해 일본 등지에서도 책과 잡지를 주문하여 받아 읽곤 하였다.
(보완: 최근 인터넷 자료를 통해 확인한 것이 있다. 1928년 7월의 중외일보 기사인데, “조가 형제들의 갸륵한 교육열”이라는 제목 아래에 안성군 삼죽면 동평리에 사는 조국원, 택원 형제가 자택에 마을 청년들을 모아 글을 가르친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이 분들이 무엇을 가르쳤는지는 더 자세한 기사가 없어서 알 수 없으나, 청년기에 들어선 선생 형제분이 마을의 청년들을 대상으로 계몽교육활동을 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때문에 일경의 감시 대상이 되어 주재소 순경들이 이따금씩 찾아와 일없이 둘러보곤 했다는데, 한번은 그들이 떼로 들이닥쳐 집안 구석구석을 뒤지고갔던 일도 있었다고 한다.
필자의 선비 자매분들의 추억에 의하면, 안성 평장굴에서도 제택의 규모가 작지 않았다. 선생은 화초 가꾸기를 즐기셨던 부친 소주공을 위하여 서울이나 상해, 동경까지 신품종의 씨앗과 화초재배법을 적은 신서적을 주문하여 드렸다고 한다. 모친 순천김씨를 위하여 신소설들을 구하여 드렸는데, 글을 읽어드리기는 따님들의 일이 되었다고 한다. 일본 강점기 마지막 시기에 소학교를 다녔던 선생의 작은 따님 炳和씨는 학교에서 한글을 배울 기회가 없었으나, 당신 할머니에게 글을 읽어 드리면서 한글을 익혔다고 한다.
온갖 화초들이 무성했던 바깥사랑채 마당에는 芭蕉가 여러 그루 있어서 여름날이면 제법 무성하였는데, 어른들이 풍월을 읊다가 혹간 佳作이 나오면, 흥에 겨운 선생이 붓을 들고 마당에 나가, 시원하게 벋은 파초잎에 싯귀를 적어두었고... 먹물이 채 마르기 전에 소나기가 시원하게 내려면, 이파리에 적어둔 글이 빗물에 씻겨 내려가는... 그런 그림 같은 정경들을 필자의 선비는 소시에 익히 보았다는 말씀을 하였다.
3.
선생은 삼십대에 접어든 1938년에 公州로 옮겨가 사셨다. 鄭鑑錄에서 말한 십승지의 한 곳인 鷄龍山에서 가까운 공주는 전통적인 교육도시였으므로, 자제들의 교육을 위하여 이거하였다는 것이다. 당시 그곳에는 大韓帝國에서 檢事를 지낸 權丙勳선생이살고계셨다. 權檢事丈은 세간에 널리 알려진 字書 《六書尋源》의 저자이다. 권검사장은 선생의 부친 소주공의 벗이었고, 선생은 이 분의 자제 權重岳씨와 절친하였다. 또 이웃에는 당시 공주중학교 교장이던 東橋 閔泰植선생이계셨다. 이 분은 선생보다는 택원씨와 가까웠다고 한다. 필자가 대학원생이었을 때 동교선생을 뵙고 인사드리자, 선생님은 “자네가 外家를 닮았으면 재주가 좋을 텐데.” 라고 하시면서 필자를 유심히 보시던 기억이 난다.
신학문을 익힌 일도 없었고, 용인, 안성, 공주 등 지방으로 옮겨 다니면서 거주하셨으나, 선생이 서울출입을 전혀 하시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해마다 가을걷이를 마치면, 이 어른은 늘 서울 걸음을 하셨다. 종로 운현궁 근처 雲堂旅館에 숙소를 정하고, 吳世昌씨등서화명가들에게작품을청하셨다. 중국산 화선지를 축으로 구입하여 서화가들에게 넉넉히 보내시면, 이 분들이 서화 작품을 제작하여 보내왔다. 두어 달 뒤 서화 명품들을 두루마리로 지니고 댁으로 돌아와 부친께 보여드리고 자녀들에게 일일이 설명해 주셨으며, 일부는 출계나간 아우와 혼인한 누이들에게도 나누어 주셨다. 당대에 이름 있던 서예가 金敦熙나 金台錫 같은 분들도 지나갈 일이 있으면, 선생 댁 사랑에서 여러 날 머물면서 기념 휘호를 남기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즈음에 절친하게 교유한 분들이 있다. 月峰 韓基岳선생, 平洲 李昇馥선생과爲堂鄭寅普선생등憂國志士들이다. 월봉과 평주는 당시 언론계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였던 명사들인데, 이 분들은 공히 기호지방 남인명가의 후예들이므로, 선생 댁과는 십수대 이전부터 世誼가 있었다. 위당은 당시 延禧專門學校 敎授로 재직하면서 新朝鮮社에서 국학 관련 선현의 저작들을 편찬 발간하였다.
어느 날 선생이 신조선사에서 위당을 만나던 중에, 尹白湖의후손윤신환이라는노인이그곳을찾아왔다고한다. 통성명을 마친 뒤에 위당이 다시 노인에게 정중하게 절을 하자, 노인이 눈물을 주루룩 흘렸다고 한다. 그 광경을 본 선생은 수백 년 묵은 백호가문의 통한을 실감하셨다고 한다. 신조사에서 《與猶堂全書》를 편찬할 즈음에는 애국시인으로 유명한 李陸史를만났었다고한다. 8. 15 해방 뒤 反民特委 委員長 시절, 위당은 선생에게 흑석동으로 이사할 것을 권유하였고, 이후 선생은 6.25전쟁으로 위당이 납북될 즈음까지 몇 해를 이웃에서 사셨다고 한다.
필자가 어른들께 들어서 알고 있는 해방 이전 선생의 생활은 이 정도이다. 신학문을 익히지 않았으므로 달라진 세상에서 쓰일 일이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創氏하라는 압력을 끝내 이겨내었고, 그 윗대 소주공은 평생 보발 하였던 꼿꼿한 가문의 젊은 가장이었으므로, 설혹 부르는 곳이 있었더라도 선생은 결코 가벼이 나가지 않으셨을 것임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삼십대 왕성한 즈음의 선생은 속마음까지도 한가로울 수는 없었다. 당시 선생의 고뇌를 짐작할 수 있는 글이 있기에 소개한다. 35세인 1939년 가을에 공주에서 찍은 사진 뒷면에 적어두신 글인데, 제목은 <길고긴 생각 長相思>이다.
생각이 길고 긴데 思悠悠
한도 따라 끝이 없네. 恨悠悠
그대 얼굴 대하니 자약할 것 같다마는 渠對渠顔應自若
성년은 한번 가면 돌이킬 수 없다네. 盛年去不回
나아갈 방법 없고 進無謀
물러날 방도 없네. 退無謀
떠도는 반평생 죄수 같은 신세여 流落半生悲楚囚
하늘을 탓하리, 사람을 허물하리. 天人更孰尤
이즈음의 선생은 신학문을 하지 못한 울분에, 당신 부친 소주공에게 눈물을 흘리면서 항의한 적도 있었다. “시대가 바뀌었음에도 왜 학교를 보내지 않고 시골에서 監農이나 하게 두시냐.”고 말이다. 이에 대하여 소주공은 “이런 난세에 어찌될 줄 알고 내보내겠느냐.”고 하셨다는 것인데, 소주공은 험난했던 당세를 피하여 일찍부터 서울에서 용인으로, 다시 안성을 거쳐 공주로의 이주를 결행하셨던 어른이었고, 선생은 자손이 귀한 이 가문의 7대 독자였던 것이다.
4.
선생은 사십대에 접어들면서 8.15 해방을 맞았다. 일제의 압정으로부터 풀려난 해방은 분명 우리나라의 거족적인 경사였다.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선생의 따님 한 분은 여학교에 진학을 하지 못한 일도 있었으니까, 일제로부터 벗어난 해방은 분명 기쁜 일이어야 했다.
그러나 선생의 가문은 그것을 넉넉히 맛보기도 전에 큰 고통을 겪어야 했다. 우선 삼천리를 뒤흔든 左右翼 葛藤이다. 선생의 아우 택원씨는 진보진영에서 활동을 하였다는데, 요동치는 이념의 파도에 휩쓸려 非命에 세상을 떠났다. 이때까지의 선생은 사랑에 앉아 글만 읽던 선비였다. 그러나 선생도 그 時代의 激浪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즈음에 선생이 각별하게 교유하였던 벗 두 분이 더 있었다. 一觀이라는 별호를 가진 李碩鎬씨와一洲金振宇씨이다. 일관은 일제 강점기의 조선미술전람회에서 각기 그림과 글씨 모두 특선을 하고서 미술계에서 활동하였고, 대나무를 잘 그리는 화가로 이름난 일주는 본디 金殷鎬의 제자였다. 그러나 그 스승이 친일행각을 하자, 절교하고는 두 번 다시 출입하지 않았다고 한다. 서화가로서 민족의식이 아주 강했던 것이다.
그런데 일관과 일주 두 분은 모두 사회주의자들이었다. 일관은 육이오 뒤에 월북하여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북한 미술계의 대표적 작가로 활동하였다. 일주는 해방 즈음에 夢陽 呂運亨선생을 도와 建國準備委員會 일을 하였다. 《心山 金昌淑 評傳》에는, 해방 직후에 일주가 몽양과 심산의 합작을 위해 애썼던 것을 알 수 있는 기록이 있다. 일주는 결국 정부 수립 뒤에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중, 육이오가 터지자 이내 총살을 당하였다고 한다.
선생은 일주와 일관 두 친구 분의 작품 여러 점을 가까이 두고 계셨으므로, 필자는 그 말씀을 비교적 자주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분들과 교유하였던 당시인 해방 전후 선생의 활동에 대하여는 실상 직접 말씀하신 것이 없다. 그러므로 아래에 적는 것은 집안 어른들로부터 들은 말씀을 토대로 유추한 것이다.
해방 직후 선생은 일주를 통하여 몽양과 만났고, 이로부터 공주의 건준 지회에서 일을 하셨다. 그러나 몽양이 좌, 우익 양 편에서 배척을 받으면서 건준 활동 또한 無爲로 돌아갔다. 지방의 건준 조직도 좌익인 人民委員會가 접수하면서 우익과의 갈등이 더욱 심하여졌는데, 본디 지주계층인 선생은 급격하게 변해버린 상황에 큰 좌절을 겪고는 이내 정치 활동에서 손을 떼었다고 한다. 그 과정에는 단 몇 줄의 글로는 도저히 담을 수 없을 정도의 극심한 고뇌와 복잡한 갈등, 몸과 마음의 심각한 좌절이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당시 소학교를 다녔던 선생의 작은 따님 炳和씨는, 공주 집 마당에서 건너다보이는 鳳凰山을 오래 바라보며 근심에 가득차 있던 선생의 모습을 자주 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당시의 사정을 선생께 직접 들은 바가 없으니, 더 이상 자세히 적을 자료가 없다.
공주에서의 건준 활동은 선생이 참여하였던 최초의 사회활동이었다. 그러나 몽양의 좌절과 더불어 실패를 본 것이다. 이후 좌익과 우익이 살벌하게 대립하였지만, 남쪽의 정국은 갈수록 우익에게 유리하게 진행이 되었으니, 선생의 처지가 매우 불안하였을 것이다. 사랑에 팔십 고령의 부친 소주공이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선생 댁이 공주를 떠나 수원으로 이주한 원인의 하나가 바로 이것이었을 것이라고 필자는 짐작한다. 그러나 선생 댁을 더욱 힘들게 한 것은 李承晩政府에 의해 진행된 土地改革이었다. 대대로 전해온 토지가 지극히 일부만 남았으니, 천석꾼의 넉넉한 살림은 옛 일이 되고 말았다.
5.
흑석동 살던 시기, 선생은 乙酉文化社에서 漢字辭典 편찬 일을 하였다. 공주의 벗 權重岳씨와 함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일이 상당히 진척되었을 즈음, 난데없이 6.25동란이 일어났다. 사전 편찬 일도 중단될 수밖에 없었는데, 이와 더불어 선생이 두고두고 아쉬워한 것이 있었다. 소중한 문헌들을 출판사에 많이 갖다 두었는데, 몽땅 잃어버린 것이다. 선생 댁은 서울에서 살면서 대대로 文翰을 이어 왔고, 가세도 유족하였으므로 藏書가 매우 많았었다. 그러나 전쟁의 와중에도 피란지에 가져간 선대의 문적과 서화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을 망실하였다. 필자의 선비 말씀에 의하면, 阮堂 글씨 중에도 기이한 필체로 유명한 <殘暑頑石樓> 편액도 본시 이 댁의 소장품이었으나, 전쟁의 와중에 지켜내지 못하였다고 한다. 전쟁 직전의 한자사전은 뒷날 다른 출판사가 나머지를 완성하여 간행하였는데, 요즘도 한문학 전공 학생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스테디셀러가 되어있다.
전쟁 뒤 선생 댁의 가세는 더욱 기울었다. 가까운 이웃으로 큰 의지가 되었던 위당도 전쟁 초기에 납북되었다. 선생의 장남 南極씨는 경기고, 서울법대를 마친 수재였으나, 졸업한 뒤에는 고시 공부를 접고 바로 일반직장에 취직을 하여 살림에 보태야만 하였다.
6.
선생이 국학계에서 활동을 시작한 것은 오십대 후반인 60년대 들어서이다. 國史編纂委員會가 《朝鮮王朝實錄》과 《承政院日記》를 정리하는 사업을 시작하였다. 십삼 년에 걸쳐 진행된 이 일에는 고문서 특히 草書 解讀에 능한 在野漢學者들이 많이 참여하였다. 그 중에 필자가 성함을 들은 분들은 成樂熏, 李翼成, 辛鎬烈, 洪贊裕, 任昌載, 南晩星, 李民樹, 金喆熙, 李鎭泳, 任昌淳, 金都鍊선생 등이다. 이 분들이 차곡차곡 脫草를 마치고 標點을 더한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가 있었기에, 왕조실록은 뒷날 우리글로 옮겨질 수 있었고, 승정원일기 또한 지금 젊은 연구자들이 읽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선생은 이 일에 시작부터 끝까지 참여하셨다. 특히 조선왕조의 文物制度와 故事, 역사서에 기록되지 않은 秘史들을 넉넉히 알고 계셨던 선생은 이즈음부터 특히 典故에 밝은 한학자로 널리 소문이 났다. 서교동 시절의 이웃에 權泰益선생이라는재미난친구분이계셨다. 안동이 고향인 이 분이 선생을 부르는 호칭이 “趙國寶”였다. 선생의 諱字를 활용하여 弄을 섞은 별명이지만, 선생의 해박함에 근거한 것이었다.
7.
선생이 民族文化推進會에 간여하기 시작한 것은 칠십세의 고령인 1974년이다. 애초의 민추는 私撰 歷史書나 文集 번역을 주로 하였다가, 이즈음부터 왕조실록의 국역에 착수하였다. 이를 위하여 당시에 사무책임을 맡은 이계황국장이 적극 나서서 선생을 초빙한 것이다.
선생은 해방 이후 처음으로 안정된 생활을 하였다. 1974년 4월에 선생의 칠순잔치를 종로의 韓一館에서 벌였는데, 賀客의 대부분이 당시 한학대가들로서 모두 노인들이었다. 위에 언급한 중의 여러분들과 趙潤濟, 申奭鎬, 閔泰植, 李家源, 尹石重, 申石艸, 尹吉重 선생 등이 그 자리에 오셨다. 필자는 한 구석에서 종일 먹만 갈아댔는데, 이 어른들이 방명록에 축하 휘호를 적는 것을 가까운 자리에서 인상 깊게 보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선생은 민추에서 校閱委員이라는 직함을 갖고 계셨다. 당시의 국역 실무직원들인 李廷燮, 張在釬, 金東柱선생들에 의하면, 선생이 나오시면, 직원들이 선생 주위에 모여 난해처를 질의하고, 선생은 그 자리에서 하나하나 일러주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이 어른의 설명이 다른 화제로 옮겨가면서 끝이 없었고, 그 말씀 듣기에 열중한 번역직원들의 그 날 업무는 그것으로 끝이었다는 것이다. 뒤에 인하대학교 사학과 교수가 된 鄭珖鎬선생과지금역사학자로왕성하게활동중인李離和선생의질문이특히많았다는데, 이 분들은 심재선생만 나오시면 열 일 제쳐놓고 선생 옆에 앉아 질문하고 말씀 듣기에 열중했다고 한다.
당시 한학대가들은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걸어 다니는 辭典, 또는 살아있는 古典이라는 별명처럼 수많은 텍스트를 통째로 머릿속에 넣고 다니는 분들이었다. 이 분들은 오로지 머릿속의 한학 지식만을 가지고 번역의 오류를 지적하고 바로 잡았다. 그러다 보니 때로는 漢書에 나오는 것을 史記의 것이라고 하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도 제법 있었다.
“博覽强記의 達人”이라 할 선생도 한문 고전들을 머릿속에 넣어두기는 다른 분들과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선생은 번역자들의 오류를 바로 잡을 때마다 확실한 근거를 분명하게 제시하였다. 혹간 알지 못하는 것이 있으면 未詳이라고 밝히는 일은 있었으되, 典據를 잘못 대거나 부정확한 풀이로서 대충 얼버무린 적은 전혀 없었다. 아마도 소시적부터 익숙했던 선생의 家學인 경기남인학파의 실증적 학문 방법이 당신 몸에 배었던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타고난 기억력이 비상하여 오류 가능성이 적기도 하였겠지만, 거듭거듭 확인하는 학문적 엄격함이야말로 당시 한학자들 가운데 선생이 지닌 特長이었던 것이다.
선생이 민추의 교열 일을 하신 것은 1988년에 세상을 떠나시기 전까지 대략 15년간이었다. 처음에는 왕조실록 번역문의 교열을 담당하셨고, 나중에는 문집 번역문의 교열도 하셨다. 70년대 왕조실록의 번역은 국가적 관심을 크게 받았던 사업이다. 고전 번역에 대한 지원은 지극히 열악하였지만 말이다. 선생은 다년간의 실록 번역에 자문을 하였던 공로를 인정받아, 1975년 정부로부터 銀冠文化勳章을 수여받았다. 문화훈장은 그 뒤에 신호열, 임창순선생도받았는데, 당시 심재선생은 실상 민족문화추진회가 받아야 할 것인데 당신에게 돌아 온 것이라고 하면서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았었다.
뒷날인 1985년에는 민족문화추진회로부터 고전국역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제1회 한국고전국역 공로상을 수여받으셨으며, 1988년 5월 20일 경희대학교 의료원에서 세상을 떠나시자, 민족문화추진회장으로 장례의식을 치루었다. 선생의 묘소는 선영을 모신 안성군 삼죽면 진촌리에 있고, 1997년에 세상을 떠나신 배위 청송심씨와의 합폄묘이다.
8.
선생은 譜學과 黨爭史에 특히 밝았다. 족보 지식은 전통사회에서는 일반상식에 속하는 것이었지만, 대체로 血緣과 學緣이 엮인 自黨의 譜系에만 관심 갖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선생의 보학은 그 넓이와 깊이에 있어 차원이 달랐다. 선생의 머릿속에는 黨派와 色目 구분 없이 조선시대 전 시기 역사 인물들의 가계가 일목요연하게 들어 있었다. 조선 후기 언젠가부터 몇 대를 두고 편찬되어온 방대한 분량의 《萬姓譜》라는 것이 있다. 이집 저집의 족보를 취합하여 베낀 것이므로 오류도 많은 책이다. 선생은 그 책의 내용은 물론 잘못된 부분까지도 낱낱이 꿰고 있었다.
선생의 비상한 기억력에 대하여 필자가 목격한 것이 있다. 칠십 년대 중반 어느 날, 선생을 모시고 필자의 친척들이 모여 사는 경기도 광주 텃골의 安順菴선생 댁을 방문하였다. 종손과 담소하신 뒤에 마을을 둘러보시던 선생은 동네 한 옆 배추밭을 잠시 응시하시더니, “여기가 安進士丈이 사시던 터 아닌가?”라고 물었다. 안진사장은 선생이 소시에 뵙던 安鍾曄이라는 어른이다. 종손 安秉善씨의 從祖로서, 일찍이 《順菴文集》발간을 주도했던 분이었다. 이 댁은 육이오전쟁 와중에 온 동리가 폭격을 당하였을 때 파괴 되었고 자손들도 마을을 떠나서, 칠십 년대 당시에는 빈터만이 남았던 것이다. 선생이 안진사댁을 방문하기는 그로부터 오십여 년전에 단 한 번의 일이었다는데, 이곳을 또렷하게 기억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선생에게는 수많은 문헌에서 본 것을 확실하게 기억할 수 있던 비법이 있었다. 83년경부터 돌아가신 88년까지는 신환 때문에 병원에 자주 입원하셨다. 결국 돌아가신 근인은 전립선암이었는데, 방광의 소변이 배출 되지 않아 고통스럽고 심하면 정신까지도 혼미해지는 병환이었다. 통증 때문에 괴로워하시던 중에 문득 조용하시기에 가만히 뵈니, 입술을 오물오물하면서 무언가를 계속 외우시는 것이었다. 유심히 들어 보니 우리 선현의 시문이나 고문의 명문장을 계속 암송하시는 것이었다. 고통을 잊기 위한 방법이겠지만, 평상시의 반복적인 공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터이다. 이것이 바로 선생이 타고난 박람강기에 더하여 돌아가시던 날까지 좋은 정신을 온전하게 유지할 수 있었던 비법이었다고 필자는 믿는다.
9.
선생이 평생을 두고 지킨 것이 있었다. 당신 마음에 마땅치 않은 것은 하지 않으셨다. 본시 타고나신 체질이 건강한 편이 아니었으나, 심신에 무리가 되는 일을 결코 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당시의 노인으로서는 비교적 장수하신 것이 아닌가 싶다.
같은 이유로 해서 당신의 성명이 적힌 글을 좀처럼 남기려 하지 않으셨다. 특히 行狀이나 墓碣銘 등 傳記文字는 일체 사양하여 단 한편도 남긴 것이 없었다. 선생의 조상 중에 이름난 분으로 龍洲 趙絅선생이 있다. 엄정한 간관이었고 청렴한 관원으로 이름이 있던 이 분은 인조 대에 문장가로 이름난 谿谷 張維를 이어서 나라의 文衡을 잡았었다. 《龍洲文集》에는 그에 앞선 명사들의 신도비문이나 묘갈문 등이 넉넉히 실려 있다. 실상 이런 글들은 그 후손의 청탁을 받아서 짓기 마련이므로 덕담 일색이거나 과장된 수사가 동원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용주공은 是든 非든 간에 근거가 있는 것이 아니면 수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선생은 이 조상을 모신 가문에 대한 대단히 큰 자부심을 가졌다. 그리하여 글은 함부로 지을 것이 아니라는 믿음을 굳게 지키셨던 것이다.
(필자는 최근에 한음 이덕형선생과조용주공을모신포천의용연서원과용주공의종가와묘소를답사할기회가있었다. 용주공의 별묘 전면의 현판 文簡公廟는 병신년, 즉 1956년에 선생이 쓰신 것이었다.)
물론 글을 전혀 짓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平洲 李昇馥선생의 팔순 기념 문집인 《三千百日紅》에는 선생이 지은 頌詩가 실려 있다. 몇 해 전에 만난 평주장의 자제 李文遠교수는 필자에게 이 책을 만들 당시, 선생의 지도와 자문을 많이 받았었다는 말씀을 하였다.
저작을 내켜 하지 않으셨던 반면 담화를 매우 즐기셨다. 소싯적부터 익숙히 보셨던 舍廊房文化가 자연스럽게 몸에 배인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선생이 한번 말씀을 시작하시면 화제가 끝없이 이어졌다. 선생의 주변에는 사람들이 빼곡히 둘러 앉아 경청하면서 시간가는 줄을 몰랐다. 선생의 따님인 필자의 선비 자매들이 선생을 모시고, 포천과 철원의 三釜淵 등지 선대의 유적이나 서울 가까운 南漢山城이나 茶山 유적지 같은 고적을 돌아보신 적이 있었다. 그러나 차창 밖 풍경에는 눈길 한 번 주는 일 없이, 龍洲공과 丙子胡亂 당시의 역사를 正史 野史들을 섞어 말씀하시다가, 다른 장소에서는 星湖선생과 安順菴, 蔡樊菴, 李錦帶, 權鹿菴, 丁茶山 같은 분들 사이에 얽힌 이야기 등... 가는 곳마다, 옛 이야기를 직접 현장을 보신 듯이 생생하게 말씀하셨다.
10.
黨爭史에 대한 선생의 지식은 해박함 이상이었다. 이 분야의 고전으로는 李建昌의 《黨議通略》이 비교적 중립적이라는 세평이 있는데, 선생은 이 책과 더불어 鄭載崙의 《公私見聞錄》, 南夏正의《桐巢漫錄》, 안순암의 《列朝通記》 등 여러 책을 통 채로 꿰고 계셨다. 여기에 소싯적부터 사랑방에서 전해들은 생생한 구비 자료들을 더하여, 선생의 思考 안에서 방대한 자료실을 구성하고 있었다.
李佑成교수는 필자에게, “심재선생은 조선시대를 직접 겪은 분은 아니지만, 소시에 조정에 출입한 분들의 말씀을 직접 듣고 아는 것이 대단히 많다. 다른 하나는 조선 후기를 주도한 것이 서인노론들이고, 지금도 그들이 기록한 역사가 사실로 인정되어 있는데, 심재선생은 문헌에 기록되지 않은 사실을 많이 알고 계셔서, 노론들의 기록이 전부 올바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 주는 유일한 분이다.”라는 취지의 말씀을 여러 차례 하신 적이 있고, 역사학자로 왕성한 저술활동을 하고 있는 李離和선생도, 80년대 초에 지은 《한국의 파벌》은 심재선생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에서 많은 소재를 얻었다는 말을 하였다.
필자도 선생에게서 당쟁 관련 말씀을 자주 들었으나, 워낙 기초지식이 없는데다가 실상 필자의 관심이 아니었다. 때문에 말씀의 대부분을 놓쳐 버렸다. 요즘 조선시대 사회사나 정치사를 공부하는 젊은 연구자들이 선생 가까이 있었다면, 선생이 종합한 넉넉한 지식들은 그들의 손을 거쳐 새로운 학술적 성과로 거듭 났으리라는 생각에 큰 아쉬움이 남는다.
11.
선생을 아는 사람들이 아쉬워하는 것이 하나 더 있다. 선생은 제자를 한 사람도 양성하지 않았다. 칠십 년대 중반, 한문고전을 읽어낼 인력이 머지않아 고갈되리라는 염려가 있었다. 그리하여 1974년에 설립된 것이 민족문화추진회 부설 國譯硏修院이다. 1980년대에 들어서는 한학대가들이 지극히 희소해졌다. 한문 독해력이 필요한 연구자와 학생들이 한학자들을 찾아다니면서, 몇 분 선생님의 書塾은 한문 수학자들로 成市를 이루었다. 일찍부터 고전학계에서 활동하신 成樂熏선생과 우수한 학생들을 선발하여 다년간의 숙식에 장학금까지 주면서 한학을 연수시킨 靑溟 任昌淳선생, 그리고 사간동 댁에서 많은 연구자들에게 고급한학을 지도하신 雨田 辛鎬烈선생은참으로많은제자들을배출하였다. 방은, 우전, 청명 세 분 선생님도 돌아가신지 이미 오래되었지만, 세 분이 양성한 학생들이 오늘날 우리나라 국학 각 분야의 원로, 중견학자로 활동하고 있음은 모두가 잘 아는 일이다.
그러나 선생은 학생을 따로 모아 강의를 하지 않으셨다. 국역연수원 초창기에 잠시 강의를 하신 적이 있었다. 《大典會通》 같은 古法典과 先賢文集을 가르치셨는데, 이것도 첫 해만 하고는 이내 그만 두셨다. 선생 말씀에 의하면, 학교를 다닌 일이 없는데다가, 그나마 배운 구학문도 13세 이전의 한학 수학이 전부이므로 남을 가르칠 자격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상은 가르치는 일 자체가 당신 성미에 맞지 않으셨던 것이다. 요즘도 선생을 뵌 적이 있는 선배들은 말한다. 심재선생은 제자를 기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분만이 알고 있던 방대한 자료들이 선생과 함께 지하에 묻혀 버렸으니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라고 말이다.
민추에 대한 선생의 애정이 대단히 지극하였다. 현재의 한국고전번역원에는 한학 실력에 더하여 대학원까지 마친 역량을 갖춘 직원들이 즐비하다. 그러나 선생 재직 시의 민추 직원들은 시골 書堂에서 한학을 이수한 마지막 세대에 속하는 분들이 대부분이었다. 선생은 정규 학교 졸업장이 없다는 이유로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면서도 열악한 근무 환경 속에서 고전과 씨름하고 있는 후배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더불어 커다란 기대를 갖고 있었다.
70년대 말의 어느 해 정부의 지원금이 갑자기 줄어 민추의 재정형편이 아주 나빠졌다. 국역연수원에서는 매 달 시험을 보고 우수 학생들에게 약간의 장학금을 지급하였는데, 민추는 부득이 이 장학금부터 삭감하였다. 그러자 선생은 급여에서 일부를 떼어, 장학금으로 희사하셨던 것이다. 필자도 그즈음의 연수원 학생이었는데 당시는 물론이고 최근까지도 그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였었다. 당시에 우수한 학생이었던 成百曉씨가 이 장학금을 받았었다고 하기에, 최근 한국고전번역원에서 발간한 《민족문화추진회 42년사》에서 새삼 확인한 것이다.
(사진제공 : 한국고전번역원) 우측부터 임창순선생, 조규철선생, 심재선생, 유봉영이사장, 이계황국장
12.
선생은 얼굴이 기름하고 특히 코가 우뚝하셨다. 음성이 매우 독특하였는데, 크지는 않았으나 종소리처럼 울림이 있었다. 때문에 멀리서도 이 어른의 음성은 바로 구별되었다. 신장은 보통 정도였고, 호리호리한 신체는 오히려 연약하신 편이었다. 소시부터 건강이 좋지 않아, 아직 소년기인 13세에 혼인을 했던 것도 당신이 건강하지 못하므로 후손을 빨리 보려는 어른들의 바람 때문이었다는 말씀을 들은 일이 있다. 소싯적을 생각하면 뜻밖에 오래 사는 것이라는 말씀도 하셨다.
선생의 유일한 취미는 서화 감상이었다. 예전처럼 작품을 구입할 형편은 되지 않았으나, 필자가 자주 뵙던 70년대 이후에도 인사동 화랑이나 간송미술관 같은 곳에 좋은 전시가 있으면 찾아가 관람하셨다. 전시작품을 둘러보시고는 반드시 방명록에 적절한 휘호를 남기셨다. 金容鎭, 許百鍊, 卞寬植, 金基昌, 柳熙綱 그리고 당신의 옛 벗인 金振宇씨의 제자 玉峰스님 등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서화가들과 전시장에서 만나 담소하시던 모습이 참으로 좋았다.
만년에 가까이 지내시던 분들은 許眉叟선생의宗孫인許赫씨, 한학자 洪贊裕선생과 民樹 李奭求선생, 시인 申石艸선생과 아동문학가 尹石重선생, 서예가 韓旭東씨와 柳寅植씨등이있다. 이 중에 허혁씨와한욱동씨는망우동자택으로선생을자주찾아오셨다. 일찍이 제헌국회의원이었던 허혁씨와는아주오랜世交家였으므로전부터각별한사이였고, 초서를 잘 썼던 한욱동선생은 새 작품을 쓰면 몇 점씩을 갖고 와서 선생께 품평을 받곤 하였다.
부모님을 지극히 받들어 모셨고, 출계나간 아우님과의 우애가 자별하셨다고 한다. 두 번의 양자로 이은 가문의 7대 독자였던 선생의 소생은 3녀3남이었는데, 자녀들에 대한 사랑 또한 지극하였다. 필자의 선비는 선생이 17세에 얻은 맏따님이다. 이 분은 일찍부터 집을 떠나, 가까운 곳에 소학교가 있는 이천의 숙부 댁에서, 그리고 숙명여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서울 낙원동의 당신 외가, 심참봉댁의 京邸에서 오래 기숙하였다. 때문에 늘 가족을 그렸는데, 당신 부친 심재선생이 붓으로 써서 보내 주시는 편지가 가장 반갑고 소중하였다고 한다. 하나도 빠짐없이 십여 년을 두고 모은 것이 궤에 가득이었고, 우리 집에 시집오실 때에 모두 갖고 오셨으나, 6.25 동란 때 피란을 가면서 간수하지 못하였던 것을 두고두고 아까워하였다. 선비는 당신 아버님 심재선생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따랐고, 선생은 맏따님을 매우 근중하게 아끼셨다. 전쟁 뒤에는 어느 집 할 것 없이 모두 어려웠지만, 선비는 경제적으로 몰락한 친정의 어려움을 무척 안타까워하였다.
필자는 어릴 때부터 선비를 따라 외가에 자주 다녔다. 초등학교 다닐 때에는 방학이면 보름 이상 한 달 가까이 외가에서 지냈다. 그 어려운 시절에 별다른 수단이 없었던 이 어른은 책이 가득한 좁은 방에 앉아 하루 종일 책만 읽으셨다. 필자가 이 어른의 진면목을 알고 뵙기는 대학에 들어간 70년대 중반쯤이고, 이로부터 세상을 떠나신 1988년까지 대략 15년간을 뵈었다. 이때는 우리 모두 아는 것처럼 정치 사회적으로 불안하고 위태로운 사건이 연속되었다. 그 때마다 선생은 혀를 차면서 근심을 감추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것을 말씀으로 표현하시는 것은 좀처럼 뵙지 못하였다. 필자의 좁은 소견에, 장년기인 해방 전후에 겪었던 어려운 일들이 선생으로 하여금 그러한 삶의 태도를 견지하신 것으로 짐작할 뿐인데, 선생은 일생동안 겪은 크고 작은 어려움은 속으로 삭이고 밖으로는 좀처럼 나타내지 않으셨다.
13.
필자가 학생 때에 몇 차례 成均館의 春秋 釋奠 행사에 선생이 참예하신 것을 뵈었다. 그런데 그 때마다 뜻밖에도 양복에 나비넥타이를 매고 단장을 짚고 나오시곤 하였다. 또 옛날 고사를 말씀하시면서 趙靜菴이나 龍洲공, 許眉叟등등선현이야기는자주하셨지만, 道學이니 性理學 같은 근엄하고 복잡한 이야기는 전혀 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옛 것만을 아는 고집불통의 노인이 아니었다는 말인데, 이 정도의 기술로 이 어른의 독특한 면모가 설명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선생은 평생 서책을 곁에 두고 좋아하는 글을 읽다가, 이따금 서화를 꺼내 보면서 혼자 즐기셨다. 누가 찾아와 옛글을 물으면 아는 대로 일러주시고, 그러다가 다른 화제로 옮겨가면서 담소하기에 시간가는 줄 모르던 그런 생활을 하셨다.
아주 일찍이 몇 분 선생님에게서 글을 배웠지만, 유수한 학자를 스승으로 모신 일이 없었다. 평생을 옛 글과 더불어 사셨으나, 스스로 학자요 문필가로 자임한 일도 없었다. 앞에 적은 바 전후에 교유하였던 분들의 면면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권력을 가까이 하거나 명예를 찾아다니는 그런 일은 선생의 일생에는 전혀 없었다.
그럼 이 어른은 어떤 인생을 살았던 분이었는가. 심심하면 심심한 그대로, 아니면 또 아닌 그대로, 그런 일생을 당신 마음가는대로 살아가신 분이 바로 선생이었다. 그래서 이 어른의 별호는 마음 心자 心齋였던 것이다. (尾)
2009년 6월 6일 不肖外孫 安秉杰삼가적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