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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단 에드워드의 복음과 사상
양낙흥(고신대 교수)
조나단 에드워드를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할 뿐 아니라 그의 가장 유명한 글들 가운데 하나는 비교적 그의 목회 초기에 속하는 1734년에 쓰인 "하나님의 영에 의해 영혼에 직접 수여된 신적 초자연적 빛이 성경적이고 이성적인 교리임을 증명함"이다. 동시에 이것은 에드워드의 대표적 설교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심지어 미국 문화사에서 식민지 시대 미국의 대표적 작가들 중 하나로 에드워드를 다룰 때 이 글은 그의 대표작들 중 하나로 선택된다. 신령한 빛에 관한 에드워드의 지론을 담은 이 설교의 본문은 마태복음 16:17,"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였다. 이 본문에 근거하여 그는 "영적이고 신적인 빛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에 의해 영혼에 곧바로 전달된 것으로 자연적 수단에 의해 획득된 어떤 것과도 다른 성질의 것"이라는 교리를 제시한다.
이 설교에서 에드워드는 성령의 조명을 "신적이고 초자연적인 빛"(divine and super-natural light)이라 표현한다. 그는 이 영적 조명이 없는 사람은 영적인 사실에 대해 장님에 불과하다고 단언한다. 교리에 대한 지성적, 관념적, 사변적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복음이 사실임을 믿고 확신하는데 이르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복음에 대해 확신을 얻기 위해서는 필히 성령이 직접 영혼에 비추어 주시는 신적 초자연적 빛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에드워드 신학의 일관된 핵심적 주제들 중 하나이다.
그러면 이 영적 신적 빛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난 신적 탁월성(the divine excellency)에 대한 진정한 지각(a true sesnse)," 혹은 "이해"(apprehension), 그리고 "그것들의 진실성과 실재성에 대한 확실한 깨달음"이라고 대답한다. 에드워드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 더 좁혀서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구속의 사역, 그리고 하나님의 길과 사역들"에 대한 "영적이며 구원 얻는 확신들"은 그것들의 신적 탁월성과 영광에 대한 안목이 생겨야 비로소 얻을 수 있다.
신령한 빛이 영혼에 비춰 우리의 영안이 열릴 때 비로소 복음의 진리를 이해하고 "보고"(see) "지각할"(sense)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체험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이 영화로우시다는 사실을 단지 "이성적으로 믿는"데서 끝나지 않고 자기 마음속에 하나님의 영화로우심에 대한 감각(sense)이 있다고 에드워드는 주장한다. 하나님이 은혜로우시다는 사실을 단지 사변적으로 판단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스러우신가를 감지한다(sense)는 것이다.
에드워드에 의하면 선(good)에 관한 두 종류의 지식이 있다. 하나는 사변적이거나 순이론적(notional)지식이다. 다른 하나는 마음의 감각으로 이루어지는 지식이다. 그것은 어떤 것의 아름다움, 사랑스러움, 혹은 달콤함에 대한 감각이다. 그리하여 그것에 대한 생각이 떠오를 때 마음으로 기쁨과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전자에서는 단시 사변적 기능 혹은 이해력이 활용된다. 후자에서는 의지 혹은 성향(inclination), 혹은 마음(heart)이 주로 관련된다. 에드워드는 견해(opinion)로서의 지식과 감각sense)으로서의 지식을 구별한다.
하나님이 거룩하시고 은혜로우시다는 사실에 대한 견해를 갖는 것과 그 거룩함과 은혜스러움의 사랑스러움과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을 갖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다른 예를 들어, 꿀은 달다는 이성적 판단을 가지고 있는 것과 그것의 달콤함에 대한 감각을 가지는 것과는 다르다. 꿀맛이 어떤 것인지 모르면서도 전자는 가질 수가 있다. 그러나 자기 마음속에 꿀맛에 대한 관념(idea)이 없으면 후자가 결코 있을 수 없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이 아름답다고 믿는 것과 그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을 가진 것과는 차이가 있다. 전자는 소문에 의해 얻을 수 있는 것이고 후자는 오직 그 용모를 봄으로써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에드워드는 단순히 어떤 것을 탁월하다고 사변적,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것과 그것의 달콤함과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을 가지는 것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고 거듭 주장한다. 전자는 단지 머리에만 머무르는 것으로 오직 사변만이 그것에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후자에는 마음이 관련되어 있다. 어떤 것의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을 마음으로 지각할 수 있을 때는 그 이해(apprehension)로부터 필연적으로 즐거움이 우러나게 된다.
에드워드는 하나님이 직접 마음속에 집어넣어 주시는 신령한 빛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성경적이고 합리적인 두 가지 증명을 시도한다. 첫째는 이 주장에 대한 성경적 증거들이다. 성도가 불신자들과 다른 점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 그리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눈을 가졌다는 점임을 성경은 누누이 보여 준다고 그는 주장한다.
"범죄 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 하였느니라"(요일3:6).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 하였느니라"(요삼1:11).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요14:19).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이러한 지식은 결코 단지 사변적 지식일 수는 없다고 에드워드는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보는" 과 "아는" 것이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식은 단지 정도의 차이 뿐 아니라 본질적으로 그 종류가 다른 지식이라는 것이다. 성경에 따르면 이러한 빛과 지식은 항상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주어지는 것이라고 에드워드는 이해한다.
"그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 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11:25-27).
여기서 이 지식을 주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선물과 역사로 되어있다.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후4:6)는 구절이 분명히 보여주는 바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신적인 최상의 영광 및 탁월함을 발견하는 그러한 일이 있다는 것이라고 에드워드는 해석한다. 그것은 그의 능력과 의지의 직접적인 결과다. 하나님이 천지창조시에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빛을 만드신 것을 그것에 비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에드워드의 관찰에 의하면 성경은 인간의 회심시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주신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때에..."(갈1:15-16).
성경은 그러한 지식을 분명히 하나님의 직접적인 선물이라고 말씀한다.
"내 눈을 열어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시119:18).
여기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이란 에드워드에 의하면 "말씀의 명령들과 교리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과 완전성의 아주 놀라운 탁월성들과 경이로운 표현들, 그리고 거기 계시되어 있는 저 하나님의 역사들과 경륜들이다. 그리하여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의 섭리, 은혜언약, 그리고 자기 백성들을 향한 은혜의 방편에 대한 지식은 성도들에게 고유한 것이며 오직 하나님의 의해 주어지는 것이라고 에드워드는 지적한다.
"여호와의 친말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그 언약을 저희에게 보이시리로다(시25:14)"
이러한 발견으로부터 복음의 진리에 대한 "참되고 구원 얻는 믿음"(saving faith)이 생긴다는 것이 에드워드의 지론이었다. 그러므로 신적 초자연적 빛에 대한 에드워드의 신학은 결국 구원론의 일부였다. 어떻게 하면 자신의 구원을 확신할 수 있는가 하는 청교도적 관심이 에드워드의 "신적 초자연적 빛"의 신학을 낳았다는 것이다. 자신의 주장에 대한 성경적 근거로 에드워드는 요한복음 6:40을 제시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 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또 요한복음 17:6-8에서도 그것이 나타난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요한복음12:44-46에서도 마찬가지다.
"예수께서 외쳐 가라사대,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그를 영적으로 보는 것이 병행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에드워드는 그리스도께서 유대인들을 정죄한 것은 그들이 그가 그리스도라는 것과 그의 가르침이 진실임을 신적인 것 속에 있는 고유한 맛과 향기(inward and distinguishing taste and relish)를 통해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고 지적한다. 누가복음 12:56-57에서 그리스도는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별치 못하느냐?"고 유대인들을 책망했다. 마태복음 16:3에서는 그것을 "시대의 표적"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면서 그는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치 아니하느냐?"고 덧붙인다. 에드워드에 의하면 그것은 "너희는 왜 거룩하고 신성한 것을 구별할 수 있는 저 참된 탁월성에 대한 감각(sense)을 갖고 있지 않으냐?"하는 말이었다. "왜 나와 나의 가르침의 영광과 신성을 볼 수 있는 수단인 하나님의 일들에 대한 미각(savor)을 갖고 있지 못한가?"라는 것이다.
에드워드의 해석에 따르면, 베드로는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신적 영광을 본 것"이 복음의 진리에 대한 확신을 얻게 된 계기였다고 말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벧후1:16). 여기서 베드로는 변화선상에서 그리스도의 변형시에 제자들이 보았던 그 가시적 영광을 언급하고 있다고 에드워드는 이해했다. 그 영광은 너무나 신성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심, 위엄, 그리고 은혜를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신적 존재임이 명백히 드러났다는 것이었다. 에드워드는 "만일 그리스도의 외적 영광을 본 것이 그의 신성에 대한 확신을 주었다면 그의 영적 영광에 대한 이해가 어찌 그런 확신을 주지 못하겠는가?"고 묻는다. 그리스도의 변형시에 나타났던 그 외적 영광이 그의 신성을 보여 주었던 것이 그것이 그의 영적 영광의 형상이요 반영이었다는 것이다.
종교적 정서 제 2부에서 은혜스러운 정서의 확실치 않은 열두 가지 표지를 논할 때도 에드워드는 "어떻게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되는가?"의 문제를 다루면서 인간은 복음의 빛이 비취어야 믿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성령의 조명 없이 자기 의지의 발동만으로 믿음을 가질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현대에 유행하는 일반적 복음전도 방식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 되는 주장이다. 그는 "아무 영적 빛이나 조망 없이 사람들에게 믿으라고 밀어붙이거나 촉구하는 것은 흑암의 왕자의 기만을 크게 도와주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한다.
에드워드는 참된 믿음을 얻기 위해서는 신령한 조명이 꼭 필요하며 그것이 없는 믿음은 거짓 믿음이라고 확신했다. "영적 빛이 없는 믿음은 빛의 자녀들의 믿음이 아니라 어두움의 자녀들의 주제넘은 상상이다." 소위 무조건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
싸구려 믿음주의(easy-believism)에 대한 정면 공격인 것이다. 아마 에드워드가 보기에 현대의 기독교가 피상적이고 그리스도인들이 무력하며 불신자들과 큰 차이가 없는 삶을 사는 이유는 이처럼 신령한 조명 없이 자신의 의지의 결단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하고서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자처하는 데 있을 것이다. 따라서 에드워드는, 우리가 조명 받는 만큼만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어떤 영적 빛이 없이는 믿음을 구사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영적 빛을 가진 꼭 그 정도만 믿음을 구사할 수 있다."
에드워드는 "생생한 은혜의 역사", 혹은 "감지되는 기독교적 체험"없이 하나님을 굳게 신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은혜의 체험이란 바로 신령한 빛을 비췸 받아 하나님과 그의 진리를 보게 되는 것과 동의어다. 그러므로 영적 조명을 통해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생기기 전에는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한 믿음 내지 신뢰를 가지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었다. 에드워드는 체험, 즉 영적 조명 없이 "믿음으로 산다."주장하는 사람들이 믿음에 대한 터무니없는 개념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구원받았다고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기의 구원에 대해 의심하는 것이 무서운 죄라고 생각해서 자기는 구원받았다고 무조건 믿는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만일 그런 것이 믿음이라면 바리새인들도 굉장한 믿음을 가졌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그들 중 일부는 사죄 받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고 그리스도는 가르쳤다. 성경에 의하면 믿음은 그것에 의해 구원으로 인도되는 것이지 자기가 이미 구원받았다고 믿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기가 믿음을 가졌다고 믿는 것"이거나 "자기가 믿는다고 믿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요즈음처럼 전도를 통해 그 자리에서 예수를 영접하고 믿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중요한 도전이 되는 주장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즉석 전도를 통해 복음을 받아들이고 당장에 구원받았다고 하는 많은 경우들이 여기에 해당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에드워드는 체험 이외는 은혜의 다른 증거가 없다고 보았다. 그는 체험을 가지는 것이 은혜를 가지는 것임을 인정했다. "대단한 체험을 하는 것은, 만일 그 체험들이 참된 것이고 언급할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대단한 은혜를 받는 것과 동일한 일이다." 참 체험이 있으면 반드시 은혜가 따른다. "참 체험들 치고 은혜의 역사가 없는 것은 없다. 그리고 은혜와 성결의 정도는 참 체험의 정도에 정확히 비례한다." 그러므로 체험을 은혜의 증거로 받아들인다고 해서 그들이 그리스도를 버렸다거나 은혜체험에 의지해서 산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에드워드는 사람이 먼저 믿기 전에 그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게시되는 법은 없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방법은 그들이 믿기 전이 아니라 ale음 후에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약속들에 대한 그들의 분깃(interest in the promises)을 계시하는 것이다." 아직 믿음이 없는 자에게 성령께서 그들이 구원받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법은 없다. 다시 말해서, 아직 믿지 않아 아무런 은총이나 그리스도 안의 분깃을 갖지 못한 불신자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이 은혜의 약속에 참여되었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성경 구절을 제시하는 일은 없다. 특정인이 사죄 받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고 선언하는 성경 본문은 없다.
에드워드에 의하면 믿음의 유일한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어떤 사람이 자기도 복음의 축복에 초청받았다고 믿을 수 있는 "유일한 확실한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 말씀은 그 정도의 자격을 가진 자들도 초대한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그 말씀을 하신 분은 진실하여 거짓말 할 수 없다. 그러므로 구원을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은 첫째, 하나님의 진실하심에 대한 확신이 생기고 둘째, 성경이 하나님의 밀씀임을 확신하며, 셋째, 성경은 와서 복음의 은택에 참여하라는 죄인들을 향한 초청으로 가득하므로 자기도 초대되었음을 확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개인적으로 그에게 새로이 말씀하시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에드워드는 단언한다.
그러면 사람이 어떻게 그 복음의 초청을 믿을 수 있게 되는가? 믿음을 인간의 능력으로 일으킬 수는 없다면 성경에 나타난 구원의 약속을 어떻게 믿고 자기에게 적용할 수 있는가? 에드워드는 성령의 "영적조명(spiritual enlightening)과 영향에 의해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마음에 적용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복음의 초청, 혹은 제시(offer)를 "영적으로 적용(spiritual application)하는 것은 "제공된 거룩하고 신적인 축복들", 그처럼 은혜로운 제공을 베푼 "제공자의 달콤하고 경이로운 은혜"및 자기가 제안하는 것을 성취하시는 "그의 거룩한 탁월성과 신실성", 그리고 그것을 위한 그의 영광스러운 충족성"에 대한 영적 감각(spiritual sense) 혹은 미각(relish)"을 인간에게 줌으로써 인간의 미음을 인도하고 이끌어 그 제안 을 받아들이게 하고 그리하여 제공된 것에 대한 그의 소유권(title)의 증거를 그에게 주는 것이다.
에드워드에 의하면, 은혜스러운 감정은 정신이 "조명되어"(enlightened) 하나님의 일들을 바로 그리고 영적으로 "이해하는"데서 비롯된다. 즉 거룩한 정서는 "빛 없는 열"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정보, 어떤 영적 가르침에서 생겨난다. 말하자면 "빛"을 받아 지식이 생겨야 거룩한 감정이 일어난다. 성령의 조명이 있어야 하나님, 그리스도, 복음에 제시된 영광스러운 것들을 더 잘 볼 수 있고 그것들에 대한 더 낫고 뚜렷한 이해가 가능해진다. 지식이 감정을 낳는다면 그것은 어떤 지식인가? 즉 "지식이야말로 완악한 마음을 열어 정서들을 키우는 열쇠"라고 주장할 때 에드워드가 염두에 두고 있는 지식은 어떤 지식인가? 에드워드는 지식을 두 종류로 나눈다. 하나는 지적 지식이요 다른 하나는 영적 지식이다. 전자는 사변적이요, 후자는 초자연적이다. 에드워드가 이해로부터 감정이 생긴다고 말할 때 그 이해는 물론 후자의 것이다. 그런데 영적 초자연적 이해는 성도에게만 고유한 것이다. 성도가 아닌 자들은 그것을 전혀 가질 수 없다고 에드워드는 주장한다.
빛으로부터 발생한 열이 아니라면 그 열은 거짓이라는 것이 에드워드의 일관된 확신들 중 하나다. 그러므로 에드워드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내용", 즉 교훈, 가르침, 혹은 사실이 우선적이다. 본질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정서가 발생해도 그것이 성경적 진리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헛것이다. 심지어 "성경 구절이 마음에 떠오른 결과로 생긴 감정이라 하더라도 그 구절의 의미를 바로 이해한 결과가 아니라 단지 그것이 마음에 떠오른 신기한 방법에 근거한 것이라면 그 정서는 거짓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에드워드 신학의 대 주제에 도달한다. 진정한 종교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신적인 것들에 대한 사랑"(love of divine things)이다. 참된 신앙의 기초는 신적인 것들의 사랑스러움에 대한 지식(knowledge of the loveliness of divine things), 혹은 이해이다. 이러한 지식으로부터 참된 종교적 정서가 우러나온다. 그러나 이 지식은 지적인 것이 아니라 체험적이고 영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에드워드에게 있어 인간의 구원과 성화 여부는 모두 이 영적 지식을 획득 혹은 체험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본다.
영적 이해 (spiritual understanding)
지금 우리는 에드워드의 신학 전체의 주제에 도달해 있다. 에드워드가 말하는 "영적 이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새로운 교리적 지식이나 전에 접하지 못했던 새로운 명제(proposition)를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 또한 그것은 설교자들이 흔히 말씀을 자의적으로 이해하고서는 그것이 영감 받은 해석이라고 주장하는 주관적 이해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에드워드에 의하면 그것은 영안이 열려 영적 실재를 보게 되는 것이다. 전에는 영안이 닫혀 보지 못하던 신령한 사실들을 이제 마음의 눈이 열려 보게 되는 것이다(시119:18). 그것은 "마음이 영적으로 조명을 받아 성경을 바로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영적 이해는 영적 감각 혹은 미각(taste)에 의해 가능하다. 이러한 영적 감각은 성경의 의미를 올바로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고 에드워드는 강조한다. 어떤 식으로? 부패한 욕망(appetite)의 편견들을 제거하여 생각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고 하나님 말씀에 빛을 던져 그것의 진정한 의미가 아주 자연스럽게 머리에 떠오르게 해 줌으로서이다. 영적 감각이 없이는 성경을 제대로 이해 할 수 없다면 이 영적 지각력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필수적인 것임에 분명하다.
마음의 감각 (a sense of the heart)
이러한 영적 이해력, 혹은 감각을 가지게 되는 것을 에드워드는 "마음의 감각"이 생긴 것이라 표현한다. 에드워드 신학에 있어 결정적 열쇠인 "영적 이해"는 "하나님의 일들의 거룩성, 혹은 도덕적 완전성의 지고한 아름다움과 달콤함에 대한 마음의 감각"이다. 그것은 "종교의 일들에 대한 저 모든 분별과 지식"을 동반하는데 그것은 "그러한 감각에서 흘러나오고 그것에 의존 한다" 이것은 에드워드 신학의 핵심에 관계된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밀하게 분석하고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 영적 이해는 "마음의 감각"이다. 그것은 단지 지성적이거나 사변적인 이해가 아니다. "마음"은 우리의 중심, 그리고 전 인격을 대변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전인격적 이해이다. 단지 머리의 이해는 "마음의 감각"이 아니다. 영적 이해는 "일차적으로""신적 일들"의 "더덕적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 혹은 "미각"이다.
둘째, 그 이해의 대상은 "신적 일들"(divine things), 즉 하나님에 관한 일들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 그리스도, 복음, 구원, 십자가의도 등에 관한 것이다. 한마디로 성경적 계시에 관한 이해다.
셋째, "마음"이 그러한 대상들에서 느끼는 감정, 혹은 감각은 "아름다움"과 "달콤함"이다. 그것은 지적 이해가 아니라 감정적 미학적 이해다. 아니 정서적 감각적 향유다. 따라서 복음을 단지 머리로만 이해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정서가 그 의미를 이해하고 맛보고 누리는 것이다. 물론 그 감각은 육체의 감각기관을 통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마음" 혹은 영혼의 감각이다. 왜냐하면 그 감각의 대상도 물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여기서 에드워드는 [신적 초자연적 빛]에서처럼 두 종류의 지식을 구분한다. 하나는 사변적(speculative)이고 지적(intellestual)인 지식이며 다른 하나는 영적 지식, 즉 "마음의 감각"에 의한 지식이다. 전자가 관념적이라면 후자는 사변적일뿐 아니라 감식적(sensible)인 것도 포함하므로 그 지식의 획득에 있어서는 맛보고 느끼고 끌리는 기능이 사용된다. 전자는 삼각형이나 사각형이 무엇인가에 관한 지식이라면 후자는 사랑스러움과 혐오스러움, 달콤함과 구역질남과 같은 것에 대한 감식(sensible per- ception)이다. 후자의 주체는 단지 바라볼 뿐 아니라 그것에 끌리거나 그것을 기뻐하거나 싫어하는 "마음"혹은 영혼이다. 그런데 종교적 진리의 인식은, 에드워드에 의하면 전자보다 후자에 속한다.
넷째, 그 마음의 감각에 동반되는 것은 "종교의 일들"에 대한 "분별력과 지식"이다. 그것은 구체적 내용이 없이 단지 막연한 아름다움과 달콤함을 맛보고 누리는 것이 아니라 아주 분명한 교리적 실체에 대한 이해를 수반한다. 지식이나 식별력은 "영적 이해"의 "이차적"부분이다.
다섯째, 그 복음의 내용에 대한 지식은 "마음의 감각"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지성적 이해에서 감성적 이해로 가는 것이 아니라 감성적 이해로부터 지성적 이해로 가는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마음의 감각"을 에드워드는 "영적 이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마음의 감각"도 일종의 "이해"이다. 단 그것은 "사변적"이해만은 아니다.
영적지식(spiritual knowledge)
영적 이해, 혹은 마음의 감각에 의해 우리는 영적 지식을 얻게 된다. 영적 지식이란 참으로 선하고 거룩한 것의 "사랑스러움과 아름다움에 대한 미각"이다. 여기서도 에드워드는 지식을 미각이라는 감각과 연결시킨다. 감각되지 않는 지식은 참된 지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이 이러한 "영적 이해력"을 가지게 되면 엄청난 일이 일어난다. "마음의 감각"을 가진 사람에게는 신천지가 열린다. 영혼이 "신적 일들 속에 있는 거룩함, 혹은 도덕적 선의 참된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을 발견하게 되면 새 세계가 눈에 들어온다. 에드워드에 의하면 이처럼 영안이 열려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마음의 감각"을 가지게 되는 것은 인간에게 지고한 중요성을 지닌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도덕적 완전에 영광을 돌리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손으로 지음 받은 만물의 특별한 목적"이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도덕적 완전, 혹은 거룩함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인간을 포함한 피조물들의 존재 목적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영광을 볼 수 있는 "마음의 감각"을 갖지 않은 존재들은 자기 존재의 목적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지 않고 있는 인간들은 존재할 가치가 없는 자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덕적 완전성의 아름다움을 감지할 그 "마음의 감각"을 갖지 못한 자들은 하나님을 찬양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영적 이해력"혹은 "마음의 감각"을 소유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가?
위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에드워드의 글들에 가장 자주 나타나는 어구들 중 두 가지는 "그리스도의 탁월성" 혹은 "도덕적 아름다움"이란 말들이다. 에드워드에게 있어 그리스도의 인격의 "탁월성"은 그의 "도덕적 완전성"과 동의어이다. "그리스도의 도덕적 완전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때 비로소 신자가 그의 인격의 탁월성에 대한 지식을 가지게 된다"고 그는 주장한다. 에드워드에 있어 하나님의 일들의 "도덕적 아름다움"이란 "중보자로서 그리스도의 충족성"과 직결되는 개념이다.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보혈의 귀중한"과 속죄를 위한 그것의 충족성을 실감하는 것은 그의 "인격의 탁월성"을 볼 때라고 그는 주장한다. 그것이 "그처럼 탁월하고 사랑스러운 인격적 존재의 피"이기때문에 그것이 그처럼 소중하다는 것이다.
영적 아름다움(spiritual beauty)에 대한 감각
에드워드는 "거룩의 아름다움"을 보는 자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위대한 것"을 본다고 주장한다. "성결의 미"야말로 최고의 가치를 지닌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없으면 온 세상은 텅 빈 것이 되고 만다. 그것이 없으면 세상은 무보다 나은 것이 없으며 오히려 그보다 더 약하다. 그것을 보지 못하면 볼 가치가 있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셈이다. 왜냐하면 그 외에 어떤 참된 탁월함이나 아름다움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이해력이라는 고상한 기능을 발휘할 가치가 있는 어떤 대상도 없다. "거룩의 아름다움"은 에드워드 사상의 가장 중요한 주제이다. 그가 다음과 같이 강한 수사를 사용하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다.
"이것[거룩의 아름다움]은 신격(Godhead)의 아름다움이요 신성중의 신성이며...선의 무한한 원천의 선(the good of the infinite Fountain of Good)이다. 이것이 없다면 하나님 자신도 ...무한한 악일 것이다. 이것이 없다면 우리 자신도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나았을 것이다. 이것이 없다면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 편이 더 나았을 것이다. "
에드워드에 의하면, 영적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이 없는 자는 "영적 세계에 대해서는 전혀 캄캄하다." 거룩의 아름다움을 못 보는 자는 성령의 은혜들 중 하나를 알지 못하는 자다. 그는 영혼의 은혜스러운 모든 움직임들, 모든 거룩한 위로와 기쁨, 인간의 마음에 대한 성령의 구원하는 영향력의 결과들에 대한 아무 개념이 없는 자이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사역들에 대해서 무지한 자다. 피조물에 대한 감각으로부터 기독교에 대한 모든 참된 체험적 지식이 비롯된다. 그것은 새로운 지식의 세계다.
그리하여 에드워드는 여기서 그러한 오해를 시정하면서 회심론의 핵심들 중 하나를 지적한다. 즉 비록 "양심이 죄를 깨닫는"단계가 회심의 전 경험으로 필요하며, 그러한 죄에 대한 양심적 확신이 종종 공포를 야기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공포가 죄에 대한 깨달음의 본질은 아니다. 공포는 종종 다른 요인들에 기인할 수 있다. 성령의 영향에 의한 죄의 확신의 본질은 다음 몇 가지에 대한 확신이다. 즉 "마음과 삶의 죄악 됨." "가공할 엄위와 무한한 거룩의 하나님을 대항해 지은 죄의 무서움", "죄에 대한 증오" 그리고 "하나님이 그것을 벌하시는 것은 아주 정의롭다"는 확신이 그것들이다.
에드워드가 볼 때는 죄에 대한 참된 깨달음이 없이도 그것이 있을 때 흔히 수반되는 감정들과 유사한 체험을 가지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했다. "자기들을 삼키려고 입을 벌리고 있는 무시무시한 구덩이 지옥" "그들을 태우려고 기다리고 있는 불길들" "그들을 붙들 준비가 되어 있는 악마들"에 대한 몸서리 쳐지는 우려들을 가진 어떤 사람들이 자신들의 마음과 삶의 죄악 됨을 참으로 확신시켜주는 밝은 양심은 거의 가지지 못하고 있는 경우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마귀도 사람을 공포에 빠뜨릴 수는 있으므로 공포 후에 어떤 긍정적인 감정이 온다고 해서 그것이 다 참된 은혜는 아니라는 말이었다. 에드워드는 은혜의 모조품이 얼마나 정교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열거한다. 예를 들면 마귀는 은혜의 준비 단계마저도 모조할 수 있다고 그는 보았다. 심지어 죄에 대한 커다란 확신과 그로 인해 겸비해진 마음도 모양만 모방할 수 있다.
또 마귀는 죄에 대한 깨달음 뒤에 위로가 따르는 그 순서도 흉내 낼 수 있다. 그러나 참 회심자들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그러한 순서와 방법을 따라 누군가가 죄에 대한 깨달음 뒤에 위로를 체험하는 순서를 밟았다고 해서 그것이 참 회심의 은혜를 받은 것이라는 증거는 전혀 아니라고 에드워드는 주장한다. "회심에 있어 성령의 역사의 순서라고 일반적으로 주장되는 그러한 순서와 방법을 정확하고 분명히 밟은" 자들, 즉 "죄에 대한 깨달음 후 감정을 체험하는 식의 규칙대로 회심한 것처럼 보이고 자신들의 그러한 체험을 멋있게 진술한 자들이 결국은 참 회심자가 아닌 것으로 드러나는 일들이 종종 있다는 것이었다.
어쨌든 에드워드는 인간은 회심하기 전에 자신의 죄와 비참에 대한 분명한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정말 회심하기 원한다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자신의 비참과 무가치함을 깨닫기 위해 애쓰는 일이었다. 그는 서둘러 그리고 신속히 이 일에 착수해야 한다. 이러한 주장에 대한 성경적 근거로 에드워드가 제시한 구절은 레위기 26:40 -45 이었다. 이 본문에 의지해서 그는, 하나님은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굉장한 은혜를 주시기 전에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죄와 비참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그것을 달라고 기도하는 방식을 쓰신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에 대한 또 다른 성경적 근거로 에드워드는 그리스도의 초청이 "수고하고 짐진자들"에게 특별히 제공된다는 본문을 지적한다. 그 말씀은 최소한 부분적으로 죄책과 위험에 대한 인식으로 인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에 대한 것이라는 말이었다.
그러면 어느 정도로 죄를 깨달아야 회심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단계에 도달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그러한 질문에 대해 에드워드는 자기가 지옥에 가야 마땅한 존재라고 생각할 정도로 죄를 철저히 깨달아야 한다고 대답했다. "인간은 자기가 지옥에 합당한 존재임을 깨닫기 전에는 자신의 죄책을 철저히 인식했다고 말할 수 없다. " 또한 자기가 속수무책임을 깨닫기까지는 자신의 비참을 철저히 깨달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좀 더 리얼하게, 지옥의 문턱에서 벌벌 떨면서 절망하고 있을 때 사람은 은혜를 받은 준비가 된다고 에드워드는 확신한다. "영혼이 지옥 구덩이의 가장자리를 떨며 서 있을 때,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움에 대해 완전히 절망했을때 비로소 구원의 소식을 기쁘게 받아들일 준비가 된다는 것이었다. 그럴때 복음은 그에게 참으로 기쁜 소식이 되고 그리스도는 아주 귀하게 여겨진다."
에드워드는 예상되는 혹은 실제로 제기될 수 있는 반론들에 대한 답변을 제시한다. 첫째 반론은 "구도론은 공덕 사상, 또는 행위 구원 사상의 발로 아닌가?"하는 것이었다. 모든 종교적 도덕적 의무를 다 이행하면서 회심의 은혜를 기다리라는 에드워드의 주장은 인간의 노력이나 행위가 구원의 조건이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행위 구원 사상이 아닌가 라는 의문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은혜의 수단은 사용하는 노력이 구원을 위한 공적이나 공로나 공적을 쌓는것은 아님을 분명히 했다. 사람들이 자신의 구원을 위해 최선을 다해 수단을 사용하는 것은 구원 얻을 만한 공을 쌓기 위해서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구원의 자비에 자신들을 추천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사람은 자기가 행한 어떤 일 때문에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충분한 공을 이루셨습니다.
사실상 에드워드는 자신의 많은 저작들에서 알미니안주의적 교리를 누구보다도 열렬히 비판하고 비난하고 있었다. 그는 은혜의 수단들을 사용하는 행위 자체에 어떤 능력이나 덕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구원은 수단을 사용하는 노력에 대한 보상이나 대가가 아니었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성례에 참석하는 것이 회심의 수단이 되는 것은 그 의무들 속에 무슨 미덕이나 능력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찾고 기다리도록 하나님이 정하신 방식이 그것들이요 하나님은 그것들 안에서 은혜와 축복을 베푸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도덕적 의무들도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 사람들이 은혜를 찾도록 정하셨다"고 그는 주장했다.
둘째, 반론은 "구도론이 구도자들로 하여금 자기 의를 의지하게 할 위험성이 없는가?"는 것이었다. 그에 대해 에드워드는 실상은 오히려 그 반대라고 답변했다. 아이러니칼하게도 일반적으로 열심 있는 구도자들보다는 느슨하고 나태한 구도자들이 자기 행위를 의지한다고 에드워드는 지적했다. "덜 각성된 양심의 소유자들이 보다 더 각성된 양심의 소유자들보다 자기가 행하는 도덕적 의무들 속에 더 많이 안주 한다"는 것이었다. "보통 안일한 태도로 종교적 의무를 수행하는 자들이 천국으로 침노하는 자들보다 자기들의 행위를 훨씬 더 의지합니다. 그들의 태만이 그들을 마비시키고 그들 자신에 대한 무지로 인도하기 때문에 그들은 가장 형편없는 피난처조차도 충분한 것처럼 의지하는 것입니다"고 에드워드는 역설했다. 에드워드에 의하면, 참으로 철저하고 진지하게 은혜의 수단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더 빨리 자기 자신을 알게 되고 그리하여 자신에게 절망하게 되므로 자기 능력이나 의에 대해 신뢰를 포기했다.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가장 빨리 알게 되는 것은 가장 열심히 구도할 때입니다. 이런 식으로 [구도 ]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를 보다 더 많이 생각하게 되고 자기 자신들을 더 엄격히 관찰하게 되며 다른 사람들보다 자기 자신의 마음을 더 많이 살피게 됩니다. 그러한 사람은 자기 자신의 약점을 더 많이 경험하게 되어 조만간에 자기가 죄 중에 죽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
에드워드는 진지하고 열심 있는 구도자는 결국 도망할 곳이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비록 그가 계속 자기 자신의 의로 달아나고자 하는 성향이 있을지라도 그는 아무 곳에서도 안식을 누리지 못합니다. 한 도피처에서 다른 도피처로 쫓겨 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수록 그는 피조물 속에서 어디서도 안식을 얻거나 의지할 곳이 없음을 확인하게 된다. 따라서 "더 많은 추구를 하면 할수록 혹은 더 철저한 구도자일수록 자기 행위 속에 안주할 가능성이 더 적어지며 자기가 하는 모든 일이 허사임을 더 빨리 보게 됩니다."고 에드워드는 단언했다. 그러므로 "열심 으로 수단을 사용할수록 그만큼 더 그 일에 의지한다."는 것은 잘못된 인식이라고 에드워드는 결론지었다.
셋째 반론은, "회심의 은혜를 얻기 위해 꼭 그처럼 힘든 구도의 수고를 해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회심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라면 구도적 노력 없이 그냥 받을 수는 없는가? 하나님은 왜 꼭 인간으로 구원을 향한 수고를 하게 하시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 에드워드는 하나님께서 구원의 전제조건으로 인간으로 하여금 그러한 일을 하게 하시는 데는 여러 가지 목적이 있다고 대답한다. 첫째는, 하나님의 영광이 그것을 요구했다. "나태함과 사악함"을 권장하는 인상을 주는 방식으로 인간에게 구원을 허락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불리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므로 "근면과 거룩함"을 권장하는 식으로 구원이 제공되어야 했다. 둘째, 위대한 가치와 커다란 중요성을 가진 일은 거기에 상응하는 많은 노력과 근면에 의해 획득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에 부합된다는 것이 에드워드의 생각이었다. 이를테면 높은 학문이나 고매한 인격을 얻기 위해서는 각고의 노력이 요청된다. 그렇다면 구원이라는 엄청나게 위대한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얼마나 더한 노력이 필요하겠는가 하는 것이다.
결국 에드워드의 이론에 따르면 구원이 구도적인 노력에 전적으로 좌우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 없이는 아무도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렇게 되면 첫째, 구원을 얻는 것이 현대인들이 막연히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 아니가 하는 의문이 떠오를 수 있다. 여기에 대해 에드워드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믿기만 하면 되므로 구원 얻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라고 말하는 현대의 전도자들과는 달리 에드워드는 그것이 아주 어렵다고 말한다. "오랜 세월동안 최고의 진지함과 수고를 기울이면서 구원을 얻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이 얼마나 지루한 것인지 미리 각오하십시오!" 구원 얻는 것은 "아주 많은 어려움이 수반되는 일입니다..." "천국을 얻고자 하는 이들에게 요구되는 모든 의무들을 수행하는 것은 참으로 심히 어려운 일입니다"
이 글에서 우리는 에드워드의 구원론을 분석하면서 청교도 전도 방식을 고찰해 보았다. 그 결과 현대의 전도가 청교도식 전도와 다른 점이 두 가지 발견되었다. 그것은 첫째, 전자가 그 과정에 죄에 대한 깊은 깨달음의 단계를 결하고 있다는 점이요, 둘째, 전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로 하는 개인의 결단을 "구원 얻는 믿음"으로 간주한다는 점이다. 즉 패커가 현대전도 방식에 대해 제기하는 도전은 죄에 대한 깊은 통회의 과정 없이 어떻게 인간이 구주의 필요성을 깨닫고 그를 믿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 그 하나요 다른 하나는 인간이 스스로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단하는 것이 참된 믿음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청교도들이 볼 때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는 구도자들에게 줄 수 있는 최악의 충고는 "그 사람이 아직 자기의 특별한 죄악들의 죄성을 직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죄악 된 행위들을 버리고 거룩하게 되기를 참으로 바라는 지점에 도달하지도 않았는데 그에게 죄에 대해 근심하기를 중지하고 당장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라고 말해주는 것"이었다고 패커는 지적한다. 이 말은 현대 한국 교회에 시사하는 바가 아주 커 보인다. 80년대 이후 한국 교인들이 사회의 대형 비리 한 복판에 연루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 이유가 바로 이런데 있지 않을까? 죄악에 대한 미련을 끊기도 전에 예수를 신뢰하라는 충고를 주는 것은 죄인들을 거짓평안과 거짓소망으로 인도함으로써 위선자들을 낳는 길이라는 생각인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현대식 전도, 혹은 전도 집회에서 일어나는 "회심"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그것을 참된 구원의 역사로 볼 것인가? 아니면 부분적으로만 참 회심인가? 아니면 그것은 완전히 거짓이거나 착각인가? 현대식 혹은 피니식 전도에서는 죄인이 자기 죄를 깊이 깨닫는 역사가 일어날 수 없는가? 그것은 꼭 많은 세월을 요하는 일인가? 에드워드가 필요하다고 주장한 컨빅션의 수준, 즉 지옥의 언저리에서 벌벌 떨며 서 있는 체험에서는 못 미친다 하더라도 그냥 자신이 죄인이라는 깨달음만 가지고는 회심에 이를 수 없는가? 회심을 위해서는 죄에 대한 어느 정도의 깨달음이 필요한가? 현대의 전도가 구원을 너무 쉬운 것으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사영리 한번 듣고 예수를 영접하겠다고 말하면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선언하는 식의 전도는 너무 피상적이고 안일한 인상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에드워드를 비롯한 청교도들이 회심의 필수적 과정으로 죄에 대한 깊은 깨달음의 과정을 강조한 것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고 본다. 현대의 회심에서 그것이 생략되었거나 너무 약한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피상적 회심의 결과가 한국 교회의 변화 되지 않은, 혹 회개하지 않은 신자들의 범람일 것이다.
그러나 한편 사영리 한번 듣고 예수를 영접하거나 전도 집회에서 그렇게 함으로써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들의 결단을 너무 과소평가 하는 것도 잘못일지도 모른다. 청교도 시대와 달리 종교에 대해 전적으로 무관심한 세속화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겠다는 한 사람의 결심이 비록 즉석에서 이루어진 결단이라 하더라도 어쩌면 그것은 사소한 것이 아닐 수 있다.
왜냐하면 영접의 행위를 한 이상 적어도 그는 교회에 출석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시작할 것이며 하나님을 섬기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한 변화를 무시한 것인가? 실제로 사영리식 전도나 전도 집회를 통해 예수를 알게 된후 신실한 제자의 길을 걷게 된 그리스도인들도 많이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러한 전도 방법을 완전히 무시할 것인가? 실제 패커도 결국은 피니식 전도 방법을 전면 부정하지 않는다. 사실 논문의 중반 이후에서 그는 전반부에서의 자신이 강경하고 극단적인 입장을 상당 부분 철회하는 변화를 보인다. 그 방향전환이 너무 급격해서 좀 실없는 사람으로 느껴질 정도이다. 그는 피니식 방식이 온전히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만은 아니며 "비록 오류가 조금 있는 진리라 하더라도 그것마저 자비롭게 축복하시는 하나님께서 피니의 방식을 계속 사용하셔서"이전에 교회에 다닌 적이 있거나 친구들의 전도를 받은 적이 있는 사람들을 "결정적이고 지속적인 헌신으로 인도하셨다"고 인정한다.
일급의 신학자에게는 같은 글속에서 자신의 판단을 거의 뒤집다시피 하는 것이 이례적이며 불명예스러운 일임에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의 마지막 부분에 가서 패커는 완전히 발을 뺀다. 비록 피니의 집회에서 거짓 회심한 많은 자들이 나중에 신앙에서 탈락했지만 피니의 '연장 집회'는 "전 세계에 걸쳐 충분한 영적 열매를 거두었"으며 "피니 방식의 수정판을 사용하는 빌리 그래함은 근년에 세계 기독교 무대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인물들 가운데 하나"라고 추켜세우는 것이다.
패커의 결론은 타협적이다. 그는 청교도식 전도와 피니식 전도가 상호보완적이라는 말로 끝을 맺는다. 현대의 전도가 열매를 맺으려면 "항상' 청중들이 청교도식 전도에 노출된 경험이 필요하다고 그는 말한다. 청교도식 전도란 그에 의하면 "오랜 시간을 두고 깊이 있게 파고 들어 가는 전도, 교회-공동체-친구 중심적이며, 여흥지향적 이라기보다는 예배 지향적"전도이다. 즉 "청교도 전도가 먼저 씨를 뿌리면 현대 전도가 수확을 거둔다."는 것이 패커의 견해이다. 패커는 구도자들을 교리문답 교육반, 양육반, 교회 예배 등의 "통회와 헌신의 신실함을 표현하는 적당한 방법"으로 인도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권장한다.
어쨌든 그는 청교도식 전도가 항상 필요불가결하다고 주장한다. "오랜 시간을 두고 복음을 충실히 설교하고 가르치는"청교도식 전도는 "언제 어디서나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요컨데 평생 아무런 종교적 관심이 없던 사람이 어느 날 집회에서나 개인 전도를 받고 갑자기 믿기로 결단하는 것보다는 기독교 메시지를 오래 동안 들으면서 구도자로서의 일정한 세월을 거친 후 예수를 믿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청교도식 전도 방식이 오늘날의 보통 교회들에서 행해지는 설교 내용의 일부와 동일시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현대의 일반 교회들의 예배에서 전해지는 설교들이 구원과 관련해서 청중들의 마음을 어느 정도 "깊이 파고 들어가고" 있는가? 현대 한국 교인들이 목사들의 일반 설교를 들으면 들을수록 각성과 죄의식이 더 깊어지고 자기 영혼의 구원에 대한 문제의식이 심화되는 것인지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교회에서 오랜 세월 설교를 듣고 있는 한국 청중들 가운데 죄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거쳐 회심에 이르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 비교적 젊은 개혁주의자들의 아지트 에서 펌 글 -
프로스원어성경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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