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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근대길 후기(포스팅) 스크랩 대구 근대로의 시간여행. 대구근대역사관
하늘타리 추천 0 조회 302 13.12.11 18:24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대구 근대사를 한눈에 조명할 수 있는 공간인 대구 근대역사관으로 갑니다.

 

대구 근대역사관은 1932년 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으로 건립되었으며

1954년부터 한국산업은행 대구지점으로 이용된 근대문화유산 입니다.

 

건물 전면부의 장식과 수평선을 강조한 지붕 슬라브의 처리가 특징적이며

원형이 잘 남아있어 2003년 유형문화재 제49호로 지정 되었습니다.

대구시가 2008 대구도시공사로부터 기증을 받아 대구 근대역사관으로 단장하여 2011년에 개관을 하였습니다.

 

입구는 건물 뒷편에 위치해 있습니다.

 

 

 

 

 

 

1층 전시실 입구 우측에 위치한 조선식산은행실입니다.

 

예전 돈을 보관하던 금고로 사용된 곳이고

이 건물의 최초용도가 은행이었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대구의 근대연표 

 

 

근대 도시 대구의 풍경 

  대구는 선조34년(1601) 경상감영이 설치된 이후

경상도의 행정.사법.군사중심지로 산성과 읍성을 가진 조선의 전형적인 내륙의 성곽도시였다.

그러나 일제 침략 이후 대구는 일본인 중심의 식민도시로 전락하였고, 내륙침탈 거점도시로 변모하게 된다.

1905년 대구역이 개통된 이후 경철과 도로 건설이 진행되면서 대구는 전국 주요 도시로의 이동이 쉬워졌고,

인근 지역들의 인구와 물산이 집중되었다.

이처럼 낙동강 수운을 대체한 대구역은 일본인의 대구 침투의 상징적 출발지가 되었다.

1906년 대구읍성은 친일파였던 관찰사 서리 박중양에 의해 철거되었고 성벽을 철거한 자리는 도로로 탈바꿈되었다.

1909년 성 내부의 가로를 개수하여 십자로를 개통하였는데 이것이 지금의 동.서문로와 종로이다.

이 십자로의 개설로 인해 경상감영의 많은 부속건물들이 훼손되었다.

구한말 대구의 상징인 경상감영을 근대도로 건설을 핑계로 훼손한 것은 일제 식민지배의 일면을 보여준다.

 

읍성이 철거된 후 일본인들은 성내에 살던 대구부민들의 거주지역을 잠식하며

대구역을 중심으로 태평로, 동성로 등 대구의 동북부를 중심으로 번화가를 이루었다.

중심부에는 일제의 식민통치 기구와 은행, 우체국, 일본인 상점 등 그들의 주거지와 편의시설들이 들어선다.

이로서 대구는 상권 뿐 아니라 전통도시의 면모마저 잃고 근대식민도시로 바뀌어가게 되었다.

<출처:게시물내용. 이하 같음>

 


대구읍성 훼철전 대구시가지의 모습.

광무10년(1906) 고종이 황제로 즉위한 날을 기념하는 계천기원절(음력9월17일) 스탬프가 찍혀있습니다.

 

 전통도시 대구의 해체와 재구성

 대구는 지리적으로 영남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미 구석기시대부터 인간이 거주하였던 흔적들이 확인되고 있다.

신라시대인 689년(신문왕9)에는 달구벌(대구)로 천도를 계획한 일도 있었으며,

조선시대인 1601년(선조34) 경상감영이 설치되면서 명실상부한 경상도의 중심지로 발전하게 되었다.

 

대구 사람드은 1830년대 천주교 전래 이후 근대문물을 수용하기 시작하였고,

1900년대 초부터는 일본인들의 이주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면서 근대 문물에 대한 수용과 배척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자주적인 근대화를 모색해 나갔다.

그 과정에서 지방행정기관의 중심이었던 경상감영과 대구라는 도시의 형체를 이루고 있던 대구읍성의 훼철은

전통 도시 대구의 해체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경상감영의 변화
조선시대의 지방행정체제는 전국을 8도로 나누고 각 도에 관찰사(감사)를 파견하였다.

감영은 관찰사가 집무하던 관청으로 오늘날의 도청에 해당한다.

경상감영은 조선 개국 이래 경주, 상주, 칠곡, 안동을 거처 1601년(선조34) 대구에 정착하여 1895년(고종32) 지방제도가 개편될 때까지 존속하였다.

관찰사의 집무실인 선화당과 관사인 징청각 등의 시설은 감영의 대구 정착 이후에 생겨났다.

그러나 1906년 대한제국의 국권 침탈을 목적으로 설치된 일제 통감부의 하부조직인 대구이사청의 개설로

선화당과 징청각의 건물은 근대식 사무공간으로 변질되었다.

 후 1909년 읍성 안에 십자 도로가 개통되면서 두 건물은 경상북도 청사의 부속 사무실이 되었고,

감영 내의 다른 건물들도 대부분 사라지고 말았다. 

관풍루 잡상

조선시대, 경상감영 정문의 누각인 관풍루의 기와 지붕 장식물로 건물의 위엄을 나타내고자 하였습니다

 

사라진 대구읍성 

 

대구의 역사와 전통의 상징이었던 대구읍성의 훼철


 대구읍성은 1590년(선조23)에 토성으로 조성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파괴되고 말았다.

그 후 1736년(영조12)에 관찰사 민응수가 이를 다시 석성으로 쌓았다.

축조 당시 읍성의 규모는 둘레가 2,21보(약 2.68km)이고, 높이는 서남쪽이 18척(3.78m), 동북쪽이 17척(3.57m)이었으며,

성의 동.서.남.북에 4개의 정문과 동.서에 2개의 소문이 있었다.

1870년(고종7) 관찰사 김세호가 대원군의 명을 받아 중수한 바 있다.

 

1888~1896년까지 조선을 방문하였던 프랑스의 탐험가 샤를 바라(Charles Varat)는 '조선기행'에서 대구읍성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둥근 길을 따라 쌓여진 그 성벽 ... 도시 전체를 감싸는 평행사변형이었다.

사방 성벽의 각 면에는 웅장한 성문이 서 있었다.

그 성문에 있는 정자 안에 들어가면 과거 역사를 나탄내는 여러가지 그림과 조각들이 있다.

그곳에 올라 나는 가을 햇빛아래 찬란한 색채를 발하며 전원 사이를 굽이치는 금호강의 낙조를 감상했다.

내 발 아래로 큰 도시의 길과 기념물과 관사들이 펼쳐져 있었다. "


 그러나 1906년 당시 경상북도 관찰사 서리 박중양은 대한제국 정부의 허가도 없이 일본인의 요구대로 읍성을 헐기 시작하여

1907년 4월 완전히 철거하고 말았다.

이 때 나온 흙과 돌은 주로 오늘날의 중구 도원동 일대를 비롯하여 동문 밖의 저지대를 매립하는데 사용되었으며,

일부는 조경석이나 건물의 주춧돌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로서 전통적 성곽도시였던 대구의 모습은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근대를 향한 기적소리 대구역

열강에 의한 식민지 구축은 철도부설에서부터 비롯되었다.

경부선 부설 역시 근대 문물 유입의 통로 역할도 하였지만, 기본적으로 일제의 침략 정책의 도구로 이용되었다.

대구역은 대구.경북지방 최초의 역으로서, 1905년(광무9) 1월1일 경부선 전 구간 개통과 함께 업무를 시작했다.

 

조선의 지방행정 중심도였던 대구는 경부선 부설 이후 일제 식민지 수탈 자본의 영향으로 근대 상업도시로 변모해 갔다.

특히 부산-신의주 및 만주 간의 직통열차가 운행됨으로써 대구상권이 급격하게 성장하였다.

당시 대구역의 발송 화물은 주로 쌀, 콩, 면포, 담배, 생선 등이었고, 도착화물은 석탄, 목재, 소금, 수입 면포 등이었다.

한국에 건너온 일본인들은 철도 주변을 시작으로 일본인 거리를 형성하면서 그들의 공간을 확장해 나갔다.

1913년에 지어진 대구역 건물은 일본인 기술자에 의해 건축된 목조 2층 건물로,

지방철도역으로는 부산과 신의주 다음으로 규 모가 크고 식당까지 갖추었던 격식있는 역사였다.

1934년의 경우 하루 평균 2,900명 정도가 대구역을 이용하였는데,

이는 경성(서울)역 다음으로 많은 이용객이었다. 

 

 

 

국채보상운동의 발상지, 대구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2월 서상돈, 김광제 등이 주축이 되어 대구광문사에서 국채 1,300만원(당시 정부 1년 예산 정도)을 갚자는 제안으로 시작되었다.

16명으로 구성된 발기인들은 북후정에서 국채보상모금을 위한 군민대회를 열고, 국채지원금수합사무소를 설치하였다.

이후 전국민의 호응으로 서울에서 국채보상기성회가 설치되고, '대한매일신보', '제국신문', '만세보' 등 각종신문의 후원이 줄을 이었다.

같은 해 4월 대한매일신보사에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가 설치되고 한규설.양기탁 등이 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 운동이 실시된 이후 4월 말까지 보상금을 의연한 사람은 4만여 명이고, 5월까지의 모인 보상금액은 18만 6천원을 상회하였다.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일제는 '대한매일신보' 총무인 양기탁을 보상금 횡령이라는 누명을 씌워 구속하고,

영국인 베델(Ernest Thomas Bathel)을 추방하는 등의 방법으로 교묘하게 탄압을 하였다.

또 친일단체 일진회의 공격도 동시에 이루어졌다.

 

외세 침략의 원인이 외채에 있다고 보고 이를 갚아 자주성을 회복하자는 획기적인 발상을 한 대구의 정신은 이후

 대구 독립만세운동을 비롯한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과

2.28민주화운동 등에서 보여주듯 오늘날까지 면면히 계승되고 있다.

 


대구,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

 대구의 민족운동은 대구지역 뿐만 아니라 경북지역에까지 영향을 미치며 식민지 한국의사회운동에서 중심축을 이루었다.

1910년대 민족운동은 대한광복회와 조선국권회복단(달성친목회) 등이 주축이 되었으며,

이는 1919년 3월 8일 독립만세운동으로 연결되었다.

또한 각계각층의 민중운동, 독립운동자금 모금과

임시정부활동, 유림단의 파리장서운동, 장진홍의 조선은행 폭탄 사건과 이종암 사건같은 의열투쟁이 전개되었다.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으로 청년운동과 노농운동을 비롯한 여성운동, 형평운동, 학생운동 등이 민족운동으로 승화되기도 했다.

또한 민족협동전선운동으로 신간회 대구지회와 근우회 대구지화가 설립되어 대구지역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다.

1930년대 이후 대구에서는 비밀결사가 결성되어 반일민족운동과 전쟁반대운동을 강력하게 전개하였다.

1939년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이 왜관 학생항일 사건, 문예부.연구회.다혁당 등 비밀결사운동을 펼쳤으며,

1943년에는 대구상업학교 학생들이 비밀결사 태극단을 결성하여 독립투쟁을 모색하기도 했다.

 

한국전쟁과 대구

 

최후의 방어지 대구
 1950년 한국전쟁 발발 후 유엔군과 한국군은 남진을 계속한 공산군을 막기 위해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정부가 대전을 거쳐 7월 16일 대구로 이동해오자 대구는 한달 남짓 임시수도 기능을 맡았다.

그러나 대구가 위태롭게 되자 정부는 다시 부산으로 이동하였다.

 대구는 공산군에 포위되어 큰 위기를 맞았으나 불굴의 의지로 낙동강 방어선을 성공적으로 지켜냄으로써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발판이 되고 자유민주주주의를 수호한 최후의 보루 역할을 하였다.

 

피란도시, 대구.

전쟁이 발발한 이래 전선이 낙동강까지 밀리자 고향을 버리고 남쪽으로 피란을 떠난 수많은 사람들이 대구로 몰려왔다.

 피란민을 위한 천막이 곳곳에 세워졌고, 판자촌이 산비탈을 메우고 공공시설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도로까지 점유될 정도였다.

또한 미군 군사시설과 위락시설, 양키시장 등이 들어서 피란도시 대구의 모습이 새롭게 형성되기도 하였다.

이렇듯 전쟁은 갑작스런 인구증가, 극심한 주택난, 미군 관련시설 설치 등으로 대구의 면모를 바꾸어 놓았다.

 

2.28민주운동

 1960년 2월 28일, 대구시내 고등학생들에 의해 주도된 한국 최초의 반독재 민주화운동은 전국민의 가슴에 민주화의 불길을 지폈고,

마침내 4.19혁명으로 대단원의 막을 올림으로써 한국 민주헌정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2.28민주운동은 3.15정부통령선거를 앞두고 2월28일 예정된 민주당 강연회에 학생들의 참여를 저지할 목적으로

자유당 정권이 대구시내 공립고등학교 학생들의 일요등교를 강요한 것이 발단이었다.

2월25일, 학교당국은 권력기관의 지시에 따라 학사일정에도 없던 온갖 핑계로 학생들에게 등교를 강요했고,

2월28일, 학생들은 이것이 자유당의 부정선거 흉계임을 간파하고 학원마저 정치도구화하려는 불의에 항거했다.

건국이후 처음으로 벌인 민주 민권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시위였다.

 

 2월28일 일요등교 강요에 대한 구실은 학교별로 영화감상, 토끼사냥, 운동회, 졸업식연습, 임시시험 등이었다.

경북고교생들은 이를 '야만적이고 폭압적인 일'로 규정한 결의문을 낭독하고

경상북도청사, 대구시청사, 자유당 도당사, 경북도지사 관사 등 독재와 부정의 심장부를 돌며 그 부당성을 규탄했다.

대구 고교생들은 명덕로터리와 중앙로로, 경북여고생들은 수성교방향으로 시위를 벌였고,

경북대사대부속고교를 비롯한 여러 학교의 학생들도 교내 농성 등의 집단행동으로 불의에 항거하였으며, 대구시민들도 학생들의 의거에 호응했다.

학생들이 외친 구호는 '횃불을 밝혀라 동방의 빛들아', '학생을 정치에 이용하지 말라', '학원에 자유를 달라' 등이었다.

이들은 조국이 가난한 약소국에서 벗어나 훌륭한 민주국가가 되기를 염원했던 것이다.

2.28민주운동은 자유당 정권의 불법적인 인권유린과 빈곤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못살겠다 갈아보자'는 국민적 요구에 불을 당겼다.

그것이 3.15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마산의거와 4.19혁명으로 이어졌고, 마침내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와 제1공화국의 붕괴를 이끌어냈다.

이 땅에 처음으로 민권 민주주의가 승리하는 위대한 역사가 창조된 것이다.

당시 이와 유사한 처지에 있던 제3세계 국민들에게도 희망의 빛을 던졌고,

60년대의 세계적 학생운동으로 번져 나갔다.

2.28민주운동은 국민이 주권자임을 역사상 처음 체험적으로 깨닫게 했고 세계사의 변혁에도 하나의 불씨가 되었다

 

근대교육의 산실 대구

대한제국 시기 대구에는 1899년에 설립된 대구 최초의 근대적 학교인 사립달성학교를 비롯하여

계성학교(1906년), 신명여학교(1907년) 등 종교계에서 설립한 교육기관을 중심으로 민족교육과 계몽운동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일제는 교육쇄신을 구실로 사립학교를 탄압하면서 대구공립보통학교(1905년), 덕산심상소학교(1906년) 등 공립학교와

일본인 전용학교를 설립하였다.

3.1운동 이후에는 소위 문화정치의 시행으로 보통교육과 실업교육에 치중하여

대구상업학교, 대구농림학교 등의 실업계 중등학교가 많이 설립되었다.

이후 대구사범학교(1923년)와 대구의학전문학교(1933년) 등과 같이 전문교육기관이 개교하였다.

한편, 일제의 감시와 탄압 하에서도 대구청년활동(신우동맹) 및 동맹휴학과 항일시위 등 교육현장에서의 학생반일운동은 계속되었다.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의 비밀결사 활동과 대구상업학교의 태극단 활동 등은 국권회복을 위한 조직적인 항일운동이었다.

이렇듯 일제강점기 대구지역 학생들의 항일독립운동과 그 정신은 오늘날 교육도시로서의 명성을 이어오는 저력이 되었다. 

 

 

 

 

 

 

 

 

유물로 보는 향토생활, 인력거

 인력거는 1890년대 일본을 통해 우리나라에 전해졌는데

주로 관리, 부자, 기생등이 이용하는 교통수단이었다.

대구에서는 역전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1920년대 당시 요

금은 부내 5정 이내 30전 내외(쌀 한되 약 39전)로 매우 비싼 편이었다.

인력거는 주인의 심한 폭압과 멸시를 참아가며 끌어야했던 가난한 한국인들의 생계수단 중 하나였다.

 

 

 근대산업도시, 대구

능금의 도시 대구.

 대구의 사과나무는 1899년 선교사에 의해 처음 심어졌으며,

본격적으로 재배된 것은 1910년대 일본인들이 금호강 주변 지역에 과수원을 조성하면서부터였다.

대구는 모래가 섞인 사질토양인데다 일교차가 커 능금재배의 최적지였다.

육질이 단단할 뿐만 아니라 당도가 높고 상품성이 뛰어나 1960년대에는 전국 생산량의 87%를 차지하기도 하였다.

현재 동구 평광동에는 국내 최고령의 사과나무가 남아 있으며,

빨간 빛을 띠는 홍옥이 열려 대구 능금의 전통과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섬유.

대구의 풍토는 뽕나무.면화.대마재배에 적당하여 예로부터 양잠과 베짜기가 성행했다.

근대적 직기기술의 보급은 1906년 기업전습소가 설치되고 전습생 15인이 직조기계기술을 습득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1910년대 후반 한국인의 자본으로 염직주식회사와 동양염직회사가 설립되기도 했지만

일본인에 의해서도 대규모의 제사공장이 설립되면서 대구는 일본계 주도의 제사산업 도시로 부상하였다.

대구의 섬유산업은 광복 이후에도 꾸준히 발전하여 한국 굴지의 삼호방직, 제일모직 등이 가동되었고,

1960년대 나일론 등 대단위 원사공장이 세워져 섬유공업의 중심지로 우뚝 섰다.

 

 

 

 근대상업도시 대구

 대구는 상업이 일찍부터 발달하여 대규모 시장이 형성되었다.

평양, 강경시장과 함께 전국 3대 시장으로 유명한 서문시장은 '대구부읍지'에 '대구읍장'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그 명칭은 읍성의 서문 밖에 위한 데에서 유래하였다.

1923년 천왕당 못이 있던 현재의 위치로 옮겨 지금까지도 대구를 대표하는 시장으로 자리잡고 있다.

조선시대 전국 최대의 약재시장이었던 약령시는 1658년(효종9) 경상도 관찰사 임의백에 의해 봄, 가을에 객사 주변에서 열렸으나

1908년 객사가 헐림에 따라 지금의 남성로 일대로 이동하였다.

1914년 일제에 의해 약령시 춘시가 폐지되었으나

1923년 약령시 진흥동맹회가 조직되어 부흥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광복 후 다시 봄, 가을에 열리다가 상설시장으로 변하였다.


삼성, 대구에서 성장하다.
 1938년 3월1일 이병철(1910~1987)은 대구 서문시장 근처의 수동에 삼성상회를 설립하였다.

삼성상회는 자본금 3만원으로 대구의 능금, 포항의 건어물 등을 만주와 중국으로 수출하였다.

이병철은 개업 1년만에 일본인의 조선양조를 인수하는 등 대구 굴지의 사업가로 성장하였다.

사업은 순조롭게 신장되어 1941년 6월 3일, 삼성상회를 주식회사 삼성상회로 등록, 근대적인 기업의 형태로 발전하였다.

1947년 대구의 사업체는 간부직원들에게 일임하고 상경하여 이듬해 삼성물산을 설립하여 무역업에 나섰다.

그러나 한국전쟁 때, 북한 인민군에게 재산을 몰수 당하고 대구로 내려왔다.

다행히 조선양조의 수입금3억원으로 부산에서 삼성물산을 다시 설립하였으며,

1954년 9월15일, 대구에서 제일모직 공업주식회사를 창립하여 삼성그룹의 모태를 마련하였다.

 

대구, 조국근대화를 이끌다를 읽고

 

 

역사관 기둥을 보고

 

순종의 대구순행시 사진을 보고 

 

이런 저런 상념속에 2층으로 올라갑니다. 

 

'100년 전 북성로를 걷다' 기획전시회를 개최하고 있습니다

 

먼저 로비에 있는 이런 저런 사진들을 둘러 봅니다.

 

 

 

 

 

 

 

 

 

 

기획전시장으로 들어갑니다.

 

북성로는 조선시대 임진왜란 이후 돌을 쌓아올린 대구읍성(大邱邑城)이 있던 자리로

일제강점기인 1906년 말부터 무단 철거되고 그 자리에 만들어진 거리입니다.
1909년 10월 십자로(지금의 종로와 경상감영길)의 개통과 함께 일본인 상점 밀집 거리로 바뀌었지요.

이곳은 일제 수탈의 상징이었으며 조선인들에게는 원성의 공간이었습니다.
1911년 2월에 발행된 조선총독부 관보에 따르면

당시 북성로에는 포목점과 양복점, 모자점, 신발점, 시계포, 장신구점, 곡물상회 철물점, 목욕탕, 백화점 등

다양한 업종의 가게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 거리에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가게가 107곳으로 대부분을 차지했고

조선인 3명이 일본인 틈바구니에서 곡물가게 3곳을 운영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현재 북성로는 공구상회가 밀집해 있어 '공구골목'으로 불리고 있으며

최근 도심재생 사업으로 박물관과 카페 등이 속속 문을 열어 '역사와 문화가 숨 쉬는 상가'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전시회에서는 일제의 자본으로 북성로에 세워진 미나카이백화점(三中井 百貨店·지금의 대우주차장 자리)관련 자료를 비롯해

당시 모습을 담은 사진과 생활용품 등의 자료 등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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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3.12.11 19:42

    첫댓글 대구근대 역사관을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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