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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신춘문예 시, 시조 당선작 모음 (tistory.com)
2018 매일신문 신춤문예 시 당선작
박쥐 / 윤여진
있잖아 이 붉은 지퍼를 올리면 그녀의 방이 있어 내가 구르기도 전에 발등을 내쳤던 신음, 그녀의 손가락을 잡으면 구슬을 고르듯 둥근 호흡이 미끄러져 들어왔지 켜켜이 나를 쌓던 그녀는 더는 미룰 수 없는 걸 알았는지, 나는 그녀의 배를 뚫고 나왔어 처음으로 말똥하게 울었는데 날 내려다보는 그녀의 눈이 선명해, 입 다물었지
노을을 오래 눈에 담으면 모든 결심이 번지고 마는 거, 아니? 나는 거꾸로 앉아 바깥을 노려봤어 배꼽 언저리를 돌리면 꿈속에서 잠드는 그녀의 집이 있어, 내가 모를 남자와 나만 한 아이가 있다는 그 집, 문지방을 넘기도 전에 접질리는 호흡. 쌓아둔 라면이 떨어질 때마다 잘 살고 있었네? 그녀는 내게 돌아와 물었지 발가락 사이엔 어설프게 부러뜨린 빛이 한가득이었어
난 그녀가 쏟아낸 그림자를 받아먹고 하루가 다르게 자랐어 뒤통수에 부러진 그녀의 날개를 밀어놓고, 기껏 고른 어둠을 양발 가득 쥐고 매달렸지 그럴 때마다 그녀는 말해 이젠 멀리 못 날아가겠네, 힘껏 닳은 발톱을 내밀다 조용히 멀어지는 그녀의 남은 날개를 내려다봐, 떨어진 돌조각을 씹어 삼키며 불현듯 나는 놀라곤 해 다시 멀어진 저 지퍼, 똑 닮은 저 곡선이 내 배에도 들어차 있었거든 흉터를 밝히는 건 촘촘히 밀려가는 증오, 잘 보이도록 내가 나온 자국을 저무는 해에게 붙여두지
귀소본능은 박쥐의 지긋지긋한 버릇, 몸살처럼 돌아올 그림자를 향해 긴 잠을 자둬야지 나는 늘 거꾸로 앉아 말해 어서 와 엄마
심사평-모성의 신화에 대한 시적인 뒤집기 인상적
예심을 통해 올라온 것은 20여 명의 작품이었다. 투고작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시적인 것’에 다가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다가감’이 아직 실현되지 않는 시적인 것에 육박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시가 될 수 없는 것과의 긴장 속에서만 시적인 것은 생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심사위원은 작품들을 추려나가면서 최종적으로 추일범, 이린아, 윤여진의 작품을 남겨두게 되었다. 이 시들은 각기 다른 측면에서의 선명한 장단점을 갖고 있었고 그 나름의 시적 잠재성을 보유하고 있었다.
추일범의 「구름의 실족사」는 장례식장을 배경으로 그 공간을 다른 차원으로 확장시키는 공감각이 뛰어났다. 죽은 사람과 조문객 사이를 은유의 힘으로 연결시키는 능력이 설득력 있는 감성을 전달했다. 다만 그 차분한 감동은 강렬한 매혹을 동반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린아의 「편집증」은 호치키스라는 오브제에 대한 시적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한다. “열두 명의 이모와 방문을 잠근 다섯 명의 언니”의 예기치 않은 등장은 시적인 언어의 절묘한 돌발성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 시와 투고된 다른 작품들과 편차가 있는 것은 아쉬움이었다.
윤여진의 시들에서는 정교한 언어들과 강렬한 이미지들이 엮어내는 인상적인 성취를 확인할 수 있었다. 투고작 가운데 「박쥐」와 「구름 수리공」 모두 수작이었다. 상대적으로 「박쥐」가 더욱 특별한 발화법과 상상력을 보여주었다. 가족과 모성을 둘러싼 이야기가 있지만 그것을 서사로 끌고 가지 않고 점묘법으로 이끌어 가고 있다. 부분마다 집중해서 전체를 보여주는 기법은 자신이 생성하는 이미지에 대한 확신에 근거한 것처럼 보인다. 모성을 ‘박쥐’라는 이미지로 상상적으로 재구성한 점도 매력적이지만, 집을 떠났다 돌아오는 존재가 모성이라는 설정 역시 익숙한 모성의 신화를 뒤집는다. 이 시적인 뒤집기를 통해 모성을 둘러싼 상징질서에 날카로운 균열을 낸다. 섬세한 재능에 대해 신뢰할 수 있었고, 미지의 폭발력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심사:송재학 시인, 이광호 서울 예술대 교수
2018 영남일보 문학상 시 당선작
조문 / 이서연
빈 방에 남아 빈 방을 닦고 있는 거울처럼
그 집의 벽들은 아직 비에 젖고 있다
현관 앞에 쓰러진 우산이 있고 지붕을 넘어
개 짖는 소리가 들린다
누군가 소리 내어 운다 나는 꽃을 들고 있다
이른 새벽 청소부가 올 때까지
쓰레기봉투처럼 웅크리고 싶은 밤이 있다
자동차가 달리는 8차선 도로를 천천히 가로질러
죽어가는 밤과 죽은 뒤의 밤을
죽은 사람 곁에 앉아 산 사람이 지샌다
삶이 죽음으로 옮겨가는 낮을 지나
죽음이 삶을 전염시키는 밤으로
눈을 감고 있으면 생각 없는 몸이 어딘가로 간다
생각만 남아 몸을 생각한다
엎어진 화분처럼
방문을 쥐고 있는 젖은 손이 있다
손잡이를 말아 쥔 둥근 손등만 보인다
창문이 없는 방에 바람이 들이쳤다
먹구름과 흰 구름이 방 안을 지나간다
감은 눈 안으로 구름은 어떻게 들어 왔을까?
심사평
언어 몰고가는 힘 놀랍고 삶과 죽음 관계 새로운 인식 이끌어
예심에서 올라온 10명의 작품으로 우리 시단의 변화를 실감했다. 흔히 보아왔던 개인적 발화에 가까운 소통부재의 언술이나 실험이라는 방패 뒤에 숨은 책임방기(責任放棄)의 시편들이 확실히 줄어들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신 새로움을 보여주는 시편들보다 익숙함이라는 달갑지 않은 현상이 눈에 띄어 안타까움을 지울 수 없었다.
두 심사자는 당선권에 든 작품으로 나동하씨의 ‘계단들’과 손명이씨의 ‘전모(全貌)’, 그리고 이서연씨의 ‘조문’을 최종 선정했다. 손명이씨의 작품은 ‘달’이라는 원형상징을 변주하면서 시상을 엮어가는 수법이 눈여겨볼 만했다. 그러나 관념을 구체성에 얹는 데 힘이 부치는 감이 있었다. 나동하씨의 작품은 ‘계단’이라는 대상을 삶의 보편적 국면으로 이어내는 인식의 깊이를 보여주었다. 대상을 치열하게 파고드는 힘, 긴밀한 구성력과 치밀한 묘사력도 두루 갖추고 있었다.
이서연씨의 작품은 참신한 비유와 더불어 언어를 몰고 가는 힘이 놀라웠다. 무엇보다 행간을 건너뛰는 경쾌한 어법이 신인의 예기(銳氣)를 느끼게 했다. “죽어가는 밤과 죽은 뒤의 밤을/ 죽은 사람 곁에 앉아 산 사람이 지샌다/ 삶이 죽음으로 옮겨가는 낮을 지나/ 죽음이 삶을 전염시키는 밤으로”와 같은 구절에서 보듯 활달한 어법을 통해 삶과 죽음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이끌어내고 있다. 구성의 측면에서 안정감을 주고 있다는 점도 이 작품의 또 다른 자랑거리다.
대상에 직핍해 들어가 인식의 상투성을 뒤집어내는 나동하씨의 작품과 감각적이고 개성적인 화법으로 일상 언어의 범박함에서 벗어난 이서연씨의 작품을 두고 논의 끝에, 두 심사자는 신춘문예 당선자에게 요구되는 새로움이라는 덕목에 좀 더 부합된다고 판단되는 이서연씨의 작품 ‘조문’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신춘문예 당선자의 영광은 단 하루다. 이 작은 성취에 머물지 말고 당선자는 언어의 모험에 기꺼이 몸을 던져 천 년을 버티는 교목이 되길 바란다.
심사: 이하석, 장옥관
2018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율가(栗家)/이소회
갓 삶은 뜨끈한 밤을 큰 칼로 딱, 갈랐을 때
거기 내가 누워있는 줄 알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벌레가 처음 들어간 문, 언제나 처음은 쉽게 열리는
작은 씨방 작은 알 연한 꿈처럼 함께 자랐네
통통하니 쭈글거리며 게을러지도록 얼마나 부지런히 밥과 집을 닮아갔는지
참 잘 익은 삶
딸과 딸과 딸이 둘러 앉아 끝없이 밤을 파먹을 때마다
빈 껍질 쌓이고 허공이 차오르고 닫힌 문이 생겨났다
말랑한 생활은 솜털 막을 두르고 다시 단단한 문을 여미었다
강철 같은 가시는 좀도둑도 막아주었다
단단한 씨방 덜컹덜컹 뜨거워지는데
온 집을 두드려도 출구가 없네
달콤한 나의 집, 차오른 허공이 다시 밥으로 채워질 때, 혹은 연탄가스로 뭉실뭉실 채워질 때
죽음은 알밤처럼 완성된다
죽음은 원래가 씨앗이기 때문이다
심사평
선명한 주제의식·사물에 대한 섬세한 접근 돋봬
올해 응모작들은 사회의식을 갖추거나 삶의 현장감 있는 작품이 드물고 너무 정감적으로 흘러가서 주제의식이 미약한 것 같다.
감각적이고 감성적이며 말초적인 작품들에서 삶의 성찰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이 든다. 작품들이 상투적인 표현으로 흘러 미학적 성숙도도 많이 떨어지고 상상력의 고갈도 보여준다.
주제의식을 갖추지 못한다면 산뜻한 이미지로서 독자의 영혼을 끌어당기는 맛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지도 못하고 선뜻 눈이 가는 작품이 부족했다. 일반적인 생각에 머무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선자들의 기대치가 높아서인지 선명함을 지닌 당찬 작품은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철학적이고 투철한 저항 의식을 담는다든가 명료한 이미지를 끌어오지 못함이 짙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중에서도 최종심에 오른 '냄새가 구석을 살핀다' '달맞이꽃' '탄생비화' '당도' '겨울파밭' '율가' 등은 일반적 범주를 뛰어넘은 수작으로 여겨진다. 이 중에서 '율가'를 당선작으로 미는 힘은 주제의식이 선명하고 사물에 대한 접근 방식이 섬세하다는 것이었다. 함께 보내온 작품들도 고른 수준이어서 선택에 어렵지가 않았다. 힘든 시의 길에 좋은 작품을 남길 것을 요구한다.
심사위원: 강은교·강영환
2018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미륵을 묻다/김형수
이천여 년 전의 방가지똥 씨앗이
스스로 발아가 된 적이 있다고 한다
한 해밖에 못 사는 풀이 때를 기다린 것이다
사랑할 만한 세상이 오지 않아
이천 년 동안 눈 감은 태연함이라니
고작 일 년 살자고 이천 년을 깜깜 세상 잠잤다니
그런 일이 어찌 꽃만의 일이랴
우리도 한 천 년쯤 자다가
살고 싶은 세상이 왔을 때 눈 뜨면 어떨까
사람이 세상을 가려 올 수 없으니
땅에 엎드린 바랭이들 한 천 년쯤 작정하고
나무를 묻었다는 매향埋香의 기록
아, 어느 어진 왕이 천 년 후를 도모했던가
침향이 되면 누구라도 꺼내 아름다운 향기로 살라고
백 년도 아닌 천 년을 걸어 나무를 묻었단다
그것은 사람이 땅에 심은 방가지똥이었다
한 해 지어 한 해 먹던 풀들이
천 년 후의 나무 씨를 뿌렸다는,
우리 오천 년 역사에서 가장 뿌듯한 매향에 관한 몇 줄의 글
읽고 또 읽고
노오란 꽃을 든 미륵이 눈에 어른거렸다
심사평
전체적으로 고른 성취로 안정감 돋보여
수사의 과잉이 사물과 현실을 왜소하게 한다. 문장들은 매끄러우나 심장박동 소리가 들리지 않고, 이미지는 넘치나 소비되기에 급급하다. 또한 전반적으로 삶과 시에 대한 예각적 인식보단 장황한 요설과 실험실에서 배양된 인위적 표현들이 유사한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예심 인상기를 공유하며 본심에 올린 최종 대상작은 권수찬, 김형수, 김현곤, 박민서의 작품이었다. 이들의 응모작은 적어도 언어 실험실의 폐쇄성과 자의식 과잉 그리고 지나친 경험 추수로부터 미학적 거리를 확보하면서 개인의 방언을 소통의 장으로 옮겨오는 데 모두 성공하고 있었다. 자신의 시대와 몸을 관통한 언어로 좀 더 자연스럽게 공적 음역을 확보할 수 있다면 머지않아 성과들이 있으리라 믿는다.
먼저 권수찬은 드물게 사회학적 렌즈로 시대 현실을 조명하는 힘을 보여주었으나 안타깝게도 인식이 감각으로 전환되는 지점을 보여주지 못했다. 김현곤은 성큼성큼 내딛는 남성적 어법에 호감이 갔으나 이분법적 문명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김형수와 박민서의 작품을 두고 장고에 들어갔다. 박민서의 작품은 이미지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 아슬아슬 위태로운 감이 없지 않았으나, 이미지와 이미지를 연결하는 힘에 있어서 탁월한 기량을 선보였다. 김형수의 경우는 기시감이 문제적으로 다가왔으나 전체적으로 고른 수준과 성취로 안정감을 주었다. 위태로운 새로움과 오래된 울림 중 격론 끝에 간신히 선택된 ‘미륵을 묻다’는 지층에서 캐어낸 미륵처럼 시간을 뛰어넘는 울림을 간직하고 있는 시다. “고작 일 년 살자고 이천 년을” 견딘 이 빛나는 시적 순간이 “한 해 지어 한 해 먹던 풀들”의 삶에 뿌리를 내리면서 측정 불가의 우주적 시간 단위로 시인을 밀어가길 바란다.
심사위원: 정일근, 손택수, 조향미
2018 경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롤러 코스트/이온정
놀이 공원엔 비명이 꽃핍니다
도대체 어떤 믿음이 저렇게
비명을 질러대는 걸까요
믿음은 힘이 세고
구심력과 원심력에 매달려
아찔한 생을 소진하고 있는 걸까요?
밖으로 튀어 나갈 수 없는 이 놀이는 무섭습니다
현기증을 다독이며 회전하는
공중의 수를 서서히 줄이기로 합니다
훌라후프처럼 돌리고 돌리던
저녁의 둘레를 줄이며
둥근 공포는 야광으로 빛날까요
노랗게 질릴수록 안전운행을 믿지만
믿어서 더 무서운 일들이 일어나곤 합니다
힘이 센 믿음에서 이탈하고 싶지만
굴곡의 운행은 중도 하차를 절대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존재의 끈을 놓지 않고
기어이 튕겨나간 방식으로 지킨 일생이라며
저렇게 즐거워도 됩니다
멀미를 추스르며
현란한 굴레를 휘돌리던 바퀴들의 공중
즐겁던 아비규환이 조용합니다
어떤 절정도 저렇게
가볍게 내려놓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놀이기구 밑엔 비명들이 즐비하고
비명은 즐거움과 고통의 두 가지 방식입니다
구심력을 밀고 원심력으로 배신당하는
이 아찔한 일생의 놀이를
아이들은 일찍부터 배우려 합니다
심사평: 시로 말하기 방법 체득해 보여준 작품
예심을 거친 74편의 시를 공들여 읽었다. 단단한 구조를 이뤄내고 있는 작품들도 있었지만 아직 시의 어법을 찾지 못한 작품들도 많았다. 시는 독창적인 말하기 방법의 하나다. 그냥 떠오르는 심회를 글로 쓰는 말하기가 아니라 지극히 절실한 직관이나 영감을 잘 짜여진 언어로 구조화해내는 특이한 말하기의 방법이다. 응모작들을 읽으면서 느낀 소회 중 다음의 두 가지를 지적해 두고자 한다.
우선, 시는 절실한 표현 의도를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사무치는 긴장을 지닌 시적 제재를 찾았을 때를 기다려 글을 써야 한다. 시의 표현 의도가 중층적 암유나 의도적 모호성을 추구한 것일 때에도, 독자가 깊은 혜안으로 접근해 갔을 때 금강석처럼 견고하면서도 빛나는 광휘의 표현 의도를 만날 수 있게 해주는 시가 좋은 시다.
그리고 응모작들이 너무 헤프게 말들을 쓰고 있었다. 정제되지 않은 말을 쓰다 보니 시의 길이가 지나치게 길어진 작품들이 많았다. 시의 길이가 길어질 수도 있지만 꼭 필요한 말들의 결집이어야 하는 것이다. 시는 무잡한 상념의 나열이나 욕구불만의 배설물이어서도 안 된다.
‘롤러코스트’를 당선작으로 뽑는다. ‘롤러코스트’의 작자는 시로 말하기의 방법을 성실히 체득해 보여줬다. 혼란한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현대인이 당면한 위난의 상황을 ‘롤러코스트’의 ‘원심력’과 ‘구심력’의 논리를 차용해 보여줬다. ‘롤러코스트’는 궤도열차라고 부르는 놀이 기구다. ‘청룡열차’나 ‘은하열차’라고도 부르는 그것이다. 고속으로 달리는 열차가 휘돌면서도, 거꾸로 매달린 사람이 떨어지거나 튕겨나가지 않는 것은 밖으로 튕겨나가려는 ‘원심력’이나 중심으로 빨려 들어오려는 ‘구심력’ 때문이다. ‘롤러코스트’에 탑승해 있는 사람은 자신의 자유의지와는 상관없이 궤도열차의 운행 방식에 자신을 맡길 수밖에 없다. ‘롤러코스트’의 시인은 놀이기구에 탑승한 채 자신의 자유의지를 던져버리고 살아야하는 현대인의 난망한 상황을 보여주었다. 쉼 없이 노력해서 훌륭한 시인으로 대성하기를 바란다.
마지막까지 심사자의 눈길을 끌었던 응모작 중 ‘얼룩말 미싱’ ‘밑돌’ 등이 가능성을 보여준 작품이었다. ‘얼룩말 미싱’은 경쾌하고 선연한 이미지를 구사할 수 있었지만 불필요한 부연이 눈에 띄었으며, ‘밑돌’은 착상의 새로움이 돋보였으나 공감을 불러내는 힘이 약했다.
심사위원: 김재홍, 이영주
2018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등대 / 유하문
지붕 낮은 집들이 송이버섯처럼 엎드려 있는 작은 마을 앞 바다에 방파제가 두 팔 벌려 마을을 넘보는 거센 파도 막아 줍니다. 근심 끝에 파수병 하나 하얀 총 들고 서 있습니다.
멀리 부레옥잠처럼 떠 있는 형제 섬들 너머로 아침나절 조업나간 배들이 돌아오고, 서녘 하늘 피조개 속살 같은 노을이 만선한 어부들 얼굴에 단풍으로 피어났습니다.
이윽고 밤이 되면 보초선 이등병이 아직 귀환하지 않은 전우들을 위해 반딧불처럼 기별을 보내고, 육지에선 촛불이 활화산 마그마처럼 흘러 바다까지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마을 초입에 서서 어두워진 바다를 바라보며 소매 끝 눈으로 가져가는 노모와 먼저 간 아내를 위해 우리들의 아버지는 작은 촛불 켜고 착착착 잘도 돌아옵니다.
아침에야 걱정 거두고 잠이 든 등대 안쪽 부두엔 옆구리 맞대고 늘어선 배들이 잠시 낮잠을 잡니다. 수협 앞에서 파시가 펼쳐지고 도시에서 온 사람들이 등 푸른 지갑을 엽니다. 돈 좀 챙긴 아버지들 소주 몇 잔 나누며 서울 간 자식 걱정에 한숨 지다가 또 바다로 나갑니다.
위문편지처럼 마지막 여객선이 부두로 들어오면 도시로 가는 마분지 박스마다 바글바글 병아리 사랑이 실립니다. 수협 뒤 여관 창에 불빛이 들어오고 홀로 된 숙모가 파도가 들려주는 자장가에 잠을 잡니다. 등대 너머 하얀 부표들 밑으로 김이 자라고 미역이 자라고 전복이 자랍니다
심사평
상징화된 등대의 의미 집요하게 잘 살려
올해 시 부문에는 경남신문 신춘문예의 역사를 대변하듯 응모작품의 양이 많았다. 서정적·전원적 상상력을 보여주거나 삶을 성찰하는 작품이 많았고, 사회적 문제나 문명 비판적 의식을 담은 작품, 실험적 경향을 보여주는 작품은 적었다. 풍성한 응모작품의 양에 비해 작품 수준은 기대에 미치지 못해 아쉬움을 남겼다.
신인의 시에서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은 개성과 패기가 있는 참신한 상상력이다. 자기만의 언어로 고유한 자기 세계를 힘차게 밀고나갈 때 다소 거칠고 모자라는 점이 있을지라도 그 가능성에 큰 신뢰를 보내게 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응모작의 상당수가 신인다운 참신한 특징을 보여주지 못했다. 가장 큰 문제는 관념과 감정의 과잉이었다. 묘사가 산만하고, 시적 긴장감이 느슨한 시, 주제 의식이 치밀하지 못해 완성도가 떨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이런 가운데 본심에 오른 작품은 ‘소슬 모란’ 외, ‘옷핀, 먼 길을 꿰어 오다’ 외, ‘태풍의 눈’ 외, ‘가새’ 외, ‘등대’ 외, 5명의 시였다. 이 시들을 다시 정독하고 심사숙고한 끝에 배종영씨(경기)의 ‘가새’ 외 3편, 유하문씨(경북)의 ‘등대’ 외 8편을 최종 논의하기로 했다.
배종영씨의 ‘가새’는 ‘가위’의 지역말인 ‘가새’를 모티브로 상상력을 차분하게 전개하고 있었다. 말놀이와 의미의 적절한 거리가 호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마무리가 성급해 아쉬움을 남겼다. 단절과 봉합의 상상력 역시 조금 더 활달하게 전개됐으면 좋았을 것이다.
유하문씨의 ‘등대’는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은 사람들의 일상을 ‘등대’라는 상징을 통해 보여주었다. 부분적으로 이미지의 낯익음이 지적되기도 했지만, 상상력의 전개가 자연스럽고, 체험에서 우러나온 듯한 언어로 시종일관하고 있어 신뢰감을 주었다. 무엇보다 상징화된 ‘등대’의 의미를 집요하게 실재적이고 객관적인 세계에 진입시키려는 노력이 시적 긴장을 유발시켜 심사위원들의 눈길을 마지막까지 붙잡았다. 유하문씨의 경남신문 신춘문예 당선을 축하하며 대성을 바란다. 아울러 당선에 들지 못한 분들에게 심심한 위로와 격려의 말을 전해 드린다.
심사위원: 이광석·배한봉
2018 대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악어떼 / 원보람
서른이 지나기 전에 두 번째 실업급여를 받았다
사람들은 거리로 나와 햇빛줄기를 나눠먹었고
발끝마다 매달린 검은 노예들도 입을 벌렸다
요즘은 늘 다니던 길을 잃는 사람들이 많아
표지판은 너무 많은 곳을 가리키고
신호등은 가만히 있으라는 신호만 보내지
도시 곳곳에 설치된 늪지대를 지나다가
영혼을 자주 빠뜨렸다
너무 바쁜 날에는 일부러 나뭇가지에
헌옷처럼 걸어두고 가기도 했다
늪지대에 악어떼가 나온다는 소문이 들렸다
노예들은 밤마다 주인을 뜯어먹었고
사람들은 나이를 먹을수록 무거워지는
노예를 질질 끌다가, 끌려다니다가
악어는 심장부터 먹는 것을 즐긴다고 했다
상자 안에 있는 상자를 열면 나오는 상자 안으로
도시의 아이들이 차례로 들어갔다
사각지대 안에서 조용히 자라는 아이들
뚜껑을 열면 어른이 되어 나왔다
우리는 시급을 받고 늪지대에 숨어
포크를 쥐고 악어떼를 기다렸다
돈을 모으면 함께 열기구를 타자고 했다
뿌리 얽힌 사람들에게 내리는 비를 지나
위로의 말이 들리지 않는 대기를 지나
구름 사이 피는 버섯처럼
둥근 머리로 허공을 밀어 올리며
계속 가자고 했다
추락하는 일에 익숙했으므로
겨울 내내 올라가는 열기구만 상상했다
악어는 울기 위해 먹이를 씹는다고 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았다
심사평 : 평범한 시어속 풀잎 같은 날카로움 느껴져
사람의 눈에 닿으면 동행하고 싶어서 안달하는 말이 있다. 노래가 되고 싶어서 춤까지 추는 언어가 있다. 시인은 그 율려와 함께 춤을 추는 사람이다. 그런 노래는 시인의 깊은 마음 바닥을 짚고 나온다.
심사자의 눈과 가슴을 벌떡 일으켜 세우는 시를 기다렸다. 오래된 서당이나 과거시험장의 시가 아니라, 저잣거리와 편의점과 고시원이 즐비한 골목길의 흥얼거림을 원했다. 태초와 시원의 바람이 아니라, 지금 여기 터진 입술과 언 뺨을 때리고 가는 질풍의 시를 기다렸다. 예심을 거쳐 올라온 만만치 않은 시를 읽으며, 심사자들은 긴장했다. 물론 좋은 시만 있는 건 아니었다. 때론 현란하고 모호했으며, 오랜 학습의 지층에 눌려 화석화된 문자도 있었다. 화장이 지나쳐서 돌비늘이 된 언어들도 있었다.
우리는 원보람 시인의 「악어떼」 외 3편에서 싱싱하게 팔짱을 끼는 젊은 숨결을 만났다. 미래의 역량이 느껴졌다 .무의미하고 불분명한 감각으로 사유되는 시의 범람 속에서 그의 시는 오롯했다. 평이한 시어 속에 긴장의 풀잎을 날카롭게 세워놓았다. 무엇보다도 그는 현실을 정직하게 읽을 줄 알았다. 언어와 표현법 뒤에 숨지 않았다. 가슴에 이미 시인의 자세가 자리를 잡은 증거였다. 손끝 재주가 아니라, 자신의 가슴속 진물과 용광로에 펜을 찍는 당찬 의지에 손을 들어주기로 흔쾌히 합의했다. 풋풋한 결점을 덮기에 충분했다.
「어메이징 그레이스」 외 4편, 「탄금」 외 2편이 마지막까지 심사자의 손에 남았음을 덧붙여야겠다. 두 분은 이미 충분한 관록이 느껴졌다. 「어메이징 그레이스」 외 4편은 아픈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에 함몰되지 않고 팽팽한 운율로 시적 순간을 발현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시에 일정한 틀이 생긴 건, 혹 응모작이라서 그럴까? 아니면 이마 위에 견고한 벽이 생긴 걸까? 오래 망설이게 했다. 「탄금」 외 2편은 우리말의 가락과 정서를 잘 형상화한 수준 높은 시였다. 다만, 전통적인 것이 흔히 그렇듯 오래 쓴 수수빗자루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이만큼 언어의 깊이에 닿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선에 들지 못한 분들도 이미 시인이다. 시를 가장 사랑하는 분들이다. 막 여행 차표를 받은 당선자는 출발지에 섰다고 여기시길 바란다. 선외 분들은 갈아타야할 승차시간이 조금 지체됐다고, 마음 토닥이시길 부탁드린다. 당선자에게 축하의 박수를 보낸다.
심사위원: 이시영 이정록
2018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한순간 해변/ 이명선
검은 얼굴의 아이가 있어
조류를 타고 해변까지 밀려온 대륙의 아이가 있어
뿔뿔이 흘러가는 하늘에 흰 수리는 원을 그리며 비행하고 있어
거듭 얼굴이 풀어져
뭍으로 오르려는 눈꺼풀이 흩어져
반복의 역사는 번복되는 아이들로 가득해
창창한 것은 꿈의 세계야 검은 눈물로 적셔지는 땅도 있어
우리에게 바다는 수평선 너머에도 있지만
아이에겐 수평선 너머의 바다엔 해변이 없어
불시에 버리고 온 대륙처럼
감은 눈 속에서 모래 언덕이 푹푹 꺼지고 있어
반신반의 하는 얼굴이 있어
간절함은 체험이 아니야 찢기는 세계에 발을 담그면 붉은빛의 인내가 필요해
국경을 물고 가는 새야
하늘을 균일하게 나누면 새들로부터 망명한 낙원이 있을까
한참을 뛰어가도 숨이 차지 않는 해변이 있어
검은 얼굴의 아이가 부르던 난민의 노래가 밀려나가는
심사평: 절제·인내로 묘사한 인류의 비극
비극적 상황을 절제와 인내로 직시한 작품"(동봉응모작 모두 수준급, 높은 점수)
이명선 당선자의 '한순간 해변'은 지난 2015년 9월 시리아 난민 아이의 죽음을 소재로 인류의 비극을 그린 작품이다. 심사위원들은 이 작품이 인류가 저지르고 있는 비극을 그리면서도 인내와 절제가 미덕인 시 세계를 펼쳤다고 평가했다.
총 1천158편이 접수된 '2018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서 본심 심사위원들은 18편의 시를 골라 평가했다. 이 가운데 4편이 당선작 후보에 오르며, 심사위원의 매서운 심사대에 올랐다.
'한순간 해변'과 '익투스' '수수께끼 나라의 첫 인사법' '미역국을 삼킨다는 것', 등이 당선 경쟁을 벌였다. 우선 '미역국을 삼킨다는 것'은 의미가 함축되도록 말을 활용하는 솜씨가 두드러진 작품이라는 평을 받으며 심사위원을 사로잡았다. 시상을 단단하게 다뤄본 느낌을 준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심사위원들은 섬세하게 형상화하는 작업이 아쉬웠다고 평했다. 종교적인 느낌이 강한 '익투스'는 시를 조여내는 실력, 한 편의 작품을 완성시키려는 의지가 읽히는 작품으로 잘 조정된 시적 발화를 보여줬다는 평을 이끌어냈다. '수수께끼 나라의 첫 인사법'은 시문이 유려하고 상상력이 돋보인 작품으로 마지막까지 당선작과 자웅을 겨뤘다.
본심 심사위원들은 '한순간 해변'의 이명선 당선자가 당선작 외에도 응모한 시가 고루 상당한 실력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줬다. 좋은 시인을 발굴했다고 입을 모았다.
반면 심사위원들은 응모자들이 실험적인 작품쓰기에 주저한 것에 대해선 아쉬움을 표했다. 현실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시에서 사유의 날카로움이 드러나지만, 대체로 서정적인 작품이 많았다고 지적했다.
심사위원들은 가족과 개인으로 세상을 보는 눈이 좁아진 것이 각박한 현실 속을 살아가는 이들의 생존법을 반영한 것 아닌가 하는 우려를 표했다.
마지막으로 시인을 꿈꾸는 응모자들에게 시를 통해 가보지 않은 낯선 곳에 가려는 노력을 당부했다.
심사위원: 김명인, 김윤배
2018 강원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가위질은 이렇게/이인애
엄마의 엄지와 약지는
사이에서 놀고 있는 손가락들을
움직이게 하는 두 가닥의 힘이다
엄마는 매일 아침
낮은 간판 아래 무릎을 꿇는다
빠져나갈 구멍만 있으면, 하며 집을 나와
미장원 열쇠구멍이나 찾는 엄마
날이 마모된 커트용 가위가
정수리에서 밀려나온 머리카락을 씹는다
언젠가부터 밥알도 질기다던 아버지처럼
잘근잘근 이로 뭉갠 머리카락을 토한다
중심에서 멀어진 것들은 잘라내야 한다는 생각
아버지가 다니던 석재공장에서도
돌가루처럼 번져갔던 걸까
남편의 까맣고 윤기 나는 직장을 두 동강 내는
엄마의 가위질을 탓하는 점쟁이
눈 뒤집힌 말들, 미용실 바닥에 쌓인다
가위질 하는 두 손가락 사이에서 졸고 있는
검지나 중지보다도 가늘어진 아버지를
자를 때가 왔다는 통보가 왔다
마지막으로 병원에 갔다 오던 날
엄마는 가위가 돌아간다고 했다
손가락이 자꾸만 구멍에서 빠진다고
아버지가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줬다고
심사평 심사위원: 이영춘, 고진하
본심 작품은 300여 편이 넘었다. 작품의 수준도 예년보다 높았다. 우리는 시가 얼만큼 문학적 진정성을 획득하고, 자기 삶의 이야기를 자기만의 방식과 새로운 진술로 승화시키고 있는가를 눈여겨봤다. 최종 논의된 작품은 김화연의 <사과 벌레가 사과를 기다리는 동안> 외 4편과 이인애의 <가위질은 이렇게> 외 5편이었다. 김화연은 오랜 습작의 연륜이 느껴졌으나 작품이 고른 수준을 유지하지 못한 채 시의 밀도가 떨어졌다. 이인애의 작품은 완성도가 높고, 체험을 바탕에 깔면서 서민적 삶의 애환을 보편적 정서로 잘 그려냈다. 젊은 감각과 번뜩이는 사유의 깊이를 내장한 20대 문청의 시를 세상에 내보내는 기쁨을 누렸다. 참신한 시로 정진하길 바란다.
2018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삼례터미널 / 김헌수
빗물 고여 팔랑이는 흙바닥 길에 숨통을 터놓고 바퀴자국 훑고 간 자리에 안부를 걸쳐 놓는다 이때 삼례터미널은 빈집 같다 버스들은 벚꽃 잎들을 헤아리며 종점 없는 마을로 떠날 것 같다
내 안에 새겨진 주름 패인 얼굴을 현상해 놓고 흑백사진 같은 터미널 지나 후정리 길목에서 손 흔들던 그의 모습을 던져주고 간다
걸어 잠근 뒷문 곁에 그림자 없는 하루가 눕는다 들마루에 앉아서 나누던 습관들이 헐렁해졌다 가끔 자리를 내어주는 그곳, 떨어지는 너그러운 빗방울이 욕심을 내던 처마 밑이 환하다
녹이 슨 남자가 떠난다 그를 엿보는 눈빛 덕분에 말은 쌓여가고, 버스가 지나간 자리에 희미하게 고요가 들어앉았다 나도 한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다음 날이면 또 들어와 앉는 터미널에서 그를 만지고 있다
삼례터미널은 빠져나갈 수 없는 출구다 살아온 지난날이 자동판매기 속에서 낡아가고 있다 쓸어내린 눈꺼풀을 길들이는 감각들, 아무도 몰래 음각해 놓은 문양으로 피어 목판화를 찍어내고 있다
심사평
고요한 은유, 따뜻한 위로같아
예전에 결선 작품들을 보고 나와서 나눈 말이 생각났다. 시들이 너무 어려웠다는 의견이다. 해독이 불가한 암호와도 같은 난독증을 일으키는 시들은 화성악을 내치며 유리창에 스티로폼을 긁어대는 것처럼 불편한 불협의 음을 차용해 시종 들이대는 난해한 음악을 읽는 것 같았다.
결선에 오른 10인의 작품들은 우수한 시들이 많았다. ‘소년병’과 ‘회전의 시간’과 ‘삼례터미널’에 주목했다. ‘소년병’은 시를 밀고 가는 힘도 단단하고 신선했다. 전혀 다른 시선이기는 하지만 문득 군대이야기를 쓴 이문열의 등단작이었던 ‘새하곡’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소년병’을 받쳐줘야 할 다른 시편들이 다소 무게감이 떨어졌다. 언어 선택이 젊다는 것은 장점이기도 하겠으나 정제되지 않은 수식어가 불편하게 느껴졌다.
‘회전의 시간’은 그의 다른 작품인 ‘오늘의 나이’와 ‘장항선’에서 보여주는 재치와 또 다른 시적 감각을 보여주는 수준에 오른 성취를 가늠케 했다. 그러나 “달맞이꽃을 깨운 샛노란 얘기들이”라든지 “물레의 올을 타래로 짓는 실패의 날들”과 같은 표현은 싱싱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던 전체적인 시의 분위기를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을 해서 오히려 풍요로운 시적 멋과 맛을 돋보이는 역할을 해야 하는 은유로서의 생명력을 잃고 말았다.
잔잔한 리얼리즘을 바탕으로 쓴 ‘삼례터미널’은 다른 작품인 ‘7번 출구에서’· ‘개개비의 여름’과 함께 대상의 이면과 그림자까지 관찰하며 사려 깊은 내면을 밀도 있게 그려놓았다. 모름지기 시인의 눈이라면 대상의 아득한 너머와 순간의 찰나까지, 쓰러지고 일어나 건너온 시간까지를 들여다보아야 할 것이다. “걸어 잠근 뒷문 곁에 그림자 없는 하루가 눕는다” “빗방울이 욕심을 내던 처마 밑이 환하다”라니, 이 같은 고요한 은유에서 볼 때 시를 짓는 새로운 시인의 눈이 따뜻하고 그렁그렁한 눈매로 대상을 위로하며 시를 풀어놓았을 것임을 눈치 챌 수 있었다.
당선작을 결정해야 한다. 실험적이고 길들여지지 않은 상상력이 꿈틀거리는 젊고 싱싱한 야생의 시에 손을 내밀어야 할까. “나의 음악은 울음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가수 밥말리의 말처럼 상처받은 생명의 동굴 속 내면으로부터 울려나오는 부드럽고 깊은 응시의 위로와 산들을 껴안고 가는 먼 산빛과 같은 시를 불러내야 할까 망설였다.
결국 ‘삼례터미널’을 당선작으로 선택하였다. 축하한다. 세상에 이름을 알리는 ‘첫 시’이다. 당선작이 대표작이 아니라 삶의 길 위에서 시의 종착역행 나침반을 잃지 않고 오래오래 치열한 시마에 사로잡혀 먼 길을 가는 시인이 되기를 바란다.
심사:이운룡.박남준
2018 젼북 도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인디고/박은영
빈티지 구제옷가게,
물 빠진 청바지들이 행거에 걸려 있다
목숨보다 질긴 허물들
한때, 저 하의 속에는 살 연한 애벌레가 살았다
세상 모든 얼룩은 블루보다 옅은 색
짙푸른 배경을 가진 외침은 닳지 않았다
통 좁은 골목에서 걷어차이고 뒹굴고 밟힐 때면
멍드는 건 속살이었다
사랑과 명예와 이름을 잃고 돌아서던 밤과
태양을 좇아도 밝아오지 않던 정의와
기장이 길어 끌려가던
울분의 새벽을 블루 안쪽으로 감추고
질기게 버텨낸 것이다
인디고는
인내와 견디고의 합성어라는 생각이 문득 들 때
애벌레들은 청춘의 옷을 벗어야 한다
질긴 허물을 찢고 맨살을 드러내는
각선의 방식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여대생들이
세상을 물들이며 흘러가는 저녁의 밑단
빈티지가게는
어둠을 늘려 찢어진 역사를 수선하고
물 빠진 허물,
그 속에 살았던 푸른 몸은 에덴의 동쪽으로 가고 있을까
청바지 무릎이 주먹모양으로 튀어나와 있다
한 시대를 개척한 흔적이 있다
*인디고: 청색염료
심사평 ◇심사: 소재호 시인·문학평론가
금년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에는 170여명에 500여 작품이 응모되어 팽팽한 경쟁을 보였다. 신춘문예에 응모되는 작품들은 대개가 작가들의 무한한 문학적 체험과 연마를 거쳐 정제된 산물이어서 이미 시의 품격이 매우 뛰어나다는 것은 불문가지의 사실이다.
이번 응모된 작품들 중에서는 시제 ‘인디고’‘그림자는 저체온증’‘지렁이 다비식’‘필사의 밤’‘ 주홍날개꽃개미’‘북해의 공작시간’ 등에 시선이 매우 끌렸다. 모두 시적 체제는 잘 갖추어져 있었다.그러니까 이 작품들이 최종심에 오른 것이다. 그러나 약간씩의 아쉬운 점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 중에서도 ‘인디고’는 수준이 매우 높아서 당선의 영예를 안게 되었다.
‘인디고’는 쪽에서 나온 남색이라 했다.색깔을 시 제목으로 내거는 자체부터가 이미 범상함을 벗는다.이 시는 역사적 현실을 배경으로 한다.절제된 감성으로 주조된 서정성을 바탕으로 어둔시대를 견인하는 서사적 정경이 오버랩된다.블루의 색소가 인상적으로 내비치며 인상파 그림의 구도와 명암이 쉬르리얼리즘의 경역도 넘나든다. 제재들은 자꾸 대칭하며 조화해 가는,아이러니와 패러독스가 시의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청춘이 선호하는 낡은 청바지...이 얼마나 아이러니인가. 그리고 얼마나 심대한 이미지의 부딪침인가.
현대의 세대가 옛 세대를 끌고 와서 한 시공에 두어 충돌과 융합을 자아낸다. 결기 높은 시이다. 청바지는 낡아서 무릎이 나와야 한다. 이 청바지는 그대로 상징성의 총화이다.
동서양의 만남이며 이는 또한 시공을 달리한 문화의 충돌이자 혼융이다. 이 때 하의 속 애벌레가 절묘한 시점에 등장한다. 애벌레는 장차 성충이 될 터이다 .매미처럼 어둠을 털고 일어나 허물을 벗고 마침내 푸른 미래의 하늘을 날 것이다.
“어둠을 늘려 찢어진 역사를 수선하고...한 시대를 개척한 흔적”의 시구가 청바지에 얼마나 적확하게 부합하는가.
2018 무등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수목원/전진자
오월이 세상에 길을 놓고 있다
악보도 없이 나무들이 몸관악기를 연주한다
피톤치드 피톤치드 바람에 추임새가 들린다
방문객을 향해 귀를 쫑긋 세우며 들꽃들이 수다를 떤다
당신은 어디서 왔는가
송화가루 음율이 간절하다
나만 빼고 모두 봄이라 한다
시린 생각을 저들에게 들키고 말았을까
내안에 있던 머뭇거림이 슬쩍 빠져나가려 한다
당신은 어디까지 갔는가
오전의 나뭇잎과 오후의 나뭇잎의 태도는 다르다
길어진 만큼 어떤 것은 짧아진다
멧새소리와 멧새소리가 모여 떼울음 이 되려한다
당신도 듣고 있는가
귀를 닫고 눈을 닫아도 길은 더 선명해지고 있다
오월엔 나무들처럼 천천히 걸어와도 좋다
그리움이 잔뜩 우거진 당신의 숲을 향해
심사평
열린 세계관으로 자연과 인생 조명
예년과 다르게 많은 응모자와 응모작품이 우선 선자를 기쁘게 했다. 내용도 사드문제, 세월호, 노마드('떠돌이'로 표현되는 현대 직업사회의 군상들), 디아스포라(국내로 들어오는 고려인 혹은 외국인 노동자와 다문화가족들), 사랑과 평화, 자연과 인생, 노동문제, 농촌과 공동체 사회의 붕괴, 사람들이 저마다 가지고 있는 개인적 정서와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스펙트럼 속으로 '불나비'처럼 날아드는 각양각색의 문제를 포착하는 작품들이 많았다.
그와 반면에 스마트폰과 컴퓨터로 만들어지는 디지털사회를 반영하는 속칭, '컴퓨터詩'가 너무 범람하는 듯하여 염려스러웠다.
시가 쓸 데 없이 너무 길고, 우리말 한글 맞춤법도 무시하는(또는 문법적 지식을 갖추지 않는) 어휘실력과 속어·비어가 출몰하는 체팅 언어가 흠이라면 큰 흠이었다.
시(운문)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정의는 "시는 짧고 산문(소설 등)은 길다"라는 사실이다. 시는 짧기 때문에 은유 등 갖가지 비유와 상징이 요구되며...마치 예리한 비수처럼 혹은 한 송이 꽃처럼 빛과 향기를 두루 갖추면서 '순간에서 영원으로' 감동을 준다는 것이다.
선자의 손에 마지막으로 남은 작품은 김로경의 '새'와 김종숙의 '불시착' 그리고 최우영의 '생선'과 전진자의 '수목원'이었다.
먼저 밀려나간 시는 '새'였는데 시의 전반부가 거의 산문에 가까웠고 나머지 작품도 지나치게 설명에 의존하고 있었다. '불시착'은 당선작으로 밀어도 좋을 만큼 시의 구성과 '현대시의 미학'을 갖추고 있어 신뢰를 주었다. 문제는 같이 응모한 다른 작품들의 수준이 들쑥날쑥했다는 사실이다. 아깝지만 더 공부할 기회를 주는 수밖에 없었다.
최우영의 '생선'외 2편과 전진자의 '수목원'이 선자를 고민하게 했다. '생선'과 '수목원' 중에서 어느 작품을 당선시로 올려도 괜찮았다. 고심한 나머지 '생선'을 뒤로 젖히고야 말았다. "나는 젖은 나무 위에 누워 / 조용히 칼을 받아들인다....(중략)...갈라진 살 사이로 소금이 들어와도 / 나는 아프지 않다 / 아직 살아있다 / 세상은 아직 푸르다"는 절창이었다.
그러나 이 시를 쓴 응모자는 다른 작품에서도 시가 너무 '단형(單形)'이었다. 이 단형에 너무 맛들이면 우선 다른 시들도 지나치게 '애매함(ambiguty)의 미학'에 빠지고 시를 이끌고 나가는 에너지, 대범성, 추진력이 쇠하게 되어...시작에 노쇠현상이 빨리 올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 점을 깊이 깨달을 때 '생선'의 시인은 '좋은 시인'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최후의 당선시를 '수목원'으로 확정했다. 시에 대한 연치(年齒)가 만만치 않다. 우선 열린 세계관을 갖추고 있으며 시에 깊이와 넓이를 동시에 부여할 수 있는 힘과 배짱과 풍성한 정서를 갖추고 있어서 좋다.
이 한편의 시에서 선자는 그의 자연관과 인생관, 시적 대상인 사물과 세상을 참신하게(초록색 시각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짐작했다.
단 부탁드리고 싶은 말씀...괴테나 셰익스피어에서 보듯이 위대한 시인은 그 나라 말의 문법을 지키고 만드는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고 당부한다. 당선을 축하드리며 더욱 용맹정진하기를 기원한다.
심사: 김준태
2018 광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물의 악공들-김정현
시리아 굶주린 혈(血)의 사막에서 금빛 모래사장 해변의 춘곤증자들에게
창백한 시체가 한 조각 잘린 구름으로 떠밀려올 때
견고한 일상의 고딕 질서를 덩어리째 뒤집어쓴 도시
사람들은
아주 잠깐 경악한다 경쾌한 악당 같던
미디어의 충만한 리듬은 조심스레 끝장났고 스무 살
열사병,
비릿한 합주를 나눴던 벌거숭이 몽상가들마저
순순히 날 선 악곡(樂曲)을 포기하고 거리로 집결했다
관현악단 같은 햄릿들로
거대한 복수를 꿈꾸던 어릿광대들과 리어처럼 선명히
부짖을 미치광이들은
이미 쓰레기 가득한 거리에 당도했고 간밤 골목마다
신명나던 두드림,
핏물 같은 구토로 조율 당한 오필리아들은 누굴 위해
저리도 침묵하나 지난 계절
아무도 돌아오지 못할 악공(樂工)이 돼버린 소년소녀들은
제일 아름다운 물의 파동으로 우리의 동공을 적셔대는데
관(管) 같은 고통은 현(絃)의 비명은 끝까지 살아남아
살아있는 자들의 금 간 심장을 날카롭게 연주하네 누
구도 화음 낸 적 없는데
누구나 펼침화음인 사람들 오래전 강을 건넜던 백수
광부의 그림자처럼
낯빛들 어둑했다 저 멀리 바닷바람이 붉은 산호처럼
뻗쳐 와도
바닥의 가장자리마다 고요히 쌓여 있는 물의 영혼들
가느다란 여음(餘音)에도 휩쓸리지 않으려
악공들 모두 기슭을 간신히 부여잡고 온몸을 떨고만
있는데,
경찰 차단선이 순식간에 벽을 쳤다 다시금 주검을 쌓아 올렸다 숨통이 통증으로 나뒹굴고 머리통은 으깨졌다 미치광이들과 어릿광대들이 찢어지자 분노는 산산조각 났고 눈먼 오필리아들만이 거리에 남아 안티고네처럼 울부짖었다 그러나 지난밤처럼 늙어버린 내 영혼은 모텔 난간에 기대선 채 한밤의 열기를 한가로이 관망했다 돌멩이가 날아들기도 했지만 나는 운 좋게 상처 하나 없다 이내 살수차가 물대포를 시연하자 누군가의 연설은 깨끗하게 뭉개졌고 최루액에 토악질하던 학생들은 공포에 휩싸였다 가까스로 시위대열에서 이탈한 노동자와 첫 의무를 이행하던 의경은 공사(工事) 중인 상가에서 마주쳤다 너부러진 각목이 수직으로 빛났고 시멘트는 지루할 만큼 천천히 굳어가고만 있었다 하지만,
아침에 나를 눈 뜨게 한 건 햄릿이 아니었다 리어가
아니었다 오필리아도
시위대도 아니었다 단지 춘곤 가득한 내 하품이었다
찔끔 눈물 한 방울의
아직도 선연한 비극을 미디어는 밤낮없이 이국(異國)의
해변에서 송출하고
모래 속 조그마한 얼굴을 묻고서 끝없이 바다를 향하는 어린 시체는
아무런 말이 없다 나는 기어이 리드미컬,
어젯밤 핏방울을 허밍으로 흘려대며 담배를 입에 가져가는 데
거리의 소란했던 혁명마저
담담히 쓰레기 자루 속으로 쓸어 담는 저 사람은 누구일까
다시금 어느 해변으론 한 구의 시신이 푸르스름하게
떠밀려오고
나는 먼지투성이 밤거리가 화염으로 솟구칠 때마다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못할 악몽을 꾸곤 했다 그런데
그 꿈을 정말 악몽이라 해야 할까
악공들이 한가로이 모래찜질하던 날 붙들곤 파도처럼
바다를 켜며 앞으로 나아가고
포말처럼 다시 바닷속으로 빨려들던 물속의 푸가를
난간 밖으로 담배꽁초는 자유롭게 튕겨 나가고
나는 더 이상 세계의 깊이로는 도무지 빠지고 싶지 않아
부드럽게 출렁이던 물침대를 조율하러 또다시 모텔로
기어들어 간다
낮잠은 지옥만큼 나를 끌어당기고
나는 천국 같은 이 단단한 세계가 하루의 시작처럼 아주 조금 마음에 든다
심사평 "아름다운 파동 일으키는 노래 이어지길"
예심을 통과한 15명의 작품 중에서 마지막까지 남겨진 것은 김정현, 한형석, 김정식의 시들이었다.
김정식의 시는 간결한 구어체를 구사하며 독자를 자연스럽게 시적 공간으로 끌어들인다. 샤갈이나 천경자 등 회화를 모티프 삼아 예술적 감각과 조형미를 보여준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하지만 작품세계가 다소 협소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한형석의 시는 감정을 조율하면서 언어적 긴장을 끝까지 밀고나가는 힘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때로는 자신을 가두는 틀을 과감하게 깨뜨리는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그에 비해 김정현의 시는 이미지의 전개가 활달하고, 원심력을 지닌 시행들이 시적 공간을 자유롭게 열어나간다. 잦은 직유와 산문적 호흡은 시를 약간 산만하게 만드는 면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가닥을 놓치지 않고 독자를 어느 낯선 지점에 정확히 데려다 놓는다. 당선작으로 뽑은 ‘물의 악공들’ 역시 시리아의 사막에서 시작해 고통스러운 죽음의 현실 곳곳을 돌아다니며 “바닥의 가장자리마다 고요히 쌓여있는 물의 영혼들”을 불러낸다. 앞으로도 그의 노래가 아프고 아름다운 파동으로 “우리의 동공을 적셔”주기를 바란다.
심사:나희덕
2018 광남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첫차 / 심상숙
환한 덧니가 영정을 물고 있다
부음은 여태 기다리고 있었구나
이곳은 생각보다 따뜻하다
혜화동 대학병원 장례식장 한 밤의 보일러 굉음이 블랙홀이다
한꺼번에 몰려드는 눈발, 국밥 말아먹듯 휩쓸려간다
눈 덮인 교복과 찹쌀떡 모판을 방 윗목에 세워 두고
모나미 볼펜과 파카 만년필 좌판 그리고 문구 캐비닛
끝내 가보지 못한 장학생 대학 합격증을 끌어안고,
영정 속 덧니는, 네모 속으로 문상객이 내어 준 사각의 추억을 끌어 들인다
종로에서, 덕수궁에서 우리 한 번 마주 친 적 있을까
흰 국화꽃 대궁 끝에 떨어질 듯 매달린 저 눈빛
아직도 인연이 남았는지 팽팽하다
단단한 잇몸 뚫고 좋은 내색이듯 빛나는 뻐드렁 덧니, 누군들 함부로 웃지 못한다 알 굵은 사과나 날 고구마를 통 째로 베어 물어 아귀 귀신 달래듯 자리를 내어 줄 뿐이다
막차 전철도 끊어져 눈 쌓이는 저녁
총알택시 대신
대학병원 아무 집 영정 앞 뜨신 바닥에 덧니로,
얹혔다가 꼭두새벽 일어서는 자리
심사평
일상성 속에서 덧니가 새로움을 물었다
천여 편의 투고작을 읽으면서 들었던 첫 번째 생각은 전국 어디나 할 것 없이 신춘문예 투고작들의 수준이 일정한 수준에는 올라있다는 것이었다. 이미 기성이라고 해도 하나도 문제 될 것 없는 작품들이 꽤 많았던 것이다. 이런 현상은 전국 각지에서 시창작 수업이 진행되고 있고, 그곳에서 수학한 이들이 문단에 등용하고자 응모하기 때문일 것이다.
응모자들의 주소지도 일정 지역에 한정되어 있지 않는 것도 특징이다. 광남일보가 광주전남을 토대로 하고 있는 지역지임에도 불구하고, 응모자들의 주소지는 대부분 서울경기이거나 부산 경남 제주도를 가리지 않았다. 인구에 비례해서 응모자들의 주소지가 분포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는 시인이 되고자 하는 이들은 전국의 어느 일간지의 신춘문예가 되었건 가리지 않고 있다는 것을 추측 가능하게 한다.
응모작도 상당하였고, 그 수준도 시적으로 일정한 경지를 구축하고 있는 것은 긍정적인 면이었다. 하지만 여러 투고작들에서 보이는 특징 중 하나가, 시어의 운용에는 그럴 듯한 경지를 보여주면서도 문장의 근본인 띄어쓰기에 서툴거나 문법적 결함을 보인다는 점이다. 기본기가 안 되어 있으면서 시적인 언술을 익히는 연습에만 매달렸기에 그런 웃지도 못할 일이 벌어진 것일 게다.
시는 언어의 예술이다. 시적 언어가 맞춤법에 무조건 복종하라는 말은 의미가 없는 것이지만, 맞춤법도 모르고 시를 쓰는 것은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아무리 치장을 잘 하더라도 본바탕이 형편없다면, 순간의 치장이 벗겨진 후의 모습만 더 흉측할 뿐이다.
투고작들은 대체로 시대의식이나 거대 담론을 말하지 않았다. 언어 실험을 통한 언어 너머를 탐구한 작품도 별로 없었다. 리얼리티를 통해 현실을 묘사하거나 인간의 삶을 깊이 있게 탐구한 작품도 눈에 띄지 않았다. 시 속에는 삶의 모습마저도 풍경으로 머물고 있었다. 견자의 시각이라고 해야 할 정도로 대상과의 거리가 일정한 시편들이 대부분이었다. 설령 시적 화자가 그 풍경 속에 있을 때도 ‘바라보는 자’의 시선만 남아 있었다. 삶이나 풍경에 투신하거나 그곳에서 뒤섞여 있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최종적으로 고민했던 작품은 6명의 작품이었다. ‘섬에서 작약을 줍다’, ‘촛불’, ‘동백꽃 여관’, ‘첫차’, ‘매생이국을 끓이다’, ‘사과의 형식’ 등이었다. 먼저 ‘사과의 형식’은 대상을 보는 시각에 개성이 있다. 또 시를 끌어가는 방법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 개성이 시의 완결에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섬에서 작약을 줍다’와 ‘동백꽃 여관’은 글을 오래 써본 사람의 솜씨이다. 그러나 시와 산문의 경계에 대해 고민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아무리 좋은 산문도 시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언어의 밀도에 있다. 또한 시어와 시어가 만났을 때 화학반응이 일어나야 한다. 일상어와 시어의 차이이다. ‘촛불’은 감정을 객관화하는 능력이 좋다. 생각이 깊다. 그러나 시는 감정의 해설이 아니다. 이미지를 통해 그것을 보여주는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첫차’와 ‘매생이 국을 끓이다’였다. 두 작품 모두, 시작을 낯설기 하기 기법을 사용하였다. 독자의 시선을 끈다. 메타포에도 능하다. 두 사람에게 남은 문제는 한 두 작품을 제외하고는 개성적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문학적 수련을 더 정직하게 한 이는 ‘매생이 국을 끓이다’의 투고자고, ‘첫차’의 투고자는 전체적인 투고작이 한 사람의 것인지 의심이 가기도 하였다. 즉 사유의 자기화와 표현방법의 체화가 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첫차’를 당선작으로 뽑는다. 자기의 모든 작품에 애정을 갖기보다는 자기 작품에서 어떤 작품이 더 나은가를 분별하는 것도 시인이 갖추어야 할 능력이다. ‘덧니가 새해를 물었다.’ 긍정의 요소를 바탕으로 하나의 개성을 이루길 기대해 본다.
이대흠(시인 ·천관문학관 관장)
2018 한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폐선 / 조직형
뱃머리는 거침없이 파도를 밀고 나아간다. 좌우 현의 오래된 균형이 삐걱거리며 서로 맞잡은 손을 거두자
갈라진 파도가 비명을 내지른다
몸통을 지나 어깨 위로 세월의 더께가 덕지덕지 앉을 때까지 뱃머리는 무지근해지는 통증을 전혀 감지하지 못한다
날카로운 예지는 분명한 걸 챙긴다. 단호하게 잘려나간 꼬리를 슬며시 감추고 씻은 얼굴 내미는 건 부끄러운 변명이다
수평선에 맞닿은 흐리멍텅한 하늘이나 경계선을 뭉개버리는 저녁 안개는 늘 무시당하는 편, 말이 없는 것들은 모호해서 경계를 흐린다. 배의 무딘 허리를 훒으며 지나간 물결이 고물에 고물고물 맴돌거나 소용돌이치며 뒤따르며 밀어주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한다. 달리는 말이 뒤돌아본다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일, 지나간
후미는 곧 사라질 물거품일 뿐이다. 사라질 것에 대하여 사랑을 퍼주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뱃머리를 벗기는 짱짱한 햇빛만이 대쪽같이 당당하다
앞만 보고 달리던 뱃머리는 고물 뒤에 숨은 시선을 기억하지 못한다. 지켜보며 뒤따르며 드러내지 않을 뿐 침묵으로 밀어주던 흘수선 아래 감춘 어미 같은 마음이 아주 환하게 비춰주고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
심사평: 할 말 끝까지 밀고 나가는 고집스러움
예심을 통과한 열 분의 작품이 본심에 올라왔다. 본선에 부쳐진 38편의 작품 대부분이 시적 형상화에 성공한 작품들이었다. 시적 이미지들이 거느린 확장성뿐만 아니라 시의 형식도 자세히 살피며 여러 차례 읽었다. 그 결과 본심에 오른 대부분 작품에서 시의 형식적인 면 즉, 연 나누기에서 많은 약점이 드러났다. 과도하게 연을 나눔으로써 시의 이미지들이 파편화되어 새로운 시적 의미로 확장되는 것을 방해한 시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연 나누기는 단지 화제나 의미의 단위로만 끝나지 않는 더 큰 의미가 있다. 시적 이미지들을 서로 작용시켜 복합적 이미지를 만들어 내며, 시적 의미를 확장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또한, 한 작품에 담고 싶은 말이 많아서인지 없어도 될 사족들이 많았다.
비교적 이러한 약점들을 극복한 이온정, 지관순, 조직형 등 세 분의 작품들을 두고 다시 심사에 들어갔다. 시의 외연을 확장하는 데에 세 분 모두 재능이 있었다. 먼저 이온정의 '염소와 제천역'에 주목했다. '염소와 역'이라는 시적 대상에 대한 관찰이 세밀했고, 사유가 깊었다. 하지만 정작 시적 대상을 빌어 드러내야 할 '남도의 말씨'나 '톤이 익숙한 목소리'에 대한 형상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음이 끝내 아쉬움으로 남았다. 지관순의 '저 희고 긴 새장'은 투고한 작품 중에서 가장 시적 형상화에 성공한 작품이었다. '셔츠 소매'라는 시적 대상을 통하여 무리 없이 시의 외연을 확장해 나갔지만, 마지막 연이 문제로 지적됐다. 앞선 사고의 모든 과정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진술이었기 때문이다. 당선작으로 결정된 조직형의 '폐선'에서 선자들은 공통으로 시를 이끌어 나가는 진술의 힘에 주목했다. 현란한 언어의 기교가 아닌 자신이 할 말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고집스러움이 엿보였다. 시적 진술이 사물과 상황을 바라보는 오랜 사유의 과정에서 이루어진다는 면에서 신뢰감을 주었다. 투고된 네 편의 작품 모두 일정한 수준을 유지한 면도 영향을 주었다.
심사위원: 김광렬, 정찬일
2018 농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밀풀/고은희
1.
밀풀에서 꽃이 폭폭 끓는다. 부풀어 오른 밀풀은 겨울과 여름에 유용하다. 문살에 밀풀을 바르고 창호지를 바르고 무성한 숨을 바른다. 덩달아 지붕 위로 하얗고 얇은 첫눈이 내린다
귓불이 떨어져나간 단풍잎 몇 개가 붓살이 쓸고 간 거친 자리에 폴짝 내려앉는다. 겨울 문턱에서 말이 달리고 창호지 마르는 소리가 소복소복 들린다. 그러니까 문풍지는 밀풀이 모른척한 날개, 열렸다 닫히는 문이 구수한 밀풀냄새를 풍기며 날아다닌다.
2.
김치는 꽃이다. 사이사이 익어가는 배추김치뿐만 아니라 한 여름 열무김치를 들여다보면 온갖 색이 다 들어 있다. 푹 절인 열무에 홍고추를 썰어 넣고 푸른 실파를 뭉텅뭉텅, 마지막에 흰 밀풀을 넣어 섞어 피는 꽃.
밀풀이 돌아다니는 동안, 풋내라는 밑줄에 문풍지가 달려 나온다. 꽃이 피려고 사각사각 감칠맛이 날 때, 한데 섞이고 어우러져 동지섣달 한겨울을 불러낸다. 밍밍한 국물에서 팽팽한 문풍지 맛이 나게 하는 것, 밀풀이 꽃을 피우는 방법이다
3.
살짝만 뜨거워져도 엉겨 붙는 밀풀의 힘, 배가 고프지 않은데도 배 아픈 때가 있다. 잘 풀어줘야 잘 붙는 힘, 풀죽은 열무가 밀풀을 만나 아삭아삭 기운을 차리듯 김치도 한겨울 문도 밀풀의 요기로 견딘다.
창호지 문에 구멍하나 뚫린 듯
열무김치국물은 앙큼한 맛이다
심사평
밀풀, 고전적이고 담백한 작품…감칠맛 나는 언어 돋보여
‘잘 풀어줘야 잘 붙는 힘’ 발휘…‘앙큼한 맛’ 담긴 시 써주길
모두 276명의 응모자 중 예심을 통과한 20명의 작품을 받았다. 20명의 작품은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접수번호 외에는 아무런 정보도 없는 임시 묶음 책 형태였다. 다산 선생이 ‘문장은 사람의 꽃이다’라고 했던가. 꽃밭에서 단점을 찾아보려고 며칠 혼났다. 다들 나름 빛났다.
두 심사위원은 각자 다섯편을 추려 최종 합평회서 만났다. 세편이 일치했고 다른 두편도 눈여겨봤던 작품이라는 점에서 미소를 나눌 수 있었다. 최종적으로 남은 작품은 ‘대설주의보’ ‘달팽이’ ‘밀풀’ ‘만가’ ‘해당화’였다.
시대의 아픔을 노래한 ‘만가’는 동봉한 다른 작품에서 설명적인 시 구절이 더러 드러나, ‘꽃잎을 까보면 충혈된 눈동자’ 같은 감각적인 이미지가 살아 있는 ‘해당화’는 앞부분의 긴 나열이 긴장감을 떨어뜨리고 있어, 먼저 미련을 접었다.
남은 세편을 올려놓고 한편을 결정하려고 하자, 단점은 가려지고 장점들만 부각됐다. ‘대설주의보’는 언어의 절제미를 보여준 산뜻하고 정갈한 작품이었으나 당선작으로 선하기에는 좀 소품이 아닌가 싶어 망설여졌다. 마지막까지 남은 ‘달팽이’는 함께 응모한 작품들 전체가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어 더 애착이 갔다. 공사장 절벽에 매달린 노동자와 달팽이가 자연스럽게 연결되며 노동자의 삶을 잘 그려내고 있으나 과연 이 시가 새로운가를 문제 삼아 볼 수밖에 없었다.
당선작으로 결정한 ‘밀풀’은 고전적이고 담백한 작품이다. 작품을 형상화하는 능력과 언어를 감칠맛 나게 다루는 솜씨를 높이 봤다. 앞으로 ‘잘 풀어줘야 잘 붙는 힘’을 언어의 세계에서도 발휘해 ‘앙큼한 맛’ 나는 시 많이 써주길 바란다. 당선자를 축하하며 당선을 잠시 미뤘을 뿐인 응모자님들에게도 위로의 말을 전한다.
심사: 곽재구, 함민복 시인
2018 동양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꿈 / 허윤종
꿈 하나를 접어야만 할 때
우리는 또 하나의 꿈을 꾸어야 한다
볕 좋은 날을 시기하는 소나기처럼
때때로 고난이 다가와 곁에 앉아도
그대 꿈에 이별을 고하지 마라
바람이 날개가 꺾인 채 날지 못하는 건
꿈을 잃었기 때문이다
누웠던 풀잎이
바람의 뒷덜미를 부여잡고 끝내 일어서고
난간 위를 걷던 달팽이가
햇살의 발길질을 이겨내는 것이 바로 꿈이다
달동네 빛바랜 전단지에도 여전히 꿈은 살아있다
도저히 이대로는 눈감을 수 없다는 듯
다 지워져가는 글자를 딛고 서서
그 끈을 놓아버린 누군가를 나무라고 있다
찢긴 날개로도 창공에 소리치는
잠자리의 함성이 들리지 않는가
삶이란 경우의 수가 아니라
반드시 보내야만 되돌아오는 메아리 같은 것
상처 없는 꿈은 꿈이 아니다
내게 온 꿈들이 상처투성이가 되어가는 건
온전해지기 위한 몸부림이다
수많은 꿈을 접었다 하더라도
꿈 하나를 더 꾸고 있다면 그게 바로 삶의 이유다
심사평
꿈의 형상화와 성찰 기법 갖춰
이번 신인문학상 공모에 응모한 작품(934편)은 작년(651편)에 비하여 많았다. 그만큼 응모작이 늘어난 것을 갖고 생각할 때 퍽 다행한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작품의 질은 평년작 수준이다. 야심찬 패기와 실험성 있는 작품은 발견하기 힘들었다.
선자의 손에 남아 마지막까지 우열을 겨룬 작품은 원기자의 ‘폐선廢船’, 강형옥의 ‘끝없는 유랑’, 곽광덕의 ‘고해성사’, 그리고 허윤종의 ‘꿈’이란 작품이다.
원기자의 ‘폐선’은 바닷가 갈대숲에 만선의 고기를 놓고, 비릿한 그 냄새가 부끄러워 먼 길을 돌아 집으로 가고, 등대를 버리고 떠난 선주는 소식이 끊기지 오래, 삶이란 그림자도 없이 밀려왔다 사라지는 너울 같은 거, 생각해보며, 바닷가 당신의 발자국 저문 노을이 쓸려간 삶을 진단하고 상기시킨다.
강형옥은 ‘끝없는 유랑’에서 시베리아의 횡단철차가 달리고 달려도 종착지가 보이지 않고 배고픔과 눈보라 아스라한 끝으로 향하고, 고려인 강제이주의 참상을 그리며, 그래도 고향에 숲 이룰 그날을 손꼽으며 꿈꾸던 꿈을, 강제이주80주년에 꿈의 실체를 찾고 있다.
곽광덕은 ‘고해성사’에서 송정리역 평화 구두방에 십자가는 없다며, 그간 걸어온 길속에서, 오행의 해독법을 넘었다고 너스레를, 타향살이 끝에 고향 찾은 이야기, 광나게 닦는 것은 흐려진 운명선 같은 것이라고, 별의 묵도소리, 역전에서 무궁화호 숨소리를 오버랩 시켜 증거를 제시한다.
허윤종은 ‘꿈’에서 달동네 빛바랜 전단지에도 꿈은 살아있다며, “꿈 하나를 접어야만 할 때 / 또 하나의 꿈을 꾸어야 한다” “난간 위를 걷던 달팽이가 / 햇살의 발길질을 이겨내는 것이 바로 꿈이다” “내게 온 꿈들이 상처투성이가 되어가는 건 / 온전해지기 위한 몸부림이다”라 했다, “수많은 꿈을 접었다 하더라도 / 꿈 하나를 더 꾸고 있다면 그게 바로 삶의 이유다”라고 주창하고 있다.
우리의 삶은 꿈꾸고 그 꿈을 일궈내는 인고의 과정이다. 자기 정체성을 세우고 실현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자존의 존재추구를 일깨워내는 능력이야말로 참된 삶의 길이기 때문일 것이다. “상처 없는 꿈은 꿈이 아니다” 이런 판타지를 구축해 내는 그의 시적 묘사와 기법에 박수를 보내며 당선작으로 민다. 더욱 정진하여 대성하기를 바란다.
심사위원 : 정연덕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