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 17일 화요일. 오전 10시 아파트를 출발해서 법화산을 향한다
신철선배님과 둘이서 가는 번개 트레킹이다.
경찰대학교 입구에서 법화산 능선으로 올라서서 등로를 따라 법화산에 올라 기념사진을 찍고 할미산성과 석성산을 보고 차와 사과로 간식을 먹고 아이젠을 착용하고 눈길을 걸으며 천주교 공원묘원에 도착한다.
첫 번째로 찾아간 곳은 육당 최남선의 묘이다.
1904년 대한제국 황실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 도쿄부립제일중학교[東京府立第一中學校]에 입학하였으나 곧 중퇴하였다...<중략>...최남선의 일제시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4·9·11·13·20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Ⅳ-17: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690~730)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한국민족문화백과사전 인용)
내가 그 시대에 살았으면 어떻게 하였을까? 국가가 지켜주지 못한 국민. 지금의 현실과 많은 것이 닮았다는 공감...
두 번째로 영랑, 김윤식 시인의 묘이다
1915년 강진보통학교를 마치고 이듬해 결혼했으나 1년 반 만에 아내를 잃었다. 그해 어머니의 도움으로 서울에 올라와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영어를 배우다가 1917년 휘문의숙에 입학했다. 휘문의숙 3학년 때 3·1운동이 일어나 학교를 그만두고 강진에서 의거하려다 체포되어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靑山] 학원 중학부를 거쳐 같은 학원 영문학과에서 공부했으나,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유학중 무정부주의 혁명가인 박열과 사귀었고 괴테, 키츠 등의 외국문학에 깊이 빠져 있었다. 그 뒤 고향에 머물면서 1925년 김귀련(金貴蓮)과 재혼했다. 1930년 정지용과 함께 박용철이 주재하던 〈시문학〉 동인으로 참여했다. 일제 말기에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하는 곧은 절개를 보여주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5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 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같이
시의 가슴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머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민족의 문화가 말살되어 가는 시대에 이렇게 아름다운 표현을 할 수 있었을까?
한글의 우수성을 시로 알리는 새로운 독립운동이었을까?
준비해간 막걸리 한잔 올려 드리고 빈 묘자리 양지바른 곳에서 선배와 컵라면에 계란, 귤, 사과로 간단하게 점심을 먹는다.
묘원은 조용하고 엄숙하다.
세 번째는 조금 고생을 해서 전헤린의 묘를 찾아갔다.
선배의 기억이 흐릿해 진듲 이곳 저골을 찾다가 가까이 고라니 한 마리가 걸어가다 돌아본다. 길없는 골짜기를 넘어 고라니가 갔던 언덕을 가파르게 올라 고라니 발자국 옆에 사과두쪽 귤하나를 놓고 다시 묘를 찾아간다.
그의 아버지 전봉덕의 묘가 옆에 있다.
1949년에는 대통령 이승만의 최대 정적인 김구가 자택에서 안두희에게 암살되는 사건이 일어났고, 이때 전봉덕은 안두희를 보호하면서 사건을 축소하고 배후를 은폐하는 쪽으로 수사를 마무리해버렸다. 이승만이 사건 발생 보고를 듣자마자 당일로 그가 수사를 담당할 수 있도록 헌병사령관으로 승진시킨 것을 놓고, 김구 암살의 배후라는 소문이 꾸준히 나돌았다.
전봉덕(田鳳德, 일본식 이름: 田中鳳德[1], 아호 남헌(南軒), 평안남도 강서군, 1910년 12월 12일 ~ 1998년 5월 18일)은 일제강점기의 경찰 간부이며 대한민국의 군인, 변호사이다. 작가 전혜린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아버지 봉덕의 1남7녀 중 맏딸로 태어나 경기여자 중·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53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해 다니다가 3학년 때 독일로 가서 1959년 뮌헨대학교 독문학과를 졸업했다.
1959년 귀국하여 서울대 법대와 이화여자대학교 강사로 있다가 1964년 성균관대학교 조교수가 되었다.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번역분과위원으로도 활동했으며 31세에 자살했다. 독일 유학 때부터 번역을 시작했으며 문장이 정확하고 아름답다는 평가를 받았다. 번역집으로 〈생의 한가운데〉(1961)·〈데미안〉(1964) 등이 있고, 특히 재독문학가인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1959)를 번역해서 유명하다.
유고수필집으로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1966)가 있으며, 1976년 대문출판사에서 일기를 간추려서 〈이 모든 괴로움을 또다시〉(1976)를 펴냈다.
전헤린의 묘비는 “ 하늘이 주신 시간에 시간을 보태고, 사랑에 사랑을 보탠 다음 눈감아 여기에 잠든이 전헤린 여사여” 김남조 선생이 짓고 박중근이 쓰다.
남편은 유신헌법을 비판하였던 헌법학 김철수이고 2022년 3월 26일 향년89세로 별세하였다
1934년 1월1일 태어나서 1965년 1월 10일까지 짧은 삶...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마음이 먹먹하다.
네번째는 박완서 작가를 찾아간다.
작가의 묘에서 묘비번호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묘비 번호만 알아도 찾기가 쉬웠을 것인데..선배는 다리품을 팔아 직접 찾는데 이틀이 걸렸다고 한다.
'한국 문단에 박완서라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이 수많은 여성 작가들에게 얼마나 든든한 희망이었는지 선생님은 아실까요. 아이 다섯을 키우던 전업주부가 마흔의 나이에 등단하여 한국 문학의 거목으로 우뚝 솟게 되었다는 사실 때문만이 아니지요. 선생님은 40년 동안 끊임없이,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써 오셨습니다. 예순에도, 칠순에도, 여든이 되실 때까지도 영원한 ‘현역’이셨습니다. 감히 그만큼 훌륭해지고 싶다는 말은 못해도 박완서 선생님만큼 오랫동안 쓰고 싶다는 바람을 가슴에 품은 후배 작가들이 저 말고도 참 많습니다. (중략) 재미와 뼈대가 함께 있는 주옥같은 소설들을 읽게 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박완서’라는 크고 높고 따뜻한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음을 잊지 않겠습니다. 그 산골짜기를 흐르던 시냇물과, 산새들의 지저귐, 또르르 발밑을 굴러가던 도토리의 빛깔을 오래오래 기억하겠습니다.- 전현이의 글.
영면으로 향하는 것 같은 눈쌓인 돌계단 길을 올라 용인공원을 본다.
1월의 겨울,
삶을 마감한 묘원,
영혼이 영면한 곳,
사제와 추기경이 계신곳을 찿아 가는 길에 소나무가 숲과 세월을 애기하듲 굴곡진 모습을 보여준다.
사랑과 배려, 성스러운 삶을 살아 가신 사제와 추기경이 계신 곳....전추교에 대해 잘 알지 못해서 표현이 부족하다
성스런운 묘역에 인사하고 감수환 추기경을 뵈었지만 다른 성인들도 많이 계셨다. 사진으로 인용한다.
시간이 15시 30분을 지나고 있다.
겨울산은 16시에는 하산을 해야한다. 묘원 탐방을 마치고 숲길 등로를 따라 걷다가 영안부부인 전씨는 우의정을 지낸 윤호의 부인이다. 그의 딸이 성종의 계비인 정현왕후이고 진성대군을 낳았고 진성대군이 조선의 11대 왕 중종이다. 중종의 외할머니의 묘이다. 용미(묘의 뒷부분)가 매우 길다 안내문에는 20미터라고 한다. 묘 입구에 “대소인 하마”라고 적혀있다.
오늘의 탐방을 마치고 막북에서 21번 버스를 타고 신갈역에 내린다 10여분만에 집앞에 도착했다 오전 10시부터 16시까지 6시간 동안 15km를 걸었는데, 철판구이집에서 삼결살과 소맥으로 마무리한다. 계산은 선배님이 해 주신다 복되고 감사한 하루이다.
집에 도착하니 어머님이 가래떡을 가져다 주셨다 김이 나는 따끈한 가래떡 몇갈래 옆집에 드렸더니 “많아요” 하신다.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어떻게 익어가야 하는지?
남아있는 삶에서 무엇을 해야하는지?.
감사합니다~!. 선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