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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1.11.26 03:18 | 수정 : 2011.11.26 23:03
弓하니 通했다···"로빈 후드의 활도, 윌리엄 텔의 활도 날 매료시키지 못했다"
시작은 엔지니어의 호기심
젊을 때 동양 활에 반했다 역학 원리·제조법 궁금해
터키로, 몽골로, 中으로···한국서 긴 여정이 끝났다
- 지난 14일 서울 종로구 사직공원 뒤편 황학정에서 자일링거씨가 활을 들어 과녁을 겨누고 있다. 서양 활과 아시아 여러 나라의 활 을 섭렵한 그는 우리 전통 각궁에 반해 한국 궁사가 되었다. 허리에 두른 궁대에 다섯 발의 화살을 꽂고 사대에 올라 모두 쏘고 내려오는 것을‘한 순’이라고 한다. / 주완중 기자 wjjoo@chosun.com
여기 한 사람이 있다. 인생 후반기를 한국의 활에 빠져 지낸 독일인, 칼 자일링거(Karl Zeilinger·67). 엔지니어였던 그는 청년시절부터 동양인들이 사용한 각궁(角弓)의 비밀을 찾아 긴 여정을 떠났다. 한편으로 엔지니어로 일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젊은 시절 마음에 품은 궁금증을 풀기 위한 작업을 쉬지 않았다. 틈날 때마다 터키와 몽골, 중국으로 '완벽한 활'을 찾아 떠났고, 그 여정은 아시아의 동쪽 끝인 한국에서 끝났다.
26년 전 한국의 각궁을 처음 접한 이후 그는 해마다 우리나라를 찾아 전국의 활터를 돌며 활 쏘는 법을 익히고, 궁장(弓匠)들의 공방을 찾아가 제조 과정을 탐구해왔다. 국내의 수많은 궁사들조차 "이제 한국 활에 대해 그보다 더 많이 아는 사람을 찾기는 힘들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독일 뉘른베르크에 있는 그의 집은 한국 활을 포함해 전 세계 활 50여점과 관련 서적 400여 권을 소장한 작은 박물관이라고 한다.
지난 14일 오후 서울 사직동의 활터 '황학정(黃鶴亭)'에서 자일링거씨는 145m 건너편의 과녁을 향해 화살을 겨누고 있었다. 그는 이곳의 평생 회원이다. 활터 뒤편 사무실 한쪽 벽 회원들의 이름이 새겨진 작은 명판들 사이에 그의 한국 이름 '채림거(蔡林巨)' 석 자가 보였다. 그는 지난 10월말 한국에 들어와 육군사관학교 화랑정에서 열린 '장안편사'(長安便射·조선시대 한양에서 지역마다 편을 갈라 벌이던 활쏘기 경기) 행사에 참가한 뒤, 남원 황산정, 안산 반월정, 파주 성호정 등 전국 10 여곳의 활터를 순례한 뒤 돌아갔다. 한국에서 올해의 마지막 활 시위를 당기고 내려오는 그를 만나 활에 대한 열정 하나로 시작된 긴 여정에 대해 들어봤다.
- 지난 2007년 서울 황학정에서 열린‘장안편사’에서 편장을 맡은 자일링거씨가 과녁을 겨누고 있다. 노란색 저고리는 편장의 상징이다. / 자이링거씨 제공
40여년 전 독일 뉘른베르크의 한 박물관, 프리드리히알렉산더 대학에서 전기공학을 공부하고 있던 20대 청년 칼 자일링거는 터키 활 전시 코너 앞에 서있었다. 활의 특이한 형태가 눈을 사로잡았다. 서양의 전통 활과 달리 둥글게 말려져 있는 각궁이었다. 특수화살을 사용하면 최고 800m나 날아갔다는 기록이 남아 있었다.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병사들이 사용한 이 활의 위력 앞에 한때 유럽인들은 벌벌 떨어야 했다.
―어떻게 활에 빠져들었나.
"나는 엔지니어다. 어릴 때부터 병장기에 관심이 많았다. 고대 무기는 고대 과학 기술의 집약체다. 그리스와 로마, 페르시아의 유물 구경을 하러 박물관을 자주 다녔는데, 17세기 오스만튀르크 유물에 섞여 있던 강력한 무기 '터키 각궁'(horn bow)에 빠져들었다."
―각궁의 어떤 점이 당신을 매료시켰나.
"서양 활과 형태가 완전히 달랐다. 어떤 역학 원리가 작동하는지, 어떻게 만드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해 이미 대학 시절에 각궁의 유래지를 찾아 터키의 이스탄불로 여행을 떠날 정도였다."
―해답을 얻었나.
"터키에는 이미 200년 전에 활을 쏘고 만드는 전통이 사라지고 없었다. 활에 관한 지식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시아 지역의 활은 어떻게 알게 됐나.
"각궁에 대한 자료를 직접 수집하기 시작했다. 과거의 터키 외에 중국과 인도, 중앙아시아 등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도 각궁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각궁은 탄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오므라져 있는 활을 반대로 뒤집어 시위를 걸고, 한 조각의 나무가 아니라 무소뿔과 쇠심줄 등 여러 재료를 이용한 '복합궁'이란 것도 알게 됐다. 아, 일본 활은 예외다. 일본인들은 긴 대나무 활을 썼다."
―한국 활에 대해선 어떻게 알게 되었나.
"1985년 한국을 처음 방문했다. 그전에 나는 몽골의 나단 축제에 참가했었다. 말을 타고 활을 쏘는 몽골 전통 축제에 참가해 그 옛날 각궁을 어떻게 쏘았는지 원형(原形)을 보고 싶었다. 몽골 궁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한국으로 가는 게 나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어떤 느낌이었나.
"무척 흥분돼 있었다. 몽골에서 '한국 각궁이 가장 강력하고 한국인들이 활을 잘 쏜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에다, 당시 한국의 양궁 선수들은 올림픽에서 메달을 휩쓸고 있었다. '활쏘기'가 세계에서 가장 대중적인 나라에 간다는 생각에 가슴이 설레었다."
―한국 역시 활쏘기가 그렇게 대중적 스포츠는 아닌데….
"처음 공항에 내려 호텔로 이동하는 사이에 길거리를 유심히 살폈지만, 활을 들고 다니는 사람은 한 명도 찾아볼 수 없었다. 조금 실망스럽기는 했다."(웃음)
―황학정은 어떻게 알게 되었나.
"아무도 서울에서 활 쏘는 곳을 몰랐다. 호텔 비즈니스 센터에서 어렵게 황학정 주소를 얻었다. 무작정 찾아갔고, 그렇게 인연이 시작됐다. 이곳의 부사두(射頭)였던 김경원 사범을 소개받아 활을 익혔다. 해마다 찾다보니 평생회원 자격도 얻었다. 그렇게 나의 긴 방황은 끝났다."
―한국에 와서 당신이 원하던 대답을 찾았나.
"그렇다. 김 사범에게 활 쏘는 법과 한국 활의 역사를 배웠다. 제조법을 설명해 주신 궁장 고(故) 김박영 선생과 시장(矢匠) 김영집 선생 등 모두 친절하고 인내심이 강한 분들이었다. 기술적으로 어떻게 화살이 날아갈 힘을 얻는지 디테일한 부분까지 혹시 귀찮았을지도 모르는 나의 질문에 기꺼이 답해줬다."
―활에 대한 관심은 잘 알겠지만, 한국은 너무 먼 나라이지 않은가.
"나는 공장 자동화 분야의 전문가다. 나의 옛 직장 상사는 내가 아시아의 활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당시 경제가 개방되기 시작한 중국에는 나 같은 사람이 할 일이 많았다. 회사의 배려로 나는 1988~91년까지 베이징의 지멘스 중국지사에 근무하게 됐다."
―중국에 근무할 때는 한국에 자주 왔겠다.
"베이징과 서울은 지리적으로 가까웠지만, 당시 외교 관계가 수립되어 있지 않았다. 홍콩으로 가서 비자를 새로 발급받아 다시 서울로 들어오는 과정이 번거로워 자주 찾지 못했다. 중국으로 배치될 때는 정말 신이 났는데 오히려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 자주 오지 못해 더 안달이 났다. 1년에 3~4차례씩 본격적으로 찾아오게 된 것은 2004년 퇴직한 이후다."
―그런데 독일에는 활이 없었나? 유럽에는 명사수로 유명한 로빈 후드나 윌리엄 텔의 전설도 있지 않은가.
"독일은 약 1000년전 활의 전통이 없어졌다. 그 이후에는 모두 석궁(cross bow)을 사용했다. 로빈 후드는 영국 이야기다. 영국 장궁(長弓)은 거의 직선에 한 조각의 나무로 된 간단한 나무활이다. 한국 각궁처럼 뒤집어 구부려 쓰는 활은 아니다."
―각궁은 다 뒤집어서 쓰나, 한국만 그런가.
"모든 각궁은 뒤집어 쓴다. 그러나 한국 각궁은 무척 특별하다. 거의 완벽한 원 또는 하트 형태다. 다른 나라 각궁은 그에 비하면 한쪽만 열린 반달 모양이다."
- 자일링거씨가 소장한 다양한 화살들.
―활은 언제부터 쏘기 시작했나….
"나는 70년대 말부터 서양 전통 활을 익혔다. 미국에서 6개월 동안 집중적으로 수업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합성 소재를 사용하고 복잡한 조준 장치와 각종 보조장치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올림픽 스타일' 활에는 관심이 없었다."
―서양식 활과 한국식 활을 모두 다 쏠 줄 안다는 이야기인가.
"처음에 서양 전통 활로 시작했지만, 한국 활을 알고부터는 오직 한국 활로만 연습했다. 가끔씩이라도 서양식 활을 쏘면 역효과를 낳게 된다."
―무슨 차이가 있나.
"오른손잡이의 경우 한국 활은 오른손에 '깍지'(엄지에 끼는 고리)를 끼고 시위를 잡아당긴다. 반면, 서양활은 손가락 세 개로 시위를 잡는다. 또 각궁은 물동이를 이듯 양손을 들어 올려 내리면서 시위를 늘이지만, 서양식은 왼손으로 활을 단단히 붙잡고 시위만 잡아당긴다. 조준 방식도 다르다. 각궁은 활을 든 왼손 엄지 위에 화살을 놓고, 서양은 그 반대편에 화살을 얹는다."
―독일에 있을 때도 한국 활만 쏘나.
"그것이 지난 수십년 동안 나의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한국 각궁은 사거리가 서양 활의 두배다. 한국 활터는 과녁까지 거리가 145m인데 독일 양궁클럽은 70m에 맞춰져 있어 쏠 수가 없다. 그래서 지난 20여년 동안 한국에서만 활을 쏠 수 있었다."
―당신의 고향인 바이에른 지역에는 숲이 많으니까 그냥 숲에서 연습해도 되지 않나.
"실제로 너무 활을 쏘고 싶어 숲에서 3번 정도 연습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화살을 잃어버릴 각오를 해야 한다."(웃음)
―유감스럽다.
"두 달 전 우리 집에서 40㎞쯤 떨어진 곳에서 과녁까지 거리가 충분히 긴 클럽을 찾을 수 있었다. 늦었지만 행운이다. 이번에 독일에 돌아가면 정통 한국식 과녁을 만들어 그곳에 설치하는 것이 맨 먼저 할 일이다."
―활 실력은 얼마나 되나. 최고 기록을 이야기해줄 수 있나.
"한국 활은 한 번에 5발씩 9번 45발을 쏜다. 그것을 아홉 순(巡)이라고 한다. 최고 기록은 45발을 쏴서 37발을 과녁에 맞혔다. 한국에 처음 오면 22~25발을 맞히기 시작해서 조금씩 조금씩 스코어가 좋아진다. 베스트 스코어로 따진다면 7~8단 정도 되지만, 정식 입단 테스트를 거치지 않아 '무단'이다. 실제 입단 테스트를 하면 심리적 부담이 커 그런 성적에 훨씬 못 미칠 것이다. 최근 충북 진천에서 열린 활쏘기 대회에 나가 4등으로 입상해 상금 10만원을 받은 적이 있다. 그것이 실제 대회에서의 내 최고 성적이다."
―활을 쏠 때 어떤 느낌인지 말해 줄 수 있나.
"처음 내가 활을 시작할 때는 스포츠로 받아들였다. 육체적 훈련을 통해 기술을 습득하는 것 말이다. 그러나 계속 배울수록, 지금도 배우고 있지만, 좋은 성적을 내려면 마음과 몸이 '밸런스'(균형)를 이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가고 있다. 'Upright mind, upright body'(바른 마음과 바른 자세)가 필요하다. '정심정기'(正心正己)는 황학정의 모토다."
―심리적 안정이 필요한 것은 올림픽 종목인 양궁도 마찬가지 아닐까.
"몇년 전 은퇴한 한 한국 양궁 대표팀 코치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그는 은퇴한 뒤 국궁을 연습했는데, 그 역시 한국 전통 활쏘기와 양궁은 전혀 다르다고 하더라. 양궁은 테크닉이 가장 중요하고 트레이닝이 필요하다. 과녁을 맞히고 바람을 계산하는 것 등 서양 활은 테크닉 쪽으로 발달해왔다."
―당신은 서양인이어서 그런 느낌을 갖기 힘들지 않을까, 언제 처음 그런 느낌이 들었나.
"약 5~6년 전이다. 물론 나는 한국 문화에 관심이 많을 뿐 서양 문화에 속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한국식으로 활을 쏠 때는 내가 한국인인 것처럼 느낀다."
―처음 한국을 방문한 것이 1985년인데 불과 5~6년 전에 그런 느낌이 들었다면 꽤 오래 걸린 셈이다.
"나는 처음엔 전통 각궁이 아닌 개량활을 사용했다. 그때는 전혀 몰랐다. 그러나 정통(original) 방식으로 만든 내 개인 각궁을 갖게 되면서 조금씩 심리적인 면의 중요성을 깨달아 갔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바람은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것'이라고 했던 한국 영화 '최종병기 활'의 대사가 생각난다. 그 영화를 본 적이 있나.
"아직 보지 못했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DVD를 구해 볼 생각이다."
―쏘아 보니 정통 각궁은 무엇이 달랐나.
"활을 쏘기 전에 활을 '올리는' 과정이 중요했다. 활을 올린다는 것은 '시위를 활에 거는 것'을 말한다. 각궁은 그 준비 과정이 간단치 않다. 먼저 활을 약 섭씨 27도의 공간에 한 시간 정도 놓아둬야 시위를 걸기 좋은 상태가 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부러진다. 무소뿔과 민어부레풀, 쇠심줄 등 자연 소재로만 만든 '생궁'(生弓·living bow)이어서 온도와 습도에 민감하다. 긴 시간을 들여 활을 올리며 마음을 가다듬는 것이다."
―각궁은 쏘기가 힘든가.
"한국 활터에서도 1단부터 5단까지는 개량궁을 쓰고, 6단부터 진짜 각궁을 쓴다. 말 그대로 '생궁'이기 때문에 겨울에는 강해지고, 여름에는 약해진다. 그래서 겨울에는 약간 낮춰 조준하고, 여름에는 목표물을 좀더 위로 겨눠야 한다. 한국 궁사들을 보면 자신의 활을 '느끼는' 것 같다."
―생(生)은 '살아 있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아는가.
"처음 개량궁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정통 한국 각궁을 쏘고 싶다'고 하니까, 궁사들이 '생궁은 힘들 것'이라고 했다. 그때는 의미를 몰랐다. 그런데 나중에 뜻을 알고서 매혹되었다. 각궁은 살아 있기 때문에 칠도 하지 않는다. 항상 자연 상태에 있어야 한다. 칠을 하면 활이 숨을 쉴 수가 없다. 비가 올 때도 쏠 수 없다. 장마철에는 비를 맞지 않아도 축축해진다."
―당신은 각궁에 직접 시위를 걸 수 있나.
"내가 직접 활을 올려 보려다 10년쯤 전 하나를 부러뜨렸다. 대나무와 뽕나무를 이어 붙이고, 바깥은 무소뿔, 안쪽은 쇠심줄을 대어 평시엔 거의 원을 이룬 활을 반대 방향으로 꺾어 시위를 거는 것인데…, 활을 잘 아는 사람만 할 수 있다. 요즘 내 각궁은 황학정 고수들이 올려주고 있다."
―이렇게 번거롭다면, 한국 활이 실제로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었을까.
"옛날 전쟁 때는 몇달씩 활을 올린 상태로 썼다고 한다. 한국 활의 사거리는 145m다. 여기에 '애기살'(baby arrow)을 쓰면 300m 이상 날아간다. '편전'(片箭)으로 불리는 애기살은 화살 대신 얇은 대나무 통(통아)을 시위에 걸고 그 안에 한 자(30㎝) 정도 크기의 작은 화살을 넣어 쏘는 것이다. 적진에서 보면 활을 쏘긴 했는데 대나무 통이 툭 떨어지는 것을 보고 '활을 잘못 쐈구나' 방심하는 순간 잘 보이지도 않는 작은 화살이 300m를 날아와 박히는 것이다."
최근 영집궁시박물관에서 애기살의 사거리를 실험한 결과 428.8m를 날아갔다고 한다.
―애기살은 한국에만 있었나.
"인도와 터키서도 사용한 기록이 있다."
―당신의 소장품 중에 애기살도 있나.
"갖고 있다. 옛날 것은 아니고 최근 제작한 것이다. 영집궁시박물관에 몽골과 인도 각궁 두 점을 기증했는데, 그 답례로 애기살 세트를 받았다. 위험하기 때문에 실제로 쏘아 보지는 못했다."
- 1 한국의 각궁 2 중국 청대의 각궁 3 일본의 대나무 활‘유미’4 영국 장궁 5 사거리를 두 배 이상 늘리기 위해 좁고 긴 대나무통에 넣어 쏘았던 작은 화살인‘애기살’(편전)./ 영집궁시박물관 제공
자일링거씨는 독일 지멘스에서 사업개발 및 동아시아지역 담당 부문장(director)을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은퇴 후 연간 3~4차례 한국에 와 활쏘기를 연마하는 한편, 한국 활의 역사에 관한 책을 쓰고 있다. 지난해에는 촬영팀과 함께 와 한국의 활터와 주요한 무형문화재 궁장들을 찾아가 제작 과정을 일일이 카메라와 필름에 담기도 했다. 그는 세계 각국의 활 50여점과 수십여점의 화살, 시위를 당길 때 엄지에 끼는 깍지뿐 아니라 국내에서 이제는 구할 수 없는 고서적도 여러 권 보유하고 있다. 한국 활의 역사를 독일인이 정리하고 있는 것이다.
―1929년에 간행된 '조선의 궁술'을 두 권이나 보유하고 있다고 들었다. 언제 어디서 구입했나.
"서울 인사동에서 약 20년쯤 전에 구했다. 당시 '조선의 궁술'이라고 하는 책이 가장 전통적인 활쏘기의 교본이라는 말을 듣고 인사동의 고서점을 50차례 이상 찾아간 끝에 구할 수 있었다. 그 당시 인사동은 정말 보물창고였다. 하지만 요즘은 기념품밖에 팔지 않는 것 같아 아쉽다."
―한국어로 씌어진 책을 읽을 수 있나.
"그림과 사진으로도 내용을 대충은 알 수 있다. 책을 '보다가' 직접 읽어야겠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번역을 부탁한다."
―한국인들이 활을 잘 다뤄 과거 중국에서 '동이'(東夷)라고 불렀다는 것을 아는가.
"알고 있다."
―독일 사람들은 활쏘기를 즐기나.
"활쏘기 인구는 한국이 3만5000명 정도로 훨씬 많다. 활 쏘는 '사정'(射亭)도 300여개나 있지 않나. 독일의 양궁 인구는 3500명으로 한국의 10분의 1이다."
―당신이 속해 있는 황학정과 독일 클럽의 교류도 추진한다고 들었다.
"2007년에 부천활사랑회와 황학정에서 8명의 궁사들이 독일을 방문해 한국 활 쏘는 법을 보여줬다. 하지만 당시에는 70m 과녁에만 쐈기 때문에 한국 각궁의 진면목을 보여주지 못했다. 내 고향 인근의 양궁클럽(Archers Guild Saint Helena)과 한국 황학정의 파트너십을 추진하고 있다.
―수집품이 다양하다고 들었다.
"내년 부천문화재단에서 '실크로드를 따라 퍼진 각궁'(가칭)이라는 전시회를 열 계획이라고 한다. 여기서 내 수집품에 관심을 많이 보였다. 각궁을 사용한 나라들을 보면 몽골 중국 인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등 모두 실크로드 주변국임을 알 수 있다."
―직접 박물관을 열거나 혹시 기증할 계획은 없나.
"내 수집품에 관심있는 박물관을 찾고 있다. 내가 죽은 다음 여러 전시 기관으로 수집품이 흩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큰 이익을 볼 생각은 없지만, 가치를 제대로 알아주는 박물관과 이야기하고 싶다. 무상기증 했다가 수집품이 대접을 제대로 못 받을까도 우려된다."
―한국인으로서 부끄럽기도 하다.
"나는 공학도 출신이다. 어떤 것에 관심을 가지면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을 때까지 탐구한다. 그것이 서양과 동양 문화의 차이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간혹 동양인들이 묻는 것을 꺼린다는 느낌은 받았다. 반면, 내가 만났던 장인과 고수들은 누군가 찾아와 묻는 것에 무척 만족스러워했다."
―지금 쓰려는 책은 어떤 책인가. 서양인이 탐구한 한국 활에 관한 책인가.
"나는 한국 각궁을 한국인의 시각으로 보려 노력할 것이다. 생명을 가진 새로운 타입의 활로 묘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