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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05환언(강석준집사님 정리)
요 8: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요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이와 같이 또 우리를 말씀 앞에 무릎 꿇게 하시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우리 영혼을 살리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특별히 종의 입을 주장하사 하나님의 말씀을 잘 대언하게 도와주옵소서. 예수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 교회생활의 의무가 있어서 십일조를 배우고, 하게 된다.
십일조는 자기 소산의 십분의 일이다.
땅이 열마지기면, 열마지기에서 생산된 곡식의 십분의 일이란 말이다.
자본금의 십분의 일이 아니다.
십분의 일을 드리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 율법으로 행해오기도 했다.
어떤 사람은 십일조가 율법이라고 해서, 율법을 부정하면서, 십일조도 부정한다.
십일조는 율법이 아니다.
십일조는 자기 신앙이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는데, 모세가 오기전에 야곱이 자기형을 피해 가던 중, 노숙하다가 천사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고, 자기 아비집으로 돌아오게 해주시면, 반드시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서원했다.
모세가 태어나기 450년전에 이미 야곱이 하나님께 서원했다.
또, 야곱도 자기가 시작한 것이 아니라, 조상 아브라함이 먼저 시작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위해 싸워 이기고, 거기서 얻은 전리품중 멜기세덱에게 십분의 일을 드렸다.
멜기세덱은 말하자면 정처없는 사람이다.
출생지도 없고, 고향도 없고, 어디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었다.
캐묻지 않았다.
만약 아브라함이 그의 신분을 물었다면, 그에게 십일조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멜기세덱의 이름은 살렘왕, 평강의 왕이란 뜻이다.
그는 제사장으로서, 마치 하나님을 방불했다.
우리가 하나님이 언제 시작하셨는지 알 수 없다.
이와 같이 멜기세덱을 그의 정체를 알지 않으므로, 하나님과 방불하게 여겼다.
그래서 멜기세덱에게 십분의 일을 드렸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은 나의 주인이시라는 것이다.
주인이 내게 베푸신 은혜의 십분의 일을 보답하는 것이다.
십일조는 내 것이 아니고, 주인의 것이다.
그래서, 십일조는 내 영혼을 위해서 드리는 것이다.
사람들은 십일조 하는 것이 억울하고, 잃어버리는 것 같고, 손해보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자기 영혼을 얼마나 학대하고 있는가.
십일조는 자기 영혼을 위해서, 영혼의 주인에게 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십의 구는 육체를 위해서 자기가 쓰는 것이다.
영혼을 위해서, 영혼을 지켜주시고, 다스리는 이에게 드리는 것이다.
모세가 정하기를 레위족속은 전쟁에도 나가지 않고, 다른 장사도 하지 않고, 오직 성막을 지키고, 성막을 위해서 봉사하도록 했다.
거기서 제사장도 나온다.
이스라엘 열두지파중 레위족속은 전쟁에 나가지 않아서, 전쟁에서 죽지 않는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낸 십일조를 받아서, 그것으로 먹고 사는 자들이다.
거기까지만 보면, 십일조는 레위지파를 위해 이스라엘이 억지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레위지파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모세율법에 이스라엘이 낸 십일조를 레위에게 준다는 것이다.
레위지파는 십일조를 받아서, 먹고 쓰고 생활한다.
레위지파가 십분의 일을 얻었는데, 열한지파의 십분의 일이므로, 다른 지파보다 수입이 좀 많다.
그들은 받은 중에서 십일조를 내야하는데, 그들이 내는 십일조는 이스라엘의 열한지파가 내는 십일조에 포함하지 않고, 하나님의 곳간에 항상 있게 했다.
하나님의 성전의 재산이 되는 것이다.
나를 비방하고 꼬집는 사람중에 김목사는 십일조를 낸 적이 없다고 한다.
나는 십일조 봉투가 없다.
그것을 가지고 십일조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나는 성경에 말씀하신대로 십일조를 받는 사람이다.
그러나, 내가 받은 것 중에서 십분의 일은 성도들의 십일조 속에 포함시키지 않고, 하나님의 창고에 있게 하라 하신 말씀대로 창고에 있게 했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그것으로 땅을 샀다.
그래서 개척할 때부터, 십일조와 함께, 더 풍성히 힘껏 드렸다.
나는 그것을 성도들의 십일조에 포함시키지 않고, 별도로 모아서 땅을 샀다.
우리 교회 많은 부동산은 그런 기초에서 온 것이다.
우리는 교회에서 땅을 살 때, 돈을 모아서 사지 않았다.
최소한 십년을 앞당겨서, 십년후에 갚을 것을 계산해서 했다.
그동안 이자만 감당하다가, 십년후에 갚도록 미리 땅을 사고, 건설했다.
인플레이션 시기에서 백배 이상 오를 수도 있다.
미리 당겨서 쓰면 백분의 일 값으로 사는 것이다.
그리고, 이자만 나가니까, 20년전의 땅값을 계속 갚는 것이다.
그래서, 이 큰 교회와 부동산을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나와 같은 영감을 가지고 일한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사람들은 세상의 법칙으로 하려고 하니까 안되는 것이다.
나는 미래의 내게 올 것을 미리 앞당겨 쓰는 방법으로 했다.
이자는 싸니까 이자만 내면서 미리 했다.
나와 함께 목회전선에서 일하는 동역자도 있지만, 알지 못해서, 이해하려고도 않고, 교회가 돈을 모아서 산 줄 안다.
교회가 돈을 모아서 산 것은 한평도 없다.
미리 해서 십년, 이십년을 갚아나갔다.
우리가 부채가 있는 것도 2026년도면 모든 것을 다 갚을 수 있었다.
다 갚을 때 계산하면, 천분의 일밖에 안되는 돈으로 먼저 사용한 것이다.
이것이 오병이어의 영감이요, 지혜라고 나는 말한다.
나는 십일조를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성경이 말한대로 교인들이 낸 십일조에 포함시키지 않은 것이다.
내가 낸 십일조는 항상 창고에 있게 하라 하신대로 하는 것이다.
나는 우리 교회 이름으로 곳곳에 예배당을 지으면서, 하나님의 창고에 부은 것이다.
여러분 우리 교인들, 미혹하고 거짓말하는 사람들 말을 듣지말라.
목사가 이중적인 신앙생활한다고 헐뜻고, 비난하는 자들의 말에 넘어가지 말고, 내게 권위를 주라.
나는 요즘 몸이 매우 약하다.
나이가 많이 먹어서 약하다.
어느날 이 세상을 다시는 걸어다니지 못할 날이 오게 되면, 영원히 세상을 떠나는 것이다.
다시는 세상에 돌아오지 않는다.
이 지긋지긋한 세상.
세상은 낙원이 없다.
세상은 고통과 시련 뿐이다.
행복이 있으면 불행이 있고, 사랑이 있으면 그 사랑이 나중에는 원수가 된다.
생명이 있으면 사망이 있고, 전부가 다 상대적인 자연의 법칙을 벗어나지 못한다.
난 이 땅에서 한번도 행복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행복한 여지가 없다.
나는 외국을 누구보다 많이 다녔다.
전세계 어디를 가도, 이민와서 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한국에 있는 고통과 슬픔과 절망과 훼방과 어둠이 거기도 있다.
이민 왔다가 한달만에 죽은 사람도 있다.
어디든지 이 땅에는 죽음이 있고, 불행이 있고, 슬픔이 있고, 이별이 있고, 고통이 있고, 저주가 있다.
흑암이 깊이 있다.
이 땅의 주인은 바알세불이기 때문이다.
바알세불은 똥집주인이라는 뜻인데, 우주가 다 하나님 아버지의 똥집과 같다.
큰 집을 지어도, 반드시 똥집은 있다.
한구석에 만들어놓는다.
바알세불은 똥집주인, 똥파리 이런 뜻이다.
나는 어느날 순간에 이 똥파리가 주장하는 똥집을 완전히 떠나게 될 것이다.
예전에 내가 96세까지 살았으면 좋겠다고 해서, 사람들이 나를 96세까지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만, 그것은 사람들의 욕심일 뿐이다.
나는 항상 저녁에 잠들기 전에 눈을 감으면, 아침에 눈을 뜰지 알 수 없다.
언제나 나는 마지막같이 눈을 감는다.
그리고, 눈을 뜨면, 또 살았구나 한다.
언제 갈지 모른다.
언제 갈지 모르는 내가 눈을 감으면서, 지구에 다시는 내 발자국이 나오지 않을 때, 내 영혼은 어디로 가는가.
책도 썼지만, 여러분 꼭 읽으라.
첫째로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
심판을 이미 받았으므로, 심판을 받을 것도 없다.
이 땅에서 이미 심판을 받았다.
살았을 때, 육체를 가지고 다니지만, 숨이 끊어지는 순간 귀신이 된다.
주님의 재림이 남아있어서, 아직 지옥에 가지는 않지만, 이 땅에서 방황하다가 무저갱에서 지옥 형벌을 받을 날까지 기다리는 것 뿐이다.
둘째, 예수를 믿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은 심판을 받는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데, 예수를 믿지 않는다.
사람들은 나는 하나님만 잘 믿으면 된다고 하는데, 그들에게 하나님은 그들의 관념, 자기가 주장하는 신념이다.
곧 우상이다.
그는 심판을 받는다.
귀신이 되지 않고, 이 세상에서 죽으면 심판받을 자들이 머무를 아브라함이 머물고 있는 그곳에 함께 들어가 머물게 된다.
어떤 사람은 예수를 알고, 침례도 받았고, 성령도 맛보았는데, 순간에 성령을 시험한다.
곧 하나님을 속인다.
교인들 가운데, 외모로 볼 때 겸손하고 온유하고 훌륭한데, 감독을 속이는 자가 있다.
감독이 마음이 약하니까, 그에게 손해를 끼쳐도, 다른 사람처럼 대항하지도 않을 것이고, 그 아픔을 속에 가지고 혼자 극복하고 갈 것이라고 해서, 감독의 온유함과 나약한 인정을 악용한다.
목사에게 손해를 많이 끼친다.
가물가물하지만, 내게 그렇게 한 자가 40여명되고, 이름을 기억하는 자는 30여명이 있다.
그들이 엄청난 피해를 내게 주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오순절에 은혜받고 성령충만했다.
그가 땅을 바치기로 한 금액보다 돈이 남으니까, 나머지는 자기가 챙겼다.
그 때, 네가 사람을 속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속인 것이라 하셨다.
네가 하나님을 속였고, 성령을 시험하는구나.
감독은 성령이 세운 자다.
사람들이 볼 때, 외모가 시원찮고, 별 볼 일 없는 것 같아도, 하나님이 세우신 자다.
수백명이 안수받고 나갔지만, 나처럼 일하는 자가 있는가.
나간 자 중에, 지금 노동판에서 노동하는 사람도 많다.
우리 교회 부목사로서 교인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감독은 나와 무엇이 다른가 불만스럽게 생각하다가 나갔다.
그는 내가 쓰는 사람이지, 하나님이 쓰는 자가 아니다.
감독자가 일하는데 필요하여, 다른 목사를 참여시킨 것이다.
감독이 하는 일을 돕는 것은 곧 하나님의 일을 돕는 것이다.
직원들도 감독이 쓰는 것이다.
그러나, 큰 목적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쓰는 자는 감독이 쓰는 것이다.
주인이 타국에 갈 때, 청지기를 세우고, 청지기에게 포도원과 종들을 맡겼다.
종들은 다 청지기가 사용하는 자들이다.
그래서 청지기가 월급준다.
주인이 돌아오실 때, 청지기가 일을 잘한 것을 보고 칭찬한다.
종들에게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주며 잘 관리하고 있다.
우리 부목사님들, 같은 감독이 아니다.
그런 생각이 없으니까, 자기가 감독을 내쫓겠다고 하는 것이다.
자기는 사람의 종이 아니고, 하나님의 종이라고 스스로 나가서 성공한 자가 있는가.
누가 있는가.
내가 안쓰면 쓸데가 없다.
다른 노동은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해 주신 것이다.
나뭇가지는 나무에게 매달린 것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하셨다.
가지가 열매를 맺어야하는데, 열매를 맺지 않으면 그 가지를 제하여 버리신다.
과일나무를 보면, 가지가 무성하다.
그러나 날이 따뜻하기 전에 가지를 친다.
먼저 자랐던 가지에서는 열매를 맺지 않기 때문이다.
자르면 새 가지가 나와서, 거기서 열매를 맺는다.
또, 절로 말라지는 가지는 잘라버린다.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이미 다 말씀하셨다.
여기서 일하는 부목사님들, 전도사님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것이지만, 현장에서는 감독을 돕는 것이다.
만약 성락교회 목사님들중에서 나는 감독의 사람이 아니라고 하면 벌써 메마르기 시작한다.
그러면 열매 맺을 수 없다.
그러면 사람들이 잘라다가 불에 사른다고 하셨다.
여러분 감독이 사용하지 않으면 이 교회에서 쓸 수 었다.
직원도 당신에게 이 일을 하라고 쓰지 않으면, 성락교회에서는 일 할 곳이 없다.
사람들은 자기가 대단히 훌륭해서, 자기가 없으면 감독이 목회를 못할 것으로 생각한다.
내가 개척해서 오늘까지 부목사님들 수백명이 있다가 떠났다.
지금은 40여명만 남아있지만, 내가 그 사람들의 능력과 그들의 자격을 꼼꼼히 알고 했다면 달랐을 것이다.
그저 우리 교회에서 열심히 하고, 신학교도 나오고, 전도사도 되어 때가 되면 안수해서, 목사의 명예를 주고, 목사가 된 후에는 일터를 주어 일하게 했다.
때로는 아무리 신학교 나오고, 전도사 노릇해도, 몇사람은 그 아버지가 와서 사정해도 목사 안수 안한 사람도 있었다.
목사를 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대단해서 자기 없이는 목회 못한다고, 목사를 지도하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굉장히 감독이 마음이 상한다.
자기 권위를 주장하면 감독과 관계가 없다.
성령이 감독자를 세웠는데, 그 감독을 돕지 않으면, 나뭇가지가 포도를 맺지 않으면 아버지가 제하여 버리신다.
지금 나를 떠난 사람들, 학벌이나 성품이 훌륭한 사람 많다.
그러나, 그들은 한결같이 나갈 때는 불만을 가지고 나갔다.
자기들보다 감독이 여러가지 약점이 있고, 부족한 것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세우신 것이다.
감독을 도우라고 부목사들도 세우신 것이다.
그런데, 자기 마음에 나도 왕 될 수 있다하고 착각을 한다.
그래서 자기가 독립할 수도 있다.
하나님께 기도 많이 하고, 하나님이 그를 감독으로 세워서 나무가 되게 하실 수도 있다.
그렇게 큰 목사가 된 사람도 있다.
자기의 그릇을 알아야 한다.
교회 직원은 보수가 약하다.
교회에서는 월급이라고 하지 않는다. 사례라고 한다. 사례는 기준이 없는 것이다.
월급받으면, 교회에서 일 못한다.
사무처에서 직원들에 대해 근심한다.
월급이라고 하면 세금을 떼야 한다. 가뜩이나 적은데, 세금을 떼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래서 그냥 사례라고 한다.
그냥 주는 것이다.
그런데, 월급받는 사람처럼 쟁의 하려고 한다.
교회에서 쟁의하면 어떻게 하는가. 그리스도와 싸우겠다는 것이다.
교인들이 헌금을 많이 하면 좋겠는데, 헌금이 한정되어 있다.
교회는 장사하는 곳이 아니다.
헌금을 불리는 곳이 아니다.
헌금으로 한주 한주 견뎌가는 것이다.
교회에서 일하는 일꾼들도, 월급이 적다고 한다.
교회는 사례를 받는 것이다. 주는 사람의 의지대로만 주는 것이다.
부흥회가서 집회를 하면, 유명한 사람에게는 묵직하게 주기도 한다.
그러면 담임목사가 한달 받는 사례의 다섯배를 주는 곳도 있고, 세배 주는 곳도 있다.
최소한 담임목사가 받는 사례만큼은 준다.
어떤 교회는 교통비도 안되게 주는 곳도 있었다.
사례다.
그렇다고 해서, 멱살잡이 할 수 없다.
나도 하나님 나라 위해서 열심히 설교하고, 역사한 것이다.
나도 봉사했고, 그들도 나에게 밥사주고, 잘대접해주었다.
돈이 바닥났다고, 차비만 주어도 뭐라고 하겠는가.
내가 나를 상품으로 만들겠는가.
하나님이 일하라 명하신 줄 알고 일했고, 그들도 나름대로 대접한 것이다.
원체 돈이 없으니, 차표만 사서 주어도 성의를 다한 것이다.
그들의 사례다.
우리는 상품으로 여기지 않는다.
강사도, 교회도 상품으로 여기지 않고, 한주간 집회로 은혜받은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린다.
그 기쁨이 충만하다.
교회는 아직까지 월급이라고 하지 않는다. 없다.
모든 회사는 월급이 정해져 있다.
우리 교회는 현재 사례주는 것도 한달 일한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미리 준다.
한달 전에 미리 주었다.
월급이 아니기 때문이다.
돈에 대해 불만이 있고, 섭섭하면 같이 할 수 없다.
이와같이 교회의 구조는 사회의 구조와 많이 다르다.
지금 우리가 하나님께 헌금하고, 봉사하되, 이 땅에서 발을 떼는 순간 내 영혼 어디로 갈 것인가.
성령을 받은 자가 마음에 순간 시험이 들면,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지으면 다시는 속죄할 제사가 없다.
이 사람은 다시 심판을 받는 사람으로 떨어질 수 밖에 없다.
구원받은 자가 심판받는 자가 된다.
진리를 알고도 포기 했기 때문이다.
마귀가 하는 일은 예수 안믿는 자는 믿지 못하게 철저히 방해하는 것이요, 예수 믿는 자는 믿음에서 떨어지도록 한다.
성경에도 마귀에게 속지말라, 시험에 들지말라, 성령을 소멸치말라 많은 경고의 말씀이 있다.
나는 나를 위해서 십일조 봉투를 따로 하지 않는다. 십일조 봉투로 내면 교회재정에 합쳐지고 만다.
교회 창고에 있게 하라고 하셨다.
말라기에서 너희가 나의 것을 도적질했다고 하셨는데, 이는 십일조의 십일조를 창고에 있게 해야 했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죽을 날이 가까이 오기 때문에, 철저하게 내 영혼을 아끼려고 한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다.
이것은 내 영혼을 위해서 하라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도 십일조 한다.
너무 가난하니까 없어서 못하고, 돈을 많이 벌어도 십일조를 못한다.
한달에 일억을 벌면, 십일조가 천만원이 되니까 안한다.
자기가 쓰는 것 중에 십일조를 한다.
자기 소산의 십일조가 아니다.
영혼을 사랑하지 않고, 돈으로 계산한다.
교회 다닐라고 해도, 돈 없으면 못다닌다고 한다.
어떤 교회 목사님은 매주 십일조 이야기 하니까, 삼백명되는 교인이 이십명만 남았다고 했다.
그래도 십일조 이야기한다.
그 다음에 목사님 떠나는 날도 십일조 이야기했다고 한다.
십일조가 무엇이기에 쫓겨나면서까지 이야기하는가하면서 회개운동이 일어났다.
베뢰아를 6년간 한 목사도 십일조 한 사람만 성도로 등록한다.
한국에서 제일 큰 교회가 되었다.
나는 그것을 실수했다.
내가 십일조 말하면, 장로나 집사나 전도사들이 와서, 십일조 이야기 안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내 말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이다.
예수께서도 십일조를 반드시 하되, 의와 인과 신도 버리지 말고 하라고 하셨다.
새신자 처음 데려왔다면서, 하지 말라고 한다.
교회가 크니까, 매주 새신자가 나온다.
목사도 십일조 말하는 것이 제일 힘들다. 그렇지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십일조는 자기 영혼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
영혼이 하나님께 사랑받게 하기 위하여 하는 일이다.
십의 구는 자기 육체를 위해 사용하고, 십의 일은 영혼을 위해 사용하라고 명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율법에도 말하지 않느냐 말하시는 부분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본래 하느님이 표준어다.
하나님은 기독교인들이 그저 한분이시라는 뜻에서 한 것이지, 본래는 하느님이다.
하나님은 초월자, 근원(복, 생명, 힘)이시다.
모든 인간의 근원이시다.
근(根) 뿌리라는 말이다.
땅속의 뿌리 크기만큼 가지도 위로 자란다.
뿌리가 작으면, 가지도 작다.
가지가 뿌리와 똑같은 범위를 가지고 있다.
뿌리가 썩으면 위도 죽는다.
거름도 뿌리를 위해서 주는 것이다.
밭을 매고 하는 것도 뿌리를 보호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뿌리는 근원이다.
인생은 바깥에 노출된 것인데, 이는 땅속에 묻힌 근원이 있어서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도 근원을 본 자가 없다.
생명이 귀한 줄 알지만, 생명을 본 자가 없다.
아무도 모른다.
조상을 보지 못했지만, 역사적인 존재다.
조상 그 이상이 있고, 그 이상이 있다.
누가복음 3장을 보면, 예수의 모친 마리아 이상 조상을 소개하고 있다.
60-70대를 주욱 올라간다.
마지막은 아담이다.
아담은 흙에서 나온 자다.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인 존재다.
요즘 생물학자나 인류학자들은 아담 그 이상은 악어나 원숭이, 별별 소리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원숭이를 원숭이로 만드셨다.
원숭이가 조금 변화될 수는 있어도, DNA로 따지면 어림도 없다.
뿌리를 찾다보니까, 악어가 나오고, 원숭이가 나온다.
보지 못했지만, 뿌리를 찾아간다.
성경은 간단하게 소개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지으셨다.
아담이란 말은 아다마라는 발음인데, 흙이란 말이다.
너희는 흙에서 났으니, 필경은 흙으로 돌아간다. 근본은 흙으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사람이라는 말은 사름, 산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근본은 흙이다.
인간의 조상은 흙이다.
세상 풍습에 산소를 봉분으로 만든다.
엄마의 무릎 모양이다.
사람이 죽으면 다시 조상의 뱃속으로 들어간다는 의미다.
엄마의 자세 모양이다.
조상들을 보내놓고, 거기에 제사를 지낸다.
사람 이상, 마지막 아담, 그 이상은 흙이다.
창 5:2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사람이라 하셨다.
사람은 남자와 여자를 말한다.
흙으로 지은 사람은 흙으로 돌아간다.
그 이상, 그 이상 할 때 이상은 아버지라는 말이다.
하느님이란 말은 초월자, 근원, 신을 말하지만, 아버지라는 말이다.
가장 높으신 어른, 그 이상은 없는 마지막 아버지시다.
그를 초월한 자로 여길 때, 하느님이라 하는 것이다.
아버지가 죽으면 우상이 된다.
고전 10:19 그런즉 내가 무엇을 말하느뇨 우상의 제물은 무엇이며 우상은 무엇이라 하느뇨
고전 10:20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국어사전에도 귀신이라는 말은 죽은 자의 영혼이라고 되어있다.
그래서 시집 보낼 때, 사주를 보낸다.
사주는 생년월일이다.
여자의 생년월일을 써서 남자의 집에 보낸다. 그 집의 귀신이 되라는 것이다.
사주가 옮겨 갔으니 그 집의 운명이 되었다는 것이다.
귀신이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고, 초월적인 존재니까 사람들은 무서워한다.
그러나, 예수께서 귀신을 더럽다고 하시니, 신자들은 아주 더럽게 여긴다.
어떤 자는 귀신 쫓는다고 그렇게 욕을 한다.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살아있는 귀신이요, 그가 죽는 순간 귀신(우상)이 된다.
거기 절하면 우상이 된다.
하느님이란 말도 세상사람들은 귀신이라고 한다.
그들은 그렇게 불러도 우리는 상관없다.
기독교는 성경에 하나님이라고 해서, 하나님이 누구신지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
예수라는 그리스도가 계시다.
예수는 내가 온 것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러 왔다고 하신다.
예수를 보내신 분, 그의 아버지를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이다.
예수의 아버지를 하나님이라고 한다.
예수를 아느냐, 모르느냐가 하나님을 아느냐, 모르느냐다.
세상 사람들은 사전대로, 하느님 곧 신(神), 귀신을 말한다.
제사 지낼 때, 종이를 붙여놓고, 현고 아무개 신위라고 쓴다.
신위라는 말은 귀신이라는 말이다.
여기 모신 분은 아무개 귀신이라는 말이다.
귀신 쫓는 것을 무당이나 하는 짓이라는 말은 무식한 목사들이 하는 소리다.
불신자들은 하나님을 모른다. 그러니까, 신(神), 귀신을 말한다.
제사지내면서, 유세차라는 말을 하는데, 말하자면 이라는 뜻이다.
본적이 없으니까 하는 소리다.
성경의 하나님은 세상사람들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아버지를 말한다.
예수는 아버지 품에서 나오셨다.
예수에 대해 아버지 품속에서 나오셨다가 하늘로 올라가신다고 하니까, 하늘이 있고, 아버지가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하늘은 하나님의 본체시다. 영이다.
하나님의 전부를 말한다.
이것이 진리다.
진리를 말씀(로고스)이라 한다.
로고스는 살아있는 인격이다.
말씀은 세상에 생명으로 나타난다.
요한복음 1장에 다 말하고 있다.
빛으로 오셨으나, 그를 영접하는 자가 없다.
그러나 영접하는 자는 생명을 얻는다.
그 빛의 이름은 예수.
예수 이름을 영접하는 자.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요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 1: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 1:6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요 1:7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하려 함이라
요 1: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요 1: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요 1: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요 1: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하나님은 예수의 아버지시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영은 하나님의 본체를 말한다.
하늘이 진리다.
하늘이 너무 무한하니까, 인간들이 감당을 못한다.
그러니까, 말씀이라고 표현한다. 인간이 귀로 들을 수 있다.
그 말씀은 소리(포네)가 아니고, 살아있는 실존이다.
하늘을 정말 잘 생각해야 한다.
예수가 오는 것을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하셨다.
그 천국이 어떻게 너희 속에 들어가는가.
성령으로 예수가 우리 안에 들어오신다.
마 12: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 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하나님 나라가 우리 안에 있으면 귀신이 나가야 한다.
우리는 본래 귀신의 지배안에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면 귀신이 쫓겨난다.
귀신 쫓아내는 것이 너무 당연한 것이다.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신 것은 하나님 나라가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이시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셨다.
그는 진리요, 생명이시다.
그 생명은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다.
창세전에 흑암속에 빛이 있으라 하시고, 빛을 주셨다.
그 빛을 밤과 낮으로 구분하셨다.
피조된 빛은 한쪽은 어둡고, 한쪽은 밝다.
모든 이치가 그렇다.
생명이 있으면 사망이 있고,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고, 낮이 있으면 밤이 있고, 행복이 있으면 저주가 있다.
토정비결하는 사람하는 사람은 이런 것을 이용한다.
지금 당신은 밤이지만, 곧 낮이 올 것이라고 희망을 준다.
또, 지금은 밝지만, 잠시후 어둠이 오니까, 운명으로 여기고 견디라고 한다.
전부가 그런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다 맞는다.
이것이 세상의 이치다.
그러나, 하나님의 빛은 어둠이 없다.
빛이 통과하지 못하니까, 어둠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빛은 다 뚫는다. 그래서 어둠이 없다.
X-ray를 찍을 때, 그 빛이 다 뚫고 들어간다.
뼈중에 가장 단단한 뼈가 해골인데, MRI는 그것까지 뚫고 들어가 모세혈관까지 찾아낸다.
과학에도 그렇게 통과하는 빛이 있다.
이런 빛을 발견한 사람도 대단하다.
하나님의 빛은 그런 것보다, 월등하다.
마가의 다락방은 벽이 일미터가 넘는다.
그런데, 그 벽도 뚫고 들어오셨다.
오늘 우리에게 생명이 들어오는데, 빛으로 오신다.
예수가 내 안에 계시다고 하니까, 마치 마음에 모시는 것으로 생각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마음에 둔다고 하는 표현식으로 생각한다.
어떻게 사람이 마음에 들어가는가.
그냥 하나의 관념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를 마음에 모셨다는 것은 관념이 아니라, 실제로 들어와 계시는 것이다.
빛으로만 들어오시는 것이다.
빛이 아니면, 그저 관념으로 생각할 뿐이다.
마음에 품고, 그 이름을 생각하고 있을 뿐인다. 그저 우상이다.
구약에 너희가 나를 우상 섬기듯 한다는 말씀이 있다.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우상 섬기듯 하는가.
예수는 나는 빛으로 왔다고 하셨다.
또, 너희는 빛의 자녀라 하셨다.
빛으로 오셨기 때문이다.
말씀이 빛으로, 생명이 빛으로, 성령이 빛으로 오셨다.
그 빛은 예수시다.
그는 우리 눈에 보이는 인자(사람)로 오셨다.
그는 의(義)다.
요 16: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그 빛을 영광이라 한다.
세상의 빛과는 다르다.
세상사람들의 하느님은 우주안에 있는 신을 말하지만, 우리는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말한다.
예수의 아버지가 우리 하나님이시다.
예수를 그리스도라 한다.
그리스도는 직분이다.
보내심을 받았다.
하나님이 보내셨다.
예수는 하늘에서 오셨다.
하나님 품속, 하늘에 계시다가 이 땅에 나타나셨다.
그는 하늘의 본체의 형상이요, 진리다.
예수를 보면, 하나님 본체를 다 보는 것이다.
그는 말씀이시다.
인간과 어떻게 접근하는가. 로고스
그는 실존이시다.
그는 생명이시다.
모든 생명이 그로 말미암는다.
그 생명은 빛이다.
빛이기 때문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우리 속으로 들어가게 하신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우리는 하나님! 우리 믿는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그가 우리 하나님이시요! 우리 맘속에 예수를 배제하고 생각하는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 엉뚱하게 내게 복 갖다주는 막연히 헤메지 않게 도와주시고 우리 하나님은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하나님이신 것을 믿고 그 하나님 앞에 큰 사랑과 은혜 받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