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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토단을 쌓는 성도
2021년 9월 19일 / 출 20:18-26 / ♬ 210장
■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목사 / 19세기 말 미국 복음주의 운동을 이끌었던 기독교 선교연맹의 창시자인 앨버트 심슨 목사는 탁월한 설교가로 신학생 때부터 설교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심슨 목사는 1865년에 22세에 캐나다 녹스 대학을 졸업하기 전 해밀턴 시 녹스 교회의 임시설교자가 되었다. 녹스 교회는 당시 캐나다에서 두 번째로 큰 건물을 가진 캐나다의 대표적인 장로교회였다. 그리고 임시설교자가 된지 2달 만에 심슨 목사는 목사 안수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만장일치로 녹스 교회의 담임설교자가 되었다. 그 후 8년 동안 예배당에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크게 부흥시켰다. 그리고 미국 켄터키 주 루이빌에 있는 체스트넛 스트릿(Chestnut Street) 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그곳에서도 2년 만에 엄청나게 성장해서 예배당 좌석이 650석밖에 되지 않는 교회에 매주 2천명 이상 몰려왔다. 결국 교회건축에 나서면서 대략 2,500석의 교회를 건축하자는 공감대가 생겼다. 그때 심슨 목사는 3가지 제안 즉 심플하게 짓고, 최저 비용으로 짓고, 9개월 내의 단기간에 짓자고 제의했다. 그런데 그 제안은 하나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신에 당시 켄터키 주 루이빌의 최대 교회를 이룬 교인 대표들은 미국 최대 교회의 꿈을 품고 많은 비용을 들여 2년 이상 걸리는 화려한 교회건축을 결의했다. 그때부터 심슨 목사는 고민이 시작되었다. 자신도 대형교회의 담임목사로서 세상 기준으로 말하면 일종의 성공한 종교 리더였기에 성공한 종교 리더의 심리를 잘 아는 상황에서 엄청난 비용을 들인 화려한 초대형 교회 건축은 하나님의 비전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내세운 종교 리더의 야망의 표출임을 너무 잘 알았기 때문이다. 당시로서는 초대형 교회인 교회에서 30대 초에 담임목사로 있던 그에게 화려한 교회 건축은 너무나 달콤한 유혹이었다. 은퇴까지 10년 남은 것도 아니고 20년 남은 것도 아니고 장장 30년 이상 남은 상태에서 그가 야망을 가지면 미국 최대 교회의 꿈은 얼마든지 가능했다. 그런 인간적인 야망에 번민하며 심슨 목사님은 깊이 고뇌했다. 오랜 번민 끝에 심슨 목사는 화려한 초대형 교회 건축은 인간적인 성공은 주겠지만 오히려 명예 추락의 길임을 확신하고 교회를 떠날 결심을 했다. 그는 문서가 건물을 능가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화려한 초대형 교회건축보다는 문서선교와 선교사 파송을 통한 영혼구원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요 2:14-22 / 예수께서는 성전뜰에 이르러 희생제물에 쓸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 또 그 뒤에 환전상들이 들어 앉아 있는 것을 보셨다. 15) 그래서 밧줄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를 몰아내고 환전상들의 돈을 땅바닥에 쏟아 버리며 그들의 탁자들을 둘러엎으셨다. 16) 그러고나서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이것들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 17) 그때 제자들에게는 ㄴ) `하나님의 집을 아끼는 열정이 나를 삼킬 것이다' 라고 성경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이 떠올랐다. (ㄴ. 시69:9) 18) 그러자 유대인 지도자들이 몰려와서 예수께 따졌다. `무슨 권한으로 그들에게 나가라고 명령하시오? 만일 당신이 하나님께로부터 그러한 권한을 받았다면 그것을 증명할 만한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시오.' 19)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성전을 다시 이곳에 세우겠다!' 20) `뭐라구요?' 그들이 소리쳤다. `이 성전을 짓는 데 46년이나 걸렸는데 당신이 이것을 사흘 안에 다시 세울 수 있다는 겁니까?' 21)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신 성전은 자신의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22) 제자들은 예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뒤에야 이 말씀을 기억하고 예수께서 자신이 대해서 인용하신 성경 구절들을 깨달았으며 또 그것이 다 이루어진 것을 알게 되었다.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교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바른 교회는 세상적인 눈으로 보면 참으로 누추하고 보잘 것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귀중하고 사랑스러우며 높은 평가를 받는다. 제사장 아론은 성전에 나올 때, 장식품을 걸친 화려한 외모로 향기를 풍기며 영광스럽게 나타났으나, 그리스도는 가장 천하고 보잘 것 없는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다.』
좋은 병원은 건물의 크기나 규모가 아니라 환자를 정확하게 진단하고 치료하는 병원이어야 한다. 좋은 교회도 크기나 규모와 상관이 없고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고 실천(집행)되는 곳이 바른 교회이다.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 중에는 세상에서 상처받고, 고통받는 분들과 영육간에 장애와 질병(疾病)을 앓고 있는 분들이 있다. 좋은 교회는 이런 사람들을 도울 수 있고, 섬기고, 치료해야 한다. 많은 교회가 양적(교인수, 교회 건물 건축, 물질적 풍요) 성장을 추구하나 좋은 교회는 질적, 영적인 성장과 아울러 거룩함과 강건함을 이루기 위해 힘쓴다.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리를 두루 다니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다. 그리고 온갖 병자와 앓는 사람을 고쳐 주셨다(마 4:23).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는 교회의 목표와 비전을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고 확장하는 데 있다(마 6:10).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만 가는 나라가 아니다. 하나님 나라가 우리 안에 아니 근본적으로 내 안에 있어야 한다(눅 17:21). 심령 안에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르고, 긍휼과 청결, 화평과 의를 위해 박해 받는 자의 복을 누리는 성도와 교회가 되어야 하며(마 5:3-10)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는 예수님이 왕이 되셔서 다스리는 교회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의 성도가 되려면 어떤 습관이 있어야 할까? 본문을 통해 복된 성도가 갖춰야 할 습관을 살펴보자.
습관이란 의미 / 習慣. 익힐 습, 익숙할 관. ‘습’자는 어린 새가 날개 짓을 익힌다는 뜻에서 나온 한자어이고, ‘관’자는 마음에 꿰여 익숙해진다는 뜻이다. 즉, 습관이란, ‘어린 새가 날개 짓을 연습하듯 매일 반복하여 마음에 꿰인 듯 익숙해진다’는 것으로 특정한 자극이나 행동이 반복적으로 노출되어 자동화된 과정을 뜻한다. 어린 새가 날갯짓을 완전히 익혀야지, 어설프게 익혔다가는 첫 비행에 목숨을 내 놓아야 한다. 습관은 내 몸에 완전히 익숙해진 것을 말한다.
습관은 뇌에 박힌 정보처리 패턴이기 때문에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다. 우리가 가져야 할 가장 좋은 습관은 이러한 자신과의 싸움을 이겨내고 더 성장하고자 하는, 스스로를 사랑하는 마음이 아닐까? 참고로 우리가 하는 행동의 40%가 습관에서 비롯된다. 그만큼 습관이 지배하는 영역이 많고 좋은 습관을 기른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소성약성(少成若性)’이라 했다. 어려서 이루어진 습관은 천성과 같다는 뜻이다. 그래서 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려서부터 좋은 습관을 길러야 한다는 뜻이다. 습관이 되면 그걸 고친다는 것은 참으로 지난한 일이다. 그래서 아무리 고치고 바꾸려 해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이 대단한 관성에 대해 다들 한숨을 쉬며 “산과 강은 오히려 고치기 쉽다, 본성을 바꾸기 어려운 것에 비하면 말이다(山河易改, 本性難移)”라고 탄식하는 것이다.
경건에 이르는 연습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그 열매는 대단히 소중하다. 디모데전서 4:8에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고 하셨다. 경건한 신앙생활로 하나님을 섬기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 하나님께로부터 귀하게 쓰임을 받는다.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간 삶은 내세 하늘나라의 영광스러운 상급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습관을 갖도록 힘쓰자.
1. 늘 겸손을 잃지 말자.
모세가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전할 때 뭇 백성은 우레와 번개와 나팔소리와 산의 연기를 보았다(18절). 그 웅장하고 장엄한 모습에 백성들이 떨며 멀리 서서 모세에게 말했다.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듣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지 모릅니다(19절).” 그렇게 모세에게 말씀 중개자의 역할을 부탁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형상을 직접 대면하면 죽는다고 했기 때문이다(출 33:20).
그렇게 두려워 떠는 백성들에게 모세가 말했다.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임하심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20절).” 왜 성도에게 가끔 두려운 일이 펼쳐질까? 두렵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믿음을 시험하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범죄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말을 마치고 백성이 멀리 선 상황에서 모세는 하나님이 계신 캄캄한 구름 쪽으로 가까이 갔다(21절). 그렇다면 하나님이 계신 곳에 캄캄한 구름이 펼쳐졌을까?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감추어 죄인인 사람이 그나마 가까이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하나님께서는 은밀한 중에 역사하실 때가 많다.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세상의 소금과 빛인 성도가 되기에 힘쓰면서도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자신을 감추는 겸손함을 잃지 말자. 겸손을 잃는다는 것은 받은 은혜를 쏟는 것과 같고 넘어질까 조심해야 한다.
눅 17:7-10 / 종이 밭을 갈거나 양을 치고 돌아왔다고 해서 그대로 앉아서 먹을 수는 없다. 8) 자기가 먹기 전에 먼저 주인을 위해서 음식을 준비하고 시중을 들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9) 그렇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특별히 고마워하지도 않는다. 그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다. 10) 이와 마찬가지로 너희가 단순히 내 말에 복종한 것을 가지고 너희 자신이 칭찬받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너희는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하였기 때문이다.'
마 6:1, 3-4 / 칭찬을 받으려고 남들이 보는 앞에서 선행을 베푸는 일이 없도록 하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아무런 상도 받을 수 없다. 3) 그러니 네가 어떤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 때 남의 눈에 띄지 않게 하라. 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4) 모든 비밀을 아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네게 갚아 주실 것이다.
2. 하나님을 제한하지 말자.
하나님께 가까이 갔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출 20:23 / 너희는 신상을 만들어 내 곁에 두지 못한다. 너희가 섬기려고 은으로든 금으로든 신상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다른 신의 우상 제작도 금했지만 하나님을 형상화한 우상 제작도 금하셨다. 하나님을 어떤 모습으로 정형(定形)화하면 아무리 잘 정형화해도 하나님의 무한하신 신적 속성이 인간의 시각에 의해 제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전능하시고 사랑이신 하나님을 말로도 표현하지 못하거늘 어찌 그 형상을 어떻게 만들 수 있다는 말인가?
사람들은 대개 자기 지식과 체험 등을 통해 하나님을 어떤 분이라고 교리 등으로 규정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런 교리와 규정으로는 하나님을 다 표현할 수 없다. 그보다도 성령에 의해 주어진 성경이 증거하는 진리자체도 하나님을 표현하는데 너무 부족하거늘 우리가 알고 있는 조그마한 깨달음 자체를 전부인양 교리를 수호하겠다고 마음을 굳게 닫고 남을 업신여기거나 정죄하는 행동을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행동이다. 그래서 교리를 주장할 때는 늘 마음의 여백을 두어야 한다.
욥의 세 친구가 인간의 짧은 인과응보의 교리로 욥을 정죄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욥기 38-41편에서 때로는 그 교리에서는 표현조차 아니 거론조차 없었던 신비로운 많은 질문을 하셨다.
욥 38:1-3 / 폭풍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셨다. 3) 잘 알지도 못하면서 허튼 소리를 해대며 내가 계획하고 있는 것을 흩어 놓으려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3) 사내답게 허리를 동여매어라. 그리고 내가 물어 볼 터이니 내 말에 대답하여라.
이에 대한 욥의 답변은 매우 충격적인 고백이었다.
욥 42:1-6 / [하나님께 꿇어 엎드리다] 그러자 욥이 여호와께 이렇게 아뢰었다. 2) 주께서는 못하시는 일이 없는 줄을 나는 잘 압니다. 주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면 모든 일을 다 이루신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3) 주께서는 말씀하셨지요. 알지도 못하면서 내 계획을 가리는 자 그 누구냐고 말입니다. 어찌 함부로 말할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깨닫지도 못하고 함부로 입을 놀려 댔습니다. 주께서 나를 위하여 하시는 놀라운 일을 미처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해댔습니다. 4) 주께서 말씀하시는 동안 듣고만 있으라고 주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 질문하실 때 대답해 보라고 말입니다. 5) 전에는 내가 소문으로만 주님에 대해서 들어 왔습니다만, 이제 이 두 눈으로 주님을 똑똑히 뵙고 있군요. 6) 이렇게 내가 꿇어 엎드립니다. 먼지바닥 위에 앉아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합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함부로 욥을 판단하고 정죄하시지 않고 오히려 인간의 짧은 지식에서 나온 인과응보의 교리를 가지고 욥을 정죄한 친구들의 잘못을 지적하셨다(욥 42:7-9).
결국 욥의 세 친구는 인과응보의 교리라는 하나님의 깊은 뜻을 모르는 짧은 지식신상을 만들어 그것을 자기네들의 주변에까지 가르쳤던 것이다. 교리는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유용한 참고자료지만 그것이 하나님을 다 규정(規定)하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교리의 신상화(神像化) 등을 통해 하나님을 제한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더 넓은 세계인 땅끝까지 나갈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전해야 할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승천하시기 직전에 하신 말씀이었다.
행 1:8 / 그러나 성령이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는 권능을 받게 될 것이다. 그래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죽음과 부활을 증거하는 증인이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왜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를 요한복음 3:14-16을 통해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다. 우리가 증거해야 하는 말씀(교리를 넘어선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들이다.
요 3:14-16 / 모세가 광야에서 구리뱀을 사람들 위에 쳐든 것 같이 인자도 나무 위에 높이 들려야 한다. 15)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16) 하나님이 이처럼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셨으니 이는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그 말씀을 증거할 때는 우리 역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이 가신 길을 걸어야 한다.
요일 3:16 /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써 사랑의 본을 보여주셨고 우리는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믿음의 형제들을 위해 생명을 바쳐야 합니다.
3. 외형에 사로잡히지 말자.
나를 섬기려거든 흙으로 제단을 쌓고(24절) / 하나님께서는 제단을 흙으로 쌓은 토단 형식으로 만들라고 하셨다. 그것은 가나안으로 이동 중인 그들의 상황에 맞추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동시에 돌이나 금속을 사용한 인위적인 이방신의 제단과 구별 짓고 제단의 외형에 치중하다가 예배의 참된 의미를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화려한 성전건축을 통해 거대한 유형교회를 만들려는 모습을 결코 기뻐하지 않음을 잘 알 수 있다.
기독교 교회사를 보면서 순교까지 불사했던 믿음의 선배들의 신앙이 어디로 갔는지 중세 가톨릭은 외모를 치장하는데 혈안이 되어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는 말씀을 외면하고 성전이 우상이 되고 말았다. 작금의 우리들의 교회는 어떠한지? 과연 여기에서 자유로운 교회와 신자들이 얼마나 되는지 … .
예루살렘 성전을 보시며 눈물을 흘리셨던 모습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마 23:37-38 / 아!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아래 모으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를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는 응하지 않았다. 38) 너희 집은 버림을 받아 황폐해질 것이다.
막 13:1-2 / 그날 예수께서 성전을 떠나려 할 때 제자 한 사람이 말하였다. `선생님, 얼마나 훌륭한 건물입니까! 돌을 조각하여 장식해 놓은 이 벽을 보십시오.' 2)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이 큰 건물이 멋있어 보이느냐? 그러나 돌 하나라도 제자리에 그대로 얹혀 있지 못하고 다 무너지고 말 것이다.'
눅 19:41-44 / 그 행렬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께서는 도성을 바라보고 우시며 42) 말씀하셨다. `영원한 평화에 이르는 길이 네 앞에 있는데 너는 그 길에서 돌아서 버렸구나. 43) 네 원수들이 진을 치고 너를 에워싸서 사면으로 공격하여 44) 너와 네 자녀들을 멸망시킬 때가 올 것이다. 그리고 네 원수들은 돌 하나도 제자리에 얹어 두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네게 주신 기회를 네가 거절하였기 때문이다.'
4. 진실한 예배를 드리자.
하나님은 그 쌓은 토단에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고 하셨다(24절).
출 20:24 / 나를 섬기려거든 흙으로 제단을 쌓고 너희가 기르는 소나 양을 잡아 번제와 화목제를 그 위에 드려라. 내가 내 이름을 부르도록 지정하는 곳이면 어디에서든지 내가 내려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와 거룩한 예물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하였다.
롬 12:1 /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여러분에게 부탁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거룩하게 하여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산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진정한 예배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베푸실 일을 생각할 때 이것이 무리한 요구이겠습니까?
성도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일까? 역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일이다. 어떤 예배가 신령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일까?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는 명령에 그 답이 있다. 먼저 번제는 짐승의 가죽과 내장만 빼고 몽땅 불살라 바치는 제사로 온전한 헌신을 뜻하는 제사이다. 그처럼 하나님께 모든 것을 드리는 마음으로 예배드려야 한다. 기도할 때는 간절히 기도하고, 찬송할 때도 혼신을 다해 찬송하자. 헌금할 때는 드리는 기쁨에 감격하며 헌금하자. 그러면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는 체험들이 많아질 것이다.
또한 화목제를 드릴 때는 제사에 참여한 사람들이 성전에서 함께 하나님의 식탁에 참여하며 고기를 나눠 먹는다. 하나님께 예배드린 후에 교우들과 함께 식사하며 교제하는 것까지 해야 예배가 완성된다는 뜻이지만 먹는 것을 뛰어넘는 성도들의 교제이다. 그처럼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 깊은 만남을 이루고 험난한 세상을 사는 교우들과도 함께 삶을 위로 격려하면서 기도해준 것에 대하여 감사하고 또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기도해 줄 것을 부탁도 한다. 그리고 외로운 순례길의 동반자가 되어준 것을 고맙게 생각하면서 나름대로 준비한 음식을 나누며 성도들의 교제를 한다.
예수님을 만나 진실한 예배를 드리게 된 수가성 여인과 그가 한 일을 보자.
요 4:20-24 / 말씀해 주십시오. 우리 조상들은 이 그리심산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왜 유대 사람들은 예루살렘이 유일한 예배 장소라고 주장하고 있습니까?' 21-24) 예수께서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내 말을 믿어라. 여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드릴 때가 온다. 예배는 어디서 드리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드리느냐가 중요하다. 너희 사마리아 사람들은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예배를 드리지만 우리 유대 사람은 하나님을 알고 예배를 드린다. 이는 구원이 유대 사람들에게서 오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니 우리는 반드시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아버지께서 이런 예배를 우리에게 원하신다.'
요 4:28-30 / 여자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달려가서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29) `와서 보세요. 나의 지난날을 낱낱이 알아맞히신 분이 계십니다. 와서 그분을 만나보세요. 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닐까요?' 30)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를 보려고 동네에서 밀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여인의 모습은 자기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동네에 다니면서 나누어주었다. 그러자 온 동네가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그곳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 오늘날 교회에게 부흥이란 것은 이러한 것이며,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여인을 통해 복음을 접하게 된 사마리아 동네 사람들의 반응 또한 특이하다.
요 4:39-42 / 그 동네의 수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분이 내 지난날의 일을 낱낱이 알아맞히셨다'는 그 여자의 말을 듣고 예수께서 메시아라고 믿게 되었다. 40-41) 그래서 우물가로 달려가 예수께 자기네 동네로 들어가 묵으실 것을 청하자 예수께서는 그 동네에 이틀 동안 묵으셨다. 그동안 더 많은 사람이 예수의 말씀을 듣고 믿었다. 42) 그들은 그 여자에게 `이제 우리는 당신의 말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 듣고 그분이야말로 참으로 세상의 구세주이심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믿는 것이오' 하고 말하였다.
이 말은 자기네들에게 복음을 전하여준 여인을 무시하는 것이 아닌 사실을 사실대로 표현한 것이다. 여인 역시 저들이 예수님 앞에 나와 믿게 된 것에 크게 기뻐하였다. 신앙의 뿌리가 제대로 박히게 된 것이다.
5. 소박함을 잃지 말자.
하나님께서는 단을 흙으로 쌓게 했지만 가끔 돌로 쌓을 때도 있었다. 그때는 다듬은 돌로 쌓지 말라고 하셨다(25절). 다듬은 돌로 제단을 쌓지 말라는 말은 소박함과 초심을 잃지 말고 제단 건설의 미명하에 백성들의 피눈물을 짜내지 말라는 뜻도 있다.
초대형 교회를 화려하게 지으려면 막대한 돈이 필요하다. 그래서 부흥회를 열어 눈을 빼어 팔아 헌금한 얘기를 들려주며 집을 팔아 헌금하게 한다. 그때 교회건축 전문 부흥사는 두둑한 사례비를 챙기며 무대 뒤에서 교우들에게 큰 부담을 안겨준다. 너무 부정적인 측면만 보는 지나친 표현일까?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아닌 필요 이상의 화려한 건축을 위해서 극단적인 헌신을 인위적으로 조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부르는 죄라는 점에서 보면 오히려 약한 표현이다.
예수님이 지금 오신다면 화려한 예배당을 보고 기뻐하실까? 십자가를 지시기 3일 전에 화려한 헤롯 성전을 보시며 탄식하셨던 예수님을 생각하면 지극히 회의적이다.
반면 작은 교회는 어떠한가? 매일 기도할 때마다 ‘교회를 부흥시켜 교회에 가득하도록 해 달라’고 부르짖고 있다. 하나님께서 과연 이 기도를 들으신다고 생각하는가? 어쩌다가 교인이 한 사람 또는 한 가족이 수평이동을 하면 ‘할렐루야’하며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를 들으셨다’고 감사를 하니 …. 과연 하나님께서 기뻐하실는지 나름대로 판단하기를 바란다.
예수님은 소박한 어린 소자의 눈물을 닦아주고 사회의 그늘진 곳을 밝히려고 땀 흘리는 교회와 교인들, 죽어가는 한 영혼을 위해 울어주며 때로는 금식도 하는 그런 교회를 기뻐하시며 함께 하실 것이다. 물론 필요할 때 누구나 공감할 만한 실용적인 건축은 축하할 일이다. 그러나 목사의 야망이 담긴 화려한 교회건축은 바벨탑을 쌓는 저주가 됨을 명심해야 한다.
진짜 부자는 나눌 줄 아는 부자이고 진짜 교회는 없어도 나눌 줄 아는 교회이며, 나아가 죽어가는 영혼을 위하여 철야기도나 금식기도까지 할 수 있는 교회이다. 왜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리 목사님이 영국 성공회를 박차고 나왔는가? 부와 권력을 쥔 그 교회에 소박한 사람들을 위한 여백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심슨 목사님도 심플하고 소박한 교회건축을 주장하다가 루이빌 교회를 떠났고, 예수님도 정교한 율법을 따지며 소박한 사람들을 외면하는 유대교를 박차고 나오셨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화려한 교회를 짓고 정교한 교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교훈과 정신을 잃지 않고 마음에 담아 실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적 비전을 가지고 자신을 성장하는 일에도 힘쓰고 동시에 욕심을 버리고 자기를 겸손케 하는 일도 힘써야 한다. 외형에 휩쓸리지 않고 나사렛 예수님처럼 소박함과 순수함과 초심을 잃지 않으면 그 영혼에 반드시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의 역사가 주어질 것이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안 후에 과거에 소유했던 쓰레기와 같은 모든 욕심을 버리고 오직 예수님만을 자랑하였으며 나아가 그의 푯대를 이렇게 정하고 함께 그 길을 가자고 권면하였다.
빌 3:10-16 / 나는 지금 모든 것을 다 내던졌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다만 참으로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신 전능한 능력을 체험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당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아는 일입니다. 11)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분이 가지는 신선하고 새로운 생명 가운데서 사는 자가 되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라도 감수할 것입니다. 12) 내가 완전한 인간이 되었다고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나는 아직도 배워야 할 것이 많습니다. 다만 나는 그리스도께서 왜 나를 구원해 주셨는가를 깨달아 그리스도께서 내게 바라는 사람이 될 그날을 향해서 계속 노력할 뿐입니다. 13)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아직 나는 그 목표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일을 이루는 데 내 모든 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과거의 것에 집착하지 않고 앞에 있는 것을 바라보며 14) 목적지까지 달려서 상을 타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상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그 일을 바탕으로 하여 내리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이 상을 주시려고 나를 하늘로 부르고 계십니다. 15) 나는 여러분이 모두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점에 대해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기를 바랍니다. 혹시 여러분이 생각을 달리하는 점이 있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점을 분명히 지적해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16) 지금까지 우리가 어떻게 됐든지간에 이제는 같은 원칙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갑시다.
6.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지 말자(하나님의 말씀에 댓글도 달지 말자)
하나님께서는 정으로 다듬은 돌로 제단을 쌓지 말라고 하셨다.
출 20:25 / 네가 돌로 제단을 쌓을 경우에는 다듬지 않은 돌로 쌓아야 한다. 정으로 돌을 쪼면 부정 타기 때문이다.
요한에게 계시를 통하여 요한계시록을 쓰게 하신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이러한 말씀을 하셨다.
계 22:18-19 / 나는 이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 엄숙히 말합니다. 만일 누구든지 여기에 기록된 것에다 어느 하나라도 덧붙이는 사람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 책에 기록된 재난을 내리실 것입니다. 19) 또 만일 누구든지 이 예언의 말씀에서 어느 하나라도 떼어 내버리면 하나님께서는 그에게서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을 권리와 그 거룩한 성에 들어 갈 자격을 거두어 버리실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을 마무리하면서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가감하는 것에 대해 크게 경고하셨다. 계시록에 기록된 내용들은 인위적인 방법으로 기록된 것도 아니며 자신의 상상이나 꿈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이요 예언의 말씀이라는 것을 밝히면서 이 예언의 말씀을 제하거나 더하는 자들은 거룩한 성에 결코 참여하지 못한다는 것을 천명하셨다.
이러한 경고는 신명기 4장에서도 밝혔듯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가고자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지 말라고 하셨다.
신 4:1-2 / 이스라엘 백성 여러분, 나는 이제 여러분에게 여호와의 계명과 규정들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이 말씀을 듣고 행하면 목숨을 잃지 않고 살아남아서 여러분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제 여러분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 그 땅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2) 내가 여러분에게 명령하는 이 말씀에는 무엇을 더 보태지도 말고 빼지도 말고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내가 여러분에게 명령하는 대로 지키십시오.
창세기를 보면 천지창조를 하신 하나님께서 아담을 손수 만드신 후에 이렇게 당부하셨다.
창 2:16-17 /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이렇게 이르셨다. ‘동산 안에 있는 온갖 나무 열매는 따먹어도 좋다. 17) 그렇지만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 것인지 알게 해주는 나무 열매는 따먹어서는 안 된다 네가 그 열매를 따먹는 날에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이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혼자 있는 모습이 보기에 좋지 않구나 짝이 없이는 바로 설 수도 없을 테니 저 사람의 짝을 만들어야겠다. 그래야 저 사람이 바로 살아갈 수 있겠지.’하고 말씀하시며 아담에게서 뽑아 낸 갈비뼈로 여자를 만드시고는 그 여자를 그 사람에게 데려오셨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의 타락에 상세히 기록하셨는데, 가장 교활하고 약삭빠른 마귀의 유혹을 받아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에 저버리게 되었다. 마귀는 하나님의 말씀에 댓글을 달아 하와로 하여금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자신도 먹고 남편이 아담에게 주어 먹게 한 것이다.
창 3:1-6 /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으신 들짐승 가운데 가장 교활하고 약삭빠른 것이 뱀이었다. 그 뱀이 여자에게 이렇게 말을 건넸다. `이것 보게나 그래 하나님이 정말 너희에게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 열매를 따먹어서는 안 된다고 그러시던가?' 2) `아니야,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어떤 것이든 따먹어도 된다고 그러셨어' 하고 그 여자가 뱀에게 대답하였다. 3) `다만 동산 한가운데에 있는 나무 열매는 따먹어서는 안 된다고 그러셨지. 그 나무 열매는 만지지도 말라고 그러셨어. 만일 그랬다가는 죽음을 면치 못할 거야.' 4) 그러자 뱀이 여자에게 속삭였다. `걱정하지 말아. 그 열매를 따먹는다 해도 절대로 죽지 않아. 5) 오히려 그 열매를 따먹기만 하면 너희 눈이 밝아질 거야. 그렇게 되면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 일인 줄 분간할 수가 있게 되지. 다시 말하면 너희도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말이지. 하나님도 이걸 아시고 그 나무 열매를 따먹어서는 안 된다고 하신 거야.' 6) 여자가 그 나무를 쳐다보니 그렇게 근사하게 보일 수가 없었다. 또 그 열매도 어찌나 탐스럽게 열렸던지 먹음직스럽기까지 하였다. 그 열매를 따먹으면 금방이라도 영리해질 것같이 보였다. 그래서 여자는 손을 내밀어 그 열매를 따먹었다. 또 그 열매를 따서 자기와 한 몸이 된 남자에게도 주었다.
계속되는 창세기 3:7-13에서는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 말씀에 댓글을 다는 잘못을 저질렀다.
창 3:7-13 / 이렇게 두 사람이 그 열매를 따먹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벌거벗은 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 몸을 가렸다. 8) 두 사람은 서늘한 바람이 부는 저녁 무렵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얼른 동산에 있는 나무들 사이에 몸을 숨겼다. 9)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찾으시며 `네가 어디 있느냐?' 하고 부르셨다. 10) `동산에서 하나님께서 거니시는 소리를 듣고는 무서웠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숨었습니다. 제가 벌거벗었기 때문이지요' 하고 남자가 대답하였다. 11) `그래, 누가 그러더냐? 네가 벌거벗었다고 말이다. 내가 분명히 일러두지 않았더냐? 너희가 그 나무 열매를 따먹어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그런데도 그 열매를 따먹었더란 말이냐?' 하고 하나님께서 소리치셨다. 12) `하나님께서 내 곁에 늘 있도록 허락하신 이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따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그 열매를 먹었을 뿐입니다' 하고 남자가 변명하였다. 13) 그러자 여호와 하나님께서 여자에게 물으셨다. `그래, 네가 어쩌자고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 `뱀이 그 나무 열매를 한번 따먹어 보라고 자꾸 꾀었어요.' 하고 여자가 대답하였다.
변명만 일삼는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에서 내쫓으셨다(창 3:22-23).
하나님께서는 계속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 때때로 많은 권면의 말씀들을 해 주셨다. 특히 이사야 1장의 말씀은 마음에 새겨두어야 할 가슴 아픈 말씀으로 심판을 앞둔 불순종과 거짓 예배로 일관하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배려도 해 주셨다.
사 1:18-19 /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오라, 우리가 이 문제를 상의해 보자! 너희가 아무리 죄악에 찌들어 있다 하더라도 내가 너희의 죄악을 씻어 주리라. 금방 떨어진 눈송이보다도 더 희게 하리라. 너희가 진홍같이 붉게 물들어 있다고 하더라도, 너희를 양털처럼 희게 씻어 주리라. 19) 너희가 내 도움을 받으려고만 하면, 너희가 내 말을 듣기만 하면, 너희는 땅이 내는 좋은 것을 먹을 수 있으리라.’
하나님께서는 신약의 첫 장인 마태복음 1장을 통해 실례를 들어가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방법에 대하여 말씀해 주셨다.
마태복음 1장을 보면 가브리엘 천사의 말에 아멘으로 화답한 마리아가 임신을 하여 배가 불러오자 약혼자인 요셉은 의심을 한다. 마리아의 변명이 요셉으로서 어찌 믿어지겠는가? 이에 하나님께서 꿈을 통해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네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여자의 태중에 있는 아기는 성령께서 임신케 하신 아기다. 그러니 마리아가 아들을 낳거든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 불러라. 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져내실 분이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하나님이 예언자를 통하여,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부를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한 것이다.”라고 하셨다. 요셉은 잠이 깬 뒤 하나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나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때까지는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았다. 아들을 낳자 요셉은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 지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여 때로는 의심도 하고 불순종도 하지만 성령님의 감동과 감화를 통해 깨우침을 받았다면 마태복음 8장의 백부장처럼 믿고 순종하는 성도가 되자.
마태복음 5장-7장의 천국민이 지켜야 할 법을 말씀하시면서 분명히 말씀해 주셨다.
마 7:24-27 / 내 가르침을 듣고 따르는 사람은 든든한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 25) 비가 쏟아져서 홍수가 나고 폭풍이 휘몰아쳐도 그 집은 무너지지 않는다. 반석 위에 지었기 때문이다. 26) 그러나 내 가르침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27) 비가 쏟아져서 홍수가 나고 폭풍우가 휘몰아치면 그 집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 것이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 제자들에게 이러한 질문을 하셨다.
마 16:15-19 /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예수께서 다시 물으시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주님은 그리스도이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17)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참으로 복되구나. 네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인간의 생각에서 온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너에게 알려 주신 것이다. 18) '내가 네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그 어떤 죽음의 세력도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 19) 또 나는 하늘나라의 열쇠를 너에게 주겠다. 네가 땅에서 잠가 둔 문은 어떤 것이든 하늘에서도 잠길 것이고, 땅에서 열어 둔 문은 하늘에서도 열릴 것이다!'
온 교회는 예수님을 머리로 하여 세워진 각 지체이매, 하나님을 뜻을 받들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아 서로 협력하여 나가야 한다. 무엇보다 성령의 권능을 힘입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하나님에게 돌아오는 사람은 모두 죄를 용서받는다는 구원의 말씀인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하는 증인이 되자.
7. 자신을 정결하게 가꾸자.
하나님께서는 제단을 계단이 필요할 정도로 높은 곳에 세우지 않게 하셨다. 그것은 화려한 제단을 금하려는 목적도 있지만 제단에 오르내릴 때 하체가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목적도 있었다(26절). 구약 시대의 제사장들은 베로 속바지를 만들어 허리부터 두 넓적다리까지 하체를 가리게 했다(출 28:42). 그런 계명들은 당시 이방 종교에서 수시로 행해지던 나체 종교의식을 배격하고 정결한 삶을 강조한 계명들이다. 특별히 이 계명은 옷차림의 중요성을 교훈하다. 사람됨과 옷차림은 깊은 연관성이 있다. 단정한 옷차림은 대개 단정한 마음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너무 야한 옷, 튀는 옷, 노출이 심한 옷은 피하라. 옷에 대한 지나친 율법적인 규제는 바람직하지 않지만 그 문제를 무시해도 안 된다.
바울은 믿음의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까지 하였다.
골 3:12-14 /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13)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열심히 나눔을 실천하자 / 옷차림은 마음의 표현이다. 그런데 성도가 입어야 할 더욱 중요한 옷이 있다. 그것은 바로 ‘좋은 생각의 옷’이다. 빌립보서 4:8에 이런 말씀이 있다.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간단하게 말하면 참되고, 경건하고, 옳고, 정결하고, 사랑받고, 칭찬받는 것들만 생각하라는 것이다.
모세 율법에는 248개의 “하라!”는 율법과 365개의 “하지 말라!”는 총 613개의 율법이 있다. 그 율법을 신약성경에서 하나로 압축한 율법이 마태복음 7:12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즉 ‘남을 대접하라!’는 한 가지 율법만이라도 철저히 지키면 1석 613조의 삶이 가능하다. 그리고 “남을 대접하라!”는 말과 ‘나누라!’는 말과 ‘선교마인드를 가지라!’는 말은 다 똑같은 말이다. 그만큼 나눔이 중요하다.
이렇게 설교를 마감하려고 한다. / 제단을 쌓되 그 제단이 토단이든 혹은 돌단이든, 어떤 제단이든 중요한 것은 그 제단을 쌓는 성도의 마음가짐이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리를 말하기 전에 먼저 나의 몸을 거룩하게 하여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산제물로 드리자. 이것이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사치스런 외모보다는 진정한 회개와 말씀에 대한 순수한 신앙과 순종을 원하신다. 제단을 멋지게 쌓는 형식이 아니라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참 예배라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성령의 권능을 힘입어 복음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땅 끝까지 전하자. 오늘도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모든 사람들이 알도록 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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