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221 연중7주간 월 – 133위 067° 김 아우구스티노
“저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마르 9,24).
133위 067° ‘하느님의 종’ 김 아우구스티노
이름 : 김 아우구스티노
출생 : 1805년, 청주
순교 : 1867년 1월 23~24일
김 아우구스티노는 청주 갈매골[0.1]에 살던 양반으로, 젊어서 천주 교리를 배웠다. 그러나 그의 형이 천주교 입교를 막았으므로 가족들을 데리고 천주교 신자들이 사는 곳을 찾아 문경 한실 교우촌(현 경북 문경시 마성면 상내리)으로 이주하였다.
한실로 이주한 뒤 김 아우구스티노와 그의 가족은 함께 최양업(토마스)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런 다음 김 아우구스티노는 한실 공소의 회장으로 임명되어 본분을 다하는 데 열중하였다. 이 무렵 그의 형 프란치스코도 천주교에 입교한 뒤 한실로 이주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김 아우구스티노는 신자들을 보살피며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던 중 같은 해 3월(음력)에 칼래 신부가 한실로 피신해 오자 잠시 머물기도 하였다.[1]
김 아우구스티노 회장이 체포된 것은 1866년 11월 19일(음력 10월 13일)이었다. 이때 그의 아들 김 토마스와 종손자들인 김 아우구스티노, 김 안토니오, 김 베네딕토, 김 빈첸시오 등 다섯 명도 함께 체포되어 문경 관아로 압송되었다가 상주 진영으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김 아우구스티노의 형 김 프란치스코와 그의 조카인 김 서방 등도 체포되어 상주 진영에서 김 아우구스티노의 가족과 함께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영장은 김 아우구스티노의 집안을 가리켜 ‘너희 집안은 모두 천주교를 믿는 천주학쟁이들의 소굴이다.’라고 하면서 엄히 다스리게 하였다. 이후 김 아우구스티노는 1867년 1월 23-24일(1866년 12월 18∼19일)에 함께 투옥되어 있던 서태순(베드로), 서유형(바오로), 박 루치아, 장 서방 내외 등과 함께 다시 한번 심한 매질을 당했으며, 그 와중에서 김 아우구스티노와 가족들, 함께 형벌을 받던 교우들이 모두 교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당시 김 아우구스티노의 나이 62세였다.[2]
[註]__________
[0.1] 갈매골 : 현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성대리(城臺里)에 있는 자연부락 갈마을(甘棠). 성대리는 현재 1,2,3리로 분구되어 있고, 1989년 1월 행정구역 경계조정으로 미원면에 편입되었으며, 자연부락으로 갈마을(甘棠), 테미, 벌말, 상평대, 점말이 있다. 갈마을(감당, 甘棠)은 벌말 북쪽에 있는 마을이고, 벌말(坪坮, 坪村)은 테미 서쪽 벌판에 있는 마을이며, 테미(琅城, 垈山)는 낭성산 (琅城山) 밑에 있는 자연부락이다. 낭성산성(琅城山城)은 테미 마을 뒤에 있는 해발 346m의 산이다. 테미 남쪽에 있는 점말(花岩)은 옛날에 옹기를 만들던 마을이다.
[1] 「칼래 신부가 알브랑(Albrand) 교장 신부에게 보낸 1867년 2월 13일자 서한」, A-MEP(파리외방전교회 고문서), Vol. 579, ff. 1265-1292 참조.
[2] 『치명일기』, 정리 번호 798-809번; 『병인치명사적』, 3권, 38면; 4권, 13면; 『박순집 증언록』, 3권, 18-19면. 『병인치명사적』의 내용과 『박순집 증언록』의 내용은 동일한데, 이는 대구에 살던 서태순(베드로)의 아내 김 데레사와 조카 서상돈(아우구스티노)이 증언한 것이다. 순교 이후 김 아우구스티노 회장과 가족들의 시신은 상주 화산동 공동묘지에 묻혀 있다가 경북 문경 한실[2.1]로 이장되었다고 하는데, 현재 소실되었다.
[2.1] 한실 : 문경시 마성면 상내리(上乃里) 268 일원 교우촌
상내리(上乃里)는 상내(上乃)라고도 부른다. 조선 현종 7년(1666년) 갈씨와 해주 오씨가 이곳으로 이주하여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한다. 상내리는 당시 이 골짜기에 칡덩굴이 많이 우거진 사이로 시냇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는데 그 상류 쪽에 있다하여 ‘웃나실내(上羅溪)’, ‘웃나서내(上乃西川)’라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상내리’로 개칭하였다. 상내리 아래에 하내리(下乃里, 마성면 하내리 647 일원 ) 또는 하내(下乃) 또는 나실내(羅溪) 아랫나서내 또는 아랫나실내(下羅溪)라 불리는 마을도 있다.
‘한실’은 1600년경에 이씨와 우씨가 개척하여 살기 시작한 마을로서 이곳은 지세가 험하여 산길을 오르내리기에 너무나 힘이 들어 땀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한실’ 또는 ‘한국’이라 불렀다고 한다. 한실의 ‘-실’은 지역의 특징 나타내는 말 뒤에 붙어, (자연) 마을이나 동네를 뜻는 접미사이다. 한실은 ‘땀나는 골짜기’, 곧 한곡(汗谷)이라고 한자로 적는다.
백화산(1,063.6m)에서 물이 흘러내리며 산 중턱에 상내리 마을을 이룬다. 예전에 문경에서 충청도 연풍을 갈 때, 곧 이화령터널이나 문경새재터널이 뚫리기 전에는 새재(鳥嶺)로 가거나 백화산을 넘어야 했다. ‘영남(嶺南)’이라는 말은 새재, 곧 조령(鳥嶺) 남쪽을 뜻한다. 충청도와 경상도를 구분하는 추풍령과 조령(문경새재)는 박해 때 교우들의 이향귀촌(離鄕歸村)이나 풍비박산(風飛雹散)의 분기점이 되었다.
문경 한실은 서울·경기·충청도 교우들이 박해를 피해 조령을 넘자마자 고달픈 피난살이를 한시름 놓게 하는 장소였다. 한실이 언제부터 교우촌이 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추정컨대, 1785년 명례방 신앙집회로 발생한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에 연루되어 문중으로부터 혹독한 박해를 당하고 상주시 이안면 배모기(양범리)로 낙향한 서광수(徐光修, 1715-1786년)의 넷째아들 서유도(徐有道, 1772-1837년)가 가족을 이끌고 1801년 신유박해를 피해 한실로 오면서부터 한실 교우촌이 시작된 것으로 본다. 그리고 1812년과 1813년에 충청도 홍주와 연산의 황 바오로, 원 베드로 등 신자 몇몇이 공주에서 순교할 때 경상도에서도 사사로운 군란이 일어나는데, 이때 한실에 피난 와서 살던 서유도의 부인 전주 이씨가 순교하였다.
한실 교우촌은 경상북부지역을 주로 담당하던 칼래(Calais, 姜, 1833-1884년) 신부의 사목 중심지였다. 최양업 신부가 그랬듯이 칼래 신부도 백화산을 넘어 문경과 연풍 등을 오가며 전교활동을 하였다. 병인박해 직전인 1866년 1월 27일에 칼래 신부가 한실 인근 건학 교우촌(문경시 동로면 명전리)에 성사를 주고 미사를 봉헌하러 갔을 때 마침 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문경시·읍 중평리 ‘여우목’ 회장 이윤일의 아들 이 시몬과 함께 체포되어 공주 감영으로 이송된 후 옥중교수치명)의 의 부인과 아들이 미사에 참례하여 순교자들을 위한 미사를 청했다. 그리고 이내 병인박해가 인근 교우촌으로 퍼지자 칼레 신부는 한실에서 문경으로 피신했다가 백화산을 넘어 연풍 등지로 피신하며 온갖 고초를 겪었다. 한편 이 박해 때 많은 교우가 잡혀 상주 진영 옥에 갇혔다가 순교하였다. 한실 교우촌의 김예기(金禮己)·김인기(金仁己) 회장 형제는 신자들의 괴수로 지목되고 여우목에서 체포되어 온 성 이윤일 요한(李尹一, 1816~1867) 회장과 함께 대구로 이송되었다가 1867년 1월 21일 관덕정에서 참수치명하였다. 박해 이후 한실 교우촌은 점점 쇠퇴해갔다. 1893년 동학혁명 때는 부근에 살던 신자들과 동학혁명군들이 이곳으로 피난하였다. 1910년 한일합병 후에 한실 교우촌은 폐허가 되었고, 대신 문경의 가은읍의 먹방이[2.2]와 도탄[2.3] 등에 새로운 교우촌이 생겨났다.
조선교구의 제8대 교구장 뮈텔(1854-1933) 주교가 병인박해 순교자 자료를 수집·정리하여 1895년에 간행한 ‘치명일기(致命日記)’에 병인박해 당시 한실 교우촌에서 체포되어 상주에서 순교한 신자는 15명이었다.
1 | 서태순 베드로 | 경상도의 첫 신자인 서광수의 증손으로 충청도 장원에서 나서 문경 여우목으로 피난 가서 얼마 동안 살다가 풍기, 상주, 대구 등을 거쳐 병인년 봄에 한실로 피난을 갔다가 그해 겨울 문경 포교에게 온 가족이 잡혀 문경을 거쳐 상주로 이송되었다. 부인 김 데레사는 감옥에서 딸 마리아를 해산하여 석방되었으나 함께 석방된 그의 7세 된 아들은 굶어 죽고, 서태순도 옥중에서 배가 고파서 소 여물을 먹기도 하였다. 그해 12월 18, 19일에 순교하였다. 부인 김 데레사와 옥중에서 탄생한 외동딸 서 마리아는 동정녀로 나중에 대구교구 설립 초창기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
2 | 김 아우구스티노 | 그는 고향이 청주 갈매골 사람으로 한실로 이사를 와서 살다가 병인박해 때 다른 많은 가족과 함께 체포되어 상주로 이송되어 그해 음력 12월 18, 19일에 62세로 순교하였다. |
3 | 김 토마 | 김 아우구스티노의 아들로 부친과 같이 순교하였다. |
4 | 김 아우구스티노 | 김 아우구스티노의 종손들로 그의 종조부와 함께 순교하였다. |
5 | 김 베네딕도 |
6 | 김 빈첸시오 |
7 | 김 안토니오 |
8 | 김 프란치스코 | 김 아우구스티노의 형제로 그보다 10일 후에 체포되었으나 함께 순교하였다. |
9 | 김 서방 | 김 아우구스티노의 조카로 그와 함께 순교하였다. |
10 | 김 서방 | 김 아우구스티노의 둘째 조카로 그와 함께 순교하였다. |
11 | 장 서방 | 부부가 함께 잡혀 김 프란치스코와 함께 순교하였다. |
12 | 장 서장 부인 | 그 남편과 함께 순교하였다. |
13 | 김 요셉 | 충청도인으로 한실에서 동정을 지키며 묵주를 만들다가 병인박해 때 상주포교에게 잡혀 순교. |
14 | 김 베드로 | 김요셉 사촌으로 김요셉과 같이 동정을 지키며 봉교하다가 병인년에 김요셉과 함께 잡혀 순교. |
15 | 모 막달레나 | 김 베드로 모친으로 아들과 함께 잡혀 순교하였다. |
2009년 9월 20일, 안동교구는 교구 설정 40주년을 맞아 순교자 현양 사업의 하나로 2009년 9월 12일 상주시 함창읍 나한리의 한 논두렁에서 순교자 서유형 바오로의 묘소를 발굴해 유해와 묘소 흙 등을 옹관에 담아 한실에 새로 조성한 무덤에 안치했다. 그리고 그의 형수인 순교자 박 루치아의 가묘도 조성하였다. 서유형은 경상도 지방의 첫 신자였던 서광수의 친척으로 문경시 산양면 평지리 일대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1865년 10월 부인 성재추 막달레나, 7세 된 딸과 아들 순보(3세), 하인, 형수 박 루치아 등과 함께 체포되어 상주 진영으로 압송되었다. 가족들은 모두 풀려났지만, 서유형과 그의 형수인 박 루치아는 1866년 겨울 상주에서 옥중치명했다.
[2.2] 먹방이 : 문경시 가은읍 왕릉리 먹뱅이(먹배이, 묵방리墨坊里). 1780년경 이 마을 아래서 악귀와 이상한 불빛이 나타났다고 한다. 이를 본 마을 사람들이 이 악귀가 마을로 올라오는 것을 막기 위하여 큰 인형을 만들어 먹칠하여 세워둔 곳이라고 하여 먹뱅이, 먹배이, 묵방리라 칭하였다 한다.
[2.3] 도탄 : 문경시 가은읍 왕릉리 도타이(도탄, 桃灘/都炭) : 1480년 경 복경(卜慶)이란 선비가 이곳의 바위를 숯으로 알고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하여 도탄이라 불렀다고 한다. 1930년대에 이곳이 전체가 탄(炭)이란 사실 은성광업소(1938-1994)에 의해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