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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영
〈백서〉 사건의 주인공
1775~1801, 세례명 알렉시오,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
황사영(黃嗣永,알렉시오)은 일명 시복(時福〉이라고도 하며. 자(字)는 덕소(德紹),호는 비원(斐園)이다. 그의 세례명은 몇 년 전까지 ‘알렉산델로 알려져 왔으나, 최근의 연구 성과에 의해 ‘알렉시오’ 임이 밝혀졌다. 황사영의 집안은 세조 때 장무공(莊武公)형(衡)이 공조 판서를 지내면서부터 이름을 떨치기 시작하였는데, 그 후 황사영의 증조부 준(峻)이 공조 판서와
중추부사를 지내기까지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한 명문대가였다.
황사영의 아버지 석범은 1771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와 한림을 역임하였으나, 스물아홉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어머니 이윤혜(李允惠)는 평창 이씨로, 이승훈과 일가인 진사 이동운(李東運)의 딸이었다. 황사영은 1775년 서울 서부 아현 방에서 이들 사이의 유복자로 태어나 여덟 살 때까지 증조부의 사랑과 가르침을 받으며 자랐고. 열여섯 살 때인 1790년 9월 12일 진사시에 급제하였다.
샤를르 달레는 이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왕이 그의 비상한 재능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불러들여 얼마 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친애하는 표로 손목을 잡기까지 하였으며, 그를 떠나보내며 이렇게 말하였다. 네가 20세가 되거든 곧 나를 만나러 오너라.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네게 일을 시키고 싶다/ 특히 왕은 아무나 만나지 않고 자기 가족이나 국사를 논하기 위하여 대신들밖에는 관계를 가지지 않으며. 우리네 관습에서 허용되는 점잖고 고상한 그 친숙함을 절대 내보이지 않는 이 나라에서 그것은 비상한 특전이다.
그러므로(황사영) 알렉시오는 그때부터 왕의 손이 닿은 영광을 가진 이 손을 보통 사람은 마구 만질 수 없다는 것을 표시하기 위하여 손목을 명주로 늘 감고 다녀야 하였다.”
《눌암 기략》(訥菴記略)에도 “황사영은 16세의 어린 나이로 진사가 되었는데, 글과 글씨가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와 명성과 영예가 매우 무성하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 당시 그의 명성은 장안에 자자하였던 것 같다.
천주교를 세상을 구하는 양약으로 생각해
어린 나이로 진사가 되어 일찍이 명성을 얻은 황사영은 다산 정약용의 큰형 약현의 맏딸과 결혼하였다. 약현의 첫 부인은 이벽의 누나였다. 이벽의 누나는 딸 셋을 낳고 죽었는데. 그 큰사위가 황사영이었고, 둘째 사위는 후에 정언을 지낸 홍영관(洪永觀)이었으며, 셋째 사위는 홍낙민의 아들 홍재영(洪榫榮, 프로타시 오)이 었다.
황사영은 결혼한 뒤. 그의 처고모부 이승훈에게서 교리서를 얻어 보고 1790년경부터 천주교를 믿기 시작하였다. 그는 그 후로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얼굴이 누렇게 뜰 정도로 교리 공부를 열심히 하였는데, 이때 남인계의 선비들은 이를 매우 애석하게 생각하였다.
그중 눌암(訥菴〉이재기(李在璣) 같은 사람은 그의 숙부 황석필을 만나 천주교 공부를 하지 못하도록 말리라고 권유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러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1795년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자, 최인길의 집에서 주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는 주문모 신부를 매우 존경했고, 천주교를 이상적인 종교로 생각하여 서양의 성당에 직접 가 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이것은 그가 추국 답변에서 “주문모 신부는 참으로 덕행 (德行)이 정수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의 제자가 되기를 원했고, 잠시도 그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았지만, 1년에 불과 두세 번밖에 만나지 못한 것이 지극히 한스럽다.
또 서양 사람들이 살고 있는 천주당에 직접 가 보고 그들을 만나 보는 것이 지극한 소원이었으나. 그 소망을 이루지 못하고 체포된 것이 한스럽다”고 한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천주교를 세상을 구하는 양약(良藥)으로, 또 정도(正道)로 인식한 그는, 도탄에 빠진 이 나라를 건질 수 있는 길은 천주교를 신앙하여 나라를 혁신시키는 것뿐이라고 생각하고, 선교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의 집에는 항상 지방에서 올라온 식객들이 머무르고 있었는데. 이들은 예사 식객이 아니라 모두 교리를 배우기 위해 올라온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황사영은 당시 전국 각지에 있는 젊은 지식인들에게 선교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그가 상주에 사는 이복운에 게 선교하려다 실패한 기복으로 보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복운은 상주의 향리 가문 출신으로 열여덟 살에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책까지 섭렵하여 각지의 사림(士林)들이 신동이라고 일컫던 인물이었다. 그가 진사시를 보기 위해 서울로 올라와 어린 나이로 합격하자. 황사영은 그를 여사(旅舍)로 찾아가 서양학에 관한 책 17권을 내놓으며 "서양에서 온 새로운 학문이 있다. 이를 집안에서 행하면 집안이 화목할 수 있고, 국가에서 행하면 나라를 교화할 수 있다”고 하며 함께 서양학 공부를 하자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복운은 이를 거절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벽이변》(闢異辨)을 지었는데, 만약 이 일이 성공하였다면 이때 경상도에 처음으로 복음이 전해졌을 것이다.
‘육회’의 지도자로 활약하다.
황사영은 정약종, 권상문 같은 양반에서부터 최창현, 최필공, 최인철 같은 중인 계급은 물론, 붓 만드는 남송로, 갓 만드는 장덕유, 짚신 장수 제관득, 목수 황태복, 삿갓 만드는 신춘득 등 상민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의 신자들과 가깝게 지냈다. 그리고 교리에도 밝아 교회 내에서는 그를 ‘성학고명’(聖學高明)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고, 강완숙도 교리에 가장 밝은 사람 가운데 하나로 황사영을 꼽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의 교회 활동 중 가장 눈부셨던 일은 명도회(明道會)활동이었다. 명도회는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후 이미 오래전부터 북경에 있던 명도회를 본떠 조직한 신심 단체였다. 명도회의 창립 연대는 훗날 황사영이 쓴 〈백서〉의 “경신 4월 명회보명지후"(庚申 四月 明會報名之後)를 근거로 하여 1800년에 창립된 것으로 보나. 그 이전일 것이라는 설도 있다.
명도회의 목적은 우선 회원 자신들이 천주교에 대한 깊은 지식을 얻고. 다음에는 그것을 다른 신자와 신자가 아닌 이들에게 전하 도복 서로 격려하고 도와주는데 있었다.
정약종이 회장으로 임명된 명도회에는 그 하부 조직으로 여섯 개의 모임. 이른바 ‘육회’(六會)가 있었다. 황사영은 육회의 모임 장소를 자기 집과 홍문갑, 홍익만, 김여행, 현계홈의 집과 또 한 집이 있었다고 하면서, 그러나 그 집은 누구의 집인지 모른다고 하였다. 한 회의 구성원은 3〜4명 혹은 5〜6명으로 구성되었으며, 입회 절차는 먼저 주문모 신부에게 그 이름을 보고한 뒤, 1년 동안 기도를 잘하였는지 여부를 심사하여 부지런히 기도한 사람에게만 입회를 허락하였다.
황사영이 지도한 회원은 남송로, 최태산, 손인원, 조신행, 이재신 등이었다. 그러나 이외에도 많은 신자들이 밤이면 그의 집에 모여 교리를 익히고 기도를 드렸다. 제관득은 “조신행, 사팔뜨기 조가, 정동 사는 윤종백, 나이 20세 된 사람, 홍재영, 남송로, 남별궁 뒤에 사는 남가, 이자현, 이국승, 이재신, 이순명. 최봉운, 한대익, 손인원, 신춘득 등이 황사영의 집에 모이는 사람이었다"고 진술하였고. 김일호도 “황사영과 교유하며 교리중 의심스럽고 모르는 것을 질문하였고. 매번 주일이면 신자들과 함께 육회에 참석하고 오직 천주교 선교에 힘썼다”고 진술하였다. 이러한 진술로 볼때. 황사영의 집은 공소의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배론의 옹기토굴에서 숨어지내
신유박해는 봄에 일어난 춘옥(春獄)과 겨울에 일어난 동옥(冬獄)으로 나눌 수 있다. 춘옥은 오가 작통법(五家作統法)의 선포와 함께 2월에 일어난 박해였고, 동옥은 황사영이 9월 29일에 체포됨으로써 10월에 다시 일어난 박해였다.
이 박해에서 황사영의 이름이 처음으로 드러난 것은 2월 10일 정약용의 국문에서였다. 이에 의금부에서는 같은 날 그를 잡아들이라는 체포령을 내렸고, 신변에 위험을 느낀 황사영은 체포령 이전에 몸을 피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자신의 행동에 대해 "양반의 아들로 망명을 하면 국가에 중대한 죄를 짓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유복자로 태어난 제가 잡히면 늙으신 어머니가 애통해하시는 것을 차마 견디기 어려울 것 같아 도피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진술하였다.
이러한 심정에서 도피를 결심한 황사영은 강완숙의 소개로 용호영 근처에 있는 김연이의 집으로
가 이합규, 김계완과 함께 3일 동안 숨어 지내다가, 석정동에 사는 권상술의 집을 거쳐 동대문 안 노랑정동에 사는 송재기의 집으로 갔다. 여기에서 3일간 머무른 황사영은 송재기, 김의호, 김한빈 등과 함께 몸을 숨길 방법을 강구하였다. 그는 김의호의 제안에 따라 이씨 상인(喪人)으로 이름을 바꾸고 서울을 빠져나갈 계획을 세웠다.
그가 입고 갈 상복은 최설애와 송재기의 부인, 김한빈의 딸 성단이 바느질하여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마치 산소에 성묘 가는 사람처럼 머리에 방갓을 쓰고 상복으로 갈아입었으며, 김한빈의 아들 성분이 술병을 들고 따라나섰다. 서울을 무사히 빠져나온 황사영은 평구역에서 김한빈을 만나 여주와 원주를 거쳐, 2월 그믐께 제천 배론에 있는 김귀동의 집에 도착하였다.
김귀동 역시 천주교 신자로 몇 달 전 이곳에 들어와 옹기를 굽고 있었다. 김귀동과 김한빈은 힘을 합해 그가 숨어 지낼 토굴을 파 주었고, 토굴로 통하는 길은 큰 옹기그릇으로 덮었다. 그리하여 한동네에 살고있는 천주교 신자들까지도 그가 와 있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고 한다. 김귀동과 그의 아내와 한 그레고리오의 어머니만이 이 사실을 알고 있었고. 한 그레고리오의 어머니가 그를 자주 찾아왔었다고 한다.
황사영은 겨울잠을 자는 개구리처럼 어두운 토굴 속에 엎드려 있었다. 그러면서도 김귀동과 함께 옹기를 굽던 김세귀, 세봉 형제에게 교리를 가르쳐 입교시켰는데, 이런 것을 보면 그의 선교 활동은 망명 중에도 두려움 없이 끈질기게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는 장문의 편지(백서)
황사영은 그 어두운 토굴 속에 숨어 지내면서 자기가 직접 보고 들은 것과 김한빈, 황심 등이 전해 준 신자들의 순교 소식을 바탕으로〈백서〉를 쓰고, '일록’(日錄)을 기록하였다. 이 ‘일록’은 박해자들이 “추한 말이 많아 차마 볼 수 없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그가 천주교 입장에서 날마다 기록한 일기 혹은 수상록인 듯하다.
황사영이 종적을 감춘 뒤, 조정에서는 그를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그리고 1801년 5월에는 정순왕후가 황사영을 아직까지 체포하지 못하였느냐고 꾸짖고, 빨리 잡아들이라는 엄한 전교를 내리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끝내 황사영 이 간 곳을 알아내지 못하였다.
황사영이 체포된 계기는 다른 데에 있었다. 1800년 동지사가 북경으로 갈 때. 황심은 옥천희(玉千禧, 요한)에게 돈 40냥을 주며 북경의 구베아(A. deGouvea. 湯士選) 주교에게 조선 교회의 편지를 전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러나 옥천회는 1801년 6월 돌아오는 길에 의주에서 체포되었고. 신문받는 과정에서 9월 15일 황심도 체포되고 말았다. 그리고 황심은 황사영이 사라진 후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어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9월 26일 포도 대장에게 황사영이 숨어 있는 곳을 알려 주었다.
조정에서는 금부 도사 이면구(李勉求)를 배론으로 급파하여 9월 29일 그를 체포하고 의금부로 압송하였다. 그러나 포졸들이 처음 배론에 왔을 때 그들은 황사영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리저리 뒤지다가 토굴 위를 걷는데, 밑에서 큰 옹기그릇들이 쿵쿵 울리는 소리가 둔탁하게 들렸다고 한다. 이에 의심을 품은 포졸들이 그곳을 파헤쳐 마침내 황사영이 숨어 있는 토굴을 찾아냈던 것이다. 황사영은 포졸들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체포될 때 위에서 말한 '일록’ 과〈백서〉가 함께 발각되어 압수되었다.
〈백서〉는 신유박해의 진행 상황, 당시의 정치적 상황. 순교자들의 순교 사실 및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나름대로의 계획을 구베아 주교에게 알리는 장문의 편지이다. 편지 글이니 제목이 따로 없고, 그저 비단에 쓴 편지라는 뜻에서〈백서〉(帛書)라고 부른다. 가로 62cm 세로 39cm 크기의 횐 비단에 한자로 13,384자가 쓰여 있는데, 비단에 쓴 것은 책문(柵門)에서 몸수색을 당할 때 발각되지 않도록 저고리 안에 꿰매 입고(背縫) 가기 위한 것이었다. 편지를 받는 사람은 북경 구베아 주교이고, 보내는 사람은 황사영이 아니라 황심이었다.
황사영이 황심의 이름을 쓴 것은 그가 북경에서 구베아 주교를 만난 적이 있어. 서로 아는 사이였기 때문이었다. 황사영은 이 편지를 황심에게 부탁하여 옥천회로 하여금 구베아 주교에게 전할 셈이었지만, 이 계획은 황사영의 체포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백서〉의 원본은 1925년 한국 순교 복자 79위 시복식 때 당시 서울교구장 뮈텔(G.Mutd,閔德孝) 주교가 비오 11세 교황에게 헌정한 후. 같은 해 로마에서 개최된 세계 포교 박람회에 전시되었다. 그 뒤〈백서〉는 수녀원 등으로 전전하다가 바티칸 민족, 선교 박물관에 기증된 이래 현재까지 이곳에 보관되어 있다. 이〈백서〉는 황사영의 신앙과 사상을 논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 만약 이〈백서〉가 없었다면 그도 한 평범한 순교자에 불과하였을 것이다.
신앙의 자유를 위해 네 가지 책략 제시
황사영을 체포할 때 그의 소지품 속에서〈백서〉가 발견되자. 조정 대신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그리고 “천지가 생긴 이래 듣도 보도 못한 흉악한 말, 흉악한 음모” 라고 규정하였다.
〈백서〉의 내용은 크게 신유박해의 발단과 진행, 순교자들의 활동과 순교 사적(순교자 전기), 신부 영입과 신앙의 자유 획득 책 등에 관한 것들이다.
이 〈백서〉는 일찍이 프랑스어로 번역되어 샤를르 달레가《한국 천주교회사》를 쓸 때 중요 자료로 이용하였는데. 특히 순교자들의 전기를 기록할 때 이를 전적으로 활용하였다고 한다.〈백서〉의 내용 중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신부 영입과 신앙의 자유 획득 책이었다.
황사영은 신부 영입과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방책으로 네 가지를 제시했다. 그가 제시한 제1책은 책문을 통한 신부 영입 방법이었다. 그는 이 땅에 살아남은 영혼을 구원하고 천주교를 재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신부를 영입하여 신자들이 성사를 받도록 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하고, 북경 주교에게 되도록 빨리 신부를 파견해 달라고 호소하였다.
그리고 신부 영입에 어려운 점이 많으므로 중국 신자 중 한 사람을 골라 책문 근처로 이주시켜 조선 신자들과의 연락 통로를 마련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제2책은 중국 황제의 명령으로 신앙의 자유를 얻는 방법이었다. 당시 우리 나라는 중국 황제의 명령을 거역하지 못하는 상황에 있었으므로. 중국 황제가 명령을 내려 천주교를 박해하지 말고 자유롭게 신앙하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제3책은 감호책(監護策)이었다. 이것은 청나라와 조선은 영고탑에서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으므로. 조선을 영고탑에 소속시키고 안주와 평양 사이에 무안사(撫按司)를 설치하여 황제의 동생인 친왕을 보내 이 나라를 보호 감독하게 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제4책은 서양의 군함이 황제의 친서를 가지고 와서 외교적으로 신앙의 자유를 보장해 줄 것을 교섭하고. 만약 그 교섭이 실패할 경우 무력을 동원해도 좋으리라는. 것이었다.
황사영이 제시한 위의 네 가지 방법 가운데 제2, 3, 4책은 조정 대신들에 의해 ‘3조 흉언' 이라고 지탄을 받았다.〈백서〉를 최초로 연구한 일본인 학자들은 이를 식민지 국민의 노예 근성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였고. 국내의 학자들은 매국노적 발상이라고 매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방책의 제시가 한국 교회 재건이라는 순수한 신앙심에서 우러나온 것임을 고려할 때. 이 부분은 앞으로 면밀하게 연구하여 역사적으로 새롭게 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황사영은 대역부도 죄인으로 사형 판결을 받고 1801년 11월 5일(양 12월 10일)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되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 이윤혜는 경상도 거제부 노비로. 부인 정명연은 제주도 대정현 노비로, 두 살 된 아들 경한(景漢)은 추자도로. 숙부 황석필은 함경도 경흥으로 유배되었다.
한편 황사영이 처형된 후, 그의 시신이 어디에 묻혔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거의 180년이 지난 1980년 3월에 황사영의 방계 후손인 황용호 씨와 황인석 씨의 제보로 경기도 양주군 장홍면 부곡리 창원 황씨의 선영에서 그의 묘소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들의 제보를 받은 당시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최석우(崔奭祐. 안드레아) 신부는 이곳을 답사한 뒤, 9월 2일 무덤을 발굴하여 청화백자합 1점과 돌 십자가를 찾아냈다.
특히 백자 합 속에는 까맣게 응고된 결정과 조각이 들어 있었는데, 이 유물은 1984년 2월 단국대학교 석주선 교수의 고증에 의해 비단 토시로 밝혀졌고, 황사영이 정조가 잡았던 손목을 보호하기 위해 감고 다녔던 명주로 추정되었다.
▲ 장흥면 울대리 황사영 묘
그리고 이러한 발굴과 고증 결과, 교회에서는 1987년 이곳을 공식적으로 황사영의 묘로 인정하였다. 그러나 현재 황사영의 묘소는 진입로도 마련되지 않은 채. 음식점에 가려진 초라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신유박해 200주년을 맞아 사적지의 개발과 보존에 좀 더 많은 관심을 촉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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