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멘트/최원준
벽은 벽돌로 환원될 수 없다 벽돌과 벽돌이 만나 벽을 이룰 때 시멘트는 벽돌들 사이의 이루어지지 않는 약속, 커다란 벽을 세우기 위한 접착력 강한 거짓말이다 벽은 다양한 형태와 크기의 벽돌 없이 완성될 수 없지만 시멘트는 거꾸로 벽돌의 가치를 결정짓는다 벽돌은 정해진 규격에 따라 일정한 크기와 무게를 지녀야 하고 규칙을 벗어난 벽돌은 벽의 일부가 될 수 없다 일단 벽이 세워지면 시멘트는 벽 속에 숨어 혹시나 있을지 모를 벽돌들의 이탈에 대비해 단단하게 굳기 시작한다 당신이 하얗게 질려 있건, 체념한 회색이건, 붉게 달아오르건 벽 밖으로 뛰어내리지 않는 한 시멘트는 당신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홍일표 <홀림의 풍경들> 61p
탄탄한 사유와 통찰의 시
시멘트는 "접착력 강한 거짓말"이요 "벽돌의 가치를 결정짓는" 사물이다.즉 시멘트는 근대적 사유의 상징이며 사회의 제도적 폭력이나 획일화된 이데올로기이다.. 달리 말하면 생명을 죽음으로 이끄는 실체이고 반생명의 구체적 사물이다. 벽돌들은 시멘트에 의해 그 가치가 결정되는 대상일 뿐이다. "정해진 규격에 따라 일정한 크기와 무게"를 지녀야 하고, "규칙을 벗어나는 벽돌"은 제도권의 구성원이 될 수 없다.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제도와 구조에 적응해야 한다. 공포와 체념, 불안과 분로로 들끊으면서도 벽돌은 벽의 일부가 되어간다. 시멘트는 벽돌의 이탈을 막기 위해 서서히 굳기 시작하고 마침내 벽은 거대한 구조물이 된다. 벽은 너와 나를 가로막는 장벽이고 뛰넘을 수 없는 절망이며 반생명이다. "벽 밖으로 뛰어내리지 않는 한" 벽돌은 차가운 주검이요 피가 흐르지 않는 관념의 덩어리일 뿐이다. 결국 생명의 실체로 살아 숨쉬기 위해서는 벽을 깨고 이탈하는 수밖에 없지만 현실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으며 획일화된 질서와 제도에 구속되어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의 쓸쓸한 초상이다.
첫댓글 시멘트는 근대적 사유의 상징이며 사회의 제도적 폭력이나 획일화된 이데올로기이다.. 달리 말하면 생명을 죽음으로 이끄는 실체이고 반생명의 구체적 사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