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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나바위 성지
도로주소 전라북도 익산시 망성면 나바위1길 146
전라북도 익산시 망성면 화산리, 금강물이 굽이굽이 흐르는 평야 한가운데 사발을 엎어놓은 듯 작은 산이 있다. 우암 송시열은 이 산이 너무 아름답다고 해서 ‘화산(華山)’이라 이름 붙였다. 산의 줄기가 끝나는 지점에 광장같이 너른 바위가 펼쳐진다. 이름하여 ‘나바위’. 오늘날 화산 위에 자리 잡고 있어 ‘화산 성당’이라고도 불리는 나바위 성당은 이 너른 바위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바로 이곳이 1845년 10월 12일 밤 중국에서 사제품을 받은 김대건 신부가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와 함께 작은 배 한 척에 몸을 얹고 한국에 첫발을 내디딘 곳이다. 김대건 신부로서는 그 해 1월 육로로 한 번 입국한 데 이어 두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밟은 고국 땅이었다. 그 때는 나바위 바로 발끝까지 금강물이 넘실거리며 흘렀다고 한다. 하구로부터 거슬러 올라오자면 황산포(지금의 강경)가 가장 큰 포구였고 나바위는 황산포를 3km 가량 남겨 둔 한적한 곳이다.
망금정과 순교기념탑으로 올라가는 길 초입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상.당시 고국 땅을 밟은 김 신부의 감회가 사뭇 어떠했을 지를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1784년 한국 교회가 세워진 후 첫 신부로 맞았던 중국인 주문모 신부는 6년 만인 1801년 신유박해로 순교했고, 그 뒤 33년간 목자 없는 양 떼였고 다시 세 명의 프랑스 신부들을 맞이했으나 그나마 1839년 기해박해 때 모두 잃었다. 그리고 6년 동안 또다시 한국 교회는 한 분의 사제도 없는 암흑기를 지내야 했었다.
목자를 기다리는 한국 교회의 양 떼들에게 세 분 성직자의 입국은 참으로 감격적인 사건이었으며 김대건 신부 자신도 그토록 목마르게 그리던 고국에서 첫 방인 사제로서 사목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가 나바위에 도착하기까지의 여정은 참으로 파란만장한 것이었다. 1836년 12월, 15세의 어린 나이로 고국을 떠나 다음해 6월 마카오에 도착한 뒤 그는 1844년 12월 부제품을 받고 이듬해 1월 천신만고 끝에 홀몸으로 의주 변문의 수구문을 통해 그리던 고국 땅을 밟았다.
하지만 3개월 뒤 다시 11명의 조선인 선원들과 함께 ‘라파엘호’라는 작은 목선을 타고 제물포를 떠나 6월 4일 상해에 도착, 김가항(金家港) 성당에서 8월 17일 페레올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았다. 그리고 그 길로 함께 길을 떠났던 조선인 선원들과 두 분 성직자를 모신 김대건 신부는 첫 방인 신부로 나바위에 발을 디딘 것이다.
귀국한 지 1년 만에 관헌에게 붙잡혀 순교함으로써 비록 고국에서의 사목 활동은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의 총명함과 굳건한 신앙은 한국 교회의 가장 든든한 초석이 되었다.
1955년 김대건 신부 시복 30주년을 기념해 나바위 성당 신자들이 화산 정상에 세운 성 김대건 신부 순교 기념탑.나바위 성당은 1897년 본당 설립과 함께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베르모렐(Vermorel, 張若瑟) 요셉 신부가 1906년에 시작하여 1907년에 완성하였다. 설계는 명동 성당 설계자인 프와넬(Poisnel) 신부가 했고 공사는 중국인들이 맡았으며 건축양식은 한국인의 정서에 맞게 한옥 형태를 취했다. 그 뒤 1916-1917년에 흙벽은 양식 벽돌로, 용마루 부분의 종탑은 헐고 성당 입구에 고딕식으로 벽돌을 쌓아 종탑을 세웠으며, 외부 마루는 회랑으로 바꿨다. 그리고 1922년 회랑 기둥 아랫부분을 석조로 개조하여 지금까지 보존하고 있다.
한국의 전통양식과 서양의 건축양식이 독특하게 혼합된 나바위 성당은 그 가치를 인정받아 1987년 7월 18일 ‘화산 천주교회’라는 명칭으로 사제관과 함께 사적 제318호로 지정되었다. 특히 성당 내부에는 전통 관습에 따라 남녀 자리를 구분한 칸막이 기둥이 그대로 남아있다. 한 때는 화산 성당이라 불렀으나 1989년부터 본래 이름을 따라 나바위 성당으로 부르고 있다.
1997년 1백주년을 맞은 나바위 성당은 일제시대와 6.25 전쟁을 거치면서 민족과 애환을 같이했다. 1907년 계명 학교를 세워 1947년 폐교될 때까지 일제의 탄압 속에서 애국 계몽 운동을 통한 구국에 앞장섰고, 신사참배에 저항하던 사제와 신자들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6.25 당시에는 죽음을 무릅쓰고 성당을 지킨 사제 덕분에 단 며칠을 제외하고는 매일 미사가 계속 봉헌된 기록을 갖고 있다. 당시 본당 주임인 김후상 신부는 “양들을 버리고는 목자가 아니며, 미사를 지내다가 죽으면 그보다 더 큰 행복이 없다”는 일념으로 피신하지 않고 미사를 계속 봉헌했다.
대구교구장 드망즈 주교의 피정을 돕기 위해 베르모렐 신부가 화산 정상에 지은 망금정.나바위 성지에는 화산 북쪽 암벽에 금강을 바라보고 마애삼존불상이 새겨져 있다. 나바위 성당이 설립되기 전 금강을 오르내리며 물건을 실어 나르는 배들의 안녕을 기원하던 사람들이 새긴 것으로 여겨진다.
암벽 위 암반에는 1912년부터 매년 6월이면 이곳에서 피정을 하던 대구교구장 드망즈(Demange, 安世華) 주교를 위해 베르모렐 신부가 지은 망금정(望錦亭)이 있다. 그 옆 너럭바위 위에는 1955년에 세운 화강석으로 만든 4.5미터 높이의 김대건 신부 순교비가 있다. 이곳이 김대건 신부가 사제품을 받고 조선에 첫 발을 내디딘 곳임을 알리기 위해 김 신부가 타고 왔던 라파엘호와 똑같은 크기로 제작되었다.
성당 뒤편에는 야외제대와 평화의 모후 성모동산이 꾸며져 있고, 화산으로 오르는 오른쪽 입구에는 2007년 9월 봉헌된 김대건 신부 성상이 서 있고, 성모동산 왼쪽으로 정상까지 이르는 길에서 야외 십자가의 길 14처와 2대 본당신부였던 소세(Saucet) 신부의 묘가 있다.
성당 내부에는 1995년 전주 교구청에서 옮겨온 성 김대건 신부의 성해(목뼈) 일부가 모셔져 있다. 제대와 그 위의 예수성심상, 촛대, 감실, 세례대 등은 중국 남경 성 라자로 수도원에서 제작해서 성당 건축 당시 들여와 조립 또는 설치된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1991년에는 200여 명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피정의 집을 건립했다. 또 피정의 집 앞에는 주차장으로 이용할 수 있는 2천 평 규모의 너른 운동장이 있어서 야영장으로도 활용하고 있다. 2011년에는 성당 보수공사를 진행하였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4년 10월 15일)]
성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1821-1846년)
성 김대건 안드레아(Andreas)는 1821년 8월 21일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솔뫼 마을에서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와 어머니 고 우르술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김대건의 아명은 재복(再福)이고 이름은 지식(芝植)이라고 하는데, 그의 집안은 열심한 구교 집안이다. 김대건의 증조부 김진후 비오(Pius)와 아버지는 순교로써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다. 신앙 깊은 순교자의 집안에서 성장한 김대건은 굳센 기질과 열심한 신덕으로 충실히 생활하던 중, 16세 때인 1836년에 모방 신부에 의해 최양업 토마스와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함께 마카오로 유학가게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최 프란치스코는 병사하였으므로, 남은 두 신학생만이 훌륭히 학업과 성덕을 닦았으나 나이가 25세에 이르지 못하여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 무렵 파리 외방 선교회가 조선 교구를 담당하여 주교와 신부를 조선에 입국시켜 전교하고 있는 중이었으나, 조선이 외국과 수호조약을 맺지 않아 종교자유가 없었음으로 프랑스 루이 필립 왕이 파견한 함대의 세실 제독이 그 계획을 실행하겠다고 나섰다. 김대건은 세실 제독의 통역관이 되어 조선이 들어갈 메스트르 이 신부와 함께 에리곤 호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세실 제독이 갑자기 조선 항해를 중지하게 되어 김대건은 혼자 육로로 본국에 들어갈 계획을 세웠다. 변문에 이르러 조선 사절단의 일원인 김 프란치스코를 만나 본국 소식을 자세히 듣게 되었는데, 성직자를 비롯하여 아버지와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입국을 서둘러 그해 12월 29일 혼자 의주 변문을 거쳐 입국하였으나 중도에서 본색이 탄로날 위험이 생겨 다시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돌아갔다.
그 후 김대건은 백가점(白家店)과 소팔가자(小八家子)에 머물며 메스트르 신부로부터 신학을 배우고, 1844년 12월 15일 페레올 고 주교로부터 부제품을 받고, 다시 입국을 시도하여 고 주교와 함께 변문으로 왔으나 김 부제 혼자만 1월 15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1845년 4월 주교와 신부를 맞이하기 위하여 상해에 갔다가 그 해 8월 17일 그곳의 김가항(金家港) 성당에서 페레올 고 주교 집전으로 사제품을 받아 조선교회의 첫 사제가 되었다. 이어 8월 24일 상해에서 30리 떨어진 횡당(橫堂) 신학교 성당에서 다블뤼 안 신부의 보좌를 받으며 첫 미사를 집전하였다.
같은 달 31일 고 주교와 다블뤼 안 신부를 모시고 라파엘호라 명명한 작은 목선을 타고 상해를 출발하여 1845년 10월 12일에 충청도 나바위라는 조그마한 교우촌에 상륙하였다. 김 신부는 선교활동에 힘쓰는 한편 만주에서 기다리는 메스트르 이 신부를 입국시키려고 애썼으나, 의주 방면의 경비가 엄해서 고 주교는 바닷길을 알아보라고 지시함으로, 백령도 부근으로 갔다가 순위도에서 1846년 6월 5일 밤에 체포되었다.
체포된 김 신부가 황해 감사 김정집의 심문에서 자신은 조선에서 출생하여 마카오에서 공부했음을 토로하자 황해도 감사는 왕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이 사건의 중대성을 인식하여 중신회의를 열고 서울 포청으로 압송케 하였다. 일부 대신들은 김 신부의 박학한 지식과 외국어 실력에 탄복하여 배교시켜 나라의 일꾼으로 쓰자고 하는 의견도 있고 해서 배교를 강요했으나, 김 신부는 도리어 관리들을 교화시키려고 하자 사학의 괴수라는 죄목을 붙여 사형을 선고하였다. 김 신부는 사제생활 1년 1개월만인 1846년 9월 16일에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이때 김 신부의 나이는 26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1818-1866년)
성 마리 니콜라 앙토안 다블뤼(Marie Nicolas Antoine Daveluy) 주교의 세례명은 안토니우스(Antonius, 또는 안토니오)이고, 한국명은 안돈이(安敦伊)이다. 그는 1818년 3월 16일 프랑스 아미앙(Amiens)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정은 그 당시 프랑스의 전통적인 가정답게 모범적인 신앙생활과 덕행의 꽃을 피웠던 집안이다. 부모는 그의 억세고도 침착하지 못한 성격을 고치려고 다소 완고한 교육을 시켰다고 한다. 그는 사제직에 뜻을 두고 1834년 10월 파리(Paris) 교외의 잇시(Issy) 신학교에서 입학하여 2년 동안 철학을 공부하였다. 이어 1836년 10월 파리 생 쉴피스(Saint Sulpice) 신학교에 진학하여 5년 동안 신학을 배운 다음 1841년 12월 18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사제 서품 후 르와예(Roye) 본당의 보좌신부로 20개월 동안 사목하다가 오래 전부터 마음속에 품고 있던 전교신부로서의 뜻을 펼치기 위해 1843년 10월 4일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다. 그리고 다음해에 극동 선교사로 임명되어, 2월 20일 브레스트(Brest) 항구를 출발하여 8월 24일 외방전교회의 마카오 대표부에 도착하였다. 그때 마침 제3대 조선 교구장에 임명되어 조선으로의 입국을 시도하고 있던 페레올(Ferreol, 高) 주교의 권유를 받아들여 조선 선교사를 지원하였다. 그는 페레올 주교와 함께 조선에 입국하기 위해 1845년 8월 초 상해로 가서 8월 17일 금가항(金家巷) 성당에서 거행된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의 사제 서품식에 참석한 후, 8월 24일 상해에서 30리 떨어진 횡당(橫塘) 소신학교에서 첫 미사를 집전한 김대건 신부를 보좌하였다. 그리고 8월 31일 페레올 주교, 김대건 신부와 함께 상해를 출발하여 어려운 항해 끝에 10월 12일 저녁 8시경 충남 강경 부근 황산포(黃山浦)에 상륙하였다.
이때부터 1866년 3월에 순교하기까지 21년 동안 그는 당시 가장 오랫동안 조선에서 활동한 선교사가 되었으며, 아울러 조선의 언어와 풍습에도 능통하게 되었다. 조선에 입국한 이듬해인 1846년부터 전교활동을 시작한 그는 갖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7백여 명의 교우들을 돌보았고, 1846년 김대건 신부가 순교하자 일단 활동을 중단하고 습기가 심한 불결한 방에 숨어 살았으며, 그러면서 건강이 많이 악화되었다. 1848년 박해가 뜸해지자 건강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다시 전교활동을 시작하여 1850년에는 생명이 위험한 지경까지 갔다. 이에 페레올 주교는 다블뤼 신부로 하여금 건강이 회복될 때까지 전교활동을 금하였고, 그래서 그동안 다블뤼 신부는 신학생들을 지도하기도 하고 틈틈이 “나선소사전”(羅鮮小辭典)을 편찬하는 등 교우들이 손쉽게 볼 수 있는 신심서 및 교리서를 번역 저술하기도 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성교 요리 문답”(聖敎要理問答), “천주 성교 예규”(天主聖敎禮規), “천당직로”(天堂直路) 등의 번역서라든가, “신명초행”(神命初行), “회죄직지”(悔罪直指), “영세대의”(領洗大義), “성찰기략”(省察記略) 등의 저서들은 모두 그의 노력에 의한 것들이다. 특히 한국 천주교회사와 순교사의 정리는 그의 두드러진 업적들 중의 하나이다. 조선 교회사 편찬을 위해 조선사에 관한 비망기와 조선 순교사에 대한 비망기를 저술하여 모두 1862년 파리(Paris)로 보냄으로써 후대의 귀중한 사료가 되었다. 이것을 기초로 달레 신부가 “한국 천주교회사”를 저술했기 때문이다.
그는 1861년에는 경상도 지방에서 활동하기도 하고, 1865년부터는 내포 지방에서 전교활동을 시작했었는데, 1866년에 병인박해가 더욱 가혹해져 마침내 같은 해 2월 23일에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가 잡혀 3월 7일 참수 치명하였다. 그래서 보좌주교였던 그가 주교직을 계승하여 제5대 조선 교구장이 되었다. 그러나 그 역시 곧 체포되어 당시 조선에 입국하여 활동하고 있던 위앵(Huin, 閔) 신부와 오메트르(Aumaitre, 吳) 신부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다. 서울 의금부에 갇힌 다블뤼 주교는 심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오히려 천주교에 대한 훌륭한 호교론을 펴기고 했다. 그러나 3월 23일 그가 사형에 처해질 것이 결정되어 충청도 보령(保寧) 수영(水營)으로 이송되었다. 그들은 죄수복을 입고 고문으로 상한 다리를 질질 끌면서 이송되는 도중, 처형 예정 날짜인 3월 30일 성 금요일에서 처형일이 다소 연기될 기미가 있음을 알고 “성 금요일에 죽게 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였다.
그의 소원대로 3월 30일에 성 금요일에 다블뤼 주교는 사형을 받게 되었다. 처형이 시작되자 맨 먼저 다블뤼 주교가 칼을 받았다. 이때 희광이들이 다블뤼 주교의 목을 칼로 한 번 내리친 다음 그대로 버려둔 채 처형의 품삯을 흥정하기 위해 한참동안 꾸물거리다가, 흥정이 결정되자 다시 다블뤼 주교의 목을 두 번째 내리쳤다고 한다. 그 후 그의 시신은 얼마동안 군문효수 되었다가 교우들의 손에 의하여 홍산 땅에 안장되었다. 현재 그의 유해는 절두산 순교자 기념관 지하성당에 모셔져 있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이상 가톨릭 성인사전]
페레올(Ferreol, Jean Joseph) 주교(1808∼1853년)
제3대 조선교구장. 1808년 12월 27일에 프랑스 아비뇽(Avignon)에서 태어나 1838년 외방전교회의 신부가 되었으며 1839년 5월초에 프랑스를 떠나 극동으로 향하였다. 1840년 1월 23일에 마카오에 도착한 그는 다시 배를 타고 중국에 상륙하여 중국대륙을 횡단하고 만리장성을 넘어 서만자(西灣子)에 도착하였다. 이때까지 그는 조선 교회로부터 아무런 소식도 받지 못하여 어떤 큰 불행이 일어났음을 예감할 수 있었다. 조선 입국을 위해 만주 봉천에까지 왔으나 그 곳 요동지방의 푸대접 때문에 서만자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요동지방은 원래 포르투갈 선교사의 관할구역이었으나 북경교구로부터 분리되어 파리 외방전교회에 그 관할권이 넘겨짐에 따라, 이를 시기한 포르투갈 출신의 선교사들이 그 곳 신자들에게 프랑스출신 신부를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사주했기 때문이었다.
서만자에 돌아온 페레올 신부는 그 곳에서 앵베르 주교로부터 보내온 편지를 받아보고 그의 지시대로 조선 입국을 위해 양부(Yang Vou)로 가려고 했으나 요동지방 신자들의 적의로 말미암아 그 곳에 갈 수가 없었다. 그러는 동안 1838년 8월 14일자로 벨리나(Bellina)의 명의주교로서 계승권을 가진 조선교구의 보좌주교로 임명되어 1843년 12월31일 만주교구의 베롤(Verrolles) 주교로부터 성성식을 받았다. 이에 더욱 조선 입국의 길을 찾으려고 애썼으나 여의치 않던 중, 때마침 그를 찾아온 김대건(金大建)을 먼저 조선에 입국시키기로 하고 자신은 마카오로 되돌아갔다. 갖은 고생 끝에 조선 입국에 성공한 김대건은 주교와의 약속대로 배를 구입하여 상해로 다시 돌아와서 주교에게 연락하니, 주교는 그때 프랑스로부터 새로 파견되어 온 다블뤼(Daveluy, 安敦伊) 신부를 거느리고 생해로 달려왔다. 이어 함께 배를 타고 모진 풍파를 헤쳐 간신히 한국 서해안에 다다라 충청도 나바위[羅岩)라는 곳에서 닻을 내렸다. 조선 입국을 시도한 지 6년만인 1845년 19월 12일이었다. 곧 서울로 올라와 전교활동을 전개했으나, 얼마 안 되어 그가 조선 입국에 앞서 상해에서 신품을 준 김대건 신부를 잃는 아픔도 겪었다. 그러는 가운데 1851년을 맞이한 주교는 거듭된 박해와 1만여명의 신자를 돌보아야 하는 과중한 업무 때문에 과로로 점차 건강이 쇠약해져 1853년 2월 3일 끝내 회복을 보지 못하고 선종하였다. 그의 나이 45세였다. 그는 제3대 주교로서 조선 입국 이래 8년 동안에 폐허가 되다시피한 조선 교회를 소생시킨 큰 공을 남기었는데, 그의 유해는 4월 12일에 안성(安城) 미리내에 있는 김대건 신부 무덤 옆에 묻혔다. [출처 : 한국가톨릭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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