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오후 2시 국가인권위 배움터에서는 장애여성공감 주최로 장애여성 인권확보를 위한 영상토론회가 개최됐다. 장애여성공감은 사회의 정상성의 제도와 기준속에서 억압을 당하고 있는 장애여성의 문제에 공감하고 다양성이 인정되는 새로운 기준을 만들고자 98년 2월에 창립된 장애여성 인권운동단체다. '공감'은 장애여성인권운동의 일환으로 올해 세차례의 토론회를 준비중인데 "장애여성과 독립" 이라는 주제로 열린 본 토론회가 첫 시간이다.
"거북이시스터즈"- 느리지만 움직이고 있다
토론회에 앞서 장애여성인권다큐멘터리 "거북이 시스터즈"가 상영됐다. '공감'과 여성영상집단 '움'이 공동제작한 본 다큐멘터리는 '영희, 영란, 순천' 세 장애여성의 일상을 장애여성의 시선으로 담고 있다. 이들은 6년전부터 독립하여 살아가고 있고 장애여성공감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다큐멘터리는 이동권이 보장되지 않아 목숨걸고 친구를 만나러 가야하는 상황, 전동휠체어를 타고 다닐 때 느껴지는 사람들의 시선, 외식을 하고 싶어도 메뉴보다 식당의 편의시설을 먼저 고려해야하는 구체적인 현실을 담는다.
만만치 않은 현실속에서 '영희, 영란, 순천'은 티격태격 싸우기도 하지만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가며 자신들만의 보금자리를 지켜간다. 장애여성의 독립생활은 힘들고, 거북이처럼 느리고 더뎌 보이지만 그 안에서도 분명한 진보가 있음을 보여준다.
"거북이 시스터즈" 상영에 이어 장애여성성폭력상담소 배복주 소장의 사회로, 장애여성의 독립에 관한 발제 및 토론 시간을 갖었다. "거북이 시스터즈"의 주인공인 '공감' 정영란 사무국장이 "나의 독립이야기"로 발제를 시작했다. 정영란 사무국장은 뼈가 잘 부서지는 골이형성부전증을 가지고 태어났고 27년간 거의 집안에서만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냈다고 전했다.
"독립생활은 그룹홈이나 공동체와 다르다"
" "사춘기 때부터 독립을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방법이 없는 것 같았다. 부모님에게 짐이 되기 싫었지만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다. 그래서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시면 나도 죽어야지 하는 생각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바보 같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입장에서는 그것이 가족에게 최선의 방법이었다는 생각을 한다"
정 사무국장은 현재 고덕동에 나와 살기 시작하면서 장애여성의 진징한 독립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이 더욱 깊어졌다고 한다. 독립생활 6년째인 그녀는, 장애인 공동체 혹은 그룹홈과 자신의 독립생활이 분명히 다르다고 강조한다.
"공동체나 그룹홈은 장애인들이 보살핌을 받는 곳이지 장애인들이 주체적으로 생활을 이끌어가는 곳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독립생활은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책임을 져야하고 경제적인 부분 또한 책임을 져야한다. 그래서 난 나의 생활을 독립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장애여성으로 독립생활에 뒤따르는 어려움도 많다. 여성이기 때문에 남성들로부터 호기심의 대상이되기도 하고 왜 불편하게 나와서 사느냐는 식의 동네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힘들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정 사무국장은 장애여성의 독립을 위해 사회적 시스템의 구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활동보조인을 유급으로 정부가 지원하거나, 결혼을 원하는 여성에게 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 등이 필요한데 무엇보다 장애여성들이 무엇을 진정으로 원하는 지에 대한 실질적인 욕구조사가 먼저 실시되어야 함을 주장했다.
"장애인운동안에서도 계속되는 정상성 좇기"
이어서 한국자립생활네트워크 회원 고명숙씨가 "장애여성의 자립생활" 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이야기했다. 고명숙씨는 스스로를 장애인계에서도 은근슬쩍 또 한번 소외되는 뇌성마비 장애인이라고 소개했다. 억압적인 남성 우월주의가 팽배한 가정에서 자신은 아버지의 미움을 독차지하게 되었고 만성적인 우울증이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교육권만큼은 끝까지 움켜쥐려 애썼고 자립생활을 위해 틈틈히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가족들이 돈을 가져가는 바람에 모으기가 어려웠고 무엇보다 직업을 구하는게 힘들었다고 말한다.
"언제부턴가 장애인'도' 받는 곳이 아니라 장애인'만' 있는 일자리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거기서도 나는 거부당했다. 모든 곳이 사회에서 요구하는 정상성 안에 있거나 그것에 근접한 쪽으로만 향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자격미달인 나는 설자리가 없었다"
이후로 고명숙 씨는 자립생활을 위해 본격적으로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한국자립생활네트워크'라는 자조단체를 만들었고 동료장애인들에게 정보와 자립생활기술훈련, 상담 서비스 등을 제공했다고 한다.
하지만 자립생활을 위해서 가장 절실한 부분인 경제적 독립의 기회에 있어서도 장애여성은 여전히 소외되고 있다. 자립생활 센터도 운동보다 사업위주로 진행되고, 좀더 수행능력이 뛰어난 장애인을 정식직원으로 두고, 최고 관리자가 남성인 경우 장애남성을 직원으로 앉히게 된다" 라며 장애인군중 안에서도 '사회에서의 정상성 좇기'의 적용과 그에 따른 차별이 고스란히 남아있음을 꼬집었다.
"비장애남성과 결혼한 장애여성은 필자 핀 여자?"
"마지막으로 장애여성공감 박주희 운영위원이 "장애여성에게 결혼이 과연 독립인가?"라는 주제문으로 발제를 이었다. 박 운영위원은 비장애남성과 이혼 후, 딸과 함께 살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한 후 비장애남성과 결혼한 장애여성은 정말 '팔자 핀 여자' 인지를 물었다.
그녀는 장애여성이 비장애남성과 결혼하는 과정에서 받게 되는 시선과 잘못된 가치관이 내면화되는 과정을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생생하게 전했다. " 내가 결혼할 때에도 남편한테 헌신하고 살 것을 강요받았다. 장애여성의 결혼으로 장애여성은 마치 하루아침에 신분상승한 신데렐라가 되고 그녀와 결혼한 비장애남성은 전무후무한 착한 남자로 추앙 받는다.
사회에서 성공한 장애극복 신화는 남성들이 주류를 이루는 반면에 장애여성들은 '여자 팔자는 뒤웅박팔자'라는 여성에 대한 전통적인 관념을 그대로 적용시켜 남성의 후광으로 빛을 발하는 모습만 부각시킨다"
박 운영위원은 장애남성과 장애여성의 독립문제에도 분명한 차이가 있음을 강조했다. 장애남성은 좀더 진취적인 삶, '남성'으로써의 삶을 위해 독립을 준비하며 집안의 후원을 받는 경우도 많지만 장애여성은 독립을 말하는 것조차 어렵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장애여성이 선택한 결혼이 당당해지기 위해서는 잘못된 결혼의 신화에서 벗어나야하며 장애여성의 독립은 다른 누구의 도움을 통해서가 아니라 바로 본인의 선택임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애아를 둔 부모대상 교육 필요
이어진 질의·응답 시간에는 발제에서 다루어지지 않은 다양한 이야기가 논의됐다. 장애여성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가지고 가족이나 주변사람들의 인식을 변화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 윗세대들의 인식을 변화시키는 것은 어렵다. 윗세대에게는 장애여성이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것을 보여드리면서 동시에 장애아를 둔 부모들을 대상으로 교육활동을 하는 것이 효과적이다"라고 정영란 사무국장이 답했다.
자립생활과 독립생활의 차이에 대한 질문에 고명숙 씨는 "주체적인 삶이 곧 혼자사는 삶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며 "언어사용을 두고 논란이 있었지만 중요한 문제로 보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자기의 영향력을 펼칠 수 있는 삶인가' 의 문제다"라고 답했다.
이에 배복주 소장은 "자립이라는 말은 왠지 모르게 재활의 냄새가 풍긴다. 그래서 장애여성공감에서도 독립이라는 말을 쓰게 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자기 삶을 얼마나 주체적으로 받아들이는가의 문제다"라고 덧붙였다.
토론회에 참여했던 유일한 남성인 박 현(한국자립생활네트워크 회원)씨는 같은 공간에서 활동을 하면서도 장애남성이기에 느끼지 못했던 문제들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고 전했다. 장애인운동 내에서도 계급을 나누고 차별하는 모습을 돌아보게 된다는 것이다.
무거운 주제임에도 여유와 편암함이 있던 토론회
토론회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시종일관 편안한 분위기로 진행되었고 웃음보따리가 터지기도 했다.토론회가 즐거울 수 있다니! 하지만 어두운 과거의 경험들을 이제는 한발짝 물러서서 볼 수 있기에 웃으며 이야기 할 수 있으리라.
이들은 문제해결의 초점을 나의 장애로 보지 않고 나를 둘러싼 환경과 사회로 인식한다. 스스로를 사랑하는 여유를 가지고 환경과 사회 그리고 차별적인 인식의 벽과 싸워나가는 과정이 멀게 보이지만, 싸워나가는 그 한 걸음이 소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