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근 시인
1966년 경북 문경에서 태어나 충주에서 성장함.
중앙대 문예창작과와 같은 대학원 다님.
1992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이후 한 편의 시도 발표하지 않음.
첫 시집 "상처적 체질"(문학과지성사,2010) 간행
황사
사막도 제몸을 비우고 싶은 것이다
너무 오래 버려진 그리움 따위
버리고 싶은 것이다
꽃 피고 비 내리는 세상 쪽으로
날아가 한꺼번에 봄날이 되고 싶은 것이다
사막을 떠나 마침내 낙타처럼 떠도는
내 고단한 눈시울에
흐린 이마에
참았던 눈물 한 방울 건네주고 싶은 것이다
지도에 없는 마을
지도에 없는 마을을 내게 가르쳐준 여자는 죽은 꽃나무였다 연인이었다가 독약이었다가 슬픔이었다 결국엔 아무것도 아니이었다 나는 지도에 있는 마을 어디에서도 산 적 없었지만 굳이 지도에 없는 마을로 가고 싶었고 거기서 높은 데 납작 엎드린 교회당 빨간 지붕이 되고 싶었으므로 맨 먼저 구름에게 물었던 것 같다
지도에 없는 마을은 지도에 없으므로 지도에 없는 마을이었다 그래서 사람들 언어로는 물을 수도 없고 가르쳐줄 수도 없는 마을일 것이었다 구름은 그러나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잽싸게 입을 배꼽으로 바꿔버렸고 내가 투덜대기도 전에 귀를 감추고 사라져버렸다 한동안 나는 지도에 없는 마을의 마음이 되어 떠돌았다 바람도 나무도 꽃도 승냥이도 송사리도 지도에 없는 마을을 알지 못했다 지도에 없는 마을에 사는 것들조차 지도에 없는 마을을 알지 못했다 잠깐 사이에 11월에 다녀갔다
그 끄트머리에 이르러 나는 한 여자를 만났다 지도에 선명하게 점 찍힌 해거름의 술집이었다 그녀는 나무뿌리 같은 머리카락을 땅에 박고서 그때 막 꽃을 피우고 있는 중이었는데 어쩐지 내가 좀 외로워 보였던지 처음 피어난 꽃 한 송이를 내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 당신은 이 나라 사람이 아니로군요. 깊은 겨울이 오기 전에 어서 날개를 갈아입어야 할 텐데요.
나는 그녀의 손이 이끄는 대로 오솔길이 되기도 하고 햇살에 기댄 돌담이 되기도 하고 꽃이 되기도 하였다 어떤 날은 별이 될 수도 있었는데 그녀의 눈 속에 잠시 몸을 맡기고 난 뒤였다 그런 날은 내가 몹시 아름다워서 지도에 없는 마을조차 잊을 지경이었다 그녀와 함께라면 지도 위에 발 묶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혼자 술집에 앉아 고민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녀 역시 어두워지면 꽃들을 데리고 잠들어야 했으므로 더 오랜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여기 별자리가 있어요. 이 별들이 당신에게 길을 데려다 줄 거에요. 머리카락을 땅에 박으며 그녀가 짧게 말했다 꽃들은 이미 시들어 있었고 그녀의 눈은 다른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제자리에 멈춰 선 그녀에게 뭔가 말하고 싶었지만 어떤 말도 더 이상 내 입을 지나칠 수 없었다 그녀의 꽃들이 한꺼번에 길을 따라 지도에 없는 마을 쪽으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지도에 없는 마을은 결국 혼자서 가야 하는 마을이었다 바람도 나무도 꽃도 승냥이도 송사리도 따를 수 없는 깊은 곳이었다
그리운 우체국
옛사랑 여기서 얼마나 먼지
술에 취하면 나는 문득 우체국 불빛이 그리워지고
선량한 등불에 기대어 엽서 한 장 쓰고 싶으다
내게로 왔던 모든 이별들 위에
깨끗한 우표 한 장 붙여주고 싶으다
지금은 내 오랜 신열의 손금 위에도
꽃이 피고 바람이 부는 시절
낮은 지붕들 위로 별이 지나고
길에서 늙은 나무들은 우편배달부처럼
다시 못 만날 구름들을 향해 잎사귀를 흔든다
흔들릴 때 스스로를 흔드는 것들은
비로소 얼마나 따사로운 틈새를 만드는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이별이 너무 흔해서
살아갈수록 내 가슴엔 강물이 깊어지고
돌아가야 할 시간은 철길 건너 세상의 변방에서
안개의 입자들처럼 몸을 허문다 옛사랑
추억 쪽에서 불어오는 노래의 흐린 풍경들 사이로
취한 내 눈시울조차 무게를 허문다 아아,
이제 그리운 것들은 모두 해가 지는 곳 어디쯤에서
그리운 제 별자리를 매달아두었으리라
차마 입술을 떠나지 못한 이름 하나 눈물겨워서
술에 취하면 나는 다시 우체국 불빛이 그리워지고
거기 서럽지 않은 등불에 기대어
엽서 한 장 사소하게 쓰고 싶으다
내게로 왔던 모든 이별들 위에
깨끗한 안부 한 잎 부쳐주고 싶으다
법칙
물방울 하나가 죽어서
허공에 흩어진다
물방울 하나가 죽어서
구름에 매달린다 물방울 하나가 죽어서
빗방울 하나로 몸을 바꾼다
빗방울 하나가 살아서
허공에 흩어진다
빗방울 하나가 살아서
잎사귀에 매달린다
빗방울 하나가 살아서
물방울 하나로 몸을 바꾼다
모였다 흩어지고
흩어졌다 모인다
사는 것도 죽는것도
한 몸
우주 안에서
도망갈 데가 없다
벌레처럼 울다
벌레들은 죽어서도 썩지 않는다
우는 것으로 생애를 다 살아버리는 벌레들은
몸 안의 모든 강들을 데려다 운다
그 강물 다 마르고 나면 비로소
썩어도 썩을 것 없는 바람과 몸을 바꾼다
나는 썩지 않기 위해 슬퍼하는 것이 아니다
살아서 남김없이 썩기 위해 슬퍼하는 것이다
풍금을 만나면 노래처럼 울고
꽃나무를 만나면 봄날처럼 울고
사랑을 만나면 젊은 오르페우스처럼
죽음까지 흘러가 우는 것이다
울어서 생애의 모든 강물 다 비우는 것이다
벌레처럼 울자 벌레처럼
울어서 마침내 화석이 되는 슬픔으로
물에 잠긴 한 세상을 다 건너자
더듬이 하나로 등불을 달고
어두워지는 강가에 선 내 등뼈에 흰 날개 돋는다
상처적 체질
나는 빈 들녘에 피어오르는 저녁연기
갈 길 가로막는 노을 따위에
흔히 다친다
내가 기억하는 노래
나를 불러 세우던 몇 번의 가을
내가 쓰러져 새벽까지 울던
한 세월 가파른 사랑 때문에 거듭 다치고
나를 버리고 간 강물들과
자라서는 한번 빠져 다시는 떠오르지 않던
서편 바다의 별빛들 때문에 깊이 다친다
상처는 내가 바라보는 세월
안팎에서 수많은 봄날을 이룩하지만 봄날,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꽃들이 세상에 왔다 가듯
내게도 부를 수 없는 상처의
이름은 늘 있다
저물고 저무는 하늘 근처에
보람 없이 왔다 가는 저녁놀처럼
내가 간직한 상처의 열망, 상처의 거듭된
폐허,
그런 것들에 내 일찍이
이름을 붙여주진 못하였다
그러나 나는 또 이름 없이
다친다
상처는 나의 체질
어떤 달콤한 절망으로도
나를 아주 쓰러뜨리지는 못하였으므로
내 저무는 상처의 꽃밭 위에 거듭 내리는
오, 저 찬란한 채찍
위독한 사랑의 찬가
아내는 사랑의 찬가를 듣고 나는 빈방에서
사랑 때문에 더 이상 사랑을 믿지 않게 된 한 여자의
짧았던 생애를 생각한다 그녀는 세상에 구원은 없다,라고 쓴
유서를 남긴 채 검은 커튼 아래서 죽었다 나는 술집에서
낮술에 취해 그녀의 부음을 들었다 아무런 죄도 없이
술잔에 머리를 묻은 채 울었고 그날 함박눈이었는지
새 떼들이었는지 광장에 가득 내리던 무엇인가에 살의를 느꼈었다
삶에서 빛을 꿈꾸었던 사람들에게 겨울은 위독하다
술 마시다 단 한 번 입술을 빌려주었던 대학 친구도
겨울에 죽었다 그녀는 프랑스 유학과 가난한 애인 사이에서 떠돌다
결국 오래 잠드는 쪽을 선택했다 하지만 오랜 잠이
그녀에게 어떤 빛을 데려다주었는지 대답해주지는 않았다
아내가 사랑의 찬가를 듣는 한낮이 나는 무덤 같고
삶에서 아무런 빛을 꿈꾼 적 없는데도 위독해진다
사랑에 찬가를 붙일 수 있는 사람은 깊이 사랑한 사람이 아닐 것
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내의 남편이 되면서 내 사랑은
쉽게 불륜이 되었지만 모든 사랑이 불륜이 되는 삶만큼
구원 없는 세상이 또 있을까 싶어 나는 무서워진다 검은 커튼
아래서 짧은 유서를 쓰던 그녀 역시 무섭지 않았을까
여긴 내가 사랑하기에 어울리지 않는 곳,이라고 썼던
친구 역시 무서웠을 것이다 무서워서
결국 뛰어내릴 수밖에 없는 삶을 건너가기 위해
그녀들은 얼마나 깊어진 절망으로 빛을 기다린 것일까
아내는 사랑의 찬가를 듣고 나는 빈방에서
겨울에 죽은 여자들의 생애를 생각한다 사랑 때문에
사랑을 버리는 일은 그녀들에게 생애의 모든 빛을 버리는 것이었고
모든 사랑이 불륜이 되어버린 나에게 겨울은 문득 위독한 빛으로
검은 커튼을 드리운다
|
첫댓글 시 감상 잘했어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