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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원문보기 글쓴이: 숲꽃향기
[이콘] 세폭 달린 성단 장식 그림(Triptychon). 중앙러시아.17세기.72 x 87cm (열려진 상태)
이 나무로 된 트리티콘 (Triptychon)을 열어 보면 중앙에 성모상이 나타나는데 바로 이런 양식의 성모상은 노프고로드 (Novgorod)도시를 수호하는 성상으로 애호되었으며 경배하는 성모의 직전에는 아기 예수의 모습이 보인다.
성모마리아가 쓰고 있는 보관(寶冠)은 은을 실제로 사용하여 진주와 다른 보석들을 박아 넣어 화려하게 세공하여 그림위에 부착시켰다. (Silberoklad). 이 중앙폭을 이루는 화면의 가장자리에는 왼쪽에 성 프로코피우스 (Prokopius), 그 아래에 잘 알 수 없는 러시아의 한 성자를, 오른쪽에는 모스크바에 살던 기독교의 바보를 자처(自處)한 성 바실리 (Basilius), 그 아래에는 신분을 잘 알 수 없는 러시아의 한 성자를 그려 넣었다. 양파 모양을 한 꼭대기 부분에는 신약 성서의 성 삼위일체로 오른쪽에 성부 왼쪽에 성자 그리스도 그 위에 성신을 상징하는 비둘기를 묘사했다.
왼쪽 날개판 정상부에 동정녀 마리아의 잉태를 알려준 천사장 가브리엘을, 그리고 오른쪽 날개판 정상부에는 마리아가 이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고 있는 장면이 보인다. 천사장 가브리엘의 아래에 있는 화면에는 그리스도의 지옥 순례를, 그 아래 화면에는 4명의 러시아 성인들, 테오도르(Theodor), 티론(Tiron), 신학자였던 요한(Johannes), 그리고 사도 베드로와 바울을 묘사하고 있다.
오른쪽 날개판의 중앙에는 요단강에서 세례받는 그리스도를, 그 아래에는 역시 4명의 러시아 성인들 : 요한 크리소스토모(Johannes Chrysostomos), 모스크바의 대주교였던 알렉세이(Alexij), 에집트의 마리아와 성녀 마트리오나(Matriona)를 그렸다.
세폭 달린 성단 장식 그림들 중에서 아주 희귀한 이 작품은 보존 상태가 훌륭하다. 이 그림에 부착된 진주와 보석이 박힌 보관(寶冠)은 그림과 동시대에 제작되었다. (유럽 聖畵(ICON)集 에서)
축일:12월 19일 성 아나스타시오 1세 ST. ANASTASIUS I Sant’ Anastasio I Papa 4th century in Rome, Italy (Papa dal 27/11/399 al 19/12/401) Canonized:Pre-Congregation Anastasio = risorto, dal greco = revived, from the Greek
막시무스의 아들로서, 로마에서 태어난 그는 399년 11월 27일에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의 재위 기간 중의 가장 큰 사건은 오리제네스의 단죄를 꼽을 수 있고, 아프리카 주교들에게 강권을 발휘하여 도나티즘을 반대하도록 한 일이다.
그리고 그는 개인적으로 뛰어난 그의 성덕과 청빈 정신으로 높은 명성을 얻었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그의 재위 기간중 일어났던 가장 큰 사건은 오리제네스를 단죄하고, 물질에도 신성이 깃들어 있다고 주장하는 부류들과 격렬하게 대항하며, 아프리카 주교들에게 강권을 발휘하여 도나티즘을 반대하게 한 일이다.
복음 낭독 때는 사제도 서 있어야 하고, 신체적 결함이 있는 사람은 사제가 될 수 없다고 규정하였다. 그는 401년 12월 19일 서거하여 로마에 있는 몬띠 근처 마르티노 성인 성당에 안장되었다.
도나티즘 4세기 카르타고 주교인 도나도의 이단설이다. 참된 교회는 거룩하고 무죄한 교회가 있는 곳에만 있기 때문에 모든 죄인은 교회로 부터 내쫒아야 하고, 죄인이 집행하는 성사는 다 무효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늘 논쟁을 벌여왔다. (우표로 보는 성인전에서)
*성 아우구스티노 축일:8월 28일.게시판1336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 도나투스파 ◆
도나투스(Donatus, 313~347)에 의해 제창된 북아프리카 교회의 이단사상.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303~305년) 때 교회 안팎에는 많은 배교자가 생겼다. 박해가 멎고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었을 때 이 배교의 문제가 대두되었다. 당시 배교한 주교 펠릭스는 체칠리아노(Caecilianus)를 서품한 3인의 주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이것이 말썽이 되어 순교자에 대한 공경과 신앙에 투철한 엄격주의자들인 70명의 주교들은 도나투스의 영향을 받아 카르타고의 주교로서 체칠리아노를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고 마요리노(Majorinus)를 새 주교로 뽑아 임명하였다. 그러나 로마 교회와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체칠리아노에게 호의를 보여 후자의 결정을 몇 차례에 걸친 시노두스를 통해 일축해 버렸다. 이 분쟁은 마요리노 사후 도나투스에 의해 계승되었다.
도나투스는 일종의 엄격주의자, 완벽주의자로 신앙에 대한 열성은 높이 평가받을 만하나 그의 지나친 완벽주의적 견해는 성사적 의미에 대한 신학적 문제를 야기시켰다. 즉 배교자나 열교(裂敎)인 이단자들에 의한 성사집행은 무효라는 것이다. 성사는 그 집행에 의해 은총이 주어지는 것[성사의 事效性, ex opere operato]이 아니고 집전자의 성성(聖性)과 정통성에 따라 성사의 유효 · 무효가 결정된다 [성사의 人效性, ex opere operantis]는 그의 주장은, 아우구스티노를 비롯한 후대 교부들에 의해 반박되었다.
따라서 이단자가 베푼 세례는 무효이기 때문에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나[이단자 세례논쟁] 교회는 성인(聖人)들만의 교회이어야 한다는 극히 제한적이고 엄격한 교리관은 모두 교회에 의해 반박 단죄되었다. 도나투스파는 5세기부터 영향력을 잃었으며 7세기경에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사효론 事效論
성사(聖事)의 은총은 그리스도의 행위인 성사적 예절에 내재하는 힘에 의하여 주어진다는 이론. 이는 성사의 유효성이 성사 집전자의 성덕(聖德)이나 의도에 의하여 영향을 받는지에 관한 문제이며, 영향을 받는다고 긍정하는 인효론(人效論)에 대립하여 주장되었다.
인효론 人效論 (가톨릭대사전에서)
◆ 오리제네스 ◆ 라틴어 Origenes
Origenes(185?∼254?). 알렉산드리아의 성서학자이며 주석가. 교부. 알렉산드리아에서 출생, 그리스도교 교육을 받았으며 202년의 박해 때 부친을 여의었다. 주교 데메트리우스(Demetrius)와의 충돌로 피신한 교사 글레멘스(Clemens)대신에 알렉산드리아 교리신학파의 지도자로 지명되었고 엄격한 금욕생활을 영위하였다. 종교적 열정에 사로잡혀 마태오 복음서 19장 12절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자신을 불구로 만들었다. 또한 이교철학자와의 호교적 논쟁에 대처하기 위해 신플라톤주의와 이교문학을 공부하였다. 215년에 이어 230년 팔레스티나의 재방문 때 그 곳 주교들에 의해 서품받은 문제로 알렉산드리아에서 추방되어 231년 체사레아(Caesarea)에 정착, 그 곳에 유명한 학파를 형성하였다. 250년 데치우스(Decius)의 박해로 고문받았으며 끝내 사망하였다. 성서주석서로는 ≪핵사플라≫(Hexapla)가 유명하며 그 밖에 그의 성서주석은 구약의 거의 전부와 4복음서들을 망라하고 있다. 신학서는 ≪원리에 대하여≫(De Principiis)가 주목되며 금욕적 저서 ≪순교에의 권고≫와 ≪기도에 대하여≫가 고대에 널리 읽혔다. 마르치온설을 반대한 그의 교리는 완전히 초월적인 일치에 대한 믿음에서 출발하였으나 철학적 사색은 가끔 매우 대담한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에 아직까지 그의 정통성은 가톨릭 교회로부터 다소 의심되고 있다. (가톨릭대사전에서)
오리제네스주의에 대한 반론은 3세기말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인 페트로스(Petros)와 올림포스의 메토디오스(Methodios) 등이 ‘영혼의 선재’와 “죽을 육신과 부활한 육신이 동일하지 않다”는 오리제네스의 설에 대해 공격하고 나섰고, 이에 대하여 체사레아의 팜필로스(Pamphilos)와 에우세비오(Eusebius)가 반박하면서 논쟁은 불이 붙기 시작하였다. 또한 니체아 공의회(325년)에서 ‘동일실체(同一實體, consubstantiality)에 관한 교리’가 확립되면서 오리제네스가 주장한 삼위일체설이 정통성이 논의의 대상이 되기 시작하였다. 이럴 즈음 에피파니우스(Epiphanius)가 그의 저서 ≪전체이단통박서≫에서 오리제네스를 최대의 이단으로 규정함으로써 이른바 제1차 오리제네스주의 논쟁이 일어났다. 이 논쟁은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테오필로(Theophilus)의 중재에 의해 양자가 화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다가 루피노(Rufinus)가 예로니모(Hieronimus)를 오리제네스주의적 경향을 지닌 인물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재연되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400년 알렉산드리아 교회회의가 개최되었고, 이 회의는 오리제네스를 이단이라 선고하였다. 교황 아나스타시오 1세를 비롯한 동방의 많은 주교들이 이 결정에 동의하였고, 오리제네스주의자들이 콘스탄티노플의 요한 크리소스토모에게 망명함으로써 논쟁은 끝났다.
오리제네스주의는 그 후 한동안 자취를 감췄다가 6세기경에 예루살렘 부근의 사바스수도원을 중심으로 다시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동로마제국의 여러 지방으로 확산되었다. 이에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메나스(Menas)를 중심으로 한 반(反)오리제네스파들은 오리제네스주의를 규탄하고 나섰고,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칙령 <메나스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하여 오리제네스주의자들을 탄압할 수 있는 법적근거를 마련하였다. 553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반오리제네스파의 주장을 반영하여 디두모스까지 이단으로 선고하였으며, 이에 찬성하지 않았던 아빌라의 알렉산데르(Alexander)를 추방하기도 하였다. 이로써 2차에 걸친 오리제네스주의 논쟁은 막을 내렸지만 오리제네스주의는 막시모(Maximus Confessor)를 비롯한 신학자들에게 계속 남아 있었다. [참고문헌] K. Holl, Gesammelte Aufsatze, II, s. 310-35 / F. Die Kampf, Die origenistischen Streitigkeiten im sechsten Jahrhundert und das funfte allgemeine Konzil, 1899. (가톨릭대사전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