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누군들 만만하랴(경기도를 지나 충청북도에 들어서다)
조선통신사 걷기행사 4일째, 건강나라 찜질방에서 아침 목욕을 하고 8시에 아람원 식당에서 황태국 백반으로 조반을 든 후 9시에 어제 마무리도착지점인 죽주산성 입구에서 오늘 목적지인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사무소를 향하여 '걷자, 걷자, 걷자'를 외치며 출발하였다. 사흘간 함께 걸었던 정하완 선생이 서울에서 내려와 합류하고.
2km쯤 걸어서 소로길로 접어들려하니 구제역 때문에 통행금지라고 적혀 있다. 공식적으로는 구제역에 해제되었다고 하는데 아직 통행제한이 풀리지 않은 듯. 안성지역이 축산업 중심지방인 것도 현지를 돌아보며 알게되었다. 통행제한구역을 우회하니 예정보다 훨씬 먼 거리를 걷게 되었고.
한 시간쯤 걸으니 죽산성지가 눈에 띤다. 1866년 병인박해 때 25명이 치명순교한 것을 비롯하여 더 많은 무명인사들이 생명바쳐 신앙을 지킨 거룩한 희생을 기리는 것이리라. 비단 순교자뿐만아니라 죽산에서는 고려 때 몽고 침입과 조선의 임진왜란 때 죽주산성에서 적을 물리친 곳이기도 하여 나라위해 몸 바친 넋들이 잠든 땅이기도 하여라. 10시 반에 휴식을 취한 '두부와 순대' 음식점 뒤편에는 청풍 곽씨의 충효비가 세워져 있어서 각기 본분에 충실한 선남선녀들이 우리 사는 곳곳에 묻혀 있음을 조선통신사 순례길에서 새삼스럽게 깨치게 된다. 이 행사에 참여한 이들도 모두 한 몫을 감당하는 일꾼들이 아닌가?
12시경에 안성시계를 벗어나 이천시에 접어들었다. 한 시간 쯤 생극면 방향으로 진행하니 어느새 충청북도 땅에 접어든다. 호산 4거리 큰 길에는 음성군 금왕읍에서 내건 '환영, 조선통신사 옛길 한일우정걷기'라고 쓴 플래카드가 일행을 반기고.
네시간에 17km를 걸어 점심장소인 들밥집에 이르니 오후 1시, 우렁된장국으로 점심을 들고 오후 2시에 다시 오후 걷기를 시작하였다. 남은 거리는 약 6km, 3km쯤 걸어 잠시 휴식을 취한 곳은 큰바위얼굴 조각공원이 있는 곳, 나는 나다니엘 호손이 쓴 큰바위얼굴이라는 소설을 매우 좋아하는데 같은 이름의 조각공원에서 휴식을 취하니 한결 마음이 포근하다. 우리 모두 큰바위얼굴처럼 넉넉하고 신실한 인품을 갈고 닦으면 좋으리라. 내 고향에서 바라보는 애기업은 모형의 큰바위를 볼 때마다 큰바위얼굴을 되새기는데 열흘 전 성묘행사 때도 그 바위를 보며 큰바위얼굴을 떠올린 터.
큰바위얼굴 조각공원에서 고개길을 하나 넘으니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안에 자리잡은 생극면 소재지가 눈에 들어온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쫓아가니 잘 정비된 하천이 나온다. 하천 제방따라 십리벚꽃길이 펼쳐지고. 보름쯤 지나면 아름다운 벚꽃이 만개하리라.
면소재지를 지나 면사무소에 도착하니 면장을 비롯한 직원들이 청사 앞에 나와서 일행을 따뜻하게 맞이한다. 면 청사에는 조선통신사 옛길 한일우정걷기 환영 플래카드가 걸려 있고. 직원들이 비타엠을 한 병씩 건네며 피곤함을 풀라는 마음 씀씀이가 고맙고.
허금 면장은 환영인사말을 통하여 조선통신사가 한일우호와 선린우호에 큰 몫을 감당한 것을 새로 알게 되었다며 지진으로 인한 대재앙과 독도영유권을 둘러싼 교과서 표기로 애증이 교차하는 한일간의 가깝고도 먼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는 시의적절한 행사에 경의를 표하며 성공적인 일정이 되기를 바란다는 뜻을 간결하면서도 조리 있게 표현하여 감명을 받았다. 어느 누군들 만만하지 않은 것, 소신과 경륜을 펼치는 공복으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숙소는 면소재지에서 3km쯤 떨어진 곳에 있는 서울 파크, 음성군청에서 제공해 준 버스 편으로 숙소에 도착하여 여장을 풀고 피곤한 몸을 따뜻한 욕조에 담갔다. 오늘의 걷기코스는 나흘간의 걷기 중 가장 짧은 23km, 내일 38km를 걸을 계획이라니 몸을 추스르고 체력을 비축하자.
첫날부터 일행 중 여성분들이 노래를 부르며 더 흥겹게 걷는 모습이 아름답다. 오늘은 엔요 교코씨와 김신경씨가 나란히 걸으며 돌아와요 부산항, 만남, 고향의 봄 등을 열창하고 저녁식사 때는 여러 명이 오카리나에 맞춰 일본가용와 한국가요를 번갈아 부르기도 하였다.
발가락이 아파서 걷기에 불편한데도 꾸준히 걸었다. 어제 복통으로 고생한 강정춘씨도 씩씩하게 걷고. 숙소에 도착하여서는 일본인 여러 분이 발이 아프다며 아내에게 치료를 요청하기도. 나흘간 쉬지 않고 강행군을 하고나니 모두들 힘이 들고 나른하기도 하다.
나흘간 함께 걸은 정하완 씨는 오늘까지 참여하고 일본에서 새로 다께노 노보루씨가 저녁부터 합류하였다. 저녁식사는 숙소에서 100여m 떨어진 곳에 있는 놀부네 밥집, 메뉴는 검은콩삼계탕에 맥주를 곁들였다.
오늘의 출발과 도착의 준비운동과 몸 풀기 인도는 77세의 시마무라 도요카시 씨, 동갑의 부부가 함께 참여한 노익장의 기개가 대단하다. 그 역시 만만한 분이 아니로다. 79세 최고령인 스즈키 기요코 여사는 젊은이보다 더 꾸준히 걷고. 나흘간 100km 넘게 씩씩하게 걸어온 일행 모두에게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