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를 미치도록 하고 싶었다. 가난한 농부의 자식은 공부를 원 없이 한번 해보고 싶었다. 7남매의 장남, 집안의 대들보 구실을 했던 그는 결국 중학교 졸업이라는 꼬리표 밖에 달지 못했다. 고등학교를 가지 못하고 공장을 전전하다가 마침 깨달은 바 있어 절에 입산했다. 틈틈이 읽은 책들은 자신에게 집착하지 말고 버리라 했다. 하나하나 연을 끊고, 욕심에서 자유로워지니 날아갈 것 같았다.
하지만, 얽혀있었던 세속의 연은 그를 다시 붙잡았다. 어머니의 병환으로 다시 고향으로. 그는 어머니의 간절한 말에 붙들려 지금까지 고향에 있다. 어찌 보면 그의 소원인 원 없이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가졌는지도 모르겠다. 도서관을 삶의 터전으로 얻었으니 말이다. 행복하다고 했다. 보고 싶은 책 맘껏 볼 수 있고, 배우고 싶은 것 원 없이 배울 수 있으니 삶에 만족한다고 했다.
여전히 배우면 배울수록 훌쩍 떠나고 싶은 생각 간절하지만, 이젠 자신을 정점으로 하는 가족으로 단단히 얼크러져 있었다. 그는 이미 속세에서 무수한 사람들과 부닥치며 삶의 구원을 얻으려고 마음 먹었는지도 모른다.
언제나 옥천도서관에 가면 푸근한 웃음으로 맞아주는 도서관 지킴이 아저씨, 시인과 수필가로 등단하고, 서예를 열심히 배우는 옥천 문인협회 간사, 정지용 시인의 후예답게 인터넷에 옥천을 사랑하는 문인들을 모아놓은 ‘향수 옥천’(http://cafe.daum.net/perfumeok)의 운영자, 스스로를 땡초 법우라 칭하는 조숙제(49·옥천읍 삼청리)씨를 만나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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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천도서관 앞에서 <사진: 김태정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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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년 공직생활 그는 도서관에 근무하는 교육청 소속 기능 8급이다. 1980년, 공고를 내도 아무도 응시하지 않았던 안내중학교 기능 9급으로 들어가서 지금까지 27년 공직생활이다. 1958년 3월12일(음력) 안내면 인포리 관골 출생, 안내초 47회, 안내중 20회. 그의 집안은 가난하게 살았고, 그만큼 어렵게 자랐다. 지게 지고 산으로 가서 나무 해오고, 들에 나가 뙤약볕 맞으며 일손 돕는 것이 학창시절의 중요한 일과였다. 그래서 원 없이 공부를 하고 싶었다. 안내중학교 3학년, 그는 대전고등학교에 응시했지만, 아쉽게 떨어지고 말았다. 재수해서 다시 들어간 친구처럼 공부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당시 대전 도마동에 위치한 대전피혁에서 야구글러브를 힘겹게 꿰매고 있었다. 그의 나이 17살 때였다. 혼자 자취하면서 공장 노동자를 전전했다. 2년 남짓 대전 피혁서 일하다가 정림동에 있는 동방농약으로 자리를 옮겨 1년 동안 노동자 생활을 했다. 3년 동안 고등학교 시절을 공장에서 보낸 것이다. 공장에서 고교 생활을 보냈다면, 다음에 펼쳐져야 할 대학 생활은 절에서 보냈다. 공장에서 틈틈이 읽은 법정스님의 책들은 자신의 잠자는 의식을 불러 일으켜 절로 향하게 했다. 예산 수덕사, 그는 행자로 입산을 했다. 2년 동안 수련을 열심히 하고 있던 중 어머니에게서 연락이 왔다. 어머니가 위암말기였다는 청천 벽력같은 소식이었다.
◆다시 고향으로 그는 황급히 고향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다시 절에 돌아가지 못했다. 고향에 있으라는 어머니의 유언을 받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안내중 기능직 직원으로 들어간 그는 학교 숙소에서 머물면서 틈틈이 비는 시간 책을 읽었다. 그리고 조금씩 쓰기 시작했다. 81년 안남면 청정리 출신 처자와 결혼도 했다. 안내중학교에서 13년 가까이 근무하다가 이원중학교, 도서관, 죽향초, 군서초를 거쳤다. 군서초에서 그는 인생의 큰 고비를 겪는다. 자칫 생을 달리 할 뻔한 상황에서 그를 오롯이 지켜준 가족과 삶에 대한 의지를 심어준 책으로 인해 그는 용기를 얻는다.
◆국가유공자가 된 군서초 사건 94년 군서초 직원으로 있던 당시 군서초는 새 건물을 신축하느라 이사를 6개월 동안 했다. 하루 종일 무거운 물건을 나르고, 마지막 뒤처리까지 하는 것은 언제나 그의 몫이었다. 그러다가 허리에 무리가 왔다. 허리의 물렁뼈가 튀어나와 허리디스크가 생긴 것이다. 바로 충남대학교 병원으로 후송돼 10시간 동안 수술을 했다. 생사의 기로에서 그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수술이 끝나고 6개월 동안 집에서 옴짝달싹 못했다. 아내가 대소변을 다 받아줬고, 그는 책을 읽으면서 6개월을 악착같이 버티었다. 그리고 영영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았던 그는 다시 일어나 복직했다. 그는 그 사건 이후로 국가유공자가 되었다. 공직생활을 수행하다가 다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도 그 후유증으로 이틀에 한번 꼴로 병원에 가서 물리치료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 일 이후로 그는 도서관 근무를 자원했다. 힘든 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교육청의 배려로 그는 도서관에 서 근무하게 됐고, 평생소원을 이루게 됐다. “힘들었지요. 당시에는 진짜 죽는 줄 알았어요. 영영 일도 못하고 집에 누워 생을 마감하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어요. 그 때 가족과 책들이 나를 지켜줬어요. 나에게 많은 힘을 주었지요.”
◆일은 고되지만, 책이 좋아 도서관에서 일하는 것이 쉬워 보일 줄 모르지만, 그는 정신없이 바쁘다. 아침 7시에 항시 출근하고, 이틀에 한 번 꼴로 밤 10시까지 근무를 해야 한다. 그래도 행복하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오세영 시인과 도종환 시인, 법정 스님과 책으로 만날 수 있고,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도종환 시인의 축복이란 시를 되뇌이며 어려운 시기를 넘겨왔다. 그가 한 구절을 갑자기 되뇌인다. “이른 봄에 내 곁에 와 피는/ 봄꽃만 축복이 아니다/ 내게 오는 건 다 축복이었다/ 고통도 아픔도 축복이었다/ 뼈저리게 외롭고 가난하던 어린 날도/ 내 발을 붙들고 떨어지지 않던/ 스무살 무렵의 진흙덩이 같던 절망도 생각해보니 축복이었다. … 육신에 병이 조금 들었다고 어이 불행이라 말하랴/ 내게 오는 건 통증조차도 축복이다.(중략)” 그는 시를 썼고, 수필을 쓰며 인생의 외로움을 달랬고, 서예를 5년째 배우면서 정신을 가다듬었다. 또 컴퓨터를 하면서 카페를 만들고 주변 사람들과 소통하기 시작했다.
◆시인, 수필가로 연이어 등단 2007년 봄호 백두산 문학과 한비문학에 시와 수필로 등단했다. 그리고 현재, 옥천문인협회 간사 일을 맡으며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시인이니 수필가니 가당찮은 말씀이지요. 한낱 책을 읽고 도서관을 지키는 도서관 지킴이에 불과한 걸요.” 겸손이 몸에 배어있는 그는 스스로를 칭하는 별칭도 서예 스승이었던 평거 선생이 지어준 ‘법우’가 너무 부담스러워 앞에 땡초라는 것을 붙였다. “아직도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시골 생활을 하려고 옥천읍 삼청리에 마련한 조그만 집도, 장성한 두 아들과 여전히 사려 깊은 아내도, 지금까지 많이 인연을 맺은 선생님들과 이 도서관 업무도 나에겐 너무 행복이지요.” 하지만, 그는 여전히 예산 수덕사에서 행자 생활을 했던 당시가 많이 그립다고 했다. “혼자였어요. 스스로를 깊게 성찰하고, 자연과 교감하면서 시간가는 줄 몰랐어요. 가진 것 없으니까 걱정도 없었구요. 다시 태어나면 스님이 되고 싶어요. 세상을 벗 삼아 유유히 떠다니는 그런 스님 말이지요.” 정년이 7년 남은 그는 나머지 주어진 임무를 다하면, 조그만 논과 밭을 가는 농부가 되고 싶단다. 흙으로 고향으로 되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가슴으로 부르는 노래
조 숙 제
사람과 사람을 연결시키는 고리는 말이다. 말과 말이 부딪치는 열기로 사바세계는 오늘도 주야장천 식을 줄 모르고 타오르고 있다. 너와 내가 가슴이 막혀 답답할 땐 허공을 향하여 노래를 부르자. 화장실 청소를 하자. 부딪치는 메아리가 사무칠수록 힘껏 닦고 닦아 보자. 어찌 고통 없는 삶이 있으랴. 접고 접어 또다시 펼치면 시련은 희망의 새순을 부드럽게 내민다. 상처 없는 훈장은 쉬이 바랜다. 빛은 희망을 따라 흐르는 물줄기. 육신의 부산물을 헐고 안으로 안으로 밀려드는 소리에 귀 기울이면 넉넉하게 흐르는 빛나는 광맥. 비우고 비우는 인고(忍苦) 속에 정갈하게 들리는 리듬.
가슴이 답답할 땐 노래를 부르자. 망아지 어미 찾는 음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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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맙습니다. .. 회장님이 이렇게 이 미미한 땡초를 위해 배려해 주신 은혜 , 가일층 노력 분발해서 보답드리겠습니다...감사합니다.
~~법우님의 인생이야 말로 생불의 인생이구요 ~지나온 구비구비 삶이 존경 스럽습니다 .앞으로도 더욱 건강하시고 이루고자 하시는일 마음먹은대로 ..이루어지길 빕니다.
ㅎㅎㅎ 감사합니다. 제가 생불이면, 국장님은 비로자나불 이십니다....부처님의 부처님이신 비로자나불....ㅎㅎㅎ 감사합니다
제 카페인 시를 훔치는 밤에도 이 기사를 홍보 하고 싶은데..괜찮겠지요? 땡초님. 항상 뭔가 다른 분위기를 갖고 계신분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항상 건강하세요.
고맙습니다. 제 것은 제 것이 아니라 , 울 향수옥천님들 것입니다. 마음대로 수용하십시요...ㅎㅎㅎ 어려운 공부하시느라 고생많으셨습니다...그리고 잘 다녀 오십시요....중국에,
법우님의 어려웠던 청소년기가 생각의 깊이를 만들준 시기가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그런날이 있었기에 인생을 남다르게 볼수있는 혜안이 있으시고 그러시기에 앞으로도 주옥같은 많은 글들이 탄생될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천둥 번개가 지난뒤에 식물이 더 건강한것처럼요.
ㅎㅎㅎ 감사합니다. 더욱더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으로 거듭 거듭 태어나고져 노력하겠습니다..원장님의 성원이 천군만마보다 힘을 더욱더 보태는 것 같군요...늘 감사드립니다.
땡초법우님의 건강과 행복 하시길.....................
감사합니다. .,.늘 찾아 주시고 격려 해 주l는 님께서도, 늘 건강하시고 부자되십시요...감사합니다.
기사를 접하면서...시려 오더라구요. 당시의 사정을 같이 경험한 저의 족적을 다시 살펴보는 그런 기회가 되었답니다. 오늘도 좋은 시간 많이 만드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