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한국축구대표팀은 1일 저녁 서울 상암 월드컵경기장에서 앙골라와의 평가전에서 박주영 선수의 결승골에 힘입어 1대 0으로 승리했다. 붉은 악마 응원단이 대형 태극기를 펼쳐 들고 있다. | | ⓒ 오마이뉴스 권우성 | | 4년전 파시즘이니 쇼비니즘이니 등을 염려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주장을 이내 접었거나 아니면 매우 조심스레, 돌려서, 살살 이야기했다. 대중의 잠재력과 가능성도 간파하지 못한, 오만한 지식인의 결벽증이라는 집중포화를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지나간 한여름 밤의 추억이겠지"하며 잊었다. 오산이었다. 개최국도 아니고 대회 개막도 석달 넘게 남은 지금, 대한민국에 월드컵이라는 유령이 다시 찾아왔다. 그동안 무엇을 먹었는지 더욱 커지고 힘도 세졌으며 그 광폭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때는 좋게 말해 우리를 '통합'시키고선 예의를 갖춰가며 단물을 빨아먹었다. 그래서 우린 오랜만에 하나됨을 느꼈고 어깨동무하며 즐거워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사방에 싸움판이다. 월드컵은 우리 사회를 떠돌며, 우리를 쪼개고 갈라놓고 있다.
크게 보아 KTF와 SKT(알파벳 순으로)가 이끄는 양대 세력의 격돌이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추잡하다. 우선 양 통신사는 서로 자기가 '원조'라고 우기는 낯뜨거운 광고를 시리즈로 내보내고 있다.
이런 가운데 SKT와 손잡은 윤도현밴드(이하 윤밴)는 '오 필승 코리아'라는 응원가를 놓고 KTF와 한편이 된 붉은악마와 분쟁을 벌이더니 급기야 윤밴은 록버전 애국가를, 붉은 악마는 새 응원가 '레즈 고 투게더'를 내놓곤 서로 자기네 응원가가 '적자'라고 우기고 있다.
3월 1일 상암경기장의 분열
한참 윤밴을 '씹었던' 붉은 악마는 지난달 27일 제대로 한방 먹었다. 서울시가 SKT컨소시엄에게 시청 앞 광장 사용권을 주는 바람에 시청 앞에 설 자리를 잃은 것이다. SKT, 그리고 서울시장도 나서서 붉은악마의 시청 앞 광장 응원을 배려하겠다는 제의에 단호하게 '노(No)'라고 선언한 붉은악마는 이후 대회전을 준비하며 전의를 불태운다.
사흘 후(3월 1일) 대 앙골라전에서 붉은악마의 상대는 SKT의 모기업 SK였다. 정확히 한 달 전, 부천SK가 제주도로 연고지 이전을 발표하면서 부천 서포터즈들에게 아무런 언질을 주지 않은 게 딱 걸렸다. 이들은 연고지 이전 반대를 내세워 검은 옷에 근조를 표시하고 경기 내내 SK 비난구호를 외쳤다.
이는 상암경기장의 분할을 가져왔다. "대∼한민국"을 외치는 관중과 SK를 야유하는 붉은악마로 나뉘더니, 관중이 시작한 파도타기를 붉은악마가 끊어 버리고, 급기야 대한민국을 외치는 관중에게 붉은악마가 폭언과 협박을 하는,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또 이날의 '사건'은 경기장 밖의 싸움을 불러왔다.
기존 SK 연고지인 부천과 새로 이전하기로 한 제주도 사람들이 온라인에서 싸움이 붙어버렸다. 제주도민들이 온라인 싸움에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부천과 붉은악마가 한편이 되어서인지 제주도민이 밀리는 양상이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서로 지역을 헐뜯는 통에 한국에는 새로운 지역대결 구도가 탄생하게 되었다.
슬픈 코미디에 또다른 등장인물이 있다. 월드컵에 '미쳐버린' 지상파 방송 3사가 시청자 권리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똑같은 경기를 동시중계하는 당돌함을 보인 것이다. 그들은 '시청률 탐욕'에 월드컵이라는 가면을 씌워 애국의 길이 바로 축구에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 날이 어떤 날? 바로 삼일절! 삼일절 특집 프로그램은 온데 간데 없고 방송 3사의 프로그램은 하루 종일 월드컵 관련 특집 프로그램을 틀어댔다. 염치도 없다. 모두가 미쳐버렸다.
배고팠던 시절, 순박했던 우리 축구
| | ▲ 대한민국과 앙골라의 평가전이 열린 1일 시민들은 SKT 등이 후원한 서울 시청앞 광장 응원행사와 붉은악마·KTF가 마련한 상암 월드컵 운동장 응원행사로 분열된 채 응원을 벌였다. 사진은 서울시청 앞 광장에 모인 시민들이 거리응원전을 펼치고 있는 모습.
| | ⓒ 오마이뉴스 남소연 | | | | ▲ 붉은악마 응원단은 축구대표팀의 평가전이 열리는 1일 저녁 서울 상암 월드컵경기장 앞에서 SK의 프로축구단 연고 이전에 항의하며 항의시위를 벌였다. | | ⓒ 오마이뉴스 권우성 | | 원래 축구는 열정적이면서도 순진했고, 모두가 함께 했다. 필자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70년대, 축구를 같이 하던 친구 중엔 고기에 쏘시지 반찬 싸오는 아이도 있었고, 김치밖에 없는 도시락을 말없이 먹던 아이도 있었다. 어렸지만 어렴풋 느끼던 우리간의 차이, 적어도 축구를 할 때는 없었다.
홉스봄(영국 역사학자)은 "축구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문화양식 중 가장 대중적"이라고 했다. 사회가 아무리 파편화되고 양극화될 지라도 온 세계가 열광하는 게 바로 축구다. 야구나 농구가 아무리 인기 있고 돈이 넘쳐나도 축구에 비할 수 없다. 비틀즈가 "예수보다 더 유명하다"고 스스로 떠들어도 무하마드 알리의 전지구적 인기를 따라갈 수 없었던 것처럼.
배고팠지만 순박했던 시절, 축구는 국기였다. 70년대 비록 이웃의 삼류 국가대표팀을 불러 우리 안방에서 두들겨 패던 삼류 대회였지만, '박스컵'은 우리에게 당시 몇 안되는 쾌감과 볼거리를 제공했다.
"우리들은 대한건아, 늠름하고 용감하다, 기른 힘과 닦은 기술, 최후까지 떨쳐보세, 조국의 영광 안고 온 세계에 내닫는다, 이기자♬∼ 이기자♬∼ 이겨야 한다…."
우리는 박스컵 대회 기간 '이기자 대한건아'를 합창하고, 텔레비전에 등장하는 선수들의 사진을 바라보면서 한국 국가대표팀의 승리를 간절히 소망했다. 흑백화면 구석의 득점 상황엔 '대한민국'이 아닌 '한국'이었던 시절, 변변한 응원가도 구호도 없었고 집어던질 휴지도 없었지만, 우리는 대표팀이 골을 넣을 때 열광했고 반대로 골을 먹으면 땅을 쳤다.
축구 4강 → 경제 4강으로 연결시키다
사실 축구는 국가가 지원했다. 세계에 내세울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던 시절, 연이은 독재정권은 축구와 올림픽, 프로권투를 지원해 나라의 이름을 알리고 국민으로 하여금 고된 세상사를 잊게 했다. 교과서적이라 할 만큼 정치적으로도 잘 이용했다.
그러나 이같은 거대 스포츠이벤트는 왜곡된 국가주의를 불러왔다. 마이클 브린(전 타임스 서울·평양 주재기자)은 <한국인을 말한다>에서 "88올림픽은 나치올림픽보다도 더 심했다"고 했다. 국가는 국민의 희생과 봉사를 강요했고, 당시 질문을 던질 능력을 상실했던 우리는 '한국이 후진국이 아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돌격 앞으로' 정신으로 해치웠다.
2002월드컵 때도 매한가지였다. 어찌 보면 더 심했다. 사실 별 것도 아닌 공차기(?)를 국가간, 민족간의 '운명을 건' 대결로 포장해 국가는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며 국민을 훈육했다. 심지어 '한발 앞으로 다가서'라며 화장실까지 따라 들어왔다.
4강까지 오르자 월드컵은 우리만의 잔치가 돼버렸다. 온 국민의 '붉은악마화'는 섬뜩했고, 국수적이었다. 그래서 이어령 교수가 "'닫힌 우리'의 모습이었다"고 꼬집었고, 한 외국 언론에서는 "월드컵에 월드는 없고 코리아만 있었다"고 비아냥거렸다.
로버트 팩스턴(미국 역사학자)은 <파시즘>에서 "파시즘은 국민들에게 거대한 집단적 창조 행위에 참여하고 있다는 흥분을 육감적으로 경험하게 해준다"고 쓰고 있다. 그 책에는 1936년 베를린올림픽 경기장에 입장하는 히틀러에게 경례하는 군중의 모습을 담고 있는 사진이 있는데, 흑백이지만 너무나도 익숙했다. 아니, 똑같았다. 기립한 수만 관중, 앞으로 쭉 뻗은 팔들. 한 팔과 양팔의 차이만 빼고 말이다.
월드컵이 끝나고 그 기억을 어떤 형태의 유산으로 간직할 것인가를 두고 보이지 않는 암투가 있었다. 상당수는 월드컵의 경험에서 대중의 주체성과 역동성, 자발적 참여를 중시하며 이들의 문화적 창조력을 되살리고자 했다. 그러나 자본과 언론 등 기득권 집단은 기억에 희미해져가던 '우리는 할 수 있다'를 다시 내세워 프로파간다(대중 선동)에 나섰다.
이들은 2006년 독일월드컵이 희미해지던 '국가'와 '애국'을 다시 불러다주니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했다. 국기에 대한 맹세, 국민교육헌장, 민방공 훈련, 그리고 오후 6시 온 국민을 동시에 '차렷'시키던 국?하강식이 사라진 상황에서 월드컵이 국가를 다시 데리고 들어오니 눈물겨웠을 것이다.
사실 이들은 젊은이들이 태극기를 아무렇게나 걸치고 몰려다니면서 괴성을 지르고 경적을 울려대는 것이 못마땅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광풍을 되돌릴 수 없다고 판단하는 순간 진로를 수정했다. 그들은 응원 뒤 깨끗이 청소하고, 애국가도 4절까지 부르는 젊은이들에게 우리의 새로운 미래라고 호들갑을 떨며 찬양하고, 이들의 등을 두드리며 이제 다시 나아가자고 다독였다.
어디로? 경제 4강으로. 축구 4강을 경제 4강으로 연결시킨 것이다. 참고로, 3000만명 이상이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브라질은 '월드컵 5회 우승'에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2006년, 또다시 월드컵의 블랙홀에 빠질 것인가
| | ▲ SK 연고지인 부천과 새로 이전하기로 한 제주도 사람들이 온라인에서 싸움이 붙어버렸다. 제주도민들이 온라인 싸움에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성남과 붉은악마가 한편이 되어서인지 제주도민이 밀리는 양상이다. | | | | 축구는 축구 그 이상의 것이고 월드컵은 세계 최고의 이벤트다. 그러나 유럽이나 남미에서는 자국 리그의 축구, 그들 지역팀의 축구는 월드컵만큼 사랑받는다. 평소엔 축구에 관심도 없다가 유독 월드컵 때만 일사분란하게 광분하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축구든, 농구든, 혹은 유럽이든, 미국이든, 일본이든, 온 국민이 '하나'돼 응원하길 강요당하는 경우도 없고, 관중들이 붉은악마식의 군사주의적 응원을 하면서 국가 이름을 외쳐대는 나라도 없다. 세계에서도 유례 없는, 동원과 통제에 의한 응원이다. 그 비근한 예는 평양에서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또 자본과 언론이 달려들어 서로 "응원을 주관하겠다"고 싸우는 경우도 보지 못했고, 정부(또는 도시)가 이들간의 싸움을 붙이고는 한쪽 재벌의 손을 들어 '너희만 해라'며 광장 독점권을 주는 경우도 내 기억엔 없다. 이런 진흙탕 싸움판에 응원단과 가수가 끼여드는 것이나 3개 지상파방송이 동시에 같은 경기를 중계하는 것은 더더욱 그렇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은 우리를 하나로 만들었지만, 2006년 독일 월드컵은 우리를 갈라놓기 시작했다. 셀 수도 없는 사람들이 서로를 비난하고 저주하는 가운데 이제 축구는 옛날의 그 축구가 아닌 괴물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또 다시 블랙홀로 빨려 들어갈 것인가.
2002년 당시 우리가 월드컵에 빨려들어간 사이 한국에서는 이런 일이 벌어졌다. 단병호 민주노총 위원장 구속, 병원노조 파업, 외국인 노동자들의 인권투쟁, 철거당한 노점상과 철거민의 시위, 역대 최저 투표율(48.9%)을 기록한 6·13 지방선거, 서해교전 사태와 전사한 해군 병사들에 대한 거국적 냉담함, 미군기지 고압선에 감전돼 사지가 잘려 숨진 전동록씨, 그리고 국민들이 처음엔 무관심했던 효순·미선의 죽음 등등.
그 블랙홀에서 빠져 나와 이번엔 바짝 정신 차리고 단단히 붙들어 맬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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