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하나님을 예배하는 존재로 창조하였습니다. 이사야 43:7절을 보면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살아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즉,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5:1~3절을 보면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출애굽기 5:3절을 보면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은즉 우리가 광야로 사흘 길쯤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가도록 허락하소서”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출애굽의 목적이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함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이 우리 가운데 내주하심으로 충만하게 하심의 목적도 예배하기 위함입니다. 에베소서 5:18~21절을 보면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창조의 목적도 구원의 목적도 그리고 성령 충만함의 목적도 같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배할 때 가장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배할 때 가장 영광 받으십니다. 우리가 구원의 감격과 기쁨 가운데 충만할 때, 우리가 성령의 부어 주심과 충만함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할 수 있습니다. 억지와 강요가 아닌, 의무와 수단이 아닌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36절을 보면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식사의 자리에 초대합니다. 그는 시몬이라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37절을 보면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라고 말씀합니다. 이 여인이 요한복음 12장의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마리아가 아닙니다. 그 사건과는 별개의 또 다른 사건입니다.
이 여인이 구체적으로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이 여인이 죄를 지은 것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가벼운 죄는 아닌 것 같습니다.
38절을 보면 여인은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었습니다. 누가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할 수 있습니까? 자신이 얼마나 크게 용서받은 죄인인지, 얼마나 엄청난 사랑을 받은 죄인인지를 감격할 때마다 우리는 그 무엇에도 방해받지 않고 예배드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저 죄를 지은 여인이 자신을 만지는데 예수님은 그것도 모른다”라고 핀잔할 때, 그 시몬에게 말씀합니다. “빚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41~42절)
두 사람 다 빚을 진 총액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공통점도 있습니다. 둘 다 빚진 자라는 사실입니다. 둘 다 죄인입니다. 바리새인이나 여인이나 죄인입니다. 어쩌면 바리새인은 여인과 비교하면서 자신은 죄가 없거나, 그 여인의 죄에 비하면 자신의 죄는 극히 작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인은 자신의 죄가 얼마나 크고 무거운지를, 그리고 용서받을 때 그것이 얼마나 놀랍고 대단한지를 알기에 펑펑 눈물을 흘리며 자기 머리 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으면서 주님을 예배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신앙인도 있지만, 종교인도 많다는 말이 있습니다. 신앙인과 종교인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은혜를 아는 자와 모르는 자의 차이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받는 수준, 탕감받는 수준, 용서받는 수준의 깊이에 의해서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수준이 결정됩니다. 예배의 깊이와 넓이가 달라집니다. 예배에 임하는 자세와 내용이 달라집니다.
오늘 본문의 여인은 고귀하고 비싼 향유를 예수님에게 부어드림으로 주님을 향한 자신의 지극한 사랑을 표현하였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남들이 볼 때 낭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르바 던 같은 신학자는 “예배야말로 고귀한 시간 낭비이고 예배야말로 거룩한 낭비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에게 예배하는 시간을 두고 고민에 빠지거나 갈등한 적은 없습니까? 주일날 쉬어야 하는데, 어떤 모임이나 약속 때문에, 경제 활동 때문에 고민하거나 갈등한 적은 없습니까? 내 삶의 우선순위에서 예배가 차지하는 위치는 어디입니까? 예배드리는 것, 헌금하는 것이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시간상으로, 경제적으로 보면 낭비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거룩한 낭비의 최고 원형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이 땅에 사람의 몸으로 오신 성육신 자체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자체가 가장 완전한 낭비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 낭비를 기쁨으로 행하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최고의 낭비를 실천하셨습니다. 예배는 결코 헛된 낭비가 아닙니다. 우리의 감사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예배를 통하여 우리를 만나주시고, 회복하여 주는 재충전이요 승리입니다.
48절을 보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50절을 보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은, 예배를 드렸다고 모든 것이 끝났다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들에게 예배 못지않게 더욱 중요한 사실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제는 죄짓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른 하나는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 중요합니다.
공적 예배의 마침은 생활 예배와 섬김 예배의 시작입니다. 로마서 12:1절의 말씀처럼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공적인 예배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예배의 시작이요 마침이 아닙니다. 세상에 돌아가서, 즉 가정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일상적인 만남과 삶에서 하나님을 동일하게 예배하는 예배자로 살아내야 합니다. 우리의 시간을, 몸을, 삶을 예배하는 예배자로 살아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