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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 MEET The BLOGGER]에 2008년 11월 19일 실린 내용 입니다.*]
http://section.blog.naver.com/sub/MeetBloggerView.nhn?seq=16
평소 다양한 영화를 많이 접하실 텐데요. 최근의 영화 트렌드에 대한 견해가 궁금합니다.
첫째, 남미의 실력파 감독들이 할리우드에서 약진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겠군요. <시티 오브 갓>(2004)으로 아카데미 감독상 후보에 오른 브라질 출신의 페르난도 메이렐레스는 브라질 출신이지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포르투갈 작가 주제 사라마구의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눈먼 자들의 도시>를 감독했고, 2008년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 후보에 지명되는 영예를 안았지요. <헬 보이 2: 골든 아미>를 만든 멕시코 출신의 길레르모 델 토로 감독은 2011년에 개봉할 <호빗>의 감독을 맡았고요. 역시 멕시코 출신인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는 2006년에 <바벨>을 발표하여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 후보에 올랐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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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관련된 폭넓은 이야기들을 촘촘히 엮어서 소개해주시는데요. 내공의 깊이가 정말 놀랍습니다. 영화와 관련된 자료 수집이나 지식 습득에 어떤 노력을 기울이시나요?
영화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제가 즐겨 찾는 곳은 imdb.com입니다. 제작 중인 영화들에 관한 발 빠른 정보는 물론 이미 관객들과 조우한 작품들의 정보가 풍부하거든요. 세계적인 영화 비평가와 저널리스트의 옥고를 만날 수 있고, 흥행 성적과 수상 기록, 영화 포스터에 앉혀진 카피(tag-line)를 비롯해 옥에 티(goofs)랄까, 미주알고주알 정보(trivia)랄까 영화의 속살을 속속 다 들여다볼 수 있는 정보 또한 풍부하지요. imdb.com가 제공하는 것보다 더 발 빠른 정보가 필요할 땐 aintitcool.com을 방문해요. 마치 실시간으로 생중계하듯 막 볶아낸 커피의 원두 향을 닮은 정보를 콸콸 쏟아내거든요. 한 예로 박찬욱 감독이 <친절한 금자 씨 Sympathy For Miss Vengeance>의 맛보기 예고편(teaser trailer)을 막 공개했을 무렵 aintitcool.com은 해외 네티즌들을 위한 이야기의 난장을 단박에 마련했을 정도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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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지널 영어 대사의 미묘한 뉘앙스를 우리말로 100% 정확하게, 그것도 한정된 글자 수 내에서 전달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 같아요. 이미도 님만의 '비장의 솔루션'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번역은 물리적 변환과 화학적 변환 사이의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라고 생각해요. 물리적 변환은 word-to-word translation 즉 ‘직역’을 뜻하며, 화학적 변환은 1차 언의가 가진 의미와 멋과 맛, 그리고 문화적 정서를 우리 정서와 교감(chemistry)하게끔 2차 언어(한국어)로 번역하는 ‘의역’을 뜻하지요. 관객은 한 편의 영화를 보면서 평균 약 1,200번이나 자막을 읽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영상을 따라잡으랴, 자막을 통해 내용을 따라잡으랴, 이들 두 가지 행위 사이에서 무수한 충돌을 경험하게 되지요. 충돌을 불편이란 표현으로 바꾸어도 무방하겠군요. 그 불편을 덜어드리기 위한 목적일 텐데요. 미국에서 공수돼오는 번역가용 대본에는 전체 대사(dialogue) 중 약 85%만 자막(subtitle)용으로 압축돼 있습니다. 어차피 100%의 대사를 화면에 다 집어넣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없애도 괜찮은 부분을 추려낸 것이지요. 스크린의 화면 비율 때문에 화면에 집어넣을 수 있는 글자 수가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고, 토막토막 끊어지는 대사의 시간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미국의 제작사에서 그런 대본을 번역가에게 제공하는 것이랍니다. 결국 85% 정도로 압축된 대본 만으로도 영화의 스토리와 내용과 재미를 제대로 전달하기 위한 제1 관건은 우리말 창작 실력인 것 같아요. 외국어를 더 잘 하기 위해서도 우리말 실력이 필수인 것처럼, 더 좋은 번역을 위해서도 우리말 표현력과 문장력은 필수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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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생한 번역을 위해 신조어를 적극 사용하시는 경향도 있는데, 이미도 님의 손을 거쳐 유행이 된 표현이 있다면요?
자막은, 예를 들어 영화 속 멜 깁슨이 마치 한글자막의 도움을 받아 대사를 립싱크 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게끔, 우리말 표현이 적절하고 자연스러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기에 저는 개그 프로그램이 유행시킨 표현이라든가 특정 계층에서만 통용되는 인터넷 용어 등은 가급적 피하고 있지요. 번역의 격이나 급을 떨어뜨릴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이런 가정을 해보면 어떨까요? 코미디 전문 배우 아담 샌들러의 대사를 “우즈 아부지, 멋져부러~”라고 번역했을 때 그게 특정 장면의 상황이나 내용과 얼마나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느냐 하는 점도 중요하겠지만 그걸 보며 좋아할 관객은 그 수가 한정될 것이라는 뜻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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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무엇인가요? 특별한 에피소드가 있다면 함께 소개해주세요.
제가 좋아하는 단어들 중 하나는 FISH입니다. FISH는, 대중문화의 트렌드를 상징하는 Fashion, 아이디어의 영어 단어인 Idea, 디즈니 패밀리인 로이 디즈니가 훌륭한 애니메이션의 3대 요소로 꼽은 ‘첫째도 스토리, 둘째도 스토리, 셋째도 스토리’의 Story, 그리고 감동을 상징하는 Heart의 두문자어(acronym)입니다. 이 네 가지를 잘 갖춘 영화는 작품성에서나 흥행성에서 모두 성공작이라 평가받잖아요. 물론 이 네 가지 조건에 모두 완벽하게 부합하는 영화를 만나기란 쉽지 않겠지만요. 번역가에게 가장 반가운 선물은 스토리가 좋은 각본을 만나는 행운이지 않을까 싶어요. 영화가 미완성인 상태에서 번역에 착수하거나, 완성됐다고 해도 불법 해적판이 나돌 수 있는 걸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해 번역가에게도 영상자료를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번역단계 초기엔 영화를 안 본 상태로 번역해야 한답니다. 그렇기에 각본의 스토리가 좋으면 좋을수록 번역가는 더 즐겁게 일에 몰입할 수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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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도 님이 생각하시는 영어를 잘하는 비법은 무엇인가요? 또, 장르를 막론하여, 영어 공부하기에 가장 좋은 영화를 한 편 꼽으신다면 무엇인가요?
우리는 어려운 단어를 많이 알고, 문법 실력도 뛰어납니다. 그런 관점에서라면 한국인은 당연 영어를 잘 합니다. 그렇지만 어려운 단어는 많이 알고 있어도 쉬운 단어로 완성할 수 있는 쉬운 문장을 잘 구사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단어를 외울 때 그 단어가 쓰인 문장과 함께 통으로 외우지 않고 단어의 기본 뜻만 또닥또닥 외우고 ‘통과, 통과!’ 해버리기 때문이지요. 예를 들어 grave와 tomb이 ‘무덤’인 줄은 알아도 둘의 차이가 무엇인지는 쉽게 구별 못 하지요. 문법을 아무리 잘 알아도 문장을 만들지 못하면 문법을 뗐다고 할 수 없지 않을까요? 단어를 아무리 많이 알아도 그걸 완전한 문장으로 엮지 못하면 단어를 뗐다고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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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꼭 한 번 번역해보고 싶은 영화가 있다면 어떤 영화인가요?
<천 개의 찬란한 태양>, <앵무새 죽이기>처럼 훌륭한 원작 소설을 각색한 영화를 번역해보고 싶어요. ‘세상을 바꾼 영화와 책과 영어’라는 콘셉트로 책을 쓰고 있기 때문에 집필에도 큰 도움이 되겠지만, 영화 덕분에 원작 소설도 함께 읽어볼 수 있는 즐거움을 덤으로 누릴 수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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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거들은 자신의 관심사를 글로 남김으로써 감수성 및 정체성을 표출합니다. 이미도 님이 최근 관심을 가지게 된 아이템을 세 가지만 소개해주세요.
앞에서 소개한 FISH와 더불어 제가 특히 좋아하는 단어는 LIFE예요. Life(인생), Imagination(상상력), Film(영화), English(영어)의 두문자어(acronym)인 LIFE 말이지요. 제가 글쓰기를 위해 일관되게 염두에 두는 네 가지 콘셉트가 FISH 즉, Fashion, Idea, Story, Heart라면 네 가지 아이템은 인생, 영화, 상상력, 영어이거든요. 저의 산문집 <나의 영어는 영화관에서 시작됐다>의 큰 목차가 영화예찬, 영어예찬, 인생예찬인 이유이기도 하지요. 저의 블로그 <이미도의 메이드 인 할리우드>의 ‘예찬’ 카테고리와도 일치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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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이미도님에게 블로그는 무엇인가요?
첫째, 저에게 블로그는 ‘위도, 경도, 등대’입니다. 물리적 의미로서가 아닌, 우리들 마음 속 지도를 채워주는 위도, 경도, 등대 말이지요. 수평의 위도는 친구와 연인의 관계를 상징하고, 수직의 경도는 스승이나 절대자와의 관계를, 그리고 등대는 가족과 형제 사이의 관계를 상징한다고 믿어요. 블로그는 우리가 세상 어느 곳에 존재하더라도 나와 누군가가 정감과 지혜와 지식을 나눌 수 있기에 위도, 경도, 등대의 공간임이 분명하지요. 참 흥미로운 점은 위도, 경도, 등대의 latitude, longitude, lighthouse가 모두 L로 시작하는 단어라는 점이지요. 미국 작가 랄프 왈도 에머슨이 “먼 곳의 친구보다 더 값진 것은 없다. 그들은 나에게 경도이자 위도이기에! There is nothing more precious as to have friends at a far distance. They are longitudes and latitudes”라고 했지요. 이 명문장을 접하면서 등대가 포함됐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답니다. 그러다가 이런 문장을 만들게 됐지요. 접속사 and만 제외하곤 일곱 개의 단어가 L로 시작하는 문장입니다. “Like lighthouses, latitudes and longitudes love lonely lives. 등대가 그러하듯이 위도와 경도는 외로운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외로운 행성, 지구에 살고 있는 우리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모두가 외로운 사람들이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