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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宗 38年(1901 辛丑/ 대한 광무(光武) 5年) 9月 12日 陽曆
수빈을 비로 존봉하는 의식 절차를 거행하도록 하다.
조령을 내리기를,
“정조 선황제(正祖宣皇帝)를 추존(追尊)한 이후에 경우궁(景祐宮)의 사체(事體)가 더욱 달라졌으니
마땅히 전례(典禮)를 거행해야 할 것이다.
수빈(綏嬪)을 비(妃)로 존봉(尊封)하는 제반 의절(儀節)을 장례원(掌禮院)에서
택일(擇日)하여 거행하라 하였다.
詔曰: “正祖宣皇帝追尊以後, 景祐宮事體尤別, 宜擧典禮。
綏嬪尊封妃號諸般儀節, 令掌禮院擇日擧行。”
고종 38년(1901 신축/ 대한 광무(光武) 5년) 10월 11일 양력
현목 수빈을 수비로 높여 봉하고 옥책과 금보를 올리는 의식을 섭행하다
현목 수빈(顯穆綏嬪)을 수비(綏妃)로 높여 봉하고 옥책(玉冊)과 금보(金寶)를 올리는 의식을
섭행(攝行)하였으며 진하(陳賀)와 반조(頒詔)는 권정례(權停例)로 하였다.
반조문(頒詔文)에,
“효성으로는 조상을 높이는 것보다 큰 것이 없으니 종묘(宗廟)의 의절을 새롭게 하고,
예의에서는 옛 법을 상고하는 것이 중요하니 궁직(宮職)의 질서를 높여야 할 것이다.
이것은 대개 예로부터 제왕들의 집안에 전해오는 움직일 수 없는 아름다운 규범으로서
이제 짐이 어찌 그대로 시행하지 않겠는가?
삼가 생각건대, 현목 수빈은 천품이 순수하고 천성이 정숙하였다.
이름 있는 가문의 딸로서 범절에는 물려받은 아름다움이 있었고
훌륭한 용모와 의젓한 행동으로 폐백을 갖추어 선발하는 데 뽑혔다.
훌륭한 꿈을 꾼 것은 황태자를 낳을 상서로운 징조에 부합되고,
호랑이가 지나가도 두려워하지 않은 것은 곰이라도 당해낼 만큼
굳세고 열렬함을 본받은 것이었다.
경술년(1790)에 아들을 낳으니 크나큰 복록은 나라의 좋은 운수를 이어 놓았다.
왕비(王妃)를 도우니 두드러진 공로는 태사(太?)나 태임(太任)에 미쳤고
자궁(慈宮)을 모시니 각근한 정성은 아침저녁 문안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마음가짐이 깊고 덕(德)이 가득하여 불행에 처하여도 끝내 누렸고 훌륭한 계책을 품고 있어
세월이 오래될수록 더욱 빛났다.
짐은 조종(祖宗)의 좋은 운수를 잇고 하늘의 밝은 명령을 받아
큰 위업을 세운 후로 온갖 예절을 충분히 갖추지 않음이 없었다.
우리 정조 선황제(正祖宣皇帝)의 위호(位號)를 추숭(追崇)한 만큼
그 다음으로 비(妃)를 추존하는 것은 떳떳한 규례이다.
그래서 이해 음력 8월 29일에 삼가 인장을 올리고 수비로 높여 봉하였으니,
황후의 의장은 제도대로 하고 금궤(金櫃)에 보관하는 것은 예법이 그러한 것이다.
삼가 지난 일들을 돌이켜 보니 감격스러운 마음이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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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구 휘경동의 유래
휘경동은 서울시 동대문구에 있으며 남쪽으로는 배봉산이 있고
동쪽으로는 중랑구 면목동, 서쪽은 청량리동, 북쪽은 이문동과 접해 있습니다.
휘경이란 마을(洞) 이름은 배봉산 아래에 있던 수빈(綏嬪) 박씨의 묘소인 휘경원에서 유래합니다.
수빈 박씨는 정조의 후궁이며 조선 22대 순조의 생모인데 순조 22년 수빈이 세상을 떠나자
순조는 사방으로 장지를 구하다가 이곳 양주군 배봉산 아래(현재 서울위생병원 위치)
자리를 정하였습니다.
배봉산에는 이보다 먼저 사도세자의 묘인 수은묘가 있었는데
영조38년(1762) 수은묘라고 묘호를 정하고 배봉산에 장사 지냈다가
아들인 정조가 임금이 되자 정조원년(1776) 영우원으로 승격한 후
정조13년 경기도 화성의 화산으로 이장하여 현륭원으로 원호를 바꾸고
후에 융릉으로 승격하였습니다.
순조는 생모인 수빈 박씨의 원호(園號)를 휘경(徽慶)이라 하고
세자를 데리고 휘경원에 자주 거둥하였는데,
이때부터 한적한 마을이었던 휘경원 일대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면서
휘경원 또는 휘경리로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풍수설에 따라 철종 6년 묘소를 양주군 풍양의
순강원(인빈 김씨 묘역) 후면 언덕으로 이장하였다가
철종14년 양주 달마동 즉 현 위치인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로 이장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휘경동은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동부 인창방에 속하였고
1911년 경기도 경성부 인창면 휘경원으로 불렸습니다.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휘경리가 되었고
1936년 경성부로 편입되면서 휘경정(徽慶町)으로 바뀌었다가
1946년 휘경동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휘경원과 관련된 이야기 하나를 소개하면 우리들 기억속에 남아있는
1993년 김영삼 정부시절 고속열차 업체선정과정에서 TGV 관련하여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가 약탈(297권)해간 강화도 외규장각 도서 반환시
외규장각도서 한 권을 반환받아 한때 국민을 흥분시킨 적이 있는데
그때 반환받은 책이 바로 휘경원을 조성한 기록인 휘경원 원소도감의궤으로서
이 책을 통해 휘경원에 얽힌 자세한 내막을 알게 되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기록
- 순조 22(1822년) 12/26 가순당(수빈박씨)이 보경단에서 서거하다
12/29 빈청에서 가순당의 원호를 휘경으로 시호는 현목으로 정하다
- 순조 23(1823년) 02/26 사시(巳時)에 현실(玄室)에 하관(下棺)하였다.
- 철조 6(1855년 ) 9/28 휘경원의 현실(玄室)을 파낼 때 함인정 앞뜰에서 망곡(望哭)을 행하였다
- 철종 14(1863년) 5/8 휘경원의 현실(玄室)을 내릴 때에 망곡하였다.
- 고종 39(1902년) 10/24 현목 수빈을 수비(綏妃)로 높여 봉하고
옥책과 금책을 올리는 의식을 거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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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규장각도서의 관련된 이야기
1886년 병인양요, 프랑스군은 외규장각에 보관된 서적을 비롯한 360여 점의
귀중품을 약탈해 본국으로 우송했다.
하지만 조선정부는 프랑스군을 물리친 승리감에 도취되어
외규장각 도서 중 일부가 프랑스로 건너간 사실조차 몰랐다.
그러나, 1993년 미태랑 대통령이 고속철도 사업권을 따내기 위해
외규장각의 약탈한 책들 중 한 권을 반환하면서 외규장각의 존재도
부각되기 시작한다.
강화도 외규장각
휘경원원소도감의궤
그 책은 정조의 후궁이자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의 묘소
휘경원 조성사업을 기록한 "휘경원 원소도감의궤"였다.
의궤는 의식과 궤범이라는 뜻이다.
즉 중요한 의식이 있으면 그것이 본보기가 되어
국가 의식을 치를 수 있게 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자체 값어치도 크지만 프랑스에 가있는 의궤는 의미가 각별하다.
의궤는 보통 관청에서 보관하는 분상용과 왕실보관용으로 어람의궤가 있다.
현재 국내에는 분상용만 남아있는데 비해 프랑스에 가있는 것은
어람용 의궤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