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화 崔善嬅 (1916~2001)】 "국내외 한국 여성들의 단결을 촉구하다"
최선화는 인천 출신으로 평양으로 이주하여 평양 정의여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 1931년 이화여전 영문과 졸업하고 모교에서 교사로 활동하였다. 최선화는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수행하다 잠시 서울에 들른 양우조를 소개받고 유학을 빌미로 1936년 중국으로 건너갔다. 1937년 최선화는 김구의 주례로 양우조와 결혼하고 중일전쟁 발발하자 임시정부와 중경으로 이동하였다. 중경에 도착한 최선화는 독립운동 관련 단체 회원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여성으로서 국내외 한국여성 단결·후원을 촉구하였다. 한편으로 최선화는 딸 제시를 키우며 쓴 육아일기 『제시의 일기』는 하나의 역사적 기록이 되는 소중한 자료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최선화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양우조를 만나 사랑에 눈을 뜨다
최선화(崔善嬅, 1911~2003년)는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학익동 출신으로 이명은 최소정(崔素貞)이다. 인천에서 출생한 최선화는 평양으로 이주하여 평양 정의여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 1931년 이화여전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여학교에서 근대 교육을 받은 최선화는 모교에서 교사로 활동하던 중 양우조를 만났다. 중국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수행하다 잠시 서울에 들른 양우조를 소개받은 것이다. 이후 최선화는 양우조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애정을 확인하였고 두 사람은 결혼을 결심하였다.
양우조는 1897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출생하여 미국 유학 중 흥사단에 입단하여 활동을 하였다. 1929년 상해에서 양우조는 한국독립당에서 활동하였고 임시정부 사찰특파원에 임명되었다.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참사 겸 정훈처장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최선화는 집안 반대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가 적극적으로 도와 결혼이 성사되었다.
역사가 담긴 육아일기 『제시의 일기』
최선화는 상해 간호전문학교에 유학간다는 구실로 '통행증'을 발급받아 어렵지 않게 중국으로 갔다. 1936년 최선화는 상해에서 간호학교를 중단하고 흥사단에 가입하여 활동하다 1937년 임시정부 청사에서 김구 주례로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양우조는 임시정부 재무차장직을 맡고 있었고, 결혼과 더불어 양우조의 독립운동을 위한 최선화의 내조가 시작되었다. 망명지 생활은 모든 일상이 정상적일 수가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선화는 딸 제시를 키우며 육아일기 『제시의 일기』를 썼는데, 일기 자체로도 하나의 역사적 기록이 되는 소중한 자료이다. 『제시의 일기』는 임시정부가 이동함에 따라 상해 등 여러 도시를 전전하여야 했던 최선화가 딸 ‘제시’를 키우며 기록한 육아일기이면서 임시정부 가족 생활상을 담은 기록이기도 한 것이다. 『제시의 일기』는 제시가 1938년 출생하면서부터 광복 후 귀국한 1946년의 8년간 기록되었다.
최선화가 결혼을 위하여 중국에 건너간 시기는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직전이었다. 중일전쟁 발발하자 최선화는 임시정부 가족에 합류하여 임시정부와 삶을 같이하였다. 임시정부와 그 가족들은 중국 본토를 침략한 일본군을 피하여 중화민국 임시정부 정착지인 중경으로 이동하는 긴 여정을 시작하였다. 최선화는 첫 아이를 낳은 지 며칠 만에 이동해야 하는 고난스러운 여정이었다. 이동하는 과정에서 일본군 공습과 폭격은 최선화를 더욱 불안하게 하였다.
임시정부 가족과 중경에 정착한 최선화는 둘째 아이를 낳은 후 빈번한 장시간 공습 대피로 몸조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여 병이 들어 수술을 수차례나 하여야만 했다. 또 최선화는 병세에 차도가 없자 우울과 절망감에 빠지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최선화는 독립 후 고국으로 돌아갈 경우를 대비하여 아이들 교육 문제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최선화는 아이들이 중국에 살면서 중국어에 익숙해져도 한글과 우리말도 능숙하게 구사하여 한국인의 정체성을 유지하여야 한다고 생각해 가정 교육을 하였고, 학교도 한글학교로 보냈다.
국내외 한국 여성들의 단결을 촉구하다
임시정부에 여성 참여가 증가하자 최선화는 한국국민당 당원, 한국독립당 당원, 한국혁명여성동맹 결성준비위원과 그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통하여 최선화는 임시정부 가족 여성들이 아이 양육·한글학교 운영·독립운동가 남편 내조 등의 일뿐 아니라 한걸음 나아가 직접적으로 독립운동에 기여하는 길을 모색하였다. 그리하여 1940년 최선화는 한국혁명여성동맹을 결성하고, 1943년 한국애국부인회 재건준비위원 및 서무주임으로 활약하였다. 최선화는 한국애국부인회 간부로 광파방송과 미국교포사회에 보내는 편지 등을 통하여 홍보활동에 주력하였고, 국내외 한국여성 단결·후원을 촉구하였다.
최선화는 중국 망명 생활 중에도 독립국가 건설과 임시정부 요인·가족의 독립운동과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였다. 이는 최선화 자신이 선택한 삶에 대한 확신과 의미를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최선화는 임시정부 지도자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과 자신의 삶, 역할을 끊임이 없는 연결되는 돌계단으로 비유하며 받침돌 역할을 자처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최선화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