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 의상능선 산행기
어제 원효봉을 다녀온 뒤 주말을 연이어 다시 북한산으로 향했다. 어제는 출발이 늦어 원효봉만 다녀왔지만 오늘은 조금 일찍 출발해 의상능선을 종주할 생각이다.
구파발역에서 704번 버스를 타고 북한산으로 향했다. 차에 탄 많은 등산객들이 가면서 일행과 예기들을 나눴다. 백화사 입구. 흥국사 입구 등 지나가는 버스정류장마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내렸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등산로가 마치 물이 정상에서 흘러내리는 지류 같은 생각이 들었다. 여기저기 갈래길을 택해 가다보면 정상에서 만날 수도 있다.
북한산성 입구에 도착해 차에서 내렸다. 이 버스는 송추가 종점인 걸로 알고 있었는데 버스기사가 여기서 다 내리라고 했다. 구파발역에서 북한산행 버스는 34번과 704번이 있었는데 양주 가는 37번 버스 노선이 새로 생겼다. 그리고 주말에는 720번 버스가 8772번 번호판을 달고 북한산성 입구까지 왕래한다.
공기가 상쾌했다. 안으로 들어가다 보니 원효봉과 의상봉이 큰 대문처럼 좌우로 솟아보였다. 의상봉은 매우 경사가 급해 보였다. 11시 36분 의상봉 들머리에 들어섰다. 어제 등산화의 재봉 실밥이 트여나가서 오늘은 여벌로 사둔 새 등산화를 신었다. 실밥이 더 트여나가기 전에 수선을 맡기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새 신발이라 탱글한 맵시가 살아있었다. 새 신발에 돌부리나 나무뿌리에 걸려 흠이 생길까봐 걸음에 신경을 썼다.
의상봉에 오르는 길은 험하기로 유명하다. 급경사진 바위 암릉에 외줄로 된 철난간을 잡고 매달리듯 당기며 오르곤 했다. 그런데 지금은 계단 등이 군데군데 설치되어 있다. 긴 철난간을 지난 후 몇 번 계단을 디디고 올라가 오리바위에 도착했다. 다른 일행들이 번갈아 바위로 올라가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 위쪽 길에 눈이 쌓여 있었다. 위쪽으로 아이젠을 차지 않고 조심하며 지났다. 얼얼한 추위에 서늘한 겨울 숲 체취가 다가왔다.
12시 13분 의상봉에 도착했다. 들머리에서 37분이 지나 있었다. 눈길을 조심하다 보니 전에 오를 때보다 시간이 더 걸렸다. 전에 그림을 그릴 때 앉았던 바위가 눈에 띠었다. 여기서도 많은 그림을 그렸다. 그 때마다 늘 그 바위에 앉았다. 그런데 오늘은 북쪽 응달에 눈이 쌓여 사람들이 그 곳을 지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지나가기 어렵게 되자 조금 뒤로 물러서 도움닫기를 하며 뛰어 올라가고 있었다.
바위에 서서 한동안 주변을 둘러보았다. 산천은 의구하다는 말처럼 산세는 전에 보았던 모습 그대로였지만 눈 덮인 모습이 겨울 산 특유의 풍미를 자아냈다. 맑고 깨끗한 날씨에 숲에 낙엽이 져서 산세가 투명하게 드러나는데다 눈이 덮여 풍광을 다채롭게 했다.
잠시 후 눈 덮인 바위에 앉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한파에 먹으로는 그릴 수 없어 종이에 연필로 그렸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바라보았다. 한 남자 분은 전에 내가 그림 그리고 있는 것을 몇 번 보았다며 그림을 팔기도 하느냐고 물어보았다. 전시할 때 팔았다고 하면서 인터넷에 올라 있는 그림들을 보여주었다. 가장 큰 그림은 가로 크기가 7.3M나 된다고 알려주었다.
그리다 보니 핸드폰에서 1시 50분에 맞춰둔 알람 소리가 들렸다. 그리는 종이 크기는 작지만 시간이 빨리 흘러갔다. 의상봉에서는 북한산 정상인 백운대와 노적봉, 그 사이로 보이는 만경대가 정면으로 솟아 보인다. 그리고 거대한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그 봉우리들의 기세가 돋보인다. 그런데 그 느낌을 살리며 그림을 그리려면 시간이 많이 걸린다.
잠시 후 젊은 여자분 둘이 지나다 한참을 들여다보다 인사를 했다. 한 분은 안나푸르나 봉을 다녀왔다고 했다. 내가 산악인이신가 물으니 그렇지는 않다고 했다. 손으로 그림을 그리며 그동안 다녔던 산 이야기를 나눴다. 그들이 그리는 모습이 멋있다며 사진을 찍어주고 용출봉 쪽으로 걸어갔다.
옷을 많이 껴입었는데도 오래 앉아 있다 보니 추위가 밀려왔다. 무엇보다 맨손으로 그리다 보니 손이 시려워 일어서서 몸을 움직이고 손을 비빈 후 다시 자리에 앉아 그림을 마무리 했다.
2시 17분 의상능선을 지나기 위해 용출봉 쪽으로 향했다. 의상봉과 용출봉 사이 안부에 놓인 가사당 암문이 눈에 띠었다. 백운데 쪽 시선 아래에는 큰 좌상 불상이 있는 국녕사가 보였다. 의상봉에서 용출봉을 오르는 길도 매우 험한데 여기도 군데군데 새로 설치한 계단이 보였다. 오르는 길이 북사면이어서 눈이 녹지 않고 그대로 길에 쌓여 있었다.
2시 42분 용출봉에 당도했다. 용출봉을 떨어져서 바라보면 급경사진 암릉 봉우리가 매우 높고 험해 보이는데 막상 정상에 올라서면 평이해 보인다. 정상석 주변의 좁은 공간에서 지나는 일행이 식사를 하는 모습을 종종 볼 때가 있었다.
그곳을 지나 오래된 철계단을 내려가다 백운대 쪽을 바라보니 용출봉 암벽 너머로 북한산 정상부 풍경이 아름답게 겹쳐 보였다. 내려가는 길도 눈이 쌓여서 나무뿌리를 잡으며 조심조심 지나갔다. 아이젠을 갖고 있지만 끝까지 그냥 지나가보려고 했다.
어릴적 농사를 지으며 살 때는 모든 것을 몸으로 견뎌냈다. 계절마다 변하는 자연 조건에 따라 그냥 적응하며 사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것이 모든 생물의 원초적인 존재 방식이고 그렇게 적응하며 사는게 순리라고 생각한다. 그럴수록 생명체로서의 감각이 살아 있게 될 것이다. 그런 생각에 지금도 가급적 맨 몸으로 자연환경에 적응하려 하고 있다.
용혈봉을 오르다 뒤돌아 앉아서 다시 그림을 그렸다, 여기서도 여러 차례 그림을 그렸다. 북한산 봉우리들이 뾰족이 솟은 모습은 많지 않은데 북한산성 입구에서 바라보이는 의상봉과 여기서 보이는 용출봉은 특별히 뾰족이 솟아 보인다.
바람이 많은 능선이라 그리며 앉아 있자니 추위가 심하게 느껴졌다. 시간도 많이 지나 있었다. 해가 기울면 기온도 많이 내려갈 것 같았다. 서둘러 그림을 완성하고 다시 문수봉 쪽으로 의상능선을 지나갔다. 용혈봉과 중취봉을 넘어 안부로 내려서니 전에 보수 중이던 성곽주변에 접근을 막고 있던 줄이 치워져 있었다. 그리고 심하게 굴곡진 성곽 모습이 드러나 보였다.
다시 앞에 놓인 나월봉을 지나기 위해 길을 올라섰다. 부왕동암문을 지나서부터 나한봉 사이 안부까지는 북동측 경사지를 통과해야 하는데 능선을 지날 때와 달리 숲에 시야가 가려져서 잠시 답답한 느낌을 갖게 된다. 전에 비탐길로 정상을 지나간 적도 있지만 눈 쌓인 겨울이라 그쪽으로 지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안부를 지나 다시 나한봉 오름길을 오르다 뒤돌아 보이는 풍광을 그리려고 자리를 잡았다. 거기서도 같은 장소에 앉아 여러 차례 그림을 그렸었다. 날씨가 더 추워지고 바람이 불었다. 어느덧 해도 뉘엿뉘엿 기울어가고 있었다. 앞에 보이는 풍경은 종방향으로 보이는 의상능선과 북한산 정상이 어우러진 광활한 풍경인데 그릴 시간은 많지 않았다.
마음을 다부지게 먹고 다시 그림을 그렸다. 한동안 인적이 끊긴 것처럼 오가는 사람이 없었다. 그림에 집중하다보니 뒤쪽에서 한 분이 다가와 인사를 나눴다. 추운데서 어떻게 그림을 그리느냐며 걱정스런 표정을 하고 있었다. 자신은 사진작가라고 하면서 사진을 찍어주고 의상봉을 향해 갔다.
잠시 후 해를 바라보니 일몰 풍경이 되어 있었다. 문수봉을 거쳐 대남문을 지나 구기동탐방안내소로 내려가려면 거리가 멀어 서둘러 움직여야 될 것 같았다. 익숙한 길이지만 눈 쌓인 밤이라 신경이 쓰였다. 경사진 큰 바위에 철난간이 길게 설치된 눈길을 지나 남장대 길과 갈라지는 능선에 오른 다음 다시 내리막길을 지났다.
잠시 후 청수동 암문을 지나다보니 해가 넘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잠시 멈춰 일몰 사진을 찍고 문수봉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았다. 해가 지고 도시에 건물 불빛이 켜져 있었다. 문수봉 정상 표지 옆쪽의 그림을 많이 그렸던 바위에 올라 백운대쪽을 바라보았다. 다시 그리고 싶지만 이미 어둠에 감싸이고 있었다. 전에 그렸던 곳들을 새로 연필로 그리려 하다 보니 할일이 많아진 느낌이다.
5시 37분 내남문을 나와 구기동 쪽으로 내려갔다. 깔딱 고개를 넘으며 돌아보니 나목 너머로 좌측의 문수봉과 우측의 보현봉이 대문 문주처럼 우뚝해 보였다. 전에 그 모습도 그렸는데, 그 풍경을 그린다음 문수봉에 올라 시점을 옮겨 그 너머 북한산 정상 모습을 함께 그려넣었다.
앞 산 너머로 해가 진 다음 하늘에 비친 노을이 비춰보였다. 아직 길은 멀고 이미 어둠에 쌓여 있었다. 익숙한 길이기에 망정이지 초행길이라면 매우 난감해 했을 것 같았다. 길이 얼어붙었지만 아이젠은 차지 않았다.
잠시 후 맨 위쪽 에 놓인 다리를 건넜다. 유독 이 계곡에는 거기서부터 계곡을 이리저리 건너는 다리가 많이 놓여 있다. 그것이 이정표가 되기도 한다. 길이 완만해 졌다. 하지만 밤길이라 여기저기 솟아 있는 작은 바위들을 디디며 지나기가 조심스러웠다. 가다 뒤를 돌아보니 둥근 달이 솟아 있었다. 달에 비친 내 그림자가 길가에 엷게 드리워져 있었다. 산에서 잠자리를 찾아가는 동물의 뒤척이는 부시럭소리가 들렸다. 길 옆 계곡은 꽁꽁 얼어 있었다. 점차 어둠이 깊어가는 산길을 내려서며 전기가 들어오지 않던 시절 고향 산천이 떠올랐다. 잠시 후 구기동 탐방안내소로 나와 산길을 벗어났다.
눈길에 험난함이 더해서인지 오늘 따라 의상 능선을 지나며 돌아본 북한산의 면모가 더 특별하게 기억되었다.
(20250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