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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8월 16일 주일예배 설교 * 광복주일
창세기 50:15-21
하나님의 도모하심 곧 언제나 새 창조
우리는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일들을 “생각하고” “기획하고” “계획하며” “꾀하고” “도모하며” 살아갑니다. 자식을 위해 이런저런 것들을 도모하고, 노후를 위해 무언가를 도모하고, 때로는 누군가를 이기기 위해, 심지어는 누군가를 밀어내기 위해 어떤 일을 도모하기도 합니다. 물론 사랑을 위해, 연인을 위해, 우정을 위해, 의리와 신의를 위해 무언가를 도모하기도 하지요.
저는 오늘 “도모하다”는 표현을 단순히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려내고 고안하는 생각만을 뜻하는 것이 아닌, 그것을 이성과 의지를 다해 실제로 수행하는 의미로 말하겠습니다. 생각과 계획을 실제 현실로 만들어내기 위해 행동하는 의미로서 “도모하다”입니다.
그리고 이 ‘도모하다’라는 표현은 본문, 그중에서도 20절에 나오는 히브리어(חָשַׁב, 하샤브)를 해석한 것입니다. 20절, 요셉이 형들에게 하는 말속에 이 단어가 연달아 두 번 표현됩니다. 오늘 이것을 중심으로 요셉과 형들의 이야기를, 나아가 창세기 전체를, 그리고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이 땅의 역사를 다시 읽어보는 시도를 하고자 합니다.
야곱이 그의 조상들에게로 거두어졌습니다. 그러자 형들의 마음속에 오래 묻어두었던 두려움이 다시 고개를 듭니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는 요셉이 참았을지 모른다. 이제 아버지도 계시지 않은데, 혹시 우리에게 앙심을 품고, 우리가 그에게 가한 모든 악을 반드시 되돌려주면 어떡하지?”
그들은 과거 자신들이 저지른 죄에 자신들이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 두려움 때문에 차마 요셉을 직접 대면하지는 못하고, 사람을 시켜 말을 전할 정도입니다. 그것도 아버지의 유언이라는 말을 먼저 전하게 하면서요. 본문은 이것을, 형들이 “명령”을 전하여 말하였다면서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말씀하셨다며 이야기합니다. “부디 제발 네 형들의 반역과 죄를 들어내어다오. 그들은 네게 악을 가했다.” 그러고 나서 이 말을 전하게 합니다. “그러니 이제 제발,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의 반역을 들어내어 주십시오.”
이 얼마나 한껏 몸을 낮춘 저자세입니까. 아버지를 우리 아버지가 아닌 당신 아버지라고 말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까지 언급하며 동원하다니요. 이는 하나님께 기대어 자비를 구하는 처절한 몸부림으로, 보기에 따라서 가증스러워 보이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고, 애처롭기도 합니다. 형들이 요셉에게 우리에게 악을 되돌려주는 것은 하나님의 종들을 치는 언약적 파괴 행위라는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 어찌 이리 뻔뻔한가 싶기도 하고, 한편으론 그 말을 자기들이 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고 염치 없는 걸 잘 알지만, 그럼에도 그만큼 절박하고 처절한가보다 싶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요셉은 이 말을 전해 듣고는 어떤 심정이었으며 어떻게 반응할까요? 창세기는 그들의 말에 요셉이 울었다 말할 뿐입니다. 요셉은 왜 울었을까요? 가해자인 형들이 저런 말을 하니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고 하도 어이없고 억울해서 우는 걸까요? 아니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을 형들이 끄집어내고 상기시켜서일까요? 아니면 형들이 비로소 자신들의 죄, 배반을 고백해서 그런 걸까요? 아니면 17년 전 형들에게 자신이 요셉임을 밝힐 때, 나를 팔았다고 해서 괴로워하지도 자책도 근심도 걱정도 말라 했는데도, 하나님께서 생명을 보존하시려고 형들보다 먼저 보내신 것이라고 했는데도, 하나님께서 나를 형들보다 앞서 보내신 것은 당신들의 남은 자를 땅에 두시려고, 큰 구원으로 당신들을 살리시려고 라고 했는데도, 그런즉 이제 나를 보낸 것은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했는데도 17년 동안 깨닫지도 이해하지도 알지도 못하는 형들의 우둔함 때문에 우는 걸까요? 아니면 그동안 형들이 죄책감에 짓눌려 산 것 때문에 우는 걸까요? 즉, 요셉은 이미 분명하게 말하며 용서하고 안심시켰건만, 그 17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여전히 죄책감과 ‘보복의 논리’라는 감옥에 스스로를 옭아맨 채 두려움의 하수인으로 살아온 형들의 무지와 어두움, 아둔함의 세월이 너무나 안타깝고 애처로워서 쏟아져나오는 긍휼의 눈물일까요?
곧이어 형들이 직접 와서 급기야 요셉 앞에 엎드려 말합니다. “보소서, 우리는 당신의 종들입니다.” 과거 이복동생 요셉을 노예로 팔았던 자들이, 이제 제 발로 그의 노예이기를 자처합니다. 악을 행하면 그 순간에는 시원할지 모르나 그 이후론 죄책감이나 악의 노예로 살게 된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로 읽을 수 있을까요?
형들의 말들에 요셉은 어떻게 대꾸할까요? 우리라면 무어라 말할까요? 요셉은 이렇게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습니까? 바로 형님들은 내 위에 악을 도모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선을 위하여 도모하셨습니다. 이날처럼 만드시기 위하여, (곧 구체적으로는) 많은 백성을 살리시기 위하여. 그런즉 이제 형님들은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바로 내가 형님들과 형님들의 아이들을 부양하겠습니다.”하고 그들을 위로하며, 그들의 마음 위에 말합니다.
“바로 당신들이 내 위에 악을 도모하였습니다.” (새번역: 형님들은 나를 해치려고 하였지만)
형들은 요셉을 해치기 위해 실제로 도모했습니다. 요셉을 해치고자 하는 마음을 속으로만 생각하고 계획한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그를 죽이고자 계획하고 실행하려 했습니다. 실제로 요셉을 구덩이에 던졌고, 실제로 상인들에게 팔았고, 실제로 아버지에게 짐승의 피를 묻힌 옷을 보여주며 그가 죽었다고 속였습니다. 단지 마음속의 미움이 아니라, 손발을 써서 완성해낸 하나의 계획이었습니다. 그렇게 요셉의 형들은 악을 생각하고, 꾀하고, 계획하고, 그것을 수행하고 실행했습니다. 악을 도모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곧이어 바로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선을 위하여 도모하셨습니다.” (새번역: 하나님은 오히려 그것을 선하게 바꾸셔서)
같은 동사, 같은 형태, 같은 표현입니다. 요셉이 이해하기론, 하나님도 그저 “생각”만, “계획”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형들이 요셉을 죽이고자 했을 때, 죽이는 것까지는 반대한 몇몇 형들의 만류로 구덩이에 던져졌고, 거기서도 건져져 상인들에게 넘겨졌습니다. 그리고 노예로 팔린 자기를, 여러 모함과 고난과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이집트의 총리로 세우셨습니다. 요셉은 자기가 출세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선을 위해 도모하셨다고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형들의 악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을 살리시는 역사를 만들어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 악한 사건 하나하나에 직접 손을 대시고, 그것이 실제로 선한 결과가 되도록 도모하고 또 도모하여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그 도모하심의 구체적인 내용은 이어지는 요셉의 말에서 드러납니다. “이날처럼 만드시기 위하여, 곧 구체적으로는 많은 백성을 살리시기 위하여.”
7년 간의 엄청난 대기근에서 야곱과 그 가문, 그 후손들을 살리시기 위해 도모하셨다는 고백입니다. 이집트와 그 인근 많은 백성을 살리시는 것도 포함되는 것은 물론입니다. 그야말로 많은 백성입니다. 국가와 민족 등 체제와 혈통을 뛰어넘는 당신의 많은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선한 도모는 이스라엘 12지파라는 좁은 혈통에 갇히지 않았습니다. 이집트 사람들과 가나안의 수많은 이방인들까지 모두 기근에서 살리셨습니다. 이것이 형들에게 대답하는 요셉의 말 “당신들은 내 위에 악을 도모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선을 위하여 도모하셨습니다”에 담긴 구체적인 의미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구절을 요셉 한 사람의 이야기로만, 요셉과 형들의 이야기로만 읽기보다는, 창세기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흐름, 주제로 읽고 싶습니다.
“이날처럼 만드시기 위하여”(새번역: 오늘과 같이 ... 하셨습니다.)에서 “만드시기”로 옮긴 히브리어(아사, עָשָׂה)는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이 하늘과 땅 곧 천체와 광명체와 생물과 사람 등 세상 그 모든 것을 “만드셨다” 할 때 반복해서 쓰인 바로 그 창조의 동사입니다(1:1,7,11,12,16,25,26,31,2:2,3,4 등등).
“살리시기 위하여”(하야, חָיָה)는 생명을 주시고 유지하시고 보존하시고 누리며 살게 하시는 것, 흙으로 빚은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살아 숨 쉬는 생명이 되게 하신 것, 곧 살리시고 살게 하시는 생명 수여를 뜻합니다. 창조의 본질이자 본뜻으로, 창조 그 자체입니다.
창세기 끝 요셉의 이 짧은 고백에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역사가 공명합니다. 이 세상에 생명을 주시고 유지하고 보존하시고 누리게 하시는, 살리시는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와 섭리, 도모가 공명합니다.
더욱이, 살리시기 위하여(르하하욧트, לְהַחֲיֹת, in order to keep alive, um am Leben zu erhalten)라는 표현은 노아와 롯의 이야기에 나왔던 바로 그 표현, 똑같은 표현입니다.
노아는 땅에 사람의 악이 많음 곧 그 마음의 도모들의 빚어진 모든 형태들이 온종일 오직 악할 때 일어난 홍수 이야기로, 하나님께서 노아의 가족들뿐만이 아니라 모든 생물과 생명체마다 방주에 들어가게 하셔서 모든 땅과 모든 산을 잠근 홍수로부터 살리십니다. 하나님의 행동과 역사 그리고 그 목적과 의도, 계획, 도모를 “살리시기 위하여”라는 표현으로 담아낸 것입니다.
롯 역시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때 그곳에 살던 롯과 그 가족을 살리시는 이야기로, 그 이야기에 이 표현을 썼습니다.
정리하자면, “하나님께선 이날처럼 많은 백성을 살리시기 위해 만드신다. 비록 바로 당신들이 악을 도모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선을 위해 선으로 도모하신다.”는 요셉의 고백은 단지 요셉과 형들 사이에만 적용되는 고백을 넘어서, 노아와 롯의 이야 등 악을 도모하는 사람들 속에 그래도 그중에서 남은 자를 살려내시고 보존하시는 창세기의 모든 이야기를 담아내는 고백으로 보입니다.
이는, “선을 위하여(르토바, לְטֹבָה)”라는 표현으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선”이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실 때마다 보시기에 “좋았다”(토브, טוֹב)하신 바로 그 표현입니다.(창 1:4,10,12,18,21,25,31)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다”할 정도로 좋게 만드시고 창조하신 세상과 그의 일부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토록 좋은 세상에서 사람은 무엇을 도모합니까?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처럼 되고자 "선악과"를 도모합니다. 가인은 동생을 죽이기를 도모합니다. 노아의 시대 사람들은 온갖 폭력을 도모합니다.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은 하늘까지 닿는 이름을 도모합니다.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도 서로를 향한 폭력을 도모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족장들, 아브라함과 이삭도 자기 아내를 팔아넘기듯 속이는 일을 도모하고, 야곱은 형을 속이는 일을 도모하고, 마침내 그 아들들, 곧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시조들도 동생을 팔아넘기는 일을 도모합니다.
이처럼 사람은 악을 도모합니다. 창세기 처음부터 끝까지 반복되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 반복 뒤에 언제나 함께 반복되는 또 하나의 흐름이 있습니다. 하나님도 도모하십니다. 사람이 악을 도모할 때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도모하십니다. 아담과 하와가 쫓겨날 때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가인이 쫓겨날 때 그를 지킬 표를 주셨습니다. 세상이 폭력으로 가득할 때 노아의 가족을 방주에 태워 생명을 보존하셨고, 롯의 가족도 소돔과 고모라로부터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형제가 형제를 팔아넘긴 이 사건 앞에서도, 하나님은 다시 도모하셨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이스라엘 가족만이 아니라, 이집트 사람들과 그 주변의 많은 사람들을 포함한 많은 생명들까지 함께 살리시는 방향으로요. 그야말로 당신의 많은 백성을 살리는 방향으로요.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늘 언제나 당신의 피조물과 그 세상을 살리는 것을 도모하십니다.
이것이 창세기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을 도모하십니다. 그런데 사람은 악을 도모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것을 다시 선으로 도모하십니다. 사람의 도모는 어그러진 방향으로 향하고 흐르고, 폭력과 피와 죽음을 만들어내지만, 그 속에서도 하나님은 기어이 옳고 곧은 방향으로 길을 내시고 인도하시고, 평화와 살림과 생명을 만들어내십니다. 그렇게 언제나 선을 도모하십니다. 제 아무리 사람이 악을 도모할지라도요. 사람의 도모와 하나님의 도모가 겨룬다면 누가 이기겠습니까? 무엇이 승리하겠습니까?
요셉의 이 고백에는 하나님의 도모하심이 승리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제 아무리 사람이 폭력과 파괴와 멸망, 피와 죽음을 도모하더라도, 그럼에도 하나님은 기어이 자신의 본래 생각과 계획과 의도대로 의와 평화와 세움, 살림과 생명을 도모하시며 만들어내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모가 결국에는 이기고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형들에게 대답할 때 "두려워 마십시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습니까"라며 서두에 말한 것입니다. 형들의 악마저도 기어이 많은 생명을 살리시는 창조의 선한 역사로 만들어내시는 하나님이신데, 내가 어찌 그 하나님을 거슬러 악을 되갚는 보복과 앙갚음으로 폭력과 파괴, 피와 죽음을 만들어내겠습니까. 그것은 내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역사를 대적하는 것이며, 내가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며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는 그 일을 결코 행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 존재 자체가 바로 당신들이 도모한 악마저도 선을 위하여 도모하신 하나님 덕분에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내가 있는 것 자체가, 많은 존재를 살리시고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선한 역사 덕분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수여하시고 그 속에서 살아가게 하시는 그 생명의 역사, 창조의 역사 덕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두려워 마시고 안심하십시오. 나는 그저 그 하나님의 역사를 따라 당신과 당신의 아이들을 부양하겠습니다. 선을 도모하시는 하나님을 따라, 세상과 그 모든 존재들을 살리시고 살게 하시는 생명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따라 당신들과 후손들을 먹여 살리겠습니다.
그렇게 요셉은 형들의 마음 위에 말하며 그들을 위로합니다. 형들은 요셉 위에 악을 도모했음에도요. 나를 향해 악이 겨눠졌던 그 “위에”가, 이야기의 끝에서 위로의 “위에”로 완전히 되갚아지는 것이며, 완전히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형들이 요셉을 해하려 했던 악을, 창세기가 야곱과 형들의 입을 빌려 “반역”이라고 표현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생각과 계획, 도모야말로 살리시고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 도모, 역사를 거스르는 것이니까요. 그것이야말로 선한 창조의 역사를 도모하시는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이며 맞서는 것이니까요. 형들은 동생 요셉을 대적하며 이 하나님께 반역했지만, 요셉은 그런 형들을 위로하며 하나님의 도모하심에 동참하고 순종하며 자신을 내어 맡겼습니다.
우리가 이 생각과 고백 위에 서서 삶과 역사를 바라보면, 보는 것들이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요. 우리가 이 ‘하나님의 도모하심’에 입각하여 삶을 대하고 역사를 바라보면 어떻게 될까요? ‘당신의 많은 백성을 살리시고 살게 하시며 생명을 수여하시고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의 선한 창조 역사’에 입각하여 생각하고 이해하고 해석한다면요? 우리의 인생과 아픈 상처를 대하는 이해와 관점, 시야가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을까요? 마치 요셉처럼요.
우리가 마주하는 상처와 배신, 실패와 절망, 원한과 폭력의 그 모든 사건들이 그 자체로 끝이 아님이 점차 보이고 이해되고 깨달아지고 믿어지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그 말도 안 되는 견해와 관점과 입장이 내 것으로 체화되는 것이 아닐까요?
사람이 다른 사람 위에, 다른 생명과 다른 존재 위에 악을 도모했더라도, 하나님이 그 동일한 자리에 다시 손을 얹어 선을 도모하고 계신다는 것을 믿고 신뢰한다면 어떨까요? 그 믿음의 눈으로 보면, 절망으로만 보이던 자리에서 다른 것이 보이기 시작하지 않을까요.
이것을 잘 보여주는 한 기도문이 있습니다.
2018년 8월 15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와 조선그리스도교련맹(조그련)은 함께 이런 기도문을 썼습니다.
“창조의 하느님!
믿음의 눈으로 보니 분열과 대결의 상징이었던 판문점이 평화와 통일, 번영의 시작점으로 존재합니다. 이제 그곳에서 맺은 평화의 선언이 활짝 꽃피어 온 겨레가 그처럼 바라던 평화와 통일의 열매가 주렁지도록 이끌어 주옵소서. 남과 북, 해외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 번영을 위해 힘써 일하도록 힘과 지혜와 용기를 주시고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이 적극 지지해 나서도록 역사하여 주옵소서.”
판문점은 분단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공간입니다. 코앞에서 얼굴을 마주 보며 서로를 노려보는 적대가 매일 온종일 계속되는 곳입니다. 그런데 남과 북의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의 눈으로 보니”라고 공동으로 고백합니다. 같은 판문점, 같은 자리, 같은 역사인데, 그것을 바라보는 눈을 바꾸자 그 자리가 “평화와 통일, 번영의 시작점”으로 다시 보이고 읽힌 것입니다. 그곳은 사람이 대결과 파괴, 보복과 피흘림, 죽음을 도모한 자리였지만, 믿음과 신뢰의 눈으로 보니 하나님께서는 그 동일한 땅, 그 동일한 자리에서 하나님은 줄기차게 화해와 평화, 살림과 생명을 도모하고 계셨다는 것을 함께 공동으로 고백한 것입니다. 물론, 이 고백의 배경에는 당시 있었던 <판문점 선언>도 한몫 단단히 했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한반도의 허리를 자르고 있는 비무장지대, DMZ(Demilitarized Zone)도 다시 보고 싶습니다.
이곳은 인간이 엮어낸 최악의 직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서로를 대적하여 죽이려 촘촘히 묻어 숨겨놓은 수백만 개의 지뢰, 높고 견고한 담을 세워놓은 철조망, 끝없는 적대와 이념의 전쟁이 엉켜 있는 역사의 흉측한 뒷면입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 지금 그곳은 수많은 멸종 위기 동식물이 살아 숨 쉬는 생태계 보고(寶庫)입니다. 생명과 평화를 주시며 살리시는 하나님의 역사, 인간이 도모한 악을 선을 위해 선으로 도모하시는 창조의 그 하나님을 신뢰하는 눈으로 바라보고 이해하고 해석해보면, 그곳에 대한 이해와 의미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도모한 그 죽음과 살육의 땅을 결코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형제와 형제가 서로 대적하며 죽이고 파멸시키기 위해 무수히 많은 덫을 깔아놓은 죽음의 땅을,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지난 70여 년이 넘는 시간동안 당신의 따뜻하고 선한 창조의 손길로 조용히 묵묵히 꾸준히 그 땅을 어루만지시며 만드셨습니다. 인간이 도모한 폭력과 파괴, 동귀어진과 공멸의 땅에서조차 하나님께서는 기어이 그 땅과 그곳의 모든 존재들을 살려 오고 계셨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생명을 수여해오고 계십니다. 사람은 악을 도모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선을 도모하고 계십니다. 여전히 이 땅과 세상을 당신의 생명이 넘치는 곳으로 만들고 계십니다. 당신께서 보시기에 좋은, 심히 좋은 곳으로 지금까지 늘 언제나 새롭게 창조해오고 계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이 땅과 하늘, 곧 세상 만물과 만유를 선을 위해 선으로 도모하고 계십니다. 그렇기에 그 도모하심에는 한반도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값싼 위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도모한 악을 없었던 일이라 말하는 것도 아니고, “결국 잘될 테니 가만히 있으라”는 무책임한 낙관도 아닙니다. 형들의 악행은 여전히 악행입니다. 한반도를 가른 그 총구와 지뢰와 철조망은 여전히 사람이 저지른 참혹한 역사입니다. 분단의 아픔을 몸소 겪어내신 세대의 고통과 원한은 참으로 깊고, 그것을 함부로 지워버리라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형들의 그 실제 악행을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그 동일한 사건 위에 하나님이 다시 손을 대시고 선을 도모하셨다는 것을 고백했던 것처럼, 우리도 이 아픈 역사를 부인하지 않으면서 그 위에 하나님이 무엇을 다시 도모하고 계신지 믿음의 눈으로 물어볼 수 있지 않을까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이 믿음을 놓지 않고자 1989년부터 조선그리스도교련맹과 함께 8월 15일 직전 주일을 “한반도 평화통일 공동기도주일”로 지켜왔습니다. 2013년에는 세계교회협의회 부산총회에서 이 날을 전 세계 교회가 함께 지키는 날로 공식 결의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2020년부터는 남북 관계가 얼어붙으면서 조그련 측의 응답이 끊겼고, 지금은 7년째 남측 홀로 기도문을 써 내려가고 있습니다. 응답이 없는 자리에서도, 여전히 그 도모하심을 믿으며 기도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결코 소망의 끈을 놓거나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북녘의 응답이 없어 홀로 낭독하는 남녘 교회의 기도는, 허공을 치는 메아리가 아닙니다. 결코 그렇게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눈에 당장 보이지 않지만, 이 끈질긴 기도는 하나님께서 이 민족의 깊은 상처를 평화의 융단으로 엮어내시는 생명의 실타래가 될 것입니다. 이 기도들은 선한 창조의 도모로 지금 쓰임 받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늘 생명을 창조해오고 계시는 하나님의 도모하심의 눈으로 바라보고 이해하고 해석한다면요. 이러한 하나님의 도모하심을 신뢰하기에, 비록 현실은 남북의 대화가 얼어붙고 캄캄할지라도 우리는 평화와 화해를 향한 기도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도모하고 엮어내는 악의 역사가 아무리 집요해도, 그것을 뚫고 기어이 생명을 살려내시고야 마는 하나님의 선한 도모하심을 우리는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보시기에 좋은 세상을 지금까지 늘 만들어오고 계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시킬 수도 없지만) 처음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선한 세상을 당신 스스로 늘 새롭게 만드시고 유지하시고 보존하시고 창조하시는 하나님과 그 역사, 섭리, 도모하심을 우리는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의 존재가, 우리의 일상과 인생이 그 살아있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착취와 수탈, 침탈과 강점, 갈등과 적대, 분단과 전쟁, 그 폐허와 죽음 속에서도 하나님은 오늘날처럼 우리를 해방시키셨고 일으키셨으며 살리시고 살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지금까지 선을 도모하신 하나님께서는 앞으로도 선을 도모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적대와 폭력에도 불구하고요. 그 적대와 폭력, 보복과 앙갚음이 파멸과 공멸을 가져오는지는 모르고 한치앞의 내 이익과 성공을 위해 그 어리석고 악한 것을 도모하는 우리 인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당신의 새 생명을 많은 존재에게 수여하시는 새 창조를 행하시고 도모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주시는 생명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평화목교회 교우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각자의 삶에도 사람이 도모한 악의 흔적들이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받은 상처, 스스로 저지른 잘못, 되돌릴 수 없어 보이는 관계의 균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창세기의 요셉의 고백이 우리에게 말합니다. 사람이 도모한 그 자리에, 하나님도 도모하고 계신다고. 그것도 결국 많은 생명을 살리시고 당신의 풍성한 생명을 베푸시는 방향으로 도모하신다고요
그렇기에 우리 역시 기어이 이 치열한 일상을 새롭게 살아낼 것입니다. 거대 담론으로서의 통일만이 아닙니다. 우리 일상에서 매일 겪는 팍팍한 관계 속에서도, 나를 찌르고 상처 주는 억울한 일들 앞에서도 그것을 의와 평화와 생명을 만드시고 창조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선을 도모하시는 하나님을 주목하며 붙잡으며 흔들리지 않기를 기도할 것입니다.
이 하나님 덕분에 요셉이 자신의 위에 악을 도모했던 형들의 마음 위에 말하며 위로했던 것처럼, 우리도 서로의 마음 위에 화해와 생명의 말을 얹어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하나님께서 빚어주시는 것을 거슬러 우리 마음의 도모가 빚어내는 형태들을 이제는 그만 추종하면서요. 그것이 이 세상과 그 많은 당신의 백성을 살리시기 위해 도모하시는 하나님, 생명을 주시기 위해 도모하시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길입니다바라기는, 지난 80년의 그 아픈 역사도, 나아가 120-130년의 아픈 역사도, 그리고 우리 각자의 아픈 사연들도,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도모하심 안에 있었음을 함께 고백하며 서로 화해하고 위로하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악을 도모하는 우리 인간 때문에 그 일은 요원하고 상상으로만 그칠 것 같아 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그 일을 도모하고 계시고 끝내 그것을 만드시고 창조하실 것입니다. 그렇기에 두 동강 난 이 조국 땅에도, 아파하고 신음하는 우리네 가정과 삶의 자리에도, 생명을 기어이 살리시고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선한 창조 역사가 날마다 새살처럼 돋아날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우리가 현실의 눈으로만 봐서 그렇지, 하나님의 도모하심의 눈으로 이 땅과 우리 일상을 들여다보면, 이미 벌써 우리 주위를 그 생명이 가득 감싸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단지 우리의 시선과 초점이 다른 곳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겪는 이 아픔마저도 기어이 평화와 생명의 선으로 직조해 내시는 하나님의 도모하심 위에서 내 인생과 일상 나아가 이 세상과 역사를 바라보며 살아갈 수 있기를, 서로를 살리고 생명을 주고 흘려보내는 선하신 하나님의 도모하심에 쓰임 받기를, 그 선한 창조의 역사에 감히 참여시켜주시는 하나님과 그 복을 온전히 받아 누리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6년 ‘8.15 한(조선)반도 평화통일 공동기도주일’ 기도문
찬란한 태양으로 아침을 열어 주시고, 달과 별로 밤하늘을 수놓으시는 창조주 하나님, 모든 생명을 품으시고 돌보시는 생명의 하나님, 우리는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주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찬양하며,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백성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만물을 질서와 섭리 가운데 다스리시고, 정의와 평화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우리를 주님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하나님, 주님께서 선하고 아름답게 창조하신 이 세상이 전쟁과 폭력, 탐욕과 증오로 신음하는 현실을 외면하지 말아 주십시오.
특별히 분단 81년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한(조선)반도를 긍휼히 여겨 주십시오. 제국주의의 폭력으로 분단된 이 땅은 오랜 세월 서로를 향한 불신과 적대를 키워 왔습니다. 이제 전쟁을 끝내고 평화협정을 이루게 하시며, 서로의 국호와 체제를 존중하는 가운데 적대를 종식하고 평화적 공존의 길로 나아가게 하옵소서. 화해와 정의로운 평화의 은총으로 한반도를 새롭게 하시고, 이 땅의 평화가 아시아와 세계를 향한 희망의 증언이 되게 하옵소서.
한(조선)반도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우리가 세계의 고통 또한 외면하지 않게 하옵소서. 팔레스타인에서는 오늘도 살육과 학살이 이어지고, 우크라이나에서는 끝나지 않는 전쟁이 사람들의 삶을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미얀마와 아프리카 여러 나라에서는 쿠데타와 폭력, 억압으로 인간의 존엄이 짓밟히고 있습니다. 또한 전쟁만이 아니라 탐욕과 자본, 차별과 혐오의 폭력으로 탄식하는 모든 이웃을 기억하여 주시고, 우리가 그들과 함께 아파하며 연대하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 우리는 절망보다 희망을, 폭력보다 평화를 약속하시는 주님을 믿습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말씀하셨듯이, 오늘도 성령께서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두려움을 넘어 정의와 화해를 향해 나아가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가 서로 연대하며 평화를 향한 걸음을 멈추지 않게 하시고, 가난한 이들과 연약한 이들, 억울하게 갇힌 이들, 차별받는 소수자들의 이웃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가 서 있는 삶의 자리에서 정의를 실천하고 평화를 일구며, 하나님의 사랑을 증언하게 하옵소서.
탐욕으로 전쟁과 폭력을 부추기는 모든 세력에 맞서 하나님의 정의를 담대히 증언하게 하시고,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가 이 땅 가운데 드러나게 하옵소서. 갈라진 담을 허무시고 원수 된 것을 화해하게 하시는 주님, 우리를 정의로운 평화의 길로 인도하여 주십시오.
평화의 주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