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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이란 무엇인가| 문학강좌(隨筆作) 가은 | 조회 9 |추천 0 | 2015.09.07. 23:25
Ⅰ. 들어가는 말
문학은 예로부터 모든 예술 가운데 으뜸의 자리에 있어 왔다. 문학이란 인간의 사상, 감정, 정서, 상상 등을 문자와 기호로 표현하는 예술행위다. 예술에 다양한 장르가 있듯이 문학에도 또 여러 갈래가 있다.
시, 소설, 수필, 평론, 희곡
이것이 이른바 문학의 5대 장르다. 여기에 시나리오를 추가하면 문학의 6대 장르가 된다. 오늘은 문학의 여러 장르 가운데 미래문학이라는 수필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Ⅱ. 수필이란 무엇인가
수필이란 시보다는 길지만 소설이나 희곡, 평론보다는 훨씬 짧은 글이다. 원고지 15장 안팎의 짧은 글 속에 자신의 인생체험 그리고 자연관찰 등 다양한 주제를 자유롭고 진솔하게 나타내는 언 어 예술이 바로 수필이다. "수필이란 독자의 마음에 정신적 그린벨트를 만들어주는 언어예술"이다.
수필을 영어로 번역하면 Essay다. 수필과 영어의 Essay가 약간 다르게 해석하는 이들도 있지만, 일찍이 수필가 윤오영은 "수필은 동양적인 에세이요, 에세이는 서구적 수필"이라고 말한 바 있다. 수필이란 말을 영어로 번역하면 Essay요, Essay란 영어 단어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수필이란 뜻이다. 굳이 수필과 Essay를 구분할 필요는 없다.
동양에서 처음으로 수필이란 말을 사용한 사람은 12세기 중국 남송 때 사람인 홍매(洪邁)란 사람이다. 그는 용재수필(容齋隨筆)이란 책을 썼는데 그것이 처음으로 수필이란 말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의 현곡수필(懸谷隨筆), 조선시대에 연암 박지원이란 분이 일신수필(馹訊隨筆)이라고 사용하 기도 했다. 서양에서는 16세기 프랑스의 몽떼뉴가 처음으로 수상록(Les Essais)이란 책을 냈고, 그 뒤 2년이 지나서 영국의 베이 컨이 수상집을 출판하면서 서양에서 수필의 붐이 일었다.
일찍이 아나톨 프랑스는 수필문학이 미래문학으로서 온 문예를 주름잡을 것이라고 공헌한 바 있다. 그것을 반영이라도 하듯 전국 모든 대학의 국문학과에서 수필론을 정규 교과과정으로 가르치고 있을 뿐 아니라 중앙일 간지와 문예지의 문화센터나 각 대학의 평생교육원 등에서 수필을 공부하는 문학도들이 줄을 잇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수필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고중 있는 이유다.
. 왜 수필을 공부해야 하는가
수필은 다른 어느 문학 장르보다도 생활과 직결되는 문학장르다. 가정이나 직장이나 사회에서 꼭 필요한 것이 바로 수필이다. 당장 청소년들이 부모나 은사 또는 남녀 친구들에게 편지를 쓰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왜 편지를 쓰는가? 수신자에게 내 뜻을 바르게 전하고 수신자가 내 편지를 읽고 감동하여 내 주장을 선뜻 들어주기를 바라서일 것이다. 상대를 감동시키기 위해서는 진솔한 문학인 수필의 형식을 빌지 않으면 안 된다. 더구나 좋은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논술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기 위해서도 수필 쓰기 실력은 절대로 필요하다.
또 대학에 가면 4년 동안 Report나 주관식 시험, 또는 졸업논문을 쓰는 데도 필요할 뿐 아니라 대학 졸업 후 취직시험 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학과실력보다 오히려 <자기 소개서>를 잘 써서 제출해야 시험관의 눈에 띄게 된다.
그뿐이 아니다. 직장에 들어가서도 각종 문서를 기안하거나 각종 프로젝트를 기획하는데도 기본적으로 문장력이 없어 서는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수필 쓰기 능력을 배양해 둘 수 있어야 성공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 수필의 구성과 텔레비전의 다큐멘터리 구성
수필은 대개 4단계로 구성된다. 제목, 서두, 내용, 결미가 그것이다.
수필은 텔레비전의 다큐멘터리 구성법과 유사하다. 제목은 방송의 타이틀이며, 서두는 방송의 오프닝멘트, 내용은 컨텐 츠, 결미는 방송의 클로징멘트와 같다.
방송사의 프로듀서들은 새로운 프로그램을 만들 때 타이틀 즉 제목을 공모할 정도로 크게 신경을 쓴다. 신문이나 잡지의 제목 뽑기도 중요하기는 마찬가지다. 따라서 수필을 쓸 때도 좋은 제목을 지어서 독자의 흥미를 끌 수 있도록 온갖 지혜를 짜낼 필요가 있다.
서두도 대단히 중요하다. 리모콘 시대라서 시청자는 30초 정도 보다가 재미를 느끼지 못하면 바로 채널을 돌려버린다. 수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텔레비전이 시청자를 다른 채널에 빼앗기지 않으려면 프로그램 서두부터 매력을 느끼도록 해야 한다.
수필도 다를 바 없다. 산뜻하며 참신한 서두로 출발해야 독자를 붙잡아 둘 수 있다. 그러기에 텔레비전에서의 '30초 전쟁'이란 말은 수필에서도 통용될 수밖에 없다. 내용이나 결미도 독자의 관심과 공감을 자아내도록 꾸며야 한다. 프로그램을 시청한 시청자나 한 편의 수필을 읽은 독자가 머리를 끄덕이거나 공감의 미소를 짓도록 하면 그 작품은 일 단 성공이라고 보아도 될 것이다.
좋은 수필을 쓰려면 텔레비전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자주 시청할 필요가 있다. 다큐멘터리를 시청하면서 줌 인, 줌 아웃, 팬 등 다양한 카메라 촬영기법에 관심을 갖기 바란다. 그러한 촬영기법은 입체적인 수필을 쓰는 요령이라 해도 좋다.
Ⅲ. 좋은 수필을 쓰려면
지금은 읽을 거리가 넘치는 세상이다. 그런데도 텔레비전이나 컴퓨터, 다른 문학작품집 등 수필 읽기로부터 시간을 빼앗아 가려는 라이벌 매체들이 너무 많 다. 라이벌 매체들과의 경쟁에서 이기려면 좋은 수필을 써야 한다. 좋은 수필은 어떻게 써야 할까?
첫째, 읽기 쉬운 글이어야 한다.
문장이 쉬워서 독자가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어야 한다. 표현은 쉽게 하되 내용은 심오하고 구수하면서도 재미가 있어야 한다. 맛 좋은 음식점이라고 소문이 나면 멀고 가깝고 따지지 않고 식도락가들은 모여든다. 좋은 수필이라고 여겨지면 독자는 그 수필을 끝까지 읽게 된다.
둘째, 간결하면서도 짧은 글이어야 한다.
미사여구가 없는 간결한 문장은 수필의 기본이다. 수필의 문장은 잎새를 모두 떨궈버린 겨울 나무와 같아야 좋다. 형용사나 부사 등 군더더기가 없는 문장은 곧 나목(裸木)과 같다. 일반적으로 수필 한 편의 길이를 200자 원고지 15매 안팎으로 생각하지만 수필의 길이는 더 짧아져야 한다. 요즘은 12매 정도로 쓴다. 활자매체에서도 그렇지만, 인터넷에서는 짧은 수필이 더 인기가 있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던 영국의 처칠 수상도 "나는 짧은 말과 쉬운 문구를 즐긴다."라고 했다지 않던가? 최근에는 원고지 5매 짜리 수필이 등장하고 있다.
셋째, 정이 넘치는 글이어야 한다. 수필은 원래 정(情)의 문학이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서로 교감할 수 있는 따사로운 정이 글 속에 배어 있다면 좋은 수필이라 할 수 있다.
넷째, 즐거움과 재미를 주는 글이어야 한다.
세상살이에 지친 독자들의 호감을 사기 위해서는 독자가 즐거움과 재미를 느낄 수 있어야 좋다. 독자가 한 편의 수필을 읽고 쌓인 스트레스를 풀 수 있다면 금상첨화의 글이다.
다섯째, 품격을 갖춘 글이어야 한다.
유치한 감정이나 저속한 표현, 야비한 내용은 독자에게 천박한 느낌을 주게 된다. 글은 곧 사람이라고 한 말의 의미를 되새겨 볼 일이다. 순수하고 단아하며 품위가 있는 어휘를 사용해야 한다. 정확하고 겸손하며, 감동적인 말에 유머와 위트가 담긴다면 아름답고 서정적인 수필이 될 것이다.
여섯째, 진솔한 글이어야 한다.
꾸미거나 과장이 없는 진실한 문장이어야 한다. 수필은 거짓이 아닌 참의 문학이다. 꾸며낸 이야기는 소설에서는 허용되지만 수필에서는 용납되지 않는다. 진실하고 겸손한 말을 사용해야 한다. 수필이 거짓을 담았을 때 그런 글은 이미 수필의 범위를 벗어난 글이다. 일기에 거짓 내용이 있을 수 없듯 수필에서도 거짓이 담겨서는 안 된다.
일곱째, 아름답고 순수한 우리말을 사용한 글이어야 한다.
품위와 여운이 있어야 하고, 명확하면서도 리듬을 살린 문장이어야 좋은 수필이다. 직설적인 표현보다는 간접적이면서도 은근한 문장이 좋다. 가급적 외래어나 한문 투의 말은 피해야 한다. 아나운서가 우리말을 갈고 닦듯 수필가는 우리 언어의 파수꾼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곁들여 불필요한 약어(略語)사용을 피하고, 비속어와 반복어, 상투적인 언어 따위를 사용하지 않는 게 바람직하다.
. 수필의 특성을 알고 써야
첫째, 수필은 자기 반성의 문학이다.
수필이 '내 탓'부터 출발하지 않고 '네 탓'부터 시작한다면 그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자기 반성을 통해 독자에게 깨달음을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수필은 나로부터 출발하는 1인칭 문학이다.
둘째, 수필은 무형식의 문학이다.
시나 소설, 희곡 등은 일정한 형식이 있다. 그러나 수필은 일정한 형식이 없다. 제재에 따라, 수필가의 개성에 따라 수필창작의 형식이 모두 다를 수 있다는 의미이다. 수필의 형식은 다양하다..
셋째, 수필은 다양한 제재의 문학이다.
인간국보라고 자칭했던 양주동 박사는 우수마발(牛馬勃)이 모두 수필의 제재라 했다.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코로 맡아지는 것, 피부로 느껴지는 것, 마음에 다가오는 것, 머리로 생각되는 것 등 모든 것을 수필이란 그릇에 담을 수가 있다. 수필은 용광로와 같은 문학 장르이다.
넷째, 수필은 고매한 인격의 문학이다.
수필가는 포용력이 있어야 하고, 항상 역지사지(易地思之) 하는 자세를 지녀야 한다. 입장을 바꿔 생각할 줄 알아야 좋은 수필을 쓸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런 자세로 글을 쓰면 편향된 글, 일방적인 글에서 벗어나 독자의 공감을 살 수 있다.
다섯째, 수필은 해학적 비평정신의 문학이다.
알베레스란 사람은 수필은 지성을 바탕으로 한 정서적 신비적 이미지의 문학이라고 말한 바 있다. 적절한 유머와 위트를 곁들이고, 또 사회문제까지도 주제로 다뤄 문제제기를 하는 것도 수필의 몫이 되어야 한다.
여섯째, 수필은 예술성과 철학성을 융해시킨 문학이다.
수필에 예술성과 철학성이 담기면 품격 높은 문학수필이 될 수가 있다. 수필이 정통문학의 반열에 오르려면 꼭 필요한 과제가 바로 이것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바람직한 수필가의 자세
수필은 머리로 쓰지 말고 발과 가슴으로 써야 한다. 농촌의 마당에서 벌레나 풀잎, 곡식 등 먹이를 자유롭게 주워먹는 암탉이 건강한 달걀을 낳듯, 수필가는 발로서 수필 소재의 현장을 답사하고 그 감흥을 글로 써야 한다.
또 수필가는 거리를 지나다 만난 걸인에게 동전 몇 닢이라도 쥐어줄 수 있는 따뜻한 가슴을 지녀야 좋은 수필을 빚을 수 있다. 수필은 겸손의 문학이다. 자기 자랑을 내세우거나, 남의 잘못을 꾸짖는 것은 수필가의 바른 자세가 아니다. 자기 반성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한 문장에서 같은 어휘가 되풀이되거나 동일 어법이 중복되지 않도록 글을 써야 한다. 많은 소재를 노트에 기록해 두거나 스크랩하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그것은 필요할 때 사용하기 위해 돈을 저금통장에 넣어두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문장의 단락(paragraph)을 적절히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은 독자가 내용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고, 짜임새 있는 글이란 인상을 심어줄 수 있다. 완성한 원고는 오래 묵혀두고 퇴고(推敲)를 거듭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등단을 서두르거나 원고발표에 연연해해서는 안 된다. 좋은 작품이라고 스스로 판단될 때에만 원고를 발표해야 한다. 얼마나 많은 수필을 썼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얼마나 좋은 작품을 발표했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나의 이웃, 동물이나 식물 등 우주만물에 많은 관심과 애정을 갖고 바라보고 자기만의 독창적 표현법을 찾아야 한다. 좋은 수필의 소재는 바로 거기에 있다.
. 초보자의 수필 쓰기 3단계
유명 수필가의 좋은 작품을 원고지에 옮겨 써보자. 서예공부를 할 때 선생님의 글씨체를 받아서 흰 종이가 까맣게 되도록 반복해서 써보는 것처럼 하라는 말이다.
또 유명한 수필을 선택하여 내용을 자기 식으로 바꿔보자. 그런 다음 자기만의 독창적인 소재로 자기 글을 써보자.
초보 운전자가 어떤 과정을 거쳐 숙달된 운전자가 되는 지를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Ⅳ. 나가는 말
2002 한·일 월드컵 축구에서 유사이래 처음으로 한국 축구를 4강으로 끌어올린 거스 히딩크 감독은 대표선수들의 기초 체력을 강화시켜서 그처럼 좋은 성적을 올렸다. 문학 특히 수필을 공부하는 데도 히딩크 훈련방식은 통용된다.
축구 선수가 기초체력을 강화하는 것 같이 바로 수필 쓰기에서 꼭 필요한 한글 맞춤법 등 문법공부를 철저히 해야 된 다. 그러한 바탕 위에 수필의 탑을 쌓아야 한다.
수필은 바로 생활문학이다. 수필이란 안경을 끼고 우리네 일상을 바라보면, 평소에 사소하게 여겼던 일상사들이 새롭게 다가올 것이다.
암탉이 많은 먹이를 주워먹어야 튼튼하고 영양가 높은 달걀을 낳듯 많은 독서와 다양한 체험을 쌓아야 좋은 수필을 쓰 게 될 것이다. 쓰면 쓸수록 어려운 게 수필이긴 하지만 쓰면 쓸수록 재미가 붙는 것도 또한 수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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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이란 무엇인가? 수필론 ─ 유희봉교수 유희봉 | 2014.10.05. 17:56
수필이란 무엇인가
현대시점에서 수필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수필의 개념과 성격에 대하여 해석이 분분하다. 글자 그대로《붓가는대로 쓰 는 글》《무형식의 글》이라고도 하고 비전문 적인 글, 자기 성찰의 글, 자기 고백의 글, 중년세대의 글…등으로 풀이 되고 있는데 모두 지난세기 30년대의 기원된 정의들이라는 평판이 힘을 얻고있다.
한국에서는 에세이라고도 하고《논픽션》이라는 외래어로 명명하기도 한다. 또 《여가의 문학》이라는 사람도 있는데 여가로 수필을 쓰는 사람이 없다는 실정에서는 엉성한 제기법이다. 수필은 절대 붓가는대로 쓰는 무질서한 글이 아니 다. 홍매로부 터 기원된 수필ㅡ붓가는대로 쓴다를 오독하지 말아야 한다. 생각나는대로 쓰는것으로 해석해도 어페이다.
중년여인의 글이라는 수필가도 있지만 수필창작자들의 년령구조, 성별이 그것을 부정하고 있다. 한국의 명수필가 피천 득 선생은 수필을《청자연적》에 비유하였는데 효용성에서 최고경지에 피워올린 꽃으로 생각한 까닭이라고 한다. 그러나 모든 수필이 청자연적일수 없다. 마음을 간지르는 수필이라면 그럴듯도 싶지만 개연성은 청자연에 만 머물라는 법이 없다.
물은 형태가 없지만 그릇에 따라 그 모양이 변한다. 수필도 마찬가지다. 수림 속에 온갖새들이 저마다 다른 목소리로 노래하듯이 수필도 각양각색일수밖에 없다. 특히 생활체험 속에 감수를 쓰는 글인만큼 영원히 개성적일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수필은 삶의 문학이란다. 수필만이 삶의 문학인가? 아님은 자명하다. 모든 문학 이 삶의 메아리이다. 수필은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라고도 하고 그냥 낙서일수도 있다는데 자신과의 대화임은 사실일세 뇌까림이 아니라 방백이다. 수필이 자신의 삶에 대한 자각과 의미부여에서 그치면 일기차원이다. 자기 인생을 의미화하는 궁극적 목적은 독자와 의 담화가 아닌가? 누구나 짙거나 강렬한 정서성을 전달하려는 목적 에서 글을 쓸 것이다.
문학일반이 인생마당의 조명이라면 수필도 인생현장을 조명하고 탐구과제를 내주는 글이 된다. 그리고 그것의 전제 로 보편적인 공감성을 내세운다. 물론 수필의 흡인력과 공감은 진실성에서 기원된다. 이 시점에서 비록 길지는 않은 글 이 지만 절대 여유로움을 가지고 쉽게, 가볍게 씌어질 수 없다는 잠규칙이 세워진다. 수필창작을 하기 전 인간수련을 하라는 것도 수필은 그 사람의 인생비밀이 되기 때문이다.
수필은 자기 생명의 향기를 피워올리거나 생명을 연소시키는 것으로서 자기 자신 만큼의 글을 쓴다. 자기를 닮지 않은 것을 낳는 동물이 없듯이 자기 고백의 글. 자기 성찰의 글이라는 수필에서는 자신을 그려내지 않을 수 없다. 수필작자는 독자와 인격적으로 만나서 생각하는 바를 고백하는 것이지 체험담을 늘여놓는 것이 아니다.
리드는 자기《영국산문록》에서《심중에 잠재해 있는 관념이나 기분-정서를 표현해 보는 것은 일종의 시도이다. 그것은 관념이나 기분-정서 등과 상응하는 어떤 류형을 언어로써 창조하는 비형식의 시도이다.…한마디로 수필은 특정 인에게 보낼 필요가 없는 하나의 공개장이다.》라고 하였다.
몽테뉴에 의하면 수필은 가장 절실한 체험의 표현이다. 몽테뉴의 이러한 독백이 바로 수필의 시작이고 성격으로 형성 되었다. 자신의 신변에서 일어난 일에서 받은 감수, 발견, 사색을 다루는 문학이다. 그러므로 자기만의 체취가 풍겨야 다른 사람들 이 공감하는 수필의 묘미가 구비된다. 수필은 확실히 특정된 형식과 내용에 제한이 없이 무엇이든 소재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로운 산문의 일종임은 사실이다. 수필은 무형식의 형식이 특징이라고 한다. 이것이 수필의 성격 이라고 공인되고 있다.
수필에서는 자기의 감정을 서정화하는 동시에 객관화해야 한다. 작가의 개인적 정서나 체험도 보편적인 공감대를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기의 생각을 주관적으로 하기보다 공유화해야 한다. 시가 주관정감으로 감동을 주는 문학 이라면 수필은 개체 적정감을 객관화하여 감동을 시도하게 된다. 자기의 체험을 소개하기보다 분석하고 제시해야 한다. 수필은 이야기자체가 아니기에 분석적이고 해설적이야 한다.
수필 글은 진실함에서 살아나고 분식에서 죽는다. 그만큼 수필글에 기발한 착상이 란 있을 수 없다. 수필을 무형식의 글이라지만 구성이 홀시되는 것이 아니다. 정감의 논리성은 수필구조의 기본요구이다. 수필은 재치있는 글솜씨에 서만 완성되지 않는다. 쌀로 밥짓는 솜씨가 아니라 향기로운 술을 빚어내는 작업에 해당한 글재간이다. 새로운 감각, 짙은 흥미성, 정서적 감염. 평화로운 기분, 유익한 지식성, 느끼하지 않은 교훈성. 삶에 대한 재인식, 생활에 대한 애착감, 교 묘하게 심어주는 지혜의 불씨…등 가치발견과 의미부여로부터 받아 안은 인생공부가 되는 데서 산생된다.
한편의 수필에서 내가 미처 체험하지 못한 미지의 생활정경이 그려지면 호기심이 당긴다. 풍부한 상상력은 흡인하고 작자의 독특한 안목과 발견, 해석은 경탄을 불러 오고 유모어와 해학이 넘치는 수필에는 즐거움이 묻어나오며 선구 적 인 통찰력과 예리 한 비판성은 통쾌감을 선물한다. 자기과시나 설교, 훈계가 아니라 그저 설복 당하는 멋이 좋다. 이렇듯 수필의 효용성은 개인체험이지만 권유하지도 않고서도 공유화되고 사회적 인식의 재확장이 되는 데서 잘 체현 된다.
일상의 체험이지만 나는 왜 못느꼈을가 개탄하게 되는 때에 감각의 새로움, 지 적인 흥미, 정서적 공감, 진선미를 무상 으로 제공받으면서 좋은 수필이라고 값을 매기 게 되는 것이다. 하다면 좋은 수필의 구체적조 건은 무엇인가? 수필은 체험의 과정과 사건의 전말을 기록하는데 흥미 없다. 체험한 사실과 행위의 차원을 넘어서 자기만의 느낌과 해석의 부 여가 중요하다.
기록문은 기록이라는 의미에서는 가치 있지만 수필은 문학인만큼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데서 예술가치가 창출되어야 한다. 수필은 체험에서 얻게 된 인생의 의미를 비쳐주는 하나의 거울이다. 그것이 바로 수필이 노리는 형상화이다. 그리고 독자는 그 거울 속에서 예술적 향수를 느끼면서 자성하게 된다. 수필은 인생미학을 창출하는 문학이므로 수기 와도 다르다. 비록 개체생명이지만 그런 만큼 독자에게 중요한 것은 작자의 생활경력이나 체험의 전말이 아니라 인생의 의미와 발산되는 인격 역량이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체험의 서술은 진부하다. 어떤 모양으로 빚든 그리고 비틀고 늘구든, 굽든 찌든 밀가루의 기본성 질은 변하지 않는다. 다양한 형태의 밀가루음식을 먹는 것은 감각문제이지 무슨 발견의 문제가 아니다. 평범한 체험 이라도 그 속에서 참신한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고 새롭게 해석해야만 좋은 수필로 될 수 있다. 같은 모래를 일면서도 금싸라기를 찾아내는 사람이 따로 있듯이 수필도 그렇게 써야 한다.
체험한 그대로 느낀 그대로 토로하는 수필이어야지 무병신음하지 말아야 한다. 소설을 비롯한 다른 쟝르는 예술 경지에 이르게 한다면 수필은 인생경지에 이르게 한다. 세상을 살아가는 것과 문학창작은 궁극적으로 세상을 보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독일의 현대파시인 노발리스는 이렇게 쓰고 있다.《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에 접촉되어 있다. /들리는 것 은 들리지 않는 것에 접촉되어 있다./생각되는 것은 생각되지 않는 것에 접촉 되여 있다.》고 말했다.
본다는 것은 단순한 목적일수 있지만 생각하는 것은 무목적일 수 없다. 본다는 것은 충동, 관찰, 발견, 사색에 이른 다. 그리고 그것을 드러내기이다. 작자는 체험의 내용 과 느낌을 전달하지만 독자들은 내용보다 느낌, 의미의 부여에 흥미 롭다. 작자에게는 소중한 체험이어서 드러내고 싶겠지만 자기를 너무 의식하는 자기도취이기 십상이다.
수필은 자기를 의식하고 쓰기보다 독자를 의식하고 써야 한다. 독자는 작자의 신변잡사에는 별로 흥미 없다. 그리하여 수필에서 가장 재치 있게 처리해야 할 문제가 독자에게 고백해야 할 것과 혼자 간직해야 할 것을 분별하는 것이다. 그냥 체험이 소중하게 느껴져 기록이나 수기단계에서 끝나면 독자는 별 볼일이 없게 된다.
무엇을 고백해야 독자들이 솔깃할 것인가? 바로 주제 ㅡ사상인 것이다. 자기 삶에 별다른 철학관념이 없는 사람은 돼지 의 포식과 소크라테스의 고뇌에서 선택을 수요 하지 않는다. 체험담에서 인생경험은 나올지 모르나 그에 그치면 인생철 학이 나오지 못한다. 축적된 지식이 철학을 낳는 것도 아니다. 체험은 부어 넣은 주전자 물처럼 바닥이 드러나지만 느 낌과 사색은 샘물처럼 그냥 솟아나온다.
행동하기 전에 생각하고 행동하면서 생각하고 행동이 끝난 뒤에도 생각하는 사람은 어떤 인생철리를 도출해 낼 것이다. 그것은 원인에서 결과를 얻은 사색의 열매이다. 철학은 사색에서 얻어진다. 인간이란 무엇이고 인생고란 무어냐 하는 사색의 저 끝에 철학이 묻어나올 수 있다.
생활이 철학을 낳는다. 철학은 생활의 부산물이다. 부산물이면서 결과적으로는 근원과 근간과 뿌리가 되여서 인간의 생 활을 관리하고 통제하고 정의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철학사상, 생각의 뿌리는 독자들의 생활의 옥토에서만 깊이 뻗어간 다. 수필을 나무로 비유해 말할 때 표현의 꽃은 예술이요 사색의 뿌리는 철학이다.
주제란 무엇이냐? 흔히 작가가 작품을 통해서 나타내려는 의도이다. 그 의도는 대부분 철학적 과제와 연결되어 있다. 주제가 곧 철학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주제를 있게 하는 바탕에 철학이 있다. 그래서 어떤 철학을 가졌는가에 따라 서 사색의 글인 수필의 주제에 한계가 그어진다. 어떤 주제 또는 철학을 형상으로 바꾸어놓는 것이 수필창작이다. 철학이 없는 예술은 씨앗이 없는 과일과 같다.
수필에도 사상이 있느냐? 철학이 곧 사상이 아니냐? 등의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인간이란 무엇이냐? 어디에서 왔는가? 동일한 사람의 많은 수필이 한결같이 동일한 문제로 엮어지는 이유는 내면의 사상테두리 안에서 나오지 못하 기 때문이다. 보통 경수필보다는 중수필에 사상이 더 짙게 표현된다. 까닭은 중수필이 생활 주변의 감성적인 이야기보 다 자연과 인생에 철학적이고 객관적인 과제에 몰두하기 때문이다.
사상과 감정을 문자로 표현한 것이 문학이다. 일단 사상이 생기면 견해와 주장을 피력하려 한다. 동일한 어떤 사태에 부딪쳤을 때 철학 또는 사상을 가진 사람과 사상이 없는 사람은 세상을 보는 시각과 인생에 대한 감수에서 질적인 차이 가 있다. 자신의 삶 자체만을 문제 삼을 때 자기의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을 인정할 수 없다. 생명운동 과 그 표현 보다 더 심각한 주제가 있는가?
철학사상이라고 말하듯이 양자는 아들과 어머니 같은 관계인지도 모른다. 사상은 생명력을 가진다. 사상과 감정을 문자 로 표현한 것일 때 사상과 감정의 관계는 파도와 그 밑에 심해와도 같다. 파도는 끊임없이 흔들거린다. 그러나 그 파도 는 심해에서 일게 된 것이다. 격랑이 일어날 때는 심해에도 동요가 온다. 사상은 만고불변이 될 수 없다. 인생을 흔들만 한 큰 사건에서 사상에도 변화가 일어난다. 사상과 감정을 부침 (浮沈)의 차이에서 구별하지만 나타날 때는 마음이라는 하나가 된다.
중국의학계에서 쟁론되고 있는 심주신명(心主神明)설과 신주심명(神主心明)설을 결합하여 말한다면 마음 안에 사상도 있고 감정도 있다. 많이 움직이는 부분을 감정 이라 하고 적게 움직이는 부분을 철학 또는 사상이라 할뿐이다. 잎이 무 성한 나무에 비교해보자. 나무의 뿌리는 땅속에 묻혀있지만 그것의 구체적인 표현은 가지와 잎에 있다. 이때 뿌리가 사 상이라면 가지는 철학이 되고 잎은 감정이 될 수도 있다.
제각기 다른 그날그날을 개체성이라 할 수 있다. 개체성이란 그래서 각각 다르게 나타나는 개체의 구체적인 모습이다. 그런데 이 개별성의 밑바닥을 살펴보면 동일한 것이 흐른다. 개체적 생활은 나름대로의 원인, 과정, 결과에서 모두 다 르게 엮어진다. 그러나 그 바닥에 공유되는 것이 있다. 보편성은 어떤 인간, 어떤 사건에도 공유한다.
그리하여 개체성은 그것이 어디에 있든 저변에 보편성이라는 분모로 연결이 된다.
서양사람들의 에세이의 원뜻은 도전이다. 도전해야만 새로운 것을 얻을 수가 있고 거기에서 변화된 모습을 찾을 수 있 다는 것이다. 수필은 사실을 기록하고 경험이나 체험을 사실대로만 적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지만 실천에서는 그냥 그렇게 진행되고 있다. 수필은 시대, 사회, 인생에 대한 도전이 되여야 한다.
수필 창작에 있어서 ‘낯설게 하기’와 ‘형상화’ 문제가 많이 나오고 있다. 그것은 도자기의 완성과정과 비교할 수 있을 것 이다. 즉 도공이 진흙으로 여러 형태의 도자기를 빚었다면 애벌구이단계를 거친 후, 다시 두벌구이단계까지 마쳐야 제 품이 완성된다. 수필 창작도 마찬가지다. 소재와 주제로 수필구조를 얽었으면 해석단계와 해석의 구체적 표현단계를 거 쳐야 비로소 한 편의 작품이 완성된다. ‘낯설게 하기’는 애벌구이, 해석단계까지에서 있는 일이고, ‘형상화’는 두벌구이, 구체적 표현단계를 거친다는 것에 비견해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1). 낯설게 하기
주제는 소재를 어찌 보았느냐 에서부터 해석되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낯설게 하기’란 낯익은 평범한 사물에 대한 고정관념의 탈피가 먼저다. 일상의 반복성 속에서 힘을 잃고 무감각한 이미지 상태를 신선한 충격적 언어로 작품의 참 신성을 더 높여 독자에게 다가서는 것이다. 즉 사람들의 보통관점이나 일상 언어를 낯설게 바꾸어서 새롭게 재구성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고로 ‘낯설게 하기’란 창작과정의 선택적 수단이라고 볼 수 있겠다. ‘낯설게 하기’는 1930년대 러시아 의 형식주의자 쉬클로프스키에 의해 제기되었다. 그것은 ‘문학 관습의 보편적 법칙을 깨트리라’는 사조로서 최근 포스트 모던이즘에서 각광을 받고 있다. 또 ‘낯설게 하기’는 여러 측면에서 시도되고 있다. 예컨대, *소재의 선택차원, (아주 특이한 글감을 찾거나 숨어있는 의미를 찾는다.) *기법의 차원, (규격화된 대상을 일탈시키는 전략이다.) *구조적 차 원, (문학적 이야기와 행동의 재구성이나 재배열을 통한 조직화를 꾀한다.) *언어 표현적 차원, (일상적인 언어를 신 선감이 있고 탄력 있는 말로 표현을 바꾼다.) *해석 의미화적 차원, (보편적 주제 해석을 포스트모던 식으로 바꾼다.)
예문 하나를 들어보자. “지금도 그 남자는 해운대에 가면 바닷물이 싱겁다고 우긴다. 맛 봐, 맛을 보라고. 손가락에 장 을 찍듯 검지 하나를 세워 들고 싱거운 장난을 건다. 처음 만난 그날처럼.” “허풍이든 사기든, 먹혀 드는 상대가 있어야 신이 난다. 싸움도 상대가 만만찮게 버텨줄 때 흥미로운 것이다. 고장 난 배를 타고 정박한 선장처럼, 전의를 잃은 장수 처럼 기진맥진한 그 남자를 위해 나는 기꺼이 다음 항해를 자청했다.”(강숙련. <내가 만난 남자> 서두, 결미 단락) 작 가는 익숙한 남편을 서두에서 결미에 이르기까지 끝내 그 남자로 일관했다. 또 매번 모시적삼을 입고 나타나는 사람으 로, 낯설기 기법이 성공한 작품이라 하겠다.
작가의 작품창작의 길은 어쩌면 ‘낯설게 하기’의 현장이 될 수 있다. 또한 실험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해석 또는 의 미화는 우선 참신하고 개성적이어야 한다. 그것은 육안이 찾아 떠올린 어렴풋 윤곽을 심안과 영감으로 구체화해야 한 다. 마치 몇 수 앞을 읽은 바둑수 같이 진전되면 더욱 좋을 것이다. 예술적 감동은 바로 그 참신한 발상에서 생성되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러한 실험을 통해서 독자들을 낯선 감동의 세계로 이끄는 도전자가 되어보아야 할 것이다
(2). 형상화
수필의 문학적 성취는 첫째 참신한 소재, 둘째 참신한 해석 또는 의미화, 셋째 참신한 표현, 즉 형상화에 의해 성패가 갈린다. 해석이 구체적 사물이나 사건의 의미 읽기라면 형상화는 추상적인 개념을 구체화시키는 것을 말한다. 더 나아 가서 구체적 사물을 감각적으로 강화는 것이다. 즉 눈에 확 들어오게 하거나 손에 잡힐 듯 뚜렸한 느낌이 닫게 하는 기 법이다. 하나의 작품이 문학 수필로 성공하느냐 그러지 못하느냐는 이 형상화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 다. 해석 또는 의미화만 있고 형상화가 없으면 관념적인 작품이 되고 말지만, 해석과 형상화가 함께 어우러지면 감동이 배가된다. 성공한 작품은 모두 이 과정을 거치고 있다. 그래서 사진찍기 묘사나 스토리 텔링으로는 수필이 될 수 없지 만, 깊은 관조를 통한 해석과 눈길을 사로잡는 형상화는 문학수필이 갖춰야 할 필요조건이자 충분조건이라 하겠다.
서정수필에서 이 형상화란 주로 비유라는 과정을 통해서 도달하게 된다. 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비유는 추상적 개념 을 구체적인 사물로 환치한다. 그뿐만 아니라 같은 구체적 사물을 감각적으로 강화하기도 한다. 다음 수필을 예로 살펴 보자.
(1) 오월은 금방 찬물에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2) 하얀 손가락에 끼어 있는 비취가락지다
오월- 피천득
오월이라는 개념을 (1)찬물에 세수한 스물한 살 여인의 얼굴과 (2)하얀 손가락에 끼어있는 비취가락지에 비유함으로서 오월의 청신한 계절감을 감각적으로 구체화시키는데 성공했다. 해석과 형상화의 과정을 가장 명료하게 보여주는 수필 은 아마도 이양하의 나무가 아닌가 한다.
A 나무는 덕을 지녔다. 나무는 주어진 분수에 만족할 줄 안다. 나무로 태어난 것을 탓하지 않는다.
B 나무는 고독을 안다. 나무는 고독을 견디고, 고독을 이기고 고독을 즐긴다.
C 나무는 원망하지 않는다. 베어 간 재목이 혹 자기를 해칠 도끼자루가 되고 톱 손잡이가 된다 하더라도 이렇다 하는 법이 없다.
a 나무는 안분지족의 현인이다.
b 나무는 고독의 철인이다.
c 나무는 견인주의자다.
A,B,C는 나무라는 소재에 대한 해석이고 a,b,c는 그 해석된 내용을 비유를 통하여 형상화시킨 것이다.
수필은 허구의 스토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지만 서사적 성격이 강한 자전적 수필에서는 사실에 충실하면서도 주제 를 감동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이같이 형상화의 단계를 거쳐야 한다. 다시 말하면 문학의 성취도는 참신한 소재와 참신 한 해석 그리고 그 해석을 어떻게 참신하게 형상화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지성과 감성의 비율이 잘 배합되고 오랜 퇴고과정에서 얻어낸 단문과 음율로 전체 문장이 물 흐르듯 읽힌다면 성공한 문학수필이 아니 될 수 없을 것이다.
-참고문헌; 안성수. 명 수필 이론, 손광성. 수필의 예술성을 위한 방법론.-
2007년 2월 11일. 미주한국문협 특강 원고
수필은 미래의 문학이다/권대근
흔히 문학을 좀 하는 사람들은 수필을 미래의 문학이라 부른다. 수필의 이 같은 특성은 시와 소설과 달리 수필을 죽지 않고 살아 남게 할 것이다. 독자가 없는 문학은 죽은 문학이나 마찬가지다. 오늘날의 시대 특성상 시나 소설은 일상 생 활사에 바쁜 현대인에게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대중으로부터 점차로 멀어지고 있다. 상대적으로 수필은 다양하고 친밀 한 제재와 적절한 분량의 길이로 인해 쉽게 일반 대중과 만나게 된다. 수필이 미래문학의 대표 자리를 지키게 되는 까 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모든 사람과 친숙한 문학, 일반 대중과 함께 하는 문학으로서 그 역할을 충분히 해 낼 문학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겠다.
우리가 수필을 말함에 있어서 우선 부딪치는 문제는 옛날의 많은 산문을 수필로 잡느냐 하는 것이다. 한국 수필문학의 연원은 7세기말 (신라 신무왕 11,A.D.691)까지 소급한다. 즉 설총이 신무왕을 충간하기 위해 쓴 <화왕계>를 효시로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수록된 상당한 분량의 산문이며, 이인로의 『파한집』, 이제현의 『역옹패설』 등 실로 많다.
우리 나라 고대 문학에서 소설은 지식인들 사이에는 금기의 문학으로 취급된 반면에 산문창작과 시 창작 지식인의 중요 한 조건의 하나였다. 따라서 산문과 시는 지식인들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어왔다. 특히 산문은 오늘날까지 놀랄 정도로 많이 보존되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작품 가운데는 선인들의 환경에서 우러난 독자적인 의식과 감정이 풍부하게 묘사되 어 현대적인 수필의 성격으로 볼 수 있는 것도 없지 않지만, 반면에 수필로 보기 어려운 잡문이 태반을 이루고 있다.
현대 수필은 문학으로서의 산문이다. 따라서 오늘날 수필문학은 홍매의 수필이나 이제현의 패설이 아니며 매천의 야록 이나 유몽인의 야담이 아니다. 홍매의 <용재수필>에서 수필이란 용어는 장르적 의미로 쓰여지지 않았으며, 그 작품들 을 결코 수필의 범주에 넣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백운소설이 오늘날 소설이 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렇다고 해서 그때 당시의 수필이나 산문이 가치가 없다거나 내용이 빈약하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오늘날 문학으로서 수필로 볼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흔히들 신변잡기나 기타 너절구레한 글들을 수필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문학이라는 말을 염두에 두고 하지 않는 말이다. 오늘날도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할 많은 산문들이 수필이라는 이름으로 발표되고 있다. 이러한 사이비 수필의 홍수는 고대수필의 잡다한 세계를 연상케 하는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이 엄청난 난센스는 수필을 사랑하는 사람이면 몹시 애 석해 하는 일이다. 특히 신문이나 잡지는 덮어놓고 수필이 아닌 잡문을 옹호해 주고 감싸준다. 이렇게 될 때 수필의 발 전은 암담하지 않을 수 없다.
해방후 20여 년 동안 수필은 소설, 시와 함께 얼마나 만족할 만한 발전을 거두어 왔던가. 피천득, 이양하, 윤오영 등의 한국 수필을 문학적 수준까지 승화시킨 공로가 아니었다면 그야말로 수필문단은 불모지나 다름이 없었을 것이다.
수필이란 시나 소설이나 희곡으로 다룰 수 없는 고유한 문학형태다. 그래서 문학에서 수필이 존재하지 않는 문학이란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다. 윤오영은 수필이란 가장 오래된 문학형태인 동시에 가장 새로운 문학형태요, 미래의 문학 형 태라고 말했다. 그것은 지금까지 수필이 있어 왔지만 수필다운 수필이 없다는 말도 되며, 수필은 아직도 다른 장르에 비해 무한히 발전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다.
수필은 발전되고 새로워져야 한다. 여기에 수필가들의 사명이 있고, 수필가의 숨가쁜 번뇌와 몸부림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수필은 미래의 문학으로서 그 역할을 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수필은 미래의 문학이다/권대근;
수필이란 어던 것인가 - 수필의 특성
수필은 독특한 개성(個性)의 문학이다. - 창조성 수필만큼 개성이 강한 문학도 없다. 수필은 자기의 개성을 드러내는 것이 본연인 문학입니다.
<참고 글> 몽테뉴 수상록에서 자기에 관한 모든 것을 얘기하는 것이고, 또 자기의 소신 있는 목소리 곧 주장과 주의 그 리고 세계관, 새로운 발견, 자신만의 명상, 자기만의 습관, 자기 고유의 체취 등을 숨김없고 유감없이 드러내는 데에 수 필의 묘미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나만이 할 수 있는 자기만의 독자성과 체험의 세계, 정서의 세계를 자기만의 맛과 멋으로 펼쳐내는 것이 자기다 운 수필을 쓰는 모습이며 수필로서의 개성(個性)을 꽃피우는 일이 될 것이다. 사람은 살다 보면 많은 사건을 만들고, 또 만나게 된다. 그러나 이런 사건과 만남 속에서 사람답게 살아가야 한다는 방향성과 인간애를 건져내는 것이 수필이다.
'나'는 세계의 중심이며, 모든 사상의 중심일 수도 있다. 나를 발전시킨다는 것은 세계의 발전으로 연결될 수 있다. 따라서 '나'를 가장 중시하면서 그 '나'를 통해 만인을 생각하는 것이 수필인 것이다. 사실은 거기에 수필의 매력이 있다 할 수 있다.
[예문.2]
불혹의 나이를 넘기고 지명에 이르러 이제 연의 일생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인지, 진흙 속의 세태 속에서도 내 삶의 기 쁨을 연꽃처럼 피워낼 수 있을 것인지, 겨울 연지를 떠나오면서 자꾸자꾸 뒤돌아보는 것이다.
- 신일수의 수필 <겨울 연지에서> 중에서
[예문.3]
나는 겨울에 벌거숭이가 된 나무들이 상록수보다 더 좋다. 상록수가 만약 잎이 진다면 그 모습은 얼마나 보기 흉할까. 원체 그들의 가지는 빈약하고 보잘 것이 없다. 그러나 잎이 다 지고 난 벌거숭이 나무들이 내놓은 하이얀 피부와 모든 것을 떨쳐 버린 밋밋한 가지들은 동양화의 여백 같은 여운을 준다. 그들의 생각은 깊디깊어 하늘로 뻗치고 일부분은 남 가람에 적시우고 있었다. 남강 변의 겨울나무처럼 이 고장에서 뿌리내려 진실하게 살아가고 싶다.
담담히 살고 싶다.
- 정목일 수필 <남강 부근의 겨울나무> 중에서
[예문.4]
떠오르는 해는 이제 내 몫이 아니다. 서녘 하늘을 아름답고도 장엄하게 물들이는 저녁 노을을 바라볼 때마다 나는 내 인생의 종장을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숱한 오류, 숱한 실패, 숱한 잘못, 이 후회와 부끄러움을 깨끗이 지워 버릴 수 있는 지우개가 있으면 좋겠다. 일흔 여섯 살의 지미 카터가 사랑과 봉사로 실패한 대통령이란 불명예를 지워가듯이, 나 또한 이기(利己)의 너울을 벗고 타인에게 따뜻한 마음으로 손을 내민다면, 내 노년에서도 잿빛을 거두워 낼 수 있을까. 지금 나는 아침 해를 바라보며 저녁 해를 떠올린다.
그 낙조(落照)가 물들일 아름다운 저녁노을, 그것은 내 마지막 욕심이자 꿈이 될 것이다.
- 이정림의 수필 <저녁 노을> 중에서
<겨울 연지>에서 작가는
진흙 속과 같은 세상의 삶 속에서 자신도 견뎌낼 수 있을 것이며, 거기다 아름다운 연꽃처럼 자신도 삶의 기쁨을 피워 낼 수 있을 것인가 하고 자신을 수없이 돌아보고 있다.
그런가 하면 <남강 부근의 겨울나무>의 작가는
상록수보다 나목(裸木)을 좋아하는 이유를 말하고 있다.
벗어버린 초라한 모습에서 오히려 동양화에서 보는 여백의 여유를 본다는 것이다.
그리고 겨울을 견디는 힘은 깊고 깊은 뿌리의 힘이고, 또 불평 없이 참아내는 진실함이라는 것이다. 화려함보다 빈약함 에서 작가는 더 여유와 풍요로움과 진실을 보는 것이다.
<저녁 노을>의 작가는 지는 해를 보며 자신의 인생 종장을 생각한다.
장엄한 저녁노을을 보며 자신도 그런 종장의 삶을 욕심내 본다.
떠오르는 해를 보면서 지는 해를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은 삶의 매 순간을 지극히 성실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태도이다.
이와 같이 수필은 작가의 독특한 개성이 그대로 나타나는 글이다. 험난한 세상의 삶 속에서 아름다운 삶의 꽃을 피워내 고 싶어하는가하면, 겨울 나목으로부터 인내와 진실을 배우며 그런 인간이 되고자 하는가 하며 지는 저녁 해를 바라보 며 자신의 삶을 점검하고 마지막 삶을 아름답게 하고 싶어 하는 여자의 마음이 나타나는 것을 볼 때수필이 얼마나 독특 한 개성을 나타내는 문학인가를 알게 된다. 뿐 아니라 독특한 개성은 창조성으로서 수필도 창작예술인 만큼 문학적 창 조를 위한 고뇌와 진통이 따라야 한다는 말이다.
(5) 수필은 아주 다양(多樣)한 제재(題材)의 문학(文學)입니다. - 광범성
수필은 무엇이든지 담을 수 있는 그릇이다. 무엇을 담든 필자의 자유로운 선택에 맡길 수밖에 없다. 자연풍물, 신변잡 사와 보고 느낀 것 모두가 수필의 소재가 된다. 다만 이것을 어떻게 '수필'이란 문학작품으로 빚어낼 것인가 하는 것은 필자의 지식이나 성향에 따라 다를 수 있고, 문장력 등 글 솜씨의 정도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그 솜씨의 정도에 따라 문장이 아름다운 시적 수필이 될 수도 있고, 유머와 위트가 넘치는 경쾌한 산문이 될 수도 있고, 진한 서정으로 가슴이 뭉클해지게 하는 서정수필 또는 설득력이 있는 논리적 수필, 예리하게 비판정신이 돋보이는 비평이 될 수도 있을 것이 다. 수필은 우리의 삶이나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이 수필의 제재가 되며,주변의 아주 사소한 것으로부터 넓고 깊은 사상 과 철학에 이르기까지 온갖 다양한 소재들을 다 담을 수 있는 대단히 폭넓은 문학인 것이다.
[예문.2] <겨울 연지에서>는
더러운 진흙 속에서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는 연꽃과 작가의 삶을 대비하여 의미화를 시킨 것이며,
[예문.3] <남강 부근의 겨울 나무>는 빈약하고 보잘 것 없는 겨울 나목의 힘인 뿌리와 삶의 진실을 제재로 삼은 것이 며,
[예문.4] <저녁 노을>은 저녁 노을과 인생의 황혼기를 대조하여 문학성을 살린 것으로
이처럼 수필은 여러 다양하고 광범한 제재를 망라하는 문학인 것입니다.
매우 서글픈 일입니다.
물론 타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은 수필을 쓰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수필가들보다 더 좋은 수필을 쓸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수필이 독립된 문학예술의 한 부문임을 인식해야하며, 수 필에 대해 열정을 갖고 고민을 거듭한 뒤 씌어진 글이 수필이며,
그런 인식으로 수필다운 글을 써야한다는 말이다.
'수필'과 '에세이'를 두고도 혼란을 겪는 사람들이 많다.
지난 시간에 조금 언급을 하긴 했지만 이러한 혼란을 막고 이해를 돕기 위해 수필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그 종류를 먼저 알아보도록 하겠다.
(1) 에세이(essay)와 수필(隨筆)
가장 혼란을 많이 겪는 게 바로 이 '에세이'와 '수필'이다.
어떤 것을 에세이라 하고, 어떤 것을 수필이라고 하는가, 결국은 같은 것이 아닌가 하고 반문하기도 한다. 몇 사람의 정의를 보겠다.
윤오영은
"수필은 동양적인 에세이요, 에세이는 서구적 수필"이라고 말했다.
·프랑스의 R.M 알베레스는
"에세이는 그 자체가 원래 지성을 기반으로 한 정서적 신비적 이미지로 된 문학"
이라고 설명했다.
·일본의 요시아 세이이찌(言田精一)는
"수필론에서 에세이는 구분해서 정의할 수 없다."고 했다.
그렇다고 하면 '에세이'와 '수필'은 같다고도 볼 수 있고, 서로 구별된다고도 할 수 있다는 말도 된다. 그런데 분명한 것 은 수필은 '자기 삶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따라서 동.서양 삶의 생활도 다릅니다. 표현하는 방법도, 성품도 차이가 난 다. 그러니 동양의 수필과 서양의 에세이도 내용에서 다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영어의 essay라는 말에는 '評論'이 라는 뜻과 '隨筆'이라는 두 가지의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에세이를 보통 수필이라고 번역할 때는 평론 부문을 제외하고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수필을 의미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2) formal essay와 Informal essay
에세이는 영문학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 '에세이'는 포오멀 에세이(formal essay)와 인포멀 에세이(Informal essay)로 나누어진다.
객관적 진리와 무게 있는 지식을 정연한 논리적 전개를 통해 나타낸 글 - 중수필(重隨筆), 논리적 수필, 경수필(硬隨筆) - 을 formal essay라 하고,
독자들의 마음을 자극하지 않고 정서와 기쁨을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한 글 - 경수필(輕隨筆), 서정수필, 연수필(軟隨筆) - 을 Informal essay라 합니다.
그런데 이 두 종류는 내용과 표현 방법에서 전혀 다른 것들로 우리가 말하는 수필에 해당하는 것은 후자인 인포멀 에세 이(Informal essay/輕隨筆,서정수필,軟隨筆)이다.
'인포멀(informal)'이란 말은 正格이 아니라는 말인데, 내용에 있어서 객관적 진리와 무게 있는 지식을 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에게 기쁨을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으로 독자를 자극하지 않고 오히려 마음을 늦 추게 하는 글이라 할 수 있다.
곧 한가한 시간에 한가하게(여유로움을 지닌) 쓰여 지는 글이며, 한가한 시간에 읽을 수 있는 글인 것이다.
따라서 이 인포멀 에세이는 논문처럼 무엇을 증명하거나 어떤 결론에 도달하여 작자의 주장을 독자에게 설명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정연한 논리적 전개를 하지 않으며, 조직적 체계를 요구하지 않으며, 명상적이고 철학적이더라도 그냥 독자가 편하게 판단하고 동감하는 정도로 작가와 독자의 관계를 설정한다. 그렇다고 중언부언이나 횡설수설하는 그런 잡담 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짧은 글이지만 그 속에 많은 변화를 품고 있으며, 파격적인 지식과 유머와 철학으 로 독자를 놀라게 하는 글이다.
(3) essay 와 Miscellany
'수필'이라는 말에 대해 외국어로는 Miscellany와 essay를 쓴다.
Miscellany가 우리나라에서 흔히 통용되는 수필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일반적으로 신변잡기(身邊雜記)나 감상문(感想文) 및 잡문(雜文)을 일컫기도 하지만 비교적 부드럽고 정서적인 문체로 엮어지며 자기의 견문(見聞)이나 감상(感想)의 기록 등을 말한다.
essay 란 Miscellany에 비해 문제에 대한 논의가 있는 소논문(小論文)이나 논설(論說)에 가까운 것으로 중국의 논(論) , 계(啓), 의(議), 서(書), 서기(序記), 설(說) 등이 이에 속한다 할 수 있다.
<정리>
1. 따라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수필'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동양적 에세이, 인포멀 에세이, 미셀러니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 할 수 있다.
2.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쓰려고 하는 수필이 어떤 종류의 것일까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수필의 종류'
연예인들의 글, 정치인이나 기업가들의 자서전적 글들, 시인이나 소설가들이 시나 소설로 쓸 수 없는 이야기들이나 작 품 여적을 창작노트 식으로 쓴 글들을 '에세이'란 이름으로 출간하고, 또 그런 것들이 에세이로 알고 아무런 저항감 없 이 받아들이고 있는 이 시대 풍토에서 굳이 그것은 에세이가 아니다 라고 반론을 펴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수필을 쓰고 자 하는 작가는 그런 오류에서 벗어났으면 싶다.
3. 수필은 다른 여느 문학 장르보다도 품격이 있는 문학이다.
요즘은 개성의 시대가 되어 웬만큼 튀어나게 해도 흉이 되지 않는다지만 그래도 옷을 제대로 갖춰 입고 나가면 품위가 있어 보이는 것처럼 수필은 바로 작가의 품위를 보여주는 글이라는 것이다. 수필의 종류를 언급한 것도 바로 그런 품위 있는 문학이 수필이므로 그런 수필을 쓰고자 한다면 어떤 것을 수필이라 하는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고 본다.
아무리 좋은 옷도 입는 사람이 제대로 잘 입으면 품위 있고 아름다워 보이지만 그렇지 못하면 옷은 옷대로, 사람은 사 람대로 볼품이 없어지는 것처럼 수필은 내 인격과 품위를 떨어뜨리지 않는 글쓰기이기 때문이다.
3. 수필의 종류
수필(隨筆)은 ‘보고, 듣고, 생각하고, 느낀 것을 그저 붓 가는 대로 쓰는 산문’이라고들 말합니다.
그래서 약간의 문장력만 있으면 누구나 쓰는 글이라고 생각을 하거나 타 장르의 문인들이 자기 장르 외의 잡다한 글들 을 모아 에세이 또는 수필이란 이름으로 내놓는 경우도 많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서전적 체험담(體驗談)이라던가 편상(片想)들을 모은 글이거나 음악, 미술, 연극, 철학, 사회, 정치, 경 제 등 각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써낸, 말하자면 엄밀히 문학예술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여록(餘錄)들까지 버젓이 수필(에세이) 행세를 한다든지,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연예인들이 쓴 이야기가 잘 팔리는 수필 노릇을 한다는 것은 문학과는 거리가 있는 듯 하다
수필의 종류
⑴ 내용에 따른 분류
① 경수필(miscellany) : 우리가 보는 보통의 수필처럼 정서적인 경향을 띠는 수필. 개성적이고 체험적이며 예술성을 내포한 예술적인 글이다.
② 중수필(essay) : 가벼운 논문처럼 지적이며 논리적이고 객관적인 경향을 띠는 수필
⑵ 제재에 따른 분류
① 수상적 수필 : 그때 그때 떠오르는 생각이나 느낌을 적은 수필
② 기행적 수필 : 여행하는 동안에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기행문 형식으로 적은 수필
③ 기록적 수필 : 생활 주변의 이야기를 생각나는 대로 적은 수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