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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동명천제단입니다.
대한제국 애국가
상제는 우리 황제를 도우사
성수무강하사
해옥주를 산같이 쌓으시고
위권이 환영에 떨치사
오천만세에 복록이 일신케 하소서
상제는 우리 황제를 도우소서
여러분은 혹시 우리나라를 상징하며 대표하는 언어라고 한다면 무엇을 첫 번째로 언급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도, 대다수의 우리 한국 신민(臣民)들은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이라는 말을 제일 먼저, 누가 일부러 얘기를 안해도 자동적으로 떠올리게 될 것 같습니다. 때에 따라서, 일부 인사분들은 소중화(小中華)라는 말을 언급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의미를 놓고 본다면 모두 같은 말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를 상징하며 또 설명하는 말로 왜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을 언급하게 되었을까?
사실, 동방예의지국이라는 말과 고조선(古朝鮮)이라는 지명에 대한 최초 기록과 등장은 중국 최고의 지리서인 산해경(山海經)에서 최초로 언급이 되기 시작합니다. 그것도, 소위 해내경(海內經)과 대황경(大荒經) 편이 바로 조선기(朝鮮記)라고 할 수 있는데, 송나라 사학자 나필(羅泌)이 노사(路史)에서 언급한 내용이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산해경 전체 18권 중에서 해내경과 대황경은 각각 4권씩 이루어져 있다라는 점이고 권수(卷數)의 비율로 따진다면 44%이지만, 즉 산해경 중에서도 해내경과 대황경은 원래 산해경에 한나라(漢國) 초기에 산경(山徑)에 합본(合本)되는 책이라고 할 수 있으며, 주석의 비율로 본다면 3분의 1에 해당할 정도로 매우 비중이 큽니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바로 산해경 자체가 사실, 주나라(周朝)가 건국되기 전 상나라(商朝)로 대표되는 동이족(東夷族)의 역사(歷史)와 문화(文化)에 대한 지리서(地理書)가 본래의 산해경적 특성이고 성격이었는데 이후, 한나라 초기 고조선이 멸망되면서 당시의 고조선이 가지고 있던 구체적인 동이족(東夷族) 문화와 지리, 역사에 관한 내용까지 추가로 합본되면서 가장 중심이 되는 내용이 바로 해내경과 대황경에 대한 내용이라고 할 정도로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 되고 있다라는 점입니다. 즉, 상나라와 고조선이 다른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산해경이 상징적으로 설명해주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중에서도, 공교롭게도 청구(靑丘)라고 대표되고 상징되는 조선(朝鮮)이라는 나라에 대한 소개와 설명, 그리고 중요한 상징성에 대한 언급으로 중심이 되고 있다는 점인데 특히, 조선의 문화, 관습, 사회의 성격이 상당수 담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군자국(君子國)이라고 자체 언급되고 있다라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언급이 중요한 이유는, 당시 동이족에게 있어서 얼마나 그리고 얼만큼, 동이족의 민족이 스스로 갖는 문화와 관습, 관례라고 하는 전례에 대한 강한 자체적 자부심과 긍지가 얼마나 컸고 깊었는가에 대한 매우 상세한 증명적이고 설명적 내용이었다고 언급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견해와 역사관, 관계가 내려온 것이 바로 중조선(中朝鮮)에 해당하는 이씨 조선(李氏朝鮮)까지 내려왔다고 평가될 수 있고 또, 이러한 맥락에서 탄생되게 되는 것이 바로 소중화에 대한 인식입니다. 물론, 유교적인 시각으로만 극히 한정지어 생각한다면 소중화 역시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중화라는 인식은 단순히 대국이냐 소국이냐의 문제보다 역사의 정통성과 유교적 장자 계승권(長子繼承權)이 누구에 의해 이루어지는가에 대한 역사 인식의 문제라고 보는 것이 더 근본적 견해라고 할 것입니다.
특히, 중조선(中朝鮮)에 있어서 역사적 정신을 핵심적으로 완성한 책이 바로 1484년에 편찬된 동국통감(東國通鑑)입니다. 특히 동국통감은 요임금(唐堯) 즉위 25년이 바로 기원전 2333년이라는 무진년(戊辰年)으로 확정(確定)짓고 결정(決定)한 역사서이며 이후 현재까지 엉터리같은 대한민국 공화국조차도 고조선의 건국연대(建國年代)는 기원전 2333년으로 확정되어 지금까지 이어지는 핵심적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국(中國)과 한국(韓國)과의 관계를 요임금 원년 갑진년(甲辰年)인 기원전 2357년과 단군 원년 무진년인 기원전 2333년 사이에 25년, 그리고 명나라(大明國)의 건국인 무신년(戊申年) 1368년과 조선(朝鮮國)의 건국인 임신년(壬申年) 1392년 사이에 25년이 동일하고 또한 뿐만 아니라, 요 임금 즉위년과 명나라 건국년과의 차이가 동일하게 3725년인데, 당시 동국통감을 편찬한 달성군(達城郡) 서거정(徐居正) 선생의 견해는 요임금의 즉위원년을 원래는 중원 갑자(中元甲子)의 갑진이지만, 달성군 서거정 선생은 필원잡기(筆苑雜記)에서 상원 갑자(上元甲子)의 갑진이라고 함으로써 요 원년 갑진(堯元年甲辰)으로부터 명 홍무제 원년 무신(明洪武帝元年戊申) 사이에 일주(一週) 갑년(甲年) 즉 60년을 더하는 3785년으로 확정짓습니다. 결국, 중국과 한국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로 주목되게 된 것이 바로 명나라와 조선이 된 것입니다.
다른 역사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독특한 중국과 한국의 특징이며 상징이 되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자랑스러운 소중화의 논리적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오천년(五千年)에 해당되는 엄청난 역사를 자랑하고 있었던 우리 민족이고 국가였지만, 1945년 8월 일본제국 통치시대(日本帝國統治時代)로부터 미국(the United States of America)과 소련(the 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에 의해 해방이 되었지만 소위, 정통적 군주제도 국가(君主制度國家)에서 공화주의 국가(republican state)로 지저분하게 변태(變態)되면서 이른바, 동방예의지국이라는 명칭, 군자국(君子國)이라는 호칭은 완전히 사라지게 됩니다. 매우 이질적이고 황당한 사건이 아닐 수 없는데, 정신못차리고 있는 것은 이러한 견해와 인식에 대한 개념자체가 없는 대한민국 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집단 공화주의(republicanism) 지도자들, 그리고 함께 기형적(畸形的)이고 불법적(不法的)인 행태를 하고 있는 대종교(大倧敎) 상태를 첫 번째로 언급할 수 있겠습니다.
역사에 대한 언급을 보면 특히 어떤 시대, 어떤 언론사, 어떤 종교도 절대 다루지 않는 때가 없을 정도로 대한민국 공화국에서는 광적으로 매우 지나칠 정도입니다. 하지만, 역사를 복원한다는 것에 대한 견해가 단순히 유물 및 유적의 복원 또는 잃어버린 고대 영토의 회복 정도로 머무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은 지극히 언급자들 스스로 무지(無知)의 소치(所致)라는 생각을 안할 수 없습니다. 단순히 영토 회복이나 유물, 유적의 복원을 한다고 하여 과연 잃어버린 역사가 복원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예를 들어, 과거에 사라졌던 어떤 오래된 사찰을 새롭게 복원한다고 해도 과거 우리 조상들의 손때가 묻어있는 사찰과는 비교 자체가 되지 않을 것이며, 더욱이 빈집으로 남아있는 경우라면 설사 복원을 하였다 해도 일반 국민이 봤을 때는 왜 복원했을까? 하는 의구심만 생길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의 소중한 고궁들이 모두 똑같이 해당되는 일 아니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외교적인 경우도 비일비재(非一非再)하여 대표적인 사례가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이나 독도에 대한 망언 등을 예로 들 수 있겠습니다만, 역시 우리 국민 스스로 자기 나라 임금도 마음에 안든다며 쫓아낸 사람들이 무슨 근거로 외국의 역사교과서나 독도에 대해 일본을 반박하며 욕을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이러한 사례는 일본제국(日本帝國)이 과거 대한제국(大韓帝)國을 합병하면서 내세웠던 주장보다도 한참 뒤떨어지는 저능아(低能兒)적인 인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천지인(天地人)이라고 하는 만고불변(萬古不變)의 진리(眞理)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면 바로 인(人)이라고 하는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유는, 아무리 훌륭하고 아름다운 강산(江山)이 끊임없이 존재한다고 해도 다스리는 사람과 신이 없다면 강산은 소유(所有)가 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만들어주고 태어나게 해준 부모를 마음에 안든다고 자식이 부모를 버리는 국민에게 무슨 예의(禮義)와 염치(廉恥), 그리고 역사(歷史)에 대해 언급할 수 있겠습니까?
대한민국 공화국 국민은 반성을 많이 해야 합니다.
이러한 면에서 본다면 단군을 신으로 모셔야 한다는 대종교(大倧敎), 공자를 스승으로 모시는 유교(儒敎) 외 많은 국내 종교들은 반성과 할복에 준하는 스스로의 자책을 반드시 해야 하고 스스로 해체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금일 언급하려고 하는 만동묘(萬東廟)는 효종대왕(孝宗大王) 제위시 우암 송시열(尤庵宋時烈) 선생이 말년에 화양동(華陽洞)으로 내려와 1666년 암서재(巖棲齋)를 짓고 후학들을 교육시키던 유서(由緖) 깊었던 곳을 후에 1695년 숙종대왕(肅宗大王) 21년, 스승이셨던 우암 송시열 선생의 제향시설로 만동묘(萬東廟)와 화양동서원(華陽洞書院)을 우암 선생의 유언에 따라 문인이었던 권상하(權尙夏) 선생, 정호(鄭澔) 선생 등의 노론계(老論系) 관료(官僚)와 유생(儒生)들이 세운 것이 시초가 되어 숙종대왕(肅宗大王) 22년인 1696년에 사액까지 받게 됩니다. 이후 영조대왕(英祖大王) 제위시 만동묘를 증수하고 헌종대왕(憲宗大王) 제위시 때는 관찰사(觀察使)가 제사를 지내기도 한 매우 중요한 제향시설(祭享施設)이었습니다.
그런데, 비록 사설이었지만 매우 중요한 국가 시설이라고 할 수 있는 국가적 제향시설이 갑자기 사라지는 상황에 이르게 되는데, 외국(外國)이나 외세(外勢)도 아닌 스스로 그리고, 자체적으로 철폐(撤廢)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은 대다수 학자적 입장에서 본다면 쉽게 납득하기가 불가능하고 반발(反撥)이 생길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보입니다.
물론, 일부 자료에 보면 화양동서원의 횡포와 악행 등에 대한 언급을 하면서 대표적인 서원철폐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만, 당시 서원들의 운영 과정에서 생기는 강제 징수등의 운영비 모금은 조선의 전국 서원에서 일반적인 현상이었고, 그것이 철폐까지 해야 할 만큼의 엄중한 상황이었냐고 본다면 지나친 정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서원이라는 것이 후학들의 교육과 관련된 교육시설(敎育施設), 학습시설(學習施設)이었다는 점이며, 뿐만 아니라 제향시설(祭享施設)도 같이 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학교 등록금을 걷는다고 악행이며, 불법이라고 한다면 어떤 학교가 운영을 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연 서원이 철폐가 되어야 할 만큼 상황이었다면 비록 추정이지만, 엄밀하게 말한다면 과거 흥선헌의대원왕 전하가 젊은 시절 흥선군(興宣君) 저하로 머물러 있을 당시, 이른바 화양동서원에서 당한 흥선헌의대원왕(興宣獻懿大院王) 전하의 수모에 대한 앙갚음의 차원으로 철폐의 대상이 된 것이 가장 직접적인 원인으로 지목이 될 것 같고, 이후 추가로 많은 화양동서원의 운영상 문제점에 대한 제보(提報)가 근거로 되어 철폐시키는 이유가 되고 있는데, 어느 정도 당시 상황에 대한 이해가 전혀 안되는 것은 아닙니다만 단순한 왕족(王族)의 수난에 대한 보복 차원으로 화양동서원과 만동묘를 철폐하는 것은 유교 국가였던 조선에서 쉽게 받아들이기는 솔직히 힘들 것으로 보입니다.
가장 큰 문제점은, 1865년 이후 지금까지 150년이 넘는 시간동안에도 여전히 화양동서원 복원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일부 복원이 이루어진 점에 대해서는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전체 화양동서원의 복원은 여전히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점에 대한 재건회(再建會)에서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화양동서원은 단순한 제향시설로 국한되어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원래 목적에 맞게 교육과 학습시설의 전체가 복원되는 것이 화양동서원의 성격을 정확히 알 수 있는 대상이 될 것이며, 유교에 대해서도 대다수 모르는 일반 공화국 국민이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입니다.
심지어, 화양동서원이 있던 자리를 비상식적인 충청북도청(Chungcheongbuk-do Provincial Government Republic of Korea)에서는 유원지(遊園地)로 만들어 물놀이장과 민박집으로 엉망을 만들고 있는 모습을 볼 때, 얼마나 대한민국 공화국이라는 국가의 정신상태와 수준이 저질 수준(低質水準)인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것입니다.
과연, 우리나라에서 성지(聖地)라는 것은 존재합니까? 모든 국민이 종교와 상관없이 존경하고 숭고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민족적 성지가 과연 존재하고 있습니까? 중요한 장소마다 성지적인 개념보다는 쓰레기장인지 놀이장인지 탈바꿈 하는 것이 현재 대한민국 공화국의 정책입니다.
후학들을 가르치고 심신수양을 하여 올바르게 나라의 동량(棟樑)이 되도록 교육하던 유서깊은 장소였던 우리 민족의 정신적 자산, 그리고 비록 비참하게 멸망하였지만, 적어도 조선이 위급할 때 지원병을 제공해준 명나라 황제에 대한 예우차원에서 세원 만동묘까지 조선 유교의 성지와도 같은 장소를 아둔하고 지리멸렬한 성균관(成均館)측의 묵인 아래 유원지가 되었다는 것은 일본제국의 국권침탈 이상으로 매우 치욕적이고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반드시, 대한민국 공화국(the Republic of Korea)은 사라져야 합니다.
비단 만동묘가 아니라고 해도 과연, 우리 민족에게 공화주의 체제의 도입이 일본제국통치시대(日本帝國統治時代)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공화국 체제 도입으로 분단이 되어 지금까지 남북이 전쟁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는 지금, 점차 이질적인 통일이 아예 불가능한 상태로 가고 있습니다. 과연 누구의 책임입니까?
맨날 자신의 의지는 없고 외세의 간섭과 훼방으로 분단이 되고, 분단이 되었음에도 정신못차리고 매일 시시콜콜한 문제로 국회는 난장판이 되며, 국가의 통치자라는 사람들은 사리사욕만 챙기기 바쁜 1948년 이후의 대한민국 공화국에서 과연 무슨 미래가 있고 희망이 있습니까? 지금의 대통령은 말할 것도 없고, 설사 대통령이 새로운 사람으로 바뀐다고 해도 이러한 대한민국 공화국의 난맥상(亂脈相)은 해결될 수 없고, 또 불가능합니다.
더욱이, 종교는 국가에 있어도 없는 것만 못하고, 무지하고 분별없는 국민은 사리분별을 못하여 참과 거짓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직 인기에 편승하여 선전 선동만 난무하는 마치 아프리카(Africa) 국가들의 정치 행태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무지몽매(無知蒙昧)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뜻이 있고 대의(大義)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국민이라면 부디 재건회와 합심하여 난국을 타개하고 국가를 일신(一新)하며, 정통성과 민족성을 갖춘 위대한 국가를 건설하는데 모든 힘을 집중시켜야 할 때입니다. 매우 짧은 인생을 살면서 과연 무엇을 남기고 갈 것인가에 대한 깊은 성찰과 고민을 해야 할 때라고 생각됩니다. 대종교 등처럼 개판이고 불법적인 종교 대표의 개인적인 영달(榮達), 그리고 욕심같은 것은 모두 버려야 희망이 생길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죽자사자 더러운 대표한다고 영예(榮譽)가 생깁니까?
한심한 사람들입니다.
더 이상 국가가 망가지고 무분별한 무질서한 국가로 전락시켜서는 안될 것입니다.
애국적 정신과 민족애적 정신을 갖추신 분들의 동참 기대하겠습니다.
대한제국 만세! 존왕양이 만세!
감사합니다.
대한제국 재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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