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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 2566년 5월 교육법회가 5월 13일 금요일 오후 7시에 극락전에서 열렸다.
식전 행사로 노래로 떠나는 구법여행을 포교부 53선지수 합창단과 함께 하고
삼조 정진경님과 명심등 주숙자님의 오카리나 연주를 듣고 본 법회가 시작됐다.
삼귀의, 반야심경을 독송하고 총동문회 혜월 권순석 회장님은 인사말에서
"5월1일 부터 3일간의 바자회와, 만발 및 봉축일 점심공양물 준비와 봉축행사시
질서유지 봉사, 그리고 연등모연에 동참해 주신 임원님들과 동문님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다음주에는 제3회 총동문 문화대축전의 제1차 법석인 강화지역 성지순례와
2차 법석인 자비도량참법기도 입재가 계획 되어 있습니다.
모두 큰 마음을 내시어 동문회 대축제의 한 마당에 각자 주인공으로서 동참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귀한 법문을 해주시기 위해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걸음을 주신
은평구 소재 정수사 주지이신 지월 스님을 모시고 계초심학인문 제 3강을
끝으로 회향하게 되어 기쁘게 생각 합니다.
법사스님의 높고 귀한 법문을 가슴 속에 깊이 새겨 초발심과 원력으로 늘 지혜롭고
즐거운 신행 활동으로 글로벌한 명품 신행단체로 도약하는데 모두 밑거름이
되어주시길 바라겠습니다." 며 참석 동문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이어서 강사 스님께 스승의날을 맞아 감사의 꽃바구니를 드리고 항상 수고해 주시는
삼조 정진경님께도 감사의 꽃바구니를 드렸다.
지월스님의 마지막 3강을 듣고 계초심학인문 특강을 끝내고
사홍서원과 산회가를 봉송하고 기념촬영으로 5월 교육법회를 마쳤다.
-계초심학인문 지월스님 3강 내용
지난 달에 다 끝냈는데
또 하라 그래가지고..웃음..
초발심을 주제로 해서
세 번에 걸쳐서 나눠서 말씀을 드리고 있는데
그동안 말씀드린 것을 간략히 좀 요약을 해보겠습니다.
첫 번째 시간에는 불교 공부를 하는데 있어서
불교를 어떻게 이해를 해야 되는지
그런 측면에서 신, 해, 행, 증 네 가지..
그런 측면에서 불교를 한번 말씀을 드려봤습니다.
그랬을 때 이제 신,해.. 신, 해가 가장 기본인데
많은 분들이 불교 입문할 때
불교 교리, 부처님말씀에 대한 이해를 토대로 입문하는 경우는
좀 드물고 대체적으로 믿음을
토대로 해서 입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또 간혹은 뭐 믿음 보다 도
교리에 대한 이해를 토대 위에서 불교로
이렇게 믿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쨌든 믿음이 먼저 든 교리에 대한 이해가 먼저든
믿음을 토대로 해서 입문을 했다면
반드시 교리에 대한 이해를 갖춰야 하고
또 교리에 대한 이해를 토대로 입문 했다라고 하면
그만큼에 상당한 어떤 믿음,
신행을 같이 갖춰야 앞으로 나갈 수 있지
그 어느 것 하나만 으로는
앞으로 전진 해 나갈 수가 없다 라 고
이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시간에는 본문에 들어가서
초심에 대한 정의를 초발심으로 확장해서
이해를 해야 된 다 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초심이라고 하면 처음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저한테 이 자리에 나와서 이야기를 좀 해달라고 할 때
초심으로 돌아가서 새롭게 좀 불교 공부를 하는 이런 자세를 뭐
그런 마음으로 초발심을 택했다 이런 말씀을 하셨거든요..
지금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기본 기본교육으로 부터 불교대학
혹은 대학원, 선림원등 불교에 대한 공부를 많이 하신 분들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다시 또 초심으로 돌아가서 이제 이런 마음을 내셨다 라고 했는데
그 초심이 불교에 처음 들어왔을 때 그런 초심은 아니어야 된다 라 는 거 에요
그러니까 처음 들어왔을 때는 그야말로 불교에 대한 믿음도 좀 적었고
교리에 대한 이해도 부족했고 단순히 어떤 종교적 신앙, 신념
이런 거였다면 그런데로 돌아가는 것은 사실 퇴보고 퇴행이거든요
그랬을 때 초심이라고 하는 것은 초발심 이라고 얘기하는 것이 더 맞겠다 라는 겁니다.
초발심 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화엄경에서 깨달음을 구하는
과정, 단계를 크게 오십삼 단계로 나눕니다.
그거를 다섯 단계로 나누면 십신, 십주, 십행, 십회향, 십지..
그리고 등각, 묘각, 불 이래서 오십삼 단계로 나누는데
초발심이라고 하는 것은 십신이 꽉 찼을 때, 십신을 완전히 갖추었을 때
십주로 승진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랬을 때 십신이 완전히 갖추어 지면
그를 십주 초주 라고 얘기를 해요 십주의 첫 단계가 초발심 단계입니다.
그러면은 우리가 초발심시 뭐라고 그랬죠? 초발심이고 변정각이다..
라는 겁니다 십신이 완전히 갖춰져서 초발심주..
십주의 초주, 초발심주에 오르면 그때가 바로 변정각이라는 거예요
53 단계 다 거칠 필요도 없이 십주의 첫 번째 단계가 바로 부처의 경지다 라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에 계신 분들은 지금 초발심자들 입니까?
아니면 아직 초발심을 못한 십신의 단계입니까?
어느 정도 단계에 있는 분들이 모여 계신 거예요? 잘 모르시겠어요?
지난 시간에 또 제가 한 가지 말씀 드린 것 가운데
우리가 불교 신행을 하는데 있어서 목표, 우리가 금생에 어느 단계까지,
최소한 어느 단계를 목표로 실행을 신행 활동을 하고 불교 공부를 해야 되는지
최선의 목표 설정을 어디에 대해 해야 되는지를 말씀을 드렸었죠?
어느 단계라고 했죠? 기억 안나세요?
성문사과 가운데 수다원과, 최소한 수다원과에 대한 목표를 두고
신행을 하고 불교 공부를 하셔야 된다는 거예요..
왜 그러냐면 아함부 경전 에서의 수행 단계는 크게 사과,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화엄에서는 오십 삼 단계.. 다양히 나누는데
초기 경전을 토대로 하면 사과예요.. 크게 사 단계로 나누면
수다원이 이제 막 성자의 반열에 오른 경지에요
그럼 여기에 계신 분들이 재가 자로써 우리가 무슨 성자의 단계 오를 수 있나?
이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금생에 수다원과에 오르지 못하면 언제
다시 우리가 이러한 사람 몸을 받아서
정법 을 만나서 이 공부를 이어나갈 기약이 없어지는 거예요
금생에 수다원 과에 오르지 못하면... 금강경에도 보면 수다원은 7 왕래라 했죠..
7번을 천상과 인간을 오고 가면서 이 고해를 벗어나는 단계를 수다원 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칠 왕래 그랬어요..일곱번 천상 과 인간을 오고 가면서 모든 번뇌를 다 제거하고
아라한을 증득 하는 이러한 단계예요 그래서 수다원에다가 최소한의 목표를
설정을 해야 된다 라는 겁니다.
그렇지 못하면 몇 왕래겠어요? 수다원 이전은 몇 왕래 일 것 같아요?
몇 생 만에 몇 생 이내에 이 삼계 고해를 벗어날 수가 있을 것 같아요?
기약이 없습니다. 수다원에 올라야 이제 일곱생 이내, 칠 생 이내에
이 사바를 벗어날 수 있는 기약이 생기는 거예요
그렇지 못하면 몇생을 더 생사를 오고 가면서 이 사람 몸을 만날지..얻을지..
또 정법을 만날지.. 지금 기약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금생에 다행히도 사람
몸을 만나서 이 정법을 들을 기회가 생겼는데 이 몸을 버리고
금생에 이제 이몸을 버리고
다음 생에 또 사람 몸을 받을 자신이 있어요? 없어요?
가만히 한번 생각을 해보세요...
내가 다음 생애 사람 몸을 다시 받을 만한 공덕을, 복덕을 지었는지..
자신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금생에 수다원과에, 최소한 수다원과에 올라야 다음
생에도 사람 몸을 받아서 공부를 이어나갈 수 있는
그런 기약이 생긴다라고.. 그럼 어떻게 해야 수다원과에 오르냐 라는 거예요..
지난 시간에 다 말씀을 드렸죠? 어렵지 않아요 간단해요
지난번에 나오신 분들 손들어 보세요.. 지난번에 나오신 분들, 지금
손 드신 분들은 다 수다원과 예요.. 지난번 지난주에 안 나오신 분들?
아니 안 나온 게 아니라 못 나오신 분들.. 이분들은 수다원과 인지
아닌지 몰라요...웃음...
그런데 지난달에 나오신 분들은 다 수다원과에 올랐어요..
그런데 지난번에 못 나오신 분들은 잘 모르겠어요.. 수다원인지? 그 이상인지?
그러면 간단히 지난번에 못 나오시는 분들을 위해서
수다원과에 오르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 그렇게 어렵지 않아요 세 가지 결박
만 끊으면 된다.. 결박이라고 하는 것은 번뇌의 일종인데
우리 중생들을 이 삼계에 붙들어 매는 족쇄와 같은 것들이예요.. 그 세 가지 결박..
그니까 하나도 아니고 세 가지, 세 가지 그런 어떤 밧줄,
족쇄에 묶여 있기 때문에 이 삼계를 벗어나지 못한다라는..
이제 그 세가지만 풀면, 제거하면 수다원이라는 거예요
그게 어렵지 않아요
그럼 첫번째 결박이 뭐냐면 유신견, 유신견은 색, 수, 상, 행, 식
오온신, 중생신은 오온신 이예요..
중생신을 얘기할 때는 오온으로 이야기를 해요
색, 수, 상, 행, 식 육체적 측면,
감성, 정서적 측면 그 사람의 어떤 생각, 사고.. 또 욕구, 의지 그 다음에 의식
이러한 측면에서 중생의 몸뚱아리를 분석을 해서 살피는 거예요
그래서 중생의 인격의 구성 요소는 색, 수 ,상, 행, 식 다섯 가지 예요...
근데 이게 중생신, 오온신, 다시 말하면
업계수신.. 업으로 받은 몸 이예요.. 이 오온신은, 중생의 몸은.. 근데
그것이 나라고 생각하는 게 유신견 이예요 고정불변하는 어떤 나라고
하는 실체가 있다 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오온을 나라고 얘기하는거예요.. 오온을 나라고 여긴다는 건
뭐냐면 이 육체에 대한 집착, 그 다음에 이 감정.. 누구나 다 감정이 있죠
기쁠때도 있고 슬플 때도 있고 우울할 때도 있고..
이런 감정, 감정에 너무 매몰는 거예요
감정에 너무 깊이 매몰되는 거예요.. 없을 수는 없지만 어떤 슬픈감정,
또 분노, 등등의 어떤 감정에 너무 깊이 빠져 가지고
벗어나지 못하는 것, 또 생각.. 다 생각이 있죠?
근데 내 생각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근거도 없는데
내 생각만 너무 내세우고 고집하는 것..
그 다음에 또 욕구, 의지.. 이거 다 있지요.. 없어선 안 되죠
그렇지만 내 욕구만, 내 어떤 욕망만 먼저 앞세우고 중시하고 있는 거죠
그 다음에 의식 이런 것들이 오온에 대한 집착예요..그거를 나라고 여기는 것..
이게 유신견입니다. 이게 첫번째 결박이예요.. 그러니까
조금 전에도 반야심경을 독성을 하셨는데 오온이 곧 공이다..
공 이라는 것을 알면..오온개공 도일체고액이죠?
모든 고통과 액난으로 부터 벗어난다는 거예요.. 오온이 공 이라 는걸 알면...
그럼 공 이라는 말이 바로 오온 이라고 하는 것이 고정된 실체가 없다 라는 말입니다.
오온이 공 이라는 것이 물질적, 육체적 측면이든
감정이든 ,생각이든, 욕구든, 의지든, 의식이든
이런 것들이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게 ..그걸 바로 알면
모든 고통과 액난으로 부터 벗어난다..
이게 반야심경의 요지예요.. 그런데 그게 쉽지는 않겠죠..
어쨌든 이론적으로 교리적 으로만 이해를 하면 돼요
오온이 나의 어떤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는 것 이론적으로만 이해를 하면 돼요
그리고 나서 감정을 다스리고 생각을 조절하고,욕구를 조절하고..
이거는 한량 없는 세월 동안 닦아나가는 겁니다.
일단 이론적으로 이해를 해야 돼요..오온이 공 이라는 것
그것만 알면 돼요 그러면 더 이상 어떤 결과 이 나를 조여내지 못한다면
그게 첫번째 수다원과에 오르는, 오르기 위해서 풀어야 할 족쇄라고 할수 있죠..
그 다음에는 두 번째는 부처님이 했던 근본정법에 대한 회의적 의심을 버리면 돼요
우리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어떤 불신을 합니까? 믿습니까?
믿습니다...웃음... 어쨌든 믿으면돼요.. 의심만 없으면 됩니다 오온이,
중생의 오온신이 고정불변된 실체로서의 내가 아니다
그것만 감정에 걸리더라도 이론적으로만 이해를 하면되요..
우선 그리고 정법에 대한 회의적 의심이 없으면 돼요
이거 두 가지 크게 어렵지 않죠? 그러면 돼요
그리고 세번째는 뭐냐 하면 계금취견을 버리면 돼요
정법이 아닌 방법으로 어떤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이런 자세를 버리면 돼요..
그것도 크게 어렵지 않죠?
그러니까 불교는 모든 문제가 나한테 있고 해결책 또한 나한테 있다
라는 거예요 밖에서 찾는 게 아니에요 내 내면에서 문제, 원인도 내 내면에 있고
해결책도 내 안에 있다.
그런데 불교가 아닌 다른 종교는 대체적으로 문제를 밖에서,
문제의 원인을 밖에 있다 라고 봐요.. 뭐 신의 뜻이다
어떤 팔자다, 운명이다, 조상탓이다
이게 밖에서 어떤 문제의 원인을 찾으려고 해요
그런데 철저하게 불교는 자업자득이고
자작자수고 내 내면에 있다 라고 보는 거예요..
어떤 나의 문제의 원인을.. 그러면 답은 어디에 있어요?
답 또한 나한테 있다..
근데 문제의 원인이 밖에 있다 라고 생각하면 해결책 또한 밖에서 찾아요
그럼 신의 뜻 이라고 하면 어떻게 돼요? 신한테 가서 비는 수밖에 없겠죠?
신한테 신의 뜻에 복종을 하고 모든 걸 다 맡기는 거예요
그럼 조상탓이네...산소를 좋은데 써야 되고 나쁘다면 옮겨야 되고
그럼 팔자면? 팔자는 고쳐져요? 안고쳐져요? 등등..
어쨌든 문제의 원인을 밖에 있다 라고 보면.. 답 또한 밖에서 찿는 거예요...
그것을 계금취견 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게 계금취견 이예요...문제가 밖에 있다 라고 생각하고
해결책을 밖에서 찾는 것.. 그게 계금취견이예요...
근데 문제도 나한테 있고 답도 나한테 있다
이게 불교예요... 이 세 가지만 해결 하면 수다원이라는 거예요
그러면은 이제 지난주에 지난달에 나오신 분은 당연히 수다원이고
오늘 또 참석하신 분들은 뭐예요?
수다원 이예요..여기에 계신 분들은 다 수다원 이예요 이제 참 쉽죠?
그렇게 해서 이제 그동안에
우리가 이제 불교를 교리적으로 많이 또 배우고 공부하고
또 수행도하고, 절도하고 다라니도 지송하고 염불도 하고
참선도 하고 등등 많은 수행을 했는데 또 뭐 대소불사에 동참하시고
이런 것들이 다 공덕을 쌓는 일들 이었어요
그래서 그런 어떤 공덕을 쌓은 힘으로 십신을 다 갖추면 그 다음이 십주 예요
몇 단계를 넘어서 열한번째 단계 십주 초주..
그게 초발심주라는 거예요.. 그게 공덕을 완전히 갖춰서
십신을 완전히 갖추면 그다음이 십주 초주인 초발심주에 오른다..
초발심은 곧 변정각이다 .초발심은 곧 부처의 경지와 다르지 않다..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 화엄의 사상입니다.
그러면 초발심시 변정각 이라는 말은 이 중생의 몸이 그대로
부처와 같다 라는 거예요
어느 면에서? 본질적인 측면에서는 부처와 다르지 않다라는 거예요 근데
현실적으로는 어때요? 같아요? 달라요
이론적으로 보면 일체중생이 다 불성이 있어요..
본질적으로 보면 이치로 보면..
그런데 현실적인 측면에서 보면 엄연한 또 차이가 있어요
그럼 초발심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십신이 꽉 차가지고
십주에 오르면 초발심주라고 얘기를 하는데 이 단계에서는 믿음이
어떤 믿음이 냐면 바로 중생인 이 나의 몸과 마음이 부처의 그런 어떤 대 지혜와
법신과 다르지 않다 라고 믿는 것이 초발심주다.. 라는 거예요
다시 말하면 지금 현실적으로는 내가 범부중생일 망정
본질적으로는 부처다 이렇게 믿는 거예요..
그러면 아까 이제 믿는다 라고 하고 뭐 하고 했는데
대답이 좀 시원치 않았지만 믿음이 어떤 믿음이 있어요?
이러한 믿음이었습니까?
아니면 그냥 막연한 어떤 신앙 혹은 종교적 신념 이런 정도였습니까?
내가 부처라는 확신, 이러한 믿음이었어요?
아니면 그냥 부처님이 나한테 복을 주겠지
이런 정도였던 믿음 이었습니까?
그러니까 불교적 믿음은 내가 곧 부처라는 데서부터
본격적인 수행의 길로 나아가는 거예요
내가 십신, 십주 초주에 오르기 전에는, 초발심이 되기
이전에는 그야말로 종교적 어떤 신념 신앙에 지나지 않아요
내가 부처라는 확신을 갖지 못한다는 거에요
그런데 십주 초주에 오르면 초발심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뭐 부처와 다르지 않다 라고 하는
확신을 갖는 것이 이 초발심 이라는 거예요
그럼 우리가 초심을 공부한다고 했을 때 이런 마음으로 초발심에 대해서
강의를 해달라고 한 거예요? 아니면 모호하고 막연한 어떤 이런
소신을 가지고 얘기를 해 달라고 한겁니까?
그러니까 일체중생이 다 부처인데도 불구하고
그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범부중생으로서 화가 나면 화가
나는 대로, 욕심이 나면 욕심이 나는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또 이런저런 생각에 어떤 욕구에 의지에 매몰되어 가지고
선, 악업을 알게 모르게 짓고 그 어떤 선, 악업의 결과에 따라서
또 다른 어떤 몸을 받고 이런 악순환이 악순환을 되풀이하는 모습이 참으로 안타까워서
그런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이런 법을 설 하셨다 라는 겁니다.
어쨌든 여기 계신 분들을 억지로 수다원지에 올렸고..
억지로 올렸죠? 제가 억지로 수다원까지 올려놨죠? 좋아요? 안좋아요?...웃음..
뭐를 해결해야 수다원이라고 했습니까? 금방 얘기했는데
세 가지 족쇄만 끊으면 수다원 이라 그랬죠?
첫번째 족쇄가 뭐에요? 유신결이 뭡니까?
(오온이 내가 아님을 아는것).그 다음에는? (불법을 보면,
진실과 진리로 받아들여야 한다)
회의적 의심을 버리는 것
그 다음에 세 번째는 계금취견을 버리는 것..
문제도 나한테 있고 해결책도 나한테 있다
이렇게 이제 알고 믿으면 수다원이라는 거예요
거기서부터 이제 불교 수행이 바른 수행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도 내 몸에 대한 어떤 집착이나 생각 이런것들이 끊어져요? 안끊어져요?
안 끊어지죠 ..그건 왜 그러겠어요?
감정에 치우쳐요? 안치우쳐요? 내 생각만 먼저 앞서게 돼요? 안돼요? 되지만
얼른 알아차리는 거죠.. 얼른 알아차리고 수습해 나가는 단계.. 이거를
선가 에서는 이제 견성을 하면 견성함이 끝이 아니라
그때부터가 진짜 본격적인 수행이라고 보는 거예요
견성, 오후 라야 진수라 그랬어요
오전 수행은 수행이 아니다 라는 거예요.. 오전..
오후 라야 진수라는 거죠 깨달음을 얻은 후라야
참다운 수행이라는.. 오전 수행은 수행이 아니에요
그럼 오후 라면, 내가 부처와 다르지 않음을 이제 알았어요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는거예요..
과거의 습은 그대로 남아 있겠죠? 지금 이해를 하고
공감을 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교리적으로 공감을 하고 이해를 한 거예요
그런 이기적 번뇌.. 이런 것들은 이렇게 법문을 듣고
생각을 해보면 쉽게 동의를 하고 공감할 수 있는 것들이에요
그런데 정의적 번뇌.. 감정적 번뇌는 단박에 끊어지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예요..
견성을 했어도 마찬가지로 이런 정의적 번뇌는 단박에 끊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견성한 도인들도 오후보림 그래요
물론 성철 스님 같은 선지식은 돈오돈수 해 가지고
단박 깨닫고, 단박에 닦아 마친다..이게 돈오돈수예요.. 그거는 이제 근기.. 그런
근기에 해당되는 얘기고 지금 얘기하는 것은 견성후에,
오후에 본격적인 수행으로 들어서서 닦아나가는 것을 이름 하여
오후보림 그래요 그러면 오후라는 것 오 라는 건 뭐예요?
내가 곧 부처라는 깨달음 후에 그 후에 뭘 어떻게 한다는 보림을 한다는.. 그럼
보림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성테를 기른다 했어요
성테, 성인의 테..
우리가 성년, 미성년을 구분하는 나이가 요즘 몇살이죠?
이십세? 어쨌든 십팔세든 이십세든 되어야지 이전에는 미성년 그러죠?
미성년이면 사람이 아니라는 거예요?
사람은 사람인데 아직 성인이 아니라는 거죠..
그럼 성인이 아니라는 말은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기도 하죠?
그렇다고 사람이 아니라고는 또 할 수 없죠? 그런 얘기입니다 이거 우리가 깨달았다
내가 부처와 다르지 않음을 본질에 있어서는 부처와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렇다 라고 해서 부처 입니까?
그렇다고 해서 부처라고 할 수는 없죠.. 그러니까 아직 미성년자와 같이 정의적
감정적 이런 번뇌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한 단계이기 때문에
그런 번뇌를 제거해 나가는 단계.. 그런 단계가 십주, 십행, 십회향, 십지
이렇게 사십 단계를 닦아 나가는 거예요..
얼마만한 세월이예요? 한량없는 세월을 그렇게 바꿔나가는 겁니다.
아비달마구사론이나 이런데 보면
삼 아승지겁을 닦아서 아라한에 오른다 했습니다.
그런데 수다원과에 오르고 초발심지에 올라서
그 다음부터 닦아나가는 수행은 삼 아승지겁이든,
뭐 무량 아승지던 상관이 없는 거예요. 그때부터
모든 일거수 일투족이 다 부처를 향해서 나아가는 그런 일이기 때문에
거기에서는 시간 관념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예요..
앞으로 앞으로 부처의 어떤 그 경지를 향해서 뚜벅뚜벅 걸어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 단계에서는 시간 관념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어쨌든 우리가 초발심이라는 말을 쉽게 하고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도 얘기를 하고
또 제대로 알고 얘기도 하지만 어쨌든 초발심이라고 하는 것은 이제 십신의
초심자를 넘어서 그야말로 제대로 된 발심, 그것을 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그러죠?
발 아뇩다라샴먁삼보리심,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뭐예요?
무상, 정등, 정각.. 바른 깨달음을 얻기 위한 마음을 내었다 라는 거예요..
그런 단계가 초발심 이예요..
그러면 그 단계가 바로 부처와 다르지 않다 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불교적 신앙은 불, 법, 승 삼보 에 대한 신앙 이죠..
불교의 믿음은, 하나의 종교로서 불교는 믿음이 중심 이지요
그럼 뭐 에 대한 믿음이 냐면 불, 법, 승 삼보 에 대한 믿음이에요
그럼 이 불, 법, 승 삼보를 크게 둘로 나눠서 주지삼보 와 자성삼보로
나눠서 얘기를 해요 이 자성삼보 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이 불, 법, 승 삼보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내면에 이미 갖춰져 있다..
그러니까 형상이 없는 부처, 자성불이 무형의 어떤 자성불이 내 내면에 갖춰져 있다
이렇게 믿는 거예요 그리고 또 모양이 없는 무상정법이 이미 내안에 갖춰져 있다
그렇게 믿는 겁니다. 그리고 무쟁의 어떤 승가가 내
내면에 갖춰져 있다 라고 믿는 것이 자성삼보예요..
그런데 범부중생들이 내 내면의 중생의 마음가운데
이런 삼보가 있는 줄 알아요? 몰라요?
이럴 때는 모른다고 대답을 해야 돼 이런거 까지 얘기를 해줘야돼요?...웃음
중생들이 내 내면에 이러한 자성삼보가 갖춰져 있음을 알아요? 몰라요? (몰라요)
그러니까 그러한 내면의 이런
자성삼보가 갖춰져 있음을 깨우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냐면
주지삼보가 필요한 거예요
그럼 주지삼보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이 불단에 모셔져 있는 부처님 목불이든 동불이든 어떤 불이든
이런 형상을 갖춘 부처님을 주지삼보 에 불보라고 하는 겁니다.
해인사 팔만대장경이 주지삼보의 법보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 이렇게 삭발을 하고 가사장삼을 수 하고 출가 수행하는 스님들이
주지삼보의 승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럼 이런 불교신앙의 내용은 자성삼보가 내용 이예요..
형식은 주지삼보 라는 형식을 토대로 해서
자성삼보를 깨닫는 것이 불교의 신앙이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철저하게 다 내 내면에 갖춰져 있다 라고 믿는 거예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무명업식에 매몰돼서그러한 사실을 모른다라는 겁니다.
오늘 이제 오면서 제가 전화를 했는데 전화가 통화가 안 돼 가지고
칠판을 좀 준비해 해달라고 미리 부탁을 하려고 했는데
통화가 안돼서 준비한 것을 판사를 하면서 말씀을 드리면 좋은 내용인데
그렇지 못해서 간략히 몇 가지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의상스님이 대방광불화엄경, 육십화엄경
전체를 요약을 해서 이백 열 자로, 십조구만오천사십팔자
나 되는 화엄경을 이백십자로 요약한 게 법성게예요
그 법성게 첫 구절이 뭐냐면 법성은 원융하야 무이상이라 법성..
법성은 부처님의 깨달음의 경지에서 본 법계의 실상을 법성이라고 합니다.
그런 법계의 실상은 무이상이다 라는 거예요
두 가지 상이 없다는 거예요 두 가지 상은 뭐냐면
우리 중생들은 언어를 토대로 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지요
사유의 도구 그게 언어예요 그 언어는 이원대립하는 개념이예요
이원대립하는 개념이 쌍으로 이루어져있어요
유 아니면 무, 유만으로 유를 얘기 할 수가 없어요
무가 없이는 유를 얘기할 수가 없어요..지금 이 종이가 커요? 작아요? 말할 수가 없어요..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다가 아니라 말할 수가 없어요
대비 돼야.. 이거보다는 어때요?
크다 라고 이렇게 대비를 해야 크다 작다를 얘기할 수 있어요
그런데 법성이라는 건 뭐예요
이런 크다 작다 라고 하는 이원대립하는 개념을 넘어선 것이다 라는 거예요
그러면 그런 거에 대해서 우리는 생각할 수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생각의 도구, 사유의 도구가 언어이기 때문에
언어는 이원대립하는 개념이 쌍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그래서 크다 라는 말은 작다 라는 어떤 대립하는 개념이 없이 말할 수가 없다
라는 거예요 유 라는 말도 무가 없이는 유를 말할 수가 없어요
선이라는 말도 그렇고 악이라는 말도 그래요..이게
다 이원대립하는 개념이 쌍으로 이루어졌다 라는 거예요..
그런 도구로 사유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어떤 분별, 차별을 낼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근데 법의 실상 법계의 실상은 그런 이원대립하는 개념의 쌍을 벗어났다 라는 거예요
그래서 제법은 부동하고 본래가 적멸하다는 거예요.. 적멸하다라는 것은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다 라는 거예요
그래서 무명무상절일체, 이름도 모양도 다 끊어졌다는 거예요..
그래서 증지라야 소지요 비여경이로다 그랬어요
증지라야 소지..증득한 자 만이 알 바지 소지..
알 바지 비여경 다른 이의 경계가 아니다 라는 거예요..
또 우리가 보는 세상은 다 주관적으로 무명업식을 토대로 해서 보고 있어요
그런데 법성은 그러한 무명업식을 토대로 해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라는 거예요
그러면 그 법성에 대해서 이런 언어, 문자로 중생들의 관습적 언어문자로
이원대립하는 개념을 토대로 해서 말할 수가 있겠어요? 없겠어요?
말할 수가 없는 거예요 말할 수가 없어요.. 어떻게 하라는 거예요?
말을 하지 않으면 우린 알아요? 몰라요? 모르죠!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원대립하는 개념의 쌍을 벗어난 무이상임 에도
불구하고 그런 개념을 토대로 해서 또 말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게 방편이예요..그랬을때
법성은 이런 이원대립하는 개념의 쌍을 벗어났는데
그 법성을 말하려니까 이원대립하는 개념을 빌려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 경전이예요..
그럼 이원대립하는 개념으로 법성을 한 푼 낮춰가지고
얘기를 하면 그 다음 게송 이에요..
그 다음에 진성심심극미묘 했어요
법성원융무이상 제법부동본래적 무명무상절일체 증지소지비여경.. 그다음 뭐예요?
그러면 진성은 뭐예요? 뭐라고 설명을 해요?
불수자성수연성.. 법성은 무이상 이고 모양도 이름도 다 끊어졌고
이원대립하는 개념을 넘어섰는데
그걸 한 톤 낮춰서 얘기하니까 진성 이라는 거예요
참다운 성품 이렇게 바꿔서 한 톤 내려서
법계실상을 설명을 하는 거예요
그럼 법계실상을, 진성을 어떻게 설명하냐면
불수자성수연성 그래요
불수자성 이라는 말은 뭐냐면 자성을 고집하지 않는다
자성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것을 의지하지 않고
홀로 독자적으로 있을 수 있는 것 이게 자성이예요.. 그럼
어느 것이 다른 것을 다른 거의 도움 없이
홀로 독자적으로 있을 수 있는 것이 뭐겠어요?
아무 도움 없이 홀로 독자적으로 있는 것..
그게 뭐예요? 없다는 거예요.. 무자성 그랬죠..
불수자성, 자성 을 고집하지 않는다
공 이라는 말은 일차적으로 의미가 없다 라 는 말이에요 없는데
뭐가 없냐면? 자성이 없다...
자성.. 그럼 이차적으로 있다는 거에요
공이라는 말은 없다는 말이고 있다는 말이죠
없다는 말은 자성이 없다는 거예요
자성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것의 도움 없이
독립적으로, 독자적으로 홀로 있는 것을 자성이고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이 없다 라 고 하는 것이
무자성, 공의 일차적인 의미예요
그러면 없기 만 하냐?
있죠.. 어떻게 있냐면? 연기하고 있다..
다른 것의 도움에 의지해서 있다 라는 거예요..
연기적 존재로서 있다. 자성은 없다..
그렇지만 연기적 존재로서 있다 라는 거예요.. 그럼 오온이 공 이라고 하는 말도
그렇게 이해를 해야 돼요.. 오온이 공 이라는 것은 자성이 없다!
그렇지만 연기하고 있다..
우리 삶이 독자적으로 독립적으로 나홀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수없이 많은 연, 화합에 의해서 살아가고 있어요?
연기적 존재지요..수없이 많은 연, 인연
저연... 수없이 많은 연들의 어떤 화합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지
독립적으로, 독자적으로 이루어지는 사람은 없다 라 는 거에요..
오온이 공 이라는 말이... 그러면 연기적 삶을 살아야 하는데
나를 중심으로 하는 어떤 이런 삶을 산다는.. 어쨌든 법성원융무이상인데
진성은 불수자성이예요..그래서 수연성이다 라는 거예요
법성을 한 톤 낮춰서 진성 이라고 했고
진성은 자성을 고수하지 않고 조건에 따라서 이루어진다..
연성, 연기, 인연화합에 의해서 이루어 진 다 라고 하는 것이
이제 연성 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불교 부처님의 가르침의
가장 기본적인 어떤 축을 이루는 것이 연기 설이에요
연기설은 가장 보편적으로
많이 알려지고, 알고 있는 연기설이 십이연기죠?
12연기 이후에도 한 삼백여 가지의 연기설이 있어요
근데 12연기설이 가장 중생들이 어떤 한 생각이 어떤 구조로 일어나는지
중생들의 생사가 어떻게 해서 되풀이, 반복 되는지
이런 것들을 가장 쉽게 설명하는 연기설이 십이연기설입니다.
그래서 대체적으로 연기설 하면 십이연기를 떠올리게 되는 거죠
그래서 오늘은 사실은 이 12연기의 핵심 골자를 좀 칠판에 써가면서
좀 말씀을 드리려고 했는데 준비가 여의치 않아서
좀 다른 얘기로 대체를 하고 있는데
어쨌든 부처님의 깨달음을 법성 이라고 하면
그 법성은 그대로는 우리는 알 수가 없기 때문에
그것을 한 톤 낮춰서 진성 이라고 하고
진성 이라고 하는 말은 자성을 고수하지 않고
모든 다양한 인과 연의 화합에 의해서 생기하고 있다
인연생기하고 있다 라 고 하는 그런 형태로
한 톤 낮춰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연성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쨌든 우리는 그런 연기설을.. 연기설에 대한 이해를 토대로 해서
무엇을 깨달아야 되겠어요?
법성을 깨달아 법성을 채득 증득을 해야 된다는 거예요..
철저하게 우리는 연기설을 토대로 해서 법성을 체득해 나가는 이런
그 과정이 수행의 과정이라고 말씀하실 것 같아요
그래서 오늘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어떤 핵심 요지는 다 말씀을 드린 것 같습니다.
시간이 좀 지난번에 비해서 빨리 마무리 지었는데
제가 세 번에 걸쳐서 말씀드린 것 가운데
저한테 질문할 거 있으면 해보세요
없죠?
그러면 이것만 한번 읽어 드리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범부가 십신심에 들어가기가 어려운 것은 범부들이 모두 스스로가
범부인 줄만 알고 자기 마음이 부동지불 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범부 들이 유시이래 망령된 견해를 따르기 때문에
불법에 대하여 자기의 정견에 따라 믿음을 냄으로
여기서 정견 이라고 하는 것은 바를 정 자가 아니라 뜻
정자 입니다
쵸코파이 선전할때 정..
그정.. 감정 할때의 정.. 중생의 마음을 설명할 때는 이 정자로
설명을 해요
유정이라고 얘기하고 그런.. 다시 쉽게 말하면
무명업식 이걸 토대로 해서 앎을.. 소견을 낸다는 겁니다.
불법에 대하여 자기의 정견에 따라 무명업식에 따라
믿음을 냄으로 지혜경계말을 미혹시킬 뿐이며, 혼란스럽게 할 뿐이며
스스로 실제 개악 하지 못하고
진실한 믿음을 일으켜 시행하지 못하기 때문에 향상일로에
나아가 보불의, 옛 부처님의 전지를 밟지 못하는 것이다.
십신만심에 발심 하면 십주의 초위에 문수의 법신과 보현의 행심과
조작이 없는 ,여기서 조작이 없다 라 고 하는 것은 저절로
그냥 이루어진다는 거예요 우리는 무엇인가를 하려면
마음을 내서 뭐 열심히, 어떻게 해야 되지만
여기서 조작이 없다 라 고 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이
이렇게 이루어지는 어떤 행을 말 합니다.
보현의 행심과 조작이 없는 지과의 고신을 함께 얻는 것이다.
지과 라고 하는 것은 10바라밀의 열 번째 단계 지..
이게 깨달음을 얘기하는 겁니다.
신심자가 자기 몸과 마음이 청정무구 하므로
곧 일체 모든 부처님의 법신과
지신과 본래 동일 하여 나의 몸과 마음이 부처의
법신과 본래 동일 하여 금색 세계와 다름이 없음을 믿고
자기 마음에 분별하는 지혜가 일체 모든 부처님의 근본 부동지
불과 함께 본래 동일함을 믿으며
자기의 마음으로 묘하게 간택하는 지혜가 일체
모든 부처님의 묘한 지혜와 동일함을
믿음으로써 신승을 성취한다.
지금 제가 말씀드린 요지를 이렇게 정리를 해 본 겁니다.
그러니까 중생일망정, 현실적으로는 중생일망정
본래는 이러한 부처님의 묘한 지혜와 다르지 않음을 믿는 것
이게 불교신앙의 핵심이라는 겁니다.
10가지 신심이 이루어지면 자연스럽게 초발심 주에 들어가고
나아가 구경의 불과를 이룬다...
선문에서, 선가에서 견성한 뒤에
보림하여 성체를 기른다고 할 것이 이 10
신 가운데 성체를 기르는 것과 같다..
초발심지에 정각을 이루면 보림을 요하지 않는 것이니
오견이 다 하여 생사에 유전하지 않는다..
화엄경의 어떤 요지라고 할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질문 있으면 하시고 없으면 마치겠습니다.
첫댓글 교육부장님...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
대철 이학구교육부장님 수고많으셨습니다.~^^
덕분에 법문을 듣게되었네요.
감사드립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