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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9-11 와룡 김제조씨 묘역 조상님 산소 이발
자유인 조동화는 10/6일 추석날이 다가오고 있어 조상의 뼈가 묻혀 있는 조상묘역을 찾아 낫으로 몇차례에 걸쳐 벌초하였다.
내가 현직에 근무할때는 맡기여 벌초하거나 예초기로 벌초했는데 예초기가 고장이 난후 내가 직접 낫으로 벌초하며 하늘나라에 계신 조상님들을 기억하며 추모하지.
조동화는 왜 장손이 되었을까?
타고난 운명을 어찌할꺼여.
할아버지 할머니 합장봉분을 다듬으며 할머니 생각을 많이했제.
할머니는 1964.5.16. 58세에 파상풍으로 갑자기 일주일 앓다가 내가 이리중학1학년때 돌아가시었는데 하늘도 슬펐는지 장사지내는 날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그시절에는 의료시설이 열악하여 그냥 앓다가 돌아가시었지.
조동화는 상여 앞에서 영정을 들고 철길을 거쳐 산너머 바떰으로 해서 선산까지 도착하였제.
할머니 장례를 치루고 나서 대청마루 한쪽에 광목으로 칸을 막아 지청을 설치하였다.
아침 저녁으로 상을 차려 올리었고, 저녁이 되면 귀신이 나올까 무서운 생각도 들었다.
지청은 설치하고 1년만에 철거한 것 같다.
할머니 돌아가신지 어언 61년이 흘러 갔구나.
세세년년 세월도 무상하여라.
봉분은 여름에 풀이 많이 자라 관리하기가 힘이들지.
금년 여름 서너번 벌초하였으나, 봉분에 개망초 같은 잡초가 어찌나 빨리 자라는지 벌초하는일이 힘이 드는구먼.
추석이 25일 남었는디 그때가서 벌초 할라다간 띠풀과 개망초 잡초로 100cm도 넘게 자라, 조상님의 산소인지 풀밭인지 구별할수 없제.
깨끗하게 봉분과 남골당을 다듬어 놓은게, 기분이 가뿐하고 조상님들한테 면목이 서는구먼.
더운날씨에 일도 못허는 조동화 땀을 흘리며, 묘소 다듬니라고 고생 많이 했수다.
두어시간 땀흘리고 집이와서 체중을 달아보니 1.0kg이 땀으로 배설되여 체중이 줄었기에, 우유를 마시여 수분 보충을 했제.
인간은 3분의2가 수분이여.
정상인 사람은 매일 약 1kg을 땀이나 소변으로 배설하는디 두어시간에 1.0kg을 배설했다니 굉장한 양이여.
인간은 물이 생명수여.
좋은 마음 착한마음으로 조상을 받들어야제.
개인주의 핵가족 시대에 누가 와서 벌초 허겋어.
사는일이 바쁘고 취미생활허기 바쁜디 산소에다가 신경쓰는이 없어.
헐수 없이 벌초는 장손인 내몫이여.
요새 젊은 사람들 별초다 뭐다 제사 같은 것 없어.
조동화는 장손이라 조상님 받든다고 봉분을 깨끗하게 벌초하고 다듬는 자세가 되었구나.
땀흘리고 벌초하는일, 몸안의 독소를 배출하여 좋은점도 있구먼.
할아버지 할머니 봉분에 자란 머리 깎아 주었다고 생각헌게 마음이 편하구먼.
조상님들이여 이세상에서 못다 이룬 꿈 저세상에서는 후손들을 위하여 성원하고 행복하소서.
납골당에 계시는
고조할아버지 옥현 20세손 1840.1.21.-1896.5.24.(57세 사망)
고조할머니 전주이씨 1844.3.3.-1894.1.25.(51세 사망)
증조부(상할아버지) 철만 21세손 1868.4.1.-1946.4.1.(79세 사망)
증조모(상할머니) 보성오씨 오성녀 1882.10.5.-1964.6.16.(음력 1964.5.7. 83세 사망)
숙모 작은어머니 박금례 1938.10.3.-1965.9.4.(28세 사망)
봉분 합장
조부(할아버지) 조갑동 22세손 1906.11.24.-1983.8.3.(음력 1983.6.25. 78세 사망)
조모(할머니) 전주유씨 유보림 1907.1.19.-1964.5.16.(음력 1964.4.5. 58세 사망)
별도봉분
부친 조병옥 23세손 1926.4.11.-1999.1.22.(음력 1999.12. 5. 74세 사망)
모친 정순봉 1928.8.15.-1996.5.5.( 음력 1996.3.18. 69세 사망)
<나의 할아버지 할머니 합장한 봉분이여.
할머니는 1964.5.16. 58세에 파상풍으로 갑자기 일주일 앓다가 내가 이리중학1학년때 돌아가시었는데 하늘도 슬펐는지 장사지내는 날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조동화는 상여 앞에서 영정을 들고 철길을 거쳐 산너머 바떰으로 해서 선산까지 도착하였다.
이시절에는 동네에 상여를 보관하는 상여집이 있었는데 바떰에 있었다.
철거하지 않고 지금도 있었다면 문화재로 가치가 있었으리라.
할아버지는 1983.8.3. 78세에 노환으로 돌아가시었다.
봉분앞에는 비석을 세우는 풍습이 있어 할아버지 할머니를 추모하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상석 제단도 설치해놓았다.
돌 꽃꼿이는 납골당과 같이 설치해 놓았다.>
< 조부 조선식 조모 전주유씨 유보림 합장 봉분이다.
조부(할아버지) 조갑동 22세손 1906.11.24.-1983.8.3.(음력 1983.6.25. 78세 사망)
조모(할머니) 전주유씨 유보림 1907.1.19.-1964.5.16.(음력 1964.4.5. 58세 사망)>
<조동화 조상 가족묘역 납골당(영모당)안에 안치된 유골함 5기.
유골함은 화장한 뼈(유골)를 담아 보관하는 상자로, 납골함, 봉안함이라고도 불린다.
金堤趙氏竹西公波 臥龍家族납골당은 西紀2005년12월3일 建立하였다.
고조할아버지 옥현 20세손 1840.1.21.-1896.5.24.(57세 사망)
고조할머니 전주이씨 1844.3.3.-1894.1.25.(51세 사망)
증조부(상할아버지) 철만 21세손 1868.4.1.-1946.4.1.(79세 사망)
증조모(상할머니) 보성오씨 오성녀 1882.10.5.-1964.6.16.(음력 1964.5.7. 83세 사망)
숙모 작은어머니 박금례 1938.10.3.-1965.9.4.(28세 사망)>
<가족묘역에 안치된 상할머니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를 기억하며 내가 4살적 사진을 추억하노라.
조동화는 네 살 나이에 내모습의 기억이 없어 오직 사진으로 나를 기억하노라.
김제 와룡마을 시골 고향집 부엌 처마 앞에서 조동화가 4세적 1954년에 가족들이 함께 찍은 사진이다.
맨앞 고개를 숙이고 개찜에 손을 집어넣은 어린 소년이 네살적(1954년) 바로 조동화로구나.
조동화는 네 살이었고 상할머니(증조모)는 72세였으며 맨앞에 의자에 앉아 사진을 찍었구나.
조동화의 뒤에는 할머니가 서서 사진을 찍었고 이때 할머니 나이는 47세였다.
학생모자와 제복을 입은 학생이 바로 조동화의 숙부님이 20살적 김제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었다.
뒤쪽 안경쓰신분이 조동화의 아버지 28세일 때 모습으로 숙부님과는 8살 차이가 나며 조병옥님이시여.
조동화의 아버지 조병옥님은 나이 드셔서도 시력이 좋으셨는데 아마도 멋이 있으라고 안경을 쓰신 것 같다.
아버지 옆에는 어머님 26세일적 정순봉님이 3살터울의 조동화의 동생 수권이를 안고 있구나.
2025.6.8. 향년 92세로 천수하신 숙부님은 장조카 조동화와 16년 차이로 결혼 1년정도 고향 와룡에서 신혼생활을 하시다가 김제로 제금 날때까지 조동화와 한집에서 살았는바 남원에서 시집온 작은 어머님 박금례님과 금실이 아주 좋았었다.
조동화는 1949년도 어머니 22살 정순봉님과 아버지 24살 조병옥님이 혼인하여 1950년도 전쟁통에 낳으셨다.
조동화가 1950년 이세상에 태어날때는 어머니 정순봉님은 23살, 아버지 조병옥님은 25살이었다.
할머니도 상할머니도 어머니도 아버지도 숙부님도 이세상에 아니계시니 이사진의 유래를 물어 볼길이 없으니 아쉽기 한이 없구나.
조동화의 할머니 유보림님은 이때 나이가 47세, 아버지는28세로서 19살에 아버님을 낳으셨다.
전주유씨 유보림할머니는 18살 나이에 삼례에서 김제와룡 김제조씨 19세인 조갑동할아버지에게 시집을 오시었다.
할머니 19세 할아버지 20세에 조동화의 부친 조병옥님을 낳으셨고 8년후 숙부님 조병무님을 낳아 숙부님은 아버지보다 8살 아래이시다.
장조카 조동화와 16세 차이의 20살 숙부님 조병무님은 장조카 조동화를 사진찍는데 고개 좀 바르게 하라고 하지 않았네요.
할머니는 큰손자인 나를 시골집 와룡에서 동네 고사티를 걸어다니시며 업어서 키웠을 것이다.
할머니는 1964년 내가 중학교1학년때 파상풍으로 일주일 앓다가 58세에 돌아가시었다.
사랑하는 할머니 사랑합니다.
김제조씨 가문 김제 와룡에서 태어나고 자란 조동화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어머니 정순봉님과 아버지 조병옥님한테 이 세상에 왔으니 삶에 이유가 없고, 그냥 태어났으니 사는것이다.
인간의 삶이란 정답이 없는 것이 정답인 것 같다.
삶의 여로에서 이세상 살아가는 것이 모두가 “부질없다” 하면서 그냥 하루 하루 최선을 다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다.
그누가 속세를 가리켜 잠깐의 꿈속세상이라 했던가?
인생은 한조각 뜬구름 같은것이며 자연에 순응하며, 오직 한번의 인생 소중한 시간을 즐겁게 살자.
오늘 해야 할일이 있다면 바로 시행하고, 평범한 일상이 나에게 가장 소중한 행복의 자원임을 꼭 기억하며 사리라.
행복이 뭐 별거 있습니까?
그냥 내가 하고 싶을거 하면 그게 행복입디다.
고맙고 감사합니다.>
28세의 젊은 나이에 가신 숙모님을 추모하며
기억을 더듬으니 결혼하여 하링이에서 같이 살다가 김제로 제금을 나와 쌀가게 하실적에 할머니와 하룻밤인가 이뜰을 잣는데 쌀가게에 도둑놈이 들어와 쌀을 훔쳐가는 도둑놈을 잡아 족치는 광경을 목격한 기억이 생생 하답니다.
작은 어머니 박자 금자 례자 님께서는 28세의 나이로 가시는 길은 1965년이었으며,
인명은 재천이라 하였으나 인생의 허무함이 이럴 수 가 있나요?
내가 중학2학년때 가시었는데 숙부님은 운구차를 따라오며 울밑에서 봉선화를 불러대며 구슬프게 보내시었지요.
앞으로도 살아갈날이 창창하며 현숙이와 기승이 키우고 중년이 되어가는 모습 보며, 즐거운 세상 이야기 나누기로 약속하지 않았나요.
28세에 고인이 된 작은어머님은 남원시댁에 다녀 오시어 풍선을 한박스 선물로 가지고 오셨었지요.
사람의 삶은 운명이라 할 수 있는데도 작은어머님 죽음이 공교롭지 않게 여기지는것은 딸과 아들 두아이의 커나가는 과정을 보지 못하고 소리없이 떠나버린 비통함에 있다고 하네요.
죽음을 맞이한 순간에 이조카는 중2때 영정을 들고 장지에 갔지만, 이제 이 조카도 노년이 되여 늦게나마 추도사로 작은어머님을 추도합니다.
-2025. 9. 11 조카-
金堤趙氏는 本貫을 金堤로 시조 趙連璧 할아버지의 자손이 번창, 약 800년의 역사를 통해 약5만여명의 씨족으로 번성하였으나, 현대사회는 서구사회를 본떠 조상들이 지켜온 충효와 승조사상은 희박해지고, 현대학문에는 능할지언정 자신에 대한 祖上에 대하여는 거의 백지이며 자기조부의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 대다수인 현세태라고 한다.
고려말기의 시조에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없네'
란 구절이 있는데,
어렸을적 산천과 인걸은 우리들 마음속에 숨쉬고 있는 것 같다.
고향은 언제나 변함없이 푸르른 들녁과 푸른 하늘 그대로, 하링이는 영원한 어머니 품이다.
지금부터라도 조상의 얼을 기리고 복받는 後孫이 되고자 다짐해 본다.
야은 길재의 시를 옮기면,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느니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 없네.
어즈버 태평년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세월은 어김없이 흘러간다.
잡을 수도 잡히지도 않는 화살같이 흘러가는 세월을 탓한들 무엇하리.
☛金堤趙氏의 來歷☚
-始祖 : 趙連璧
-本貫 : 金堤
김제조씨의 시조는 고려고종때 상장군(대장급)을 지낸 조연벽(趙連璧)이다.
시조 조연벽은 김제 용두동(지금의 옥산동)에서 태어났으며 무예가 뛰어나 장수의 재목으로 꼽혔다고 하며,
시조 조연벽(趙連璧)은 1231년(고려 고종18년) 몽고군이 내침했을 때 대장군에 임명되어 몽고군을 소탕한 공으로 좌의정에 추증되어 후손들은 조연벽을 시조로 모시고 본관을 김제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조연벽은 삼남을 두었는데 장자 조기는 선친의 뒤를 이어 무장이 되었고 대장군에 올랐으며, 차자 조서는 대사헌 좌승지에 올랐으나 후사가 없다.
삼자 조간은 초시 중시 친시를 공의 나이 16세때(1279년 고려 출렬왕5)인 모두 장원급제하여 우정승을 역임하였고 “주자사서집주”를 간행하여 큰 공헌을 하였다.
조간은 父喪에 3년동안 시묘살이를 하였으며 1264년(고려원종4)에 김제용두동에서 태어나 1325년(충숙왕15년)세상을 떠났으며(향년62세) 시호는 문량공이다.
6세 趙義는 중시조로서 정산현감, 권농단훈련관, 충청병마절도사를 역임하였고, 사후에는 천안 개천동에 예장되었다.
의는 이조 태종13년 서기1413년에 경기도 양주에서 출생하여, 세종22년 서기1440년 28세로 순직하시메 세종께서 부음을 들으시고 크게 슬퍼하시와 예장을 명하여 묘소가 심산유곡 천안시 광덕면에 있다.
조의의 정부인 강능김씨 할머니는 공이 28세에 순직하여 행복된 젊은시절은 잠시동안이 되고 말았으니 絶望感에 빠져 下從하기를 결심하고 食飮을 全廢하여 사경을 헤메는 여러날만에 어린자녀들이 붓들고 痛哭하니 스스로 정신을 가다듬어 어린 5남매를 거느리고 양주로부터 竹山리에 이사, 故鄕에 定着하여 3남2녀를 훌륭히 養育하여 長男 理智 2남 崇智 3남 承智는 각각 登科하여 나라에 충성하고 두딸은 출가하여 子孫이 繁昌하였으며 할머니께서는 李朝成宗9년 西紀1478년에 作故, 井邑옹동 금산동에 墓가 있다
9세손 처사 조윤침(趙潤琛)은 한성서윤에 여러차례 임명되었으나 잇당사화 정쟁풍토에 환멸을 품어 벼슬길에 오르지 않고 후학지도에 일생을 바쳐 그이름을 원근에 떨쳤다.
집 하나를 구성하여 학업을 연구하는 장소로 백천이라고 하였으니 수삼명현과 더불어 문주지유(文酒之游 글을 짓고 술을 마시며 노는 것)하였다.
조윤침의 호는 백천당이며 서기1476년(성종7년) 공조참판 원우의 셋째아들로 태어나 일흔살이 되는 1545년 인종원년에 별세하셨다.
12세손 응헌은 호가 죽서공이요, 일찍이 연방에 올라 명나라가 패망한후 벼슬에는 뜻이 없어 한세대의 명현들과 더불어 글과 술과 서로 놀면서 의리를 밝히었으며 공은 일곱아들이 있으니 시인들이 말하기를 조씨의 칠룡이라고 말하였다.
공은 효종대왕4년(서기1653년) 졸하니 칠십이세가된다.
응헌(應巘)의 셋째 아들 필태(13대손)는 천성의 효성이 지극하여 묘려에서 삼년을 마치니 원근사람들이 찬탄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었다.
왕께서 특별히 인견하시어 태학반에서 누락된 것을 아깝게 여기시고 특별히 호계라는 호를 주시었다.
13세손 趙必達장군은 父가 思誨(12세손)로 호조참판, 조부 유정(11세손)은 승정원좌승지, 고조부 윤정(10세손)은 병절교위(정6품)이었다.
공은 1600년(宣祖 33년) 7월 7일 김제에서 태어났다.
조필달장군은 일찍이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을 필두로 벼슬길에 나가 순안현령(順安縣令)과 보성군수, 양주목사(揚州牧使) 등 외직을거쳐 포도대장(捕盜大將)과 3도통제사(三道統制使) 등 무려 일흔 두 군데의 관직을 거쳤다.
공은 어느 자리에 있거나 국사(國事)를 공정히 처리하고 사사로운 이득을 취하지 않아 부임하는 곳마다 청렴결백한 관리로 소문이 자자하였다.
공의 행장(行狀)을 듣고 임금이 시험해 보기 위해 제주목사(濟州牧使)로 제수한 후 얼마 뒤에 파면시키고 암행어사를 보내어 그가 돌아오는 배를 조사하게 하였다. 이윽고 배 안에는 짚신 3켤레와 쌀 3되,군복 한 벌 장검(長劍)과 추(錐)가 각각 한개씩 뿐이라는 어사의 보고를 받자 임금은 크게 기뻐하여 '만고청백우성장조필달 (萬古淸白于城將趙必達)' 이라는 친필 휘호를 내렸다.
1664년(顯宗 5년) 공이 평안병사 겸 안주목사로 재임 중 별세(향년64세)하니 임금이 예조(禮曹)에 명하여 부조를 후히 하도록 했으며, 예조정랑 박청(朴淸)을 보내어 제사를 치르도록 하였고, 고향으로 운구할 때에 예의를 갖추어 장례를 치르도록 명하였다.
그의 군복, 호남육군사령기(湖南陸軍司命旗), 고신(告身), 화살통, 논시(論示), 교지(敎旨) 12매 등 6종 17점의 유물은 전라북도유형문화재 104호로 지정되었으며 김제 벽골제농경문화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현대에 이르러 김제조씨문중의 명예를 선양한 인물로는 제헌 및 4선국회의원을 역임한 趙漢栢 종친이 커다란 족적을 남겼고, 2선국회의원을 지낸 趙尙來 종친이 뒤를 이었으며, 그 외에도 수많은 종친이 배출되어 가문의 명예를 선양하고 국가사회에 기여하고 있다.
김제조씨는 현재 북한과 해외동포를 포함하여 약5만여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집성촌(集姓村)
-전북 김제군 월촌면 일원
-전남 무안군 현경면 양학리
-전북 정읍군 이평면 창동리
-전북 김제군 김제읍 일원
-전북 김제군 용지면 일원
한국의 장례 문화
옛날에는 집에서 장례를 치렀고 장례가 끝나면 조상들의 무덤이 있는 곳이나 그 근처에 묻었다. 그리고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무덤 옆에 작은 집(움막)을 지어(만들어) 그 안에서 3년 동안 사는 사람도 있었다. 3년이 지나야 장례가 완전히(모두) 끝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장례 기간 동안 입고 있던 장례복(상복)을 벗었다.
요즘은 병원의 장례식장이나 전문 장례식장에서 장례를 치른다. 장례가 완전히(모두) 끝났다고 생각하는 기간도 달라졌다. 아주 많이 짧아졌다. 예전에는(옛날에는) 집집마다 장례를 치르는 방법이 거의 비슷했지만 요즘은 종교에 따라 다르다. 어떤 종교인지에 따라 장례 방법이 조금씩 다르다. 예전에는(옛날에는) 땅에 묻었지만 요즘에는 땅에 묻는 대신 다른 방법을 하기도 한다. 땅에 묻을 경우에도 공동묘지를 이용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땅에 묻지 않을 경우에는 시신(죽은 사람의 몸)을 불에 태우는 '화장'을 하기도 한다.
보건복지가족부에서 성인(어른) 남녀 천 명에게 설문조사를 한 결과 죽으면 화장을 하겠다는 사람이 80%가 넘었다. 그리고 실제로 10명 중 6명 정도는 화장을 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1998년 화장률이 27,5%였던 것에 비하면 십년만에 두 배 이상 늘었다.
또 최근 수목장을 하겠다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수목장은 화장한 후 나무 밑에 묻는 것을 말한다. 자연과 하나가 되고 환경도 생각한다는 점에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는 매년 여의도 면적만큼의 묘지가 새로 생겨나고 있다고 한다.
전국적으로 산에 있는 묘지는 2000만기를 넘어섰다고 하는데, 땅은 한정되있고 묘지는 계속해서 늘어나 더이상 묘지를 쓸 땅도 어렵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묘지는 개인묘지가 69% 집단묘지는 31% 으로 개인묘지의 70%이상이 불법묘지라고 한다.
국민 1인당 평균 주거 공간은 4.3평인데 묘지 면적은 평균 15평에 달해 주거공간보다 3~4배나 크다고 한다.
대부분의 묘지는 산에 조성되기 때문에 산림 훼손, 자연생태계 파괴, 환경파괴의 원인을 제공한다.
앞으로 수도권은 3년, 전국적으로 10년내에 묘지 공급한계가 예상이 되어 사후에도 시신을 안치할곳이 없기때문에 봉안제도가 도입되고 확산이 되는 추세이다.
시묘살이
부모상을 당했을 경우, 묘지 옆에 초막이나 여막을 짓고 3년(만2년)을 생활하며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와 마찬가지로 모시는 생활을 ‘시묘살이’라고 한다. 여러 예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중국 공자의 제자들에게서 유래된 풍습으로 조선시대 사대부에서 성행했던 풍습이다.
옛날에는 부모상을 당할 경우 묘지에 초막을 지어 3년간 거처하며, 살아계실 때와 마찬가지로 아침 · 점심· 저녁으로 상식을 올리고, 밤이 되면 침상을 마련하는 것이 예의 기본이었다. 이것을 시묘살이라 한다.
시묘살이는 유학의 발달로 많은 사람들에게 퍼져나갔다. 유학은 효를 중시했기에 유학자는 지극정성으로 돌아가신 부모를 3년 동안 모셨다. 그 때문에 시묘살이 중에 심각하게 건강이 악화되는 경우도 많았고, 심하면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시묘살이는 유가의 보편적인 예서인 『가례家禮』 등에서는 언급되지 않은 내용이다. 그럼에도 조선시대에 시묘살이가 사대부가에 유행한 것은 중국에서 공자 제자들이 스승님을 위해서 했던 일이 전파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묘살이는 의례의 실천이 아닌 유교적인 전통 관습이라고 할 수 있다. 시묘살이는 어떤 의례서에서도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시묘살이가 예서에 언급되지 않은 이유는 『가례』에 규정되어 있는 상례의 일정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장례가 끝나면 망자의 혼백은 집으로 모셔 와서 신주를 사당에 모셔야 한다. 그런데 시묘살이를 하게 되면 혼백을 집으로 모셔오는 ‘반혼(返魂)’이 삼년 이상 미뤄지게 된다. 따라서 예학자는 시묘살이를 명쾌하게 인정하기가 어려웠다. 시묘살이에 대한 기록은 퇴계 이황(李滉)이 『사례편람』의 인용문에서 “지금 여묘의 풍속은 성하고 반혼하는 예는 없어졌으니 한탄스럽다. 다만, 말세에 예법이 무너져 집으로 부모의 혼백을 모셔와 근신하지 못 하는 일이 많이 생긴다면, 여묘를 행하여 혼잡을 피하는 것보다 못하게 된다.”고 한 것과, 율곡 이이(李珥)가 『격몽요결(擊蒙要訣)』에서 “장례 후에 반혼하는 일이 많은데, 이는 정말 바른 예이다. 다만, 세속 사람들이 잘못 본떠 여묘하는 풍속을 폐하되, 반혼 후에는 각기 제집으로 돌아와 처자와 한데 거처하면서 예법을 크게 무너뜨리니 심히 한심하다. 무릇 어버이상을 당한 이는 스스로 헤아려보아 일일이 예를 따라 조금이라도 부족함이 없어야 할 것이니, 마땅히 예에 따라 반혼하고, 혹시라도 그렇지 못하면 옛 풍속에 따라 여묘살이를 하는 것이 옳다.”라고 한 것이 전부이다. 이 내용에 의하면, 이황과 이이는 원칙적으로 반혼을 바른 예라고 규정하면서도, 만약에 반혼의 효를 다하지 못할 바에야 시묘살이를 해도 된다는 입장을 나타내고 있다. 실제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시묘살이 풍속을 현실로 인정하는 태도를 보인다.
이 외에 사대부의 일기에서 시묘살이를 확인할 수 있다. 경상북도 안동에 살았던 이정회(李庭檜)와 서울 서소문에 살았던 이문건(李文楗)의 일기가 그것이다. 이정회는 1578년 5월 1일에 모친상을 당해 시묘살이를 만 2년 동안 했다. 그는 장사 후에 여막에 거주하면서 초하루와 보름에는 꼭 삭망제(朔望祭)를 지냈고, 손님을 맞이하였다. 틈틈이 농사일도 돌봤다. 추수가 끝난 겨울에는 열심히 묘역에 상석(床石)이나 표석(標石)을 조성하는 일을 했다. 이문건은 1535년 1월 5일 모친상을 당하여 시묘살이를 했다. 그의 집은 서울 서소문이었지만 양주 인근에 모친을 모셨다. 이문건도 상중에는 열심히 묘역을 돌보면서, 사회활동과 경제활동도 함께 했다. 그는 평상시 하던 전답 관리와 소속된 노비 관할 등을 계속했다. 일상생활의 하나인 봉제사(奉祭祀)와 접빈객(接賓客)도 빼놓지 않았다. 시묘살이 중 이문건은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아 상중 내내 감기 기침에 시달렸다. 그래서 간혹 아침과 저녁에 하는 조석곡(朝夕哭)을 생략했다. 그는 건강을 지키기 위해 인삼이나 약을 복용하였고, 간혹 술을 마셨다. 상중에 금기시되는 술을 마신 것은 약해진 체력을 보존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예기禮記』의 「상대기喪大記」에도 거상 중에 병이 있으면 술을 마시거나 고기도 먹을 수 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상중에는 철저하게 소식(素食)하였다. 상중에는 관직 생활을 하지 못하는 것은 기본이었고, 먼 길을 떠나는 것 역시 못했을 정도로 제약이 많았다. 반면 이러한 제약으로 학문에 몰두하여 상 중에 저술 활동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시묘살이는 살아계실 때와 동일하게 묘 옆에 움막을 지어 생활하며 부모가 돌아가셨지만 생전에 못다한 효도를 이어간다는 의미가 있다. 시묘살이는 『국조오례의』나 『가례』등의 예서에는 규정되어 있지 않지만 사대부의 생활 속에 자리 잡혀있던 전통적인 풍속이라고 할 수 있다.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선양(宣陽)리에는 시묘곡이라는 고개가 있다. 시묘곡은 풀이하면 ‘시묘살이했던 골짜기’라는 뜻이다. 현재 이곳은 안동댐이 건설되어 인공호가 들어서 ‘시묘살이골’이란 이름만이 전해지고 있다.
시묘살이를 한 이유
예전에는 삼 년간 시묘살이했다. 그것은 아이가 태어나면 삼 년간 부모가 돌봐주기 때문이다. 부모의 은공에 보답하기 위해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묘 옆에 움막을 짓고 그곳에서 삼 년간 시묘살이했던 것이다. 부모의 은공을 갚기 위해, 효심으로 시묘살이를 하는 것이다.
경기도 파주 지역에서 상장례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2005년 이기형이 엮어 민속원에서 펴낸 『한국구전설화집 2』에 수록되어 있으며, 2004년 1월 14일 이기형이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이천 1리 441-18에서 김기철(남, 79세)으로부터 채록한 것이다.
예전에는 시묘살이라는 것을 했다.. 부모가 돌아가시면 건품만 했다. 건품은 가묘를 해 묻어두었다가 삼 년이 지난 후에 원 자리에 갖다 모시는 것을 말한다. 이제 삼 년 간에는 여막을 짓고 거기서 머리도 안 빗고 지냈다. 그전에는 다 머리를 빗고 상투를 틀 때였다. 빨래도 안 해 입었다. 아침저녁으로 상식을 하고 여막에서 삼 년을 지내야 했다.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효를 행하며 부모를 모셨다.
이렇게 삼 년을 졸곡하고, 장사를 지내고 그런 다음에 산지(묘지)를 잡으러 갔다. 지금은 부모가 죽으면 바료 묘지를 잡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정성을 드린 다음에 묘지를 잡았던 것이다.
선산이 있으면 선산에 묘를 쓰는데, 먼저 선산 산에 올라가서 산신제를 잘 지내야 했다. 묘를 쓰기 전에 산신제를 지내는 것은 산의 임자가 바로 산신이기 때문이다. 산신께 정성을 다해 제사를 지내면 묫자리를 내주게 되어 있다. 아무리 명당이라도 또 명당을 잘 잡는 지관도 산신이 묫자리를 내어주지 않으면 못 보는 법이다. 산신께 정성껏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눈을 가려서 명당자리가 보이질 않는다고 한다.
예전에는 시묘살이를 삼 년 동안 했다. 옛날에는 탁아소 같은 것이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 젖을 삼 년 동안 먹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죽었다. 아이는 세 살이 되어야 이가 나와서 이밥을 먹었다. 부모가 돌아가시면 삼 년간 시묘살이를 하는 이유는 내가 태어나서 세 살까지 날 먹어주고 입혀주며 돌봐줬기 때문이다. 부모의 은공을 갚기 위해, 효심으로 시묘살이를 하는 것이다.
「시묘살이를 하는 이유」는 전통 장례에서 삼 년간 시묘살이를 하는 이유를 설명한 이야기이다. 사람은 태어나면 삼 년 동안 부모가 돌봐줘야 살 수 있다. 이런 부모의 은공에 보답하기 위해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묘 옆에 움막을 짓고 그곳에서 삼 년 동안 시묘살이를 했다는 것이다. 시묘살이는 생전에 못다 한 효도를 지속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시묘살이는 『가례家禮』를 비롯한 유가의 보편적인 예서에는 없는 내용이다. 정몽주는 부모님 돌아가시자, 각각 삼년간의 시묘살이를 한다. 이후 시묘살이는 조선시대 사대부가에서 널리 유행하게 된다. 시묘살이는 의례의 실천이라기보다는 사대부가의 삶 속에 자리 잡은 전통풍속이라고 할 수 있다.
지청(상청)설치와 삼년상
전통사회 온가족이 모여살던 시절 조동화는 중학1학년때 1964년 할머니가 58세에 돌아가시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대청마루 한쪽에 광목으로 칸을 막아 지청을 설치하여 영정사진을 비치하고, 아침 저녁으로 상을 차려 올리었다.
지청을 다른말로 상청(喪廳)이라고도 하는데 어른들이 지청이라고 하였다.
초하루와 보름이 되면 음식을 장만하여 큰상을 차리여 올리었다.
저녁이 되면 귀신이 나올까 무서운 생각도 들었다.
지청은 설치하고 1년만에 철거한 것 같다.
전통사회는 유교사상에 바탕을 두어 조상숭배 사상이 강했다.
유교식 전통 상례의 핵심은 삼년상이라 할 수 있다.
수백 년 동안 우리 조상은 부모가 돌아가시면 삼년상을 치렀다.
삼년상은 인간이 태어나서 3년이 되어야만 부모의 품을 떠날 수 있다는 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즉 삼년상에는 적어도 3년이 될 때까지는, 살아있는 부모를 모시듯 돌아가신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여야 한다는 효사상이 담겨 있다.
부모는 자기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에, 비록 상복을 벗더라도 상중인 것처럼 행동을 삼가고 마음속으로나마 상기를 치르는 것처럼 행동하였던 것이다.
현대를 사는 우리는 삼년상의 본질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삼년상에 들어 있는 의미를 안다면 결코 부모에게 소홀히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삼년상은 거의 시행되지 않는다. 사십구재나 100일 탈상을 하고, 일년상도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심지어는 부모의 시신을 매장한 다음날 3일 탈상을 하는 경우도 흔하다. 아예 탈상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일도 허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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