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홉스는 『리비이어던』에서 “인간은 자연상태, 즉 전쟁상태에 존재”한다고 했고, 『영구평화론』을 쓴 칸트도 “평화 상태는 자연상태가 아니다. 자연 상태란 전쟁의 상태이다.”라고 했다. 현대에 들어서도 퀸시 라이트는 『전쟁연구』에서 “평화는 인위적이고 전쟁은 자연적이다.”라고 했고, 아자 가트는 『전쟁과 평화』에서 “폭력적 경쟁, 일명 분쟁은 자연전체의 통칙이다.”고 했다. 이런 인식의 연장선에서 ‘평화’는 그 동안 자신에 대한 자신만의 규정을 갖지 못했다. 평화는 자신에 대한 규정조차 전쟁에 의존했다. 즉 평화는 전쟁과의 대비 속에서 전쟁의 결여태 또는 부정태로 규정되었다.
이에 대해 필자는 평화를 만드는 피스메이커가 되기 위해서는 ‘평화를 전쟁의 부재상태’라고 하지 않고, ‘전쟁을 평화의 부재상태’로 개념 규정하는 발상의 대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발상을 전환할 경우, 가장 중요한 것은 평화에 대한 새로운 개념 규정이다. 평화에 대한 새로운 개념 규정은 “소극적 혹은 부정적 규정으로부터 적극적 혹은 긍정적 규정으로 전환”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이렇게 새롭게 평화의 개념을 규정할 경우, 우리는 이전과는 달리 더욱 적극적으로 평화를 추구할 수 있다. 평화를 위한 다양하고 적극적인 정책수립이 가능해지고, 마침내 “평화를 위하여 전쟁을 준비하라”는 금언과 더불어, “평화를 원하거든 평화를 준비하라”라는 금언을 현실화시킬 수 있다.
평화의 새로운 개념정립을 위해서는 우선 전쟁의 개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전쟁은 ‘상대를 존중하지 않고 자신의 의지를 상대에게 강제하기 위해 폭력적은 방법을 사용하는 것’다. 여기서 전쟁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①우선 상대가 있어야 하고, ②그 상대를 존중하지 않아야 하며, ③자신의 욕구를 상대에게 강제적으로 관철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하고, ④마지막으로 자기 의지의 강제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해야 한다. 보통 전쟁이 가까운 사이에서 일어나는데 이것은 ①이 전쟁의 필수요소임을 말하는 것이다. ‘상호존중’을 의미하는 ②는 적(敵)과 우(友)를 구분하는 기준으로 중요하며, ③과 ④는 전쟁으로 발화되는 과정을 의미한다. 아자 가트는 “현실 안에서 유기체들은 협력전략, 경쟁전략, 분쟁전략에 의지”하는데, 이것을 어떻게 조합할지는 “특정한 상황에서 각 전략의 유용성에, 그리고 진화 경로에 따라 형성된 유기체 각각의 특수한 형태에 달려 있다”고 보았다. 결국 “비용 대비로 가장 효과적인 선택지라고 판단되는 경우, 폭력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전쟁의 개념을 염두에 두면서, 평화의 개념을 부정태가 아니라 정태, 즉 독립적인 개념으로 정립할 때 고려해야 할 것은 ‘주체’, ‘관계맺음’, ‘비폭력(우호)적인 상호작용’ 등 세 가지이다.
우선 주체의 문제인데, 전쟁과 마찬가지로 평화가 논의되기 위해서는 상호 독자적인 주체의 형성이 필수적이다. 주체성(독자성)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 즉 유기체의 분화가 일어나지 않았거나 한 유기체의 의지가 일방적이고 강제적으로 관철되어 지배와 종속만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평화는 성립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상호 독자적인 존재성이 상실되고 서로가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거나 지배적 획일성만 존재한다면 평화는 불가능하다. 특히 지배적 획일성은 동일성 원리라고 할 수 있는데, 지배하거나 배제하여 독립적인 존재성을 정립하지 못하게 하는 “동일성의 원리는 평화의 적이다.” 이 점에서 평화의 제1조건은 상호 독자성의 정립이고, 이를 서로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을 한반도에 적용시킬 경우, 한반도 평화의 제1조건은 남과 북이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각각 정립되고 이것을 상호 인정하는 것이다.
둘째는 ‘관계맺음’으로, 따로 고립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울려 존재해야 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인간의 삶에서 “타자와의 무관계 혹은 비교섭이 원칙적으로 가능하지도 않지만 있어서도 안된다.” 이것은 개인만이 아니라 사회, 국가도 마찬가지이다. 이 관계맺음은 인간존재의 기본조건이자 평화의 기본조건이고 전쟁의 기본조건이기도 하다. 정호근은 「평화, 화해와 소통의 철학」에서 “전쟁이든 평화든 모두 접촉과 교류의 불가피성에서 기인한다.......교류를 단절하고 접촉 없는 삶을 선택할 수 있고 그렇게 살 수 있도록 타자에 의해서 방치될 수 있다면 전쟁은 불필요한 것”이라고 보았다. 남과 북의 ‘관계맺음’에 있어서 핵심문제의 하나는 이념과 체제문제이다. 즉 이념과 체제가 달라도 관계맺음이 가능한가? 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상대방의 이념과 체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현명한 방법을 제시해야 한다.
셋째는 상호관계를 적대적 관계가 아니라 우호적 관계로 만들어 경쟁과 갈등을 비폭력적 방식으로 풀어가는 것이다. 칸트는 “우호란 한 이방인이 낯선 땅에 도착했을 대 적으로 간주되지 않을 권리”라고 규정했는데, 이 우호의 조건을 영구평화를 위한 제3의 확정조항으로 제시했다. 칸트는 우호를 일시적인 방문의 권리 또는 교제의 권리라고 했지만, 우호적 관계를 위해 필요한 것은 거래, 소통, 관용, 화해이다. “두 집단이 만나는 경우, 그들은 서로 피하거나 - 경계심을 나타내거나, 도전하는 경우에는 싸우거나 - 아니면 잘 거래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거래를 통해 관계를 맺을 때 두 주체가 독자성(고유성)을 잃지 않고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방식은 소통이다. 이 점에서 진정한 관계맺음은 하나됨이 아니라 소통의 관계로 이해되어야 하고,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차이의 관계로 있을 때만 진정한 소통이 가능하다. 이 소통은 곧바로 관용으로 연결된다. 즉 인간의 복수성에서 출발한 ‘그리고(and)’의 논리가 작용하는 공간에서 “관계맺음의 도덕이 관용이다.” 관용은 우선적으로나 지속적으로 일치가 가능하지 않을 때 “상대적 평화” 상태로 살게 한다. 그래서 아도르노는 “평화란-지배없이-구별된 자가 서로 관여하는, 구별된 자의 상태이다.”고 정의했다. 이 때 “분쟁과 갈등의 해소는 더 이상 폭력적인 수단이 아니라 소통을 통한 조정에 입각해야 한다.” 이것이 평화의 원칙이다. 결국 평화는 서로의 독자성을 인정하고 관계를 맺으며 소통하고 거래(조정)하며 관용(이질성을 참는 것)하는 과정에서 생겨난다. 이 결과 나타나는 “평화는 우호적 관계 형성의 과정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 점에서 1972년 독일연방공화국과 독일민주공화국의 우호협력에 관한 기본조약은 매우 의미있는 평화의 교본이다.
넷째 평화를 ‘독자성을 가진 존재들이 서로 소통하며 어울려 (우호적으로) 사는 것’으로 규정할 경우, ‘폭력(강제)적인 방식으로 다른 독자성을 파괴하는 존재’, 즉 ‘적’를 어떻게 보고, 이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암세포나 코로나바이러스, 나치즘과 제국주의, 나아가 폭력혁명으로 다른 계급을 제거하고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실현하려 한 공산주의와 ‘각자 자유롭게 어울려 살 수 있는가, 즉 평화롭게 지낼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평화’와 ‘적’은 그 개념상 서로 모순적이다. 그래서 적과의 평화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적과의 전쟁도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 적으로 하여금 폭력적인 방식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억지’할 수 있다면 전쟁을 방지할 수 있다. 그렇다면 ①적이 자신의 의지를 폭력적으로 관철하려는 것을 억지(deterrence)한 상태에서, 앞에서 제시한 평화의 조건에 입각해 ②상호 독자성을 인정하고, ③서로 관계를 맺으며, ④소통하고 거래하며 조정(관용)할 수 있는가? 만일 이것이 가능하다면 ‘적과의 평화’를 위한 최소한의 길이 열린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적대의식, 적 이미지, 악마화이다. 적대의식 또는 적 이미지가 심화되면 이것을 통해 대립과 불신이 확대 재생산된다. 그리고 “대중들은 악마는 오로지 무력에 의해서만 통제할 수 있다는 인식에 동조하기 쉽다.” 또한 “악마적 국가와 펼치는 죄수의 딜레마 게임에서는 상대가 어떤 전략적 선택을 하더라도 상대적으로 이익을 최대화할 수 있는 전략이 바로 군비증강”이고, “악마와의 싸움에서 힘의 증강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 것은 자신의 나약함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군비경쟁을 피할 수 없는 악순환이 발생한다.”(송영훈, 「적대의식과 상징정치」) 이러한 맥락에서 한국전쟁을 둘러싼 ‘정전체제 유지론’과 ‘평화제제 형성론’ 그리고 북의 핵무력과 한미동맹군의 군사력 사이에 벌어지는 ‘확장억지론’과 ‘군비통제론’이 한반도 평화를 위한 핵심 쟁점이고, 이것에 어떤 관점을 가지고 어떤 정책을 수립하고 추진하느냐가 한반도 평화에 매우 중요한 관건이 된다.
이상 평화의 개념을 ‘독자성을 가진 두 실체 간의 우호적 관계 형성’으로 규정할 경우 우리는 한반도 평화의 쟁점을 새롭게 추출할 수 있고, 그 논점을 밝힐 수 있으며, 평화를 위한 이론적, 정책적 대안을 마련할 수 있다. 한반도 차원이나 세계 차원만이 아니라 일상적인 생활차원에서 ‘평화만들기’(peace making)가 가능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