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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밝홈실 참의공파 종친회 원문보기 글쓴이: 설죽선생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4
李承晩과 金九 (37)
『임시대통령 각하, 上海에 오시도다』
1920년 12월13일에 각료들과 임시정부 직원들을 인견한 李承晩은 12월24일에 육군무관학교 졸업식에 참가한 것을 시작으로 공식 활동을 했다.
임시정부는 1920년 10월에 있었던 경신참변(간도사변)의 영향으로 위기국면을 맞고 있었다. 국무총리 李東輝를 중심으로 한 공산당 그룹은 臨時政府를 委員制로 바꿀 것을 요구했다. 그들은 볼셰비키 정부가 제공한 막대한 자금을 가지고 있었다. 자기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李東輝 그룹은 임시정부에서 탈퇴했다.
임시정부 수립 당시 문제가 되었던 李承晩의 委任統治請願 문제가 다시 논란이 되면서, 임시정부는 큰 혼란에 빠졌다. 金奎植·南亨祐·安昌浩 등 총장들이 임시정부를 떠나고, 임시정부를 새로 수립하기 위해 國民代表會를 열자는 요구가 나타났다. 李承晩은 協成會를 조직하여 반대파에 맞섰다. 임시정부 반대파들의 활동을 제재하는 과정에서 金九는 朴殷植의 아들을 구타하기도 했다. 李承晩은 金九를 교통부 차장으로 지명했으나 金九의 현재의 임무를 더 중요하게 여긴 국무위원들은 동의하지 않았다.
李承晩이 없는 동안 歐美委員部는 내분이 일어나서, 李承晩은 위원장대리 玄楯을 해임시켜야 했다. 申圭植, 李東寧, 李始榮 등 원로들과 孫貞道, 申翼熙, 李喜儆, 尹琦燮 등으로 새 내각을 구성한 李承晩은 〈외교상 긴급과 재정상 절박〉 때문에 상해를 떠난다는 교서를 임시의정원에 보내고 1921년 5월29일에 상해를 떠나 하와이로 향했다. 그가 임시정부의 大統領으로서 상해에 있었던 것은 이때의 6개월 동안뿐이었다.
(1) 북경의 朴容萬에게 협조 요청
黃浦江 어구에 도착한 李承晩과 林炳稷은 「웨스트 하이카」호에서 내려 상륙하는 데에도 아슬아슬한 고비를 겪어야 했다. 그곳은 영국 조계지였다. 삼엄한 영국의 경비망을 뚫고 비밀리에 상륙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선원들의 상륙 수속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에 두 사람은 문을 잠근 방에 숨어 있어야 했다. 얼마쯤 지난 뒤에 선장은 무사히 상륙하라면서 두 사람이 숨어 있는 방의 문을 따 주었다.
갑판에 올라오자 뜻밖에도 배에 가득 실은 재목을 중국인 노동자들이 어깨에 메고 부두로 옮기고 있는 광경이 보였다. 李承晩은 임병직의 귀에다 대고 이들 틈에 끼어서 상륙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어깨에 무거운 재목 하나를 메고 긴 사닥다리를 내려가서 무사히 上海 땅에 발을 디뎠다.
두 사람은 범선을 구해 타고 황포강의 上海 쪽 땅에 닿았다. 인력거를 타고 중국인 거류지로 간 그들은 인력거꾼에게 중국 여관으로 안내하라고 말했다. 그렇게 하여 孟淵館이라는 여관에 들었고, 그 즉시로 張鵬에게 편지를 썼다.
장붕을 기다리는 동안에 李承晩은 배 위에서 그랬던 것처럼 한시를 읊었다.
又
風風雨雨大洋舟
未度兩旬到亞洲
莫道江蘇鄕國遠
雲山猶似漢陽秋
또 지음
비바람 몰아치는 大洋에 뜬 배
스무 날 채 못 되어 亞洲에 닿았구나
江蘇가 고국땅과 멀다고 말라
구름 인 저 산이 漢陽 가을을 닮았다
十二月五日船舶黃浦江潛上陸 暫寓孟淵館
(投書張鵬 待其來)
孟淵館裏客眠遲
待友不來細雨時
盡日看書衰眼暉
背燈偃臥試新試
12월5일 黃浦江에 정박하고서 몰래 上陸하여 孟淵館에 잠시 머물다.
(張鵬에게 편지 보내고 오기를 기다리며)
孟淵館 나그네에게는 잠도 더디다
기다리는 벗은 아니 오고 부슬비만 내리누나
온 종일 책만 보니 눈이 어지러워
등불을 등지고 누워 시를 지어 본다
맹연관은 중급 여관이었으나 자동차 달리는 소리며, 인력거꾼의 고함소리며, 중국인들의 거친 말소리 때문에 단잠을 잘 수 없었다. 上海가 초행인 李承晩으로서는 아련한 감상이 없지 않았을 것이나, 결코 쉽지 않을 임시정부 인사들과의 대결을 앞두고도 웬만큼 마음의 여유가 있었음을 이러한 詩作을 통해서 엿볼 수 있다.
이틀 뒤에 장붕이 왔고, 임시정부는 李承晩을 상해에서 가장 큰 호텔의 하나인 벌링턴 호텔(Burlington Hotel)로 옮기게 했다. 며칠 뒤인 12월12일에 李承晩은 프랑스 조계 안에 있는 미국인 안식교회 선교사 크로푸트(J.W. Crofoot)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것은 呂運亨의 주선에 따른 것이었는데, 李承晩은 상해에 머무는 동안 내내 이 집에서 거처했다. 그것은 신변안전을 위해서였다.
① 金嘉鎭이 옛 官服 입고 찾아와서 큰절
이튿날 李承晩은 프랑스 조계 新民里에 있는 군무부에서 임시정부 직원들을 인견했다. 이 무렵 임시정부의 각 기관은 프랑스 조계 안의 여러 곳에 분산해서 일을 보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자기가 미국을 떠나 올 때에 여권 없이 비공식으로 왔기 때문에 자기의 내방을 공식으로는 비밀로 해달라고 당부하고 얼마 동안이나 상해에 있을지는 미정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임시정부의 재정적 곤란은 자기가 어떻게든지 해결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李承晩은 그의 거처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을 만나고 외국인들을 예방하기도 했다. 프랑스 영사를 방문하여 3·1운동 이래 프랑스 영사관이 한국인들을 호의로 대해 준 데 대해 감사의 뜻을 표하기도 했다.
일본군의 한 정보보고는, 李承晩이 오자 상해에 있는 미국 영사와 신문기자단은 그를 만나서 한국의 독립운동이 완성되면 미국은 위원을 파견하여 실황을 조사한 뒤에 독립승인에 관해 진력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李承晩을 찾아오는 한국인들 가운데에서 金嘉鎭의 행동은 인상적이었다. 어느 날 밤 김가진은 손자를 데리고 인력거를 타고 李承晩을 찾아왔다. 그는 대한제국의 관복을 입고 있었다. 김가진은 李承晩에게 큰절을 했다.
『각하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옛 황제 앞에서 입었던 이 관복을 입고 왔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조용히 말했다.
『여기 있는 사람들과 어떻게 상종해야 할지를 아셔야 합니다. 조용히 계시면서 사태를 지켜보십시오』
李承晩은 상해 방문기에 이러한 에피소드를 적으면서 〈실제로 나는 무슨 일을 벌이려고 하는 대신에, 조용히 있으면서 사태를 지켜보았다〉라고 덧붙였다.
12월24일 오후 2시에 육군무관학교 제2회 졸업식이 거행되었다. 24명이 임관하는 이 날의 졸업식에는 300여 명의 사람들이 몰려 성황을 이루었다. 李承晩이 상해에 온 뒤에 여러 관중 앞에 나선 것은 이 날이 처음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요지의 축사를 했다.
『오늘 나의 하고저 하는 말은 우리의 위치를 보든지, 민족을 생각하든지, 세계를 관찰하든지, 國民皆兵이라는 주의의 정신을 경주함이 필요하다는 것이외다. 그런즉 鐵血主義를 품고 기회를 기대하기를 바라오. 그런즉 오늘부터는 「臨陣對敵(임진대적: 싸움터에 나서서 적과 맞섬)」으로 생각해야 시종이 여일하게 하기를 부탁하오』
그가 말한 「국민개병」론이나 「철혈주의」는 이때의 상해의 독립운동자들의 공통된 화두였다.
② 환영식에서 小銃이나 短刀 사 두라고 권고
12월28일 오후 7시30분에 교민단 사무소에서 李承晩의 환영회가 성대하게 열렸다. 장내는 태극기와 만국기로 장식되고 정면 벽에는 금글자로 「歡迎 大統領 李承晩博士」라고 쓴 편액이 걸렸다. 환영식에는 임시정부 각료들과 의정원 간부들을 비롯하여 상해 동포사회의 주요 인사들이 다 모였다. 애국가 봉창과 민단장 張鵬의 개회사, 남녀 찬양대의 환영가 합창에 이어 朴殷植, 李逸林, 安昌浩의 환영사가 있었다.
박은식은 『오늘 밤 우리가 환영하는 李博士는 수십 년 래의 애국자이며 오늘에 이르기까지 시종일관 국사에 진력해 온 분으로서, 우리가 언제나 희망해 온 共和政治를 집행한 사람이다. … 우리는 한층 노력하여 서울에서 李承晩 박사를 환영할 것을 바란다』고 했고, 안창호는 『일본 奸人(간인)에게 동족을 팔아먹는 관공리와 정탐 이외에는 전부 오늘 우리 국가를 건설한 李承晩 박사에게 복종하여 전진할 것을 희망한다』고 말했다. 국무총리 李東輝는 이 자리에 참석하여 기념촬영까지 하면서도 환영사는 하지 않았다.
기념촬영이 끝난 다음 답사에 나선 李承晩은 『나는 과거를 돌이켜보면 국가와 민족에 대하야 조그마한 공로도 없는 사람인고로 이와 같은 환영식을 당할 때마다 송구합니다』라는 겸손한 말로 연설을 시작했다. 그러나 연설은 바로 자기과시로 이어졌다.
『그러나 나의 자랑할 것은 나라에 유익한 일이라면 不計利害하고 시험해 보는 것과 또는 끝까지 끌어 나가며 불변하는 것은 자랑하며, 청년들에게 표준이 되리라고 하오. 獨立協會 때부터 맹세한 결심이 오늘까지 쉬지 아니한 몇몇 친구도 지금까지 산재해 있습니다. 이 석상에도 安총판, 李총리 양씨의 만겁풍상으로 지금까지 나아 옴을 보았소이다. 일찍이 내무총장 李東寧씨로 함께 옥살이할 때에 오늘이 있을 줄은 생각지 못하였소이다』
이처럼 그는 먼저 자신의 지도력의 원천이 독립협회운동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임을 상기시켰다. 그리고는 자기가 많은 자금이나 무슨 큰 정략을 가지고 온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오늘 내가 이곳으로 온 것은 많은 금전이나 대정략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니라 재미 동포들의 이곳에서 일하시는 제위에게 감사하고저 하는 소식을 가지고 왔나이다』
이렇게 전제한 李承晩은 3·1운동 이후에 외국인들의 한국인에 대한 평가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여러 가지로 보기를 들어 설명했다. 그는 외국인들이 한국인을 가리켜 「영광의 민족」, 「담력 있는 민족」, 「인내심 강한 민족」, 「단합력 있는 민족」이라고 말하면서 중국인과 일본인보다 낫다고 평한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그의 연설은 청중들의 민족적 긍지를 한껏 고무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모든 나라들이 일본을 꺼리고 미워하며 한국의 독립에 동정적이라면서, 다가오는 독립전쟁의 기회를 위하여 준비할 것을 촉구했다.
『미구에 기회가 옵니다. 표면으로 아무 일도 없는 것같이 하고 각각 사업하며 비밀히 예비하야 단도와 소총 한 개씩이라도 사서, 적어도 두 놈은 죽이고야 죽겠다는 결심을 가집시다.
세상이 우리를 단합하는 민족이라고 하니 기쁘외다. 단합에 견고를 더하야 넘어져도 한결같이, 일어나도 한결같이 하야 향진합시다.… 왜탐정과 李完用을 제하고는 다 한 지체인데, 한 사람이라도 불합이라 하면 우리 사업에 그만치 해가 있는 것입니다. 어느 곳에서 작정하고 동원령을 내릴 날이 있으리이다』
환영회는 밤 10시경에 끝났는데, 「獨立新聞」은 이 날의 李承晩의 연설에 대해 〈博士의 장시간의 열변은 일반 청중으로 하여금 심각한 감동을 일으키다〉라고 보도했다.
상해주재 일본 총영사의 정보보고는 이 날의 환영회에서 李承晩이 독립운동에 대해 러시아 볼셰비키의 원조를 빌리려고 하는 자가 있음을 비난하고 오로지 미국의 성의 있는 원조를 신뢰해야 할 것이라는 의견을 토로한 것처럼 기술하고 있으나,그 자신도 볼셰비키 정부와의 외교교섭을 추진하고 있던 처지에서 실제로 그러한 말을 했었는지는 의문이다.
환영회가 끝나자 李承晩은 金九가 지휘하는 경호원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회장을 떠났다.
③ 朴容萬에게 만나자고 편지 보내
李承晩이 상해에 와서 누구보다도 만나보고 싶어 한 사람은 北京에서 申采浩, 申肅 등과 함께 임시정부 반대운동을 하고 있던 朴容萬이었다. 그는 裵君이라는 사람을 몇 차례 북경으로 보낸 데 이어, 측근인 적십자사 회장 李喜儆(이희경)도 보냈다. 1921년 1월8일에 박용만에게 보낸 그의 편지는 박용만의 마음을 돌리려고 그가 얼마나 고심했는지를 말해 준다. 이 편지는 드물게 한문으로 쓴 것이다.
〈내가 上海에 온 뒤로 땅은 가까운데 사람은 멀다는 느낌이 무시로 들다가 잠시 해이해지곤 하오. 여러 차례 裵君으로 하여금 이 구구하게 보고 싶은 회포를 알리게 했고, 李喜儆에게 부탁하여 당신에게 나의 微衷(미충)을 전하게 했소이다.
사랑하는 아우는 우리 두 사람의 平昔(평석: 예부터)의 정의가 어떠했으며, 또한 同胞들이 우리 두 사람에게 촉망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평범하게 보지 말기 바라오. 하물며 內地國民들이 우리에게 중임을 맡겼은 즉, 어찌 손잡고 함께 나아가 誠忠을 다해 衆人의 두터운 기대에 부응하고, 아울러 평소의 지극한 뜻을 성취해야 하지 않겠소. 만약 門戶를 따로 하여 각기 깃발을 들어 끝내 양쪽이 서로 화합하지 못하는 형세가 된다면, 國家에나 우리 신상에나 아무런 도움도 없을 것이오.
간절히 바라건대, 현명한 아우는 특히 깊이 생각하여 한번 면대했으면 하오. 만약 이곳으로 올 뜻이 있으면, 즉시 여비를 마련하여 왕복에 편하도록 하겠소. 이 편지를 보는 대로 바로 회답을 보내주시오. 객지에서 편히 지내기 바라오.〉
④ 朴容萬은 國內의 金性洙에게 자금지원 요청
李承晩은 미국에 있을 때에도 安玄卿과 장붕의 보고를 통하여 박용만의 동정을 웬만큼 파악하고 있었다. 박용만은 북경을 근거지로 하여, 임시정부의 교통총장 취임을 거부한 대한국민의회 회장 文昌範, 李承晩을 비판하면서 임시정부를 탈퇴한 申采浩, 천도교 간부 申肅 등과 어울리면서 만주와 시베리아 지역의 무장독립운동단체들을 통합하여 독립투쟁을 전개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것을 위한 자금 모집에도 그는 열성이었다. 면식도 없는 중앙학교 교장 金性洙와 고양군의 부호 閔泳達에게 자금지원을 요청한 그의 편지가 일본 경찰에 발각된 것이 그러한 보기이다.
일본경찰의 한 정보보고는 박용만은 1920년 5월 말에 문창범, 신채호, 柳東說, 金永學 등과 함께 북경을 떠나서 시베리아의 포그라니치나야(綬芬河)로 갔다고 적고 있다. 이때에 같이 간 사람들은 상해에서 온 高昌一 등을 합하여 14명이었는데, 이들은 연해주에서의 활동이 어려워졌으므로 바이칼호 서쪽으로 가서 이르쿠츠크와 톰스크 사이에서 독립운동을 추진하는 방안을 협의했다는 것이다. 한 달 전에 연해주 주둔 일본군에 의한 한인독립운동단체 및 新韓村 습격사건(4월참변)이 발생했었기 때문이다.
이 무렵의 박용만의 동정과 관련된 일본경찰의 또 하나의 정보보고는 매우 주목할 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 곧 박용만이 1920년 늦여름에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볼셰비키 정부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이에 6개항의 비밀조약을 체결했고, 이 조약 제3항의 〈볼셰비키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군 군대의 시베리아 지방 주둔 및 양성을 승인하고 이들에 대하여 무기와 탄약을 공급한다〉는 규정에 따라, 임시정부는 상해에는 외무부만 남기고 다른 기관을 시베리아 방면으로 옮기는 문제를 검토하고 있으며, 하와이에 있는 李承晩은 이를 반대하여 金奎植, 蘆伯麟을 대동하고 상해에 온다는 설이 있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李承晩이 상해로 간 것이 박용만의 활동과 관계가 있다는 뜻이었다.
⑤ 볼셰비키 政府는 200만 루블 지원하기로
그러나 박용만이 모스크바에 가서 소비에트 정부와 비밀조약을 체결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임시정부의 특사 자격으로 1920년 4월에 모스크바로 갔던 韓馨權(한형권)은 회상기에서, 자기가 레닌(Vladimir I. Lenin)을 비롯한 외무인민위원장 치체린(Georgy V. Chicherin), 부위원장 카라한(Lev Karakhan) 등을 만나
1) 소비에트러시아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할 것,
2) 한국 독립군의 장비를 적위군(볼셰비키군)의 그것과 똑같이 공급해 줄 것,
3) 시베리아의 적절한 지점에 독립군 사관학교를 설치할 것,
4) 상해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거액으로 지원할 것 등
4개항의 요구사항을 제출하여 소비에트 정부의 동의를 얻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이때에 한형권은 한인사회당의 코민테른(국제공산당) 파견대표로 모스크바에 가 있던 朴鎭淳(박진순)의 도움을 받았다. 블라디보스토크의 러시아 중학교를 졸업한 박진순은 「동양의 레닌」이라는 말을 들을 만큼 재능 있는 청년이었다. 일본경찰은 이때의 박진순의 활동을 박용만의 활동으로 잘못 파악했는지 모른다.
박진순과 한형권은 볼셰비키 정부로부터 200만 루블의 자금지원을 약속받고, 그 가운데에서 40만 루블을 금화로 받았다. 볼셰비키 정부는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서의 공산주의 활동을 위한 비용으로 거액의 자금을 이들에게 내놓은 것이었다. 두 사람은 9월 초에 모스크바를 떠나서 시베리아횡단 철도를 거쳐 베르흐네우진스크까지 왔다. 이때의 박진순의 직위는 「코민테른 대외전권위원」이었는데, 그에게는 「동양공산당」을 조직하는 임무가 부여되어 있었다.
베르흐네우진스크에는 상해의 한인공산당이 파견한 金立과 桂奉瑀(계봉우)가 와 있었다. 40만 루블 가운데 6만 루블은 활동비로 한형권에게 지급되었다. 그는 볼셰비키 정부가 약속한 나머지 잔금을 가져오기 위해 모스크바로 돌아가고, 박진순이 22만 루블, 김립이 12만 루블로 나누어 상해로 옮기기로 했다. 김립은 4만 루블을 도중에서 분실하고 8만 루블을 가지고 상해로 돌아왔다. 그가 상해로 돌아온 것은 李承晩이 상해에 와서 얼마 되지 않은 12월경이었다. 박진순은 이듬해 3월 말에 상해로 왔다. 이렇게 하여 김립과 박진순이 상해로 가져온 자금은 모두 25만 4,300멕시코 달러였다.
박용만이 체결했다는 비밀조약 6개항 전문은 李承晩이 상해에 도착한 닷새 뒤인 12월10일자 「大阪朝日新聞」에 보도되었는데, 많은 중국 신문들이 이를 전재했다. 그리하여 임시정부에서는 12월22일에 「공보국」 명의로 「大陸報」에 기고하여 「大阪朝日新聞」의 기사는 허위이며, 임시정부는 아직 소비에트 정부와 구두로나 성문으로나 아무런 조약도 체결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⑥ 北京에서 軍事統一促成會 발족
박용만의 움직임이 임시정부의 경계의 대상이 되고 있었던 것은 안창호의 「일기」에도 보인다. 李始榮은 안창호를 만나, 박용만이 내외지를 망라한 遠東司令部를 조직하는데, 그 일을 자기의 형 李會榮의 집에 모여서 논의하고 있으므로, 그것을 막기 위해 한 열흘 동안 북경을 다녀오겠다고 말하고 있다.25) 그러나 박용만·신채호·신숙 등 북경지역 인사들과 천도교·의열단·대한국민의회 관계자 등 15명은 1920년 9월에 군사통일촉성회를 발족시켰다.
1920년 10월부터 서간도와 북간도 지역에서 일본군에 의한 대규모의 한국인 학살이 자행되었다. 庚申慘變(경신참변) 또는 間島事變이라고 일컫게 된 것이 그것이다. 한국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비극적이었던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임시정부는 수립 이래 가장 심각한 정치적 위기를 맞게 되었다.
6월에 북간도의 鳳梧洞(봉오동)에서 독립군에게 크게 패한 일본군은 이른바 「間島地方不逞鮮人剿討計劃(간도지방 불령선인 초토계획)」이라는 것을 만들고, 1만 8,000명에 이르는 대병력을 간도지방에 침입시켰다. 그리고 서북간도 곳곳의 독립군 근거지는 말할 나위도 없고 한국인 마을을 철저히 수색하여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사람이 있으면 죽이고 가옥은 불질렀다. 독립군 부대들은 러시아의 연해주로 병력을 이동시켜 후일을 대비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金佐鎭의 북로군정서, 洪範圖의 대한독립군, 池靑天의 서로군정서 등의 병력이 이동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것이 유명한 靑山里 대첩이었다. 청산리 전투에서 대패한 일본군은 서북간도 일대에 산재해 있는 한국인 마을을 습격하여 마을 주민 전체를 교회당에 집결시켜 석유를 뿌리고 불을 지르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
「獨立新聞」의 보도에 따르면 10월 초부터 11월 말까지 두 달 동안에 3,623명이 살해되었다. 다섯 달이 넘는 장기 정간 끝에 12월18일자로 속간된 「獨立新聞」은 그동안 보도하지 못했던 봉오동 전투의 승리, 경신참변, 청산리 대첩 등의 내용을 크게 보도하면서 「間島事變과 獨立運動 將來의 方針」이라는 사설을 연속으로 6회에 걸쳐 실었다.
그러나 청산리 대첩 등의 군사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임시정부의 노력 끝에 가까스로 통일적 움직임을 보이던 서북간도의 무장부대들은 기반을 파괴당하고, 러시아령 연해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각 무장단체 사이의 협력 강화와 임시정부 지지의 확산이라는 그동안의 성과는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다.
⑦ 庚申慘變 대응책을 둘러싼 論難
임시정부 인사들 사이에서는 대응책을 놓고 논란이 벌어졌다. 비분강개하여 당장 전쟁을 결행하자는 급진론과 이럴 때일수록 냉정하게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는 주장이 맞섰다. 李東輝는 11월23일에 의정원 의원들을, 그리고 며칠 뒤에는 다시 의정원 의원들과 각 단체 대표 및 유력인사들을 초청했다. 이동휘에 동조하는 급진론자들이 많았다. 간도지방에서 온 사람들은 태반이 급진론자들이었다.
그러나 안창호는 11월27일의 교민단 강연회에서 전쟁은 무기와 무술이 있어야 가능하고, 그보다 더욱 필요한 것은 무기를 사용할 군인과 그것을 뒷받침할 군자금이라고 말하면서 그 특유의 실력준비론을 폈다. 「獨立新聞」도 안창호의 주장을 반영하여 〈지금 소위 급진론자는 다만 구두의 급진론이니, 인재를 내고 금전을 내고, 조직적이요 공고한 독립당을 내기 전에는 아무리 급진을 외친다 하더라도 앉은뱅이더러 달음질을 하라고 재촉함과 같도다〉라면서 급진론을 비판했다.
이러한 논란이 진행되는 속에서 李承晩이 도착한 것이다. 이처럼 임시정부의 위기국면을 타개해야 할 막중한 임무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2) 臨時政府 制度改革을 둘러싼 論爭
1921년 1월1일자 「獨立新聞」이 李承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말로 최대의 경의를 표하고 있는 것은 그의 지도력에 대한 임시정부 인사들의 관심과 기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국민아, 우리 임시대통령 李承晩 각하가 上海에 오시도다. 우리는 무슨 말로 우리의 元首를 환영하랴. 우리 民國의 첫 원수를 우리 故疆(고강)의 서울에서 맞지 못하는 비애를 무슨 말로 표하랴.
국민아, 통곡을 말고 희망으로 이 결심을 하자. 우리의 원수, 우리의 지도자, 우리의 대통령을 따라 광복의 대업을 완성하기에 일신하자. 합력하자.
그는 우리의 大元帥(대원수)시니 獨立軍人되는 국민아, 우리는 그의 지도에 순종하자. 그의 명령에 복종하자. 죽든지 살든지, 괴롭거나 즐겁거나,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그의 호령 밑에 바치자. 진실로 우리 대통령을 환영할 때에 우리가 그에게 바칠 것은 화관도 아니오 頌歌(송가)도 아니라.
오직 우리의 생명이니, 우리의 생명이 가진 존경과 지식과 기능과 심성을 다 그에게 드리고, 마침내 그가 「나오너라」하고 戰場으로 부르실 때에 일제히 「네」 하고 나서자. 민국 3년 원단에 국민아, 일심으로 「우리 대통령 李承晩각하 만세」를 높이 부르자.〉
그것은 어떻게 보면 당면한 위기 국면에 대한 불안감에서 기인하는 자기최면적인 환호의 발로였는지도 모른다.
① 國務會議에서 李承晩과 李東輝가 격론 벌여
1월1일 오전에 임시정부 및 임시의정원의 신년축하식을 마치고 기념촬영을 한 李承晩은 참석자들을 오찬에 초대했다. 이때의 기념사진에는 李承晩, 安昌浩, 李東輝의 세 거두와 金九를 포함하여 모두 59명의 얼굴이 보이는데,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을 통틀어 그 정도의 인원이 직접 참여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李承晩은 1월 초부터 본격적인 집무를 시작했다. 임시정부는 재무부가 쓰던 건물에 그의 집무실을 마련했다. 먼저 국무위원을 비롯하여 내무부·외무부·재무부·군무부의 업무보고가 있었고, 5일부터 국무회의가 열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때에 국무회의의 회의록은 작성되지 않았던 것 같다. 李承晩을 임시정부에서 축출하기로 방침을 정해놓고 있던 이동휘 등 한인공산당으로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李承晩의 위임통치 청원문제를 들고 나왔을 것은 짐작하기에 어렵지 않다. 대논쟁이 벌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李承晩은 이때의 국무회의와 관련하여 좀 다르게 서술하고 있다.
〈李총리가 내부결속을 唱하는 동시에 反省悔悟(반성회오)를 표명하며 앞으로는 協同一致하겠다는 주지로 각료들을 면려하였고, 기왕에 퇴거를 선언한 安총판도 출석 시무하매, 國事의 원만히 商議決行됨을 切望하고 豫喜(예희: 미리 기뻐함)하였노라.
불의에 李총리가 현 정부 제도를 폐지하고 委員制로 개정하자는 안을 돌연히 제의한 바 연석회의에서 여차한 대변경은 이해관계가 어떻든지 의정할 權利와 실행할 道理가 없으므로 의안이 성립치 못한지라.…〉
이동휘가 「반성회오」를 어떻게 표명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임시정부의 제도개혁 문제는 이 무렵 상해인사들 사이에서 가장 열띤 논란거리가 되고 있었다. 그 논의를 주도한 사람은 한형권으로부터 모스크바 자금을 건네 받아 가지고 온 金立이었다. 그는 날마다 큰 음식점에 사람들을 불러 모아 집행위원회를 중심으로 하는 혁명정부를 조직해야 한다는 여론을 유도했다.
이동녕, 이시형, 신익희 등 기호파인사들은 이러한 모임에 나타나지 않았으나 안창호는 참석했다고 한다. 이동휘가 제의한 위원제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는 명시되지 않았으나, 그것은 소비에트 러시아의 인민위원회 제도와 같은 것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때의 李承晩과 이동휘의 논쟁과 관련하여 金九는 뒷날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 임시정부 직원 중에서도 공산주의니 민족주의니 하는 분파적 충돌이 격렬해졌다. 심지어 정부의 국무원 중에도 대통령과 각부 총장들 간에 민주주의냐 공산주의냐로 각기 옳다는 주장을 좇아 갈라졌다. 그 대강을 거론하면, 국무총리 이동휘는 공산혁명을 부르짖고, 대통령 이승만은 민주주의를 주창하였다. 이로 인해 국무회의 석상에서도 의견 불일치로 때때로 논쟁이 일어나 國是(국시)가 서지 못하고, 정부 내부에 괴이한 현상이 거듭 일어났다.〉
임시정부의 보위를 책임지고 있는 金九의 고충이 어떠했는지가 느껴지는 술회이다.
② 委員會制와 臨政幹部들의 分散活動 주장도
또한 이동휘 그룹은 임시정부의 효율성을 제고하기 위하여 주요 간부들이 각기 적당한 지역에 배치되어 실질적인 활동을 추진할 것을 주장했다고 한다. 김규식은 모스크바에서, 이동휘는 시베리아에서, 이동녕과 이시영은 만주에서, 안창호는 미주에서,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신규식은 광동에서, 신채호와 남형우는 북경에서 활동하고 노백린은 사관 양성에 주력하며, 상해에는 김립을 총책으로 한 연락부만 두고, 각처에 있는 사람들은 1년에 한 번씩 만나서 회의를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이와 비슷한 임시정부 간부들의 분산 활동 방안은 안창호도 주장하고 있어서 흥미롭다.
임시정부 간부들의 분산 활동은 사실상 임시정부의 해산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위원회제로 바꾸자는 주장과도 모순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일본경찰의 정보보고는 이동휘는 이때의 국무회의에서 임시정부를 시베리아로 옮길 것을 제의했으나, 이 역시 李承晩 등의 반대에 부닥쳤다고 기술하고 있다.
대통령제를 위원회제로 바꾸자는 이동휘의 제안에 대해서는 李承晩은 물론 안창호도 반대했다. 그러자 이동휘는 사임을 청원했다. 李承晩과 각원들이 극력 만류하였으나 이동휘는 1월24일에 〈나의 쇄신의안을 정무회의에 제출하였으나, 한마디 심의도 없이 구겨 없앴기 때문에 나의 실력으로서는 이 난관을 타개하기 어렵다〉는 요지의 선포문을 발표하고 광동으로 가버렸다. 내무총장 이동녕이 그를 대신하여 1월25일에 국무총리 대리 겸임으로 임명되었다.
이동휘의 사임은 곧 한인공산당의 임시정부 탈퇴를 뜻하는 것이었다. 이동휘는 러시아 외무인민위원회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친미 우익그룹에 지도적 역할을 계속 맡겨 두는 것은 무의미한 행위〉라고 판단하여 임시정부에서 탈퇴했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한인공산당의 이러한 결정은 「대중의 전적인 신뢰를 받는 최고혁명기관」을 다시 조직하는 계획과 관련되어 있었다. 그것은 국민대표회 소집운동이었다.
국민대표회 소집운동은 2월 들어 표면화되었다. 몇몇 임시의정원 의원들과 임시정부 밖에서 활동하던 인사들 15명의 명의로 발표된 「우리 同胞에게 告함」이라는 격문이 그 효시였다. 서명자 가운데에는 한 달 전 李承晩 환영회에서 환영사를 했던 박은식을 포함하여, 국내 유림들이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는 청원서(파리장서)를 가지고 상해에 왔던 金昌淑, 블라디보스토크의 대한국민의회의 대표로서 상해임시정부와 국민의회의 통합을 주선했던 元世勳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격문은 임시정부는 설립 당초부터 불합리한 점이 있었고, 대한국민의회와의 통합도 실패했으며, 간도의 참화에 대해서도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근본적인 대개혁〉으로 독립운동의 신국면을 타개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국민대표회를 소집하여 민의를 집결해야 한다고 성명했다. 이 격문은 자기들이 국민대회의 소집을 요구하는 동기가 공고한 통일적 정부를 재조직하고 중지를 통합하여 최선의 독립운동 방략을 수립하려는 데 있다고 천명했다.
③ 金九는 朴殷植 아들 구타
이 격문의 충격은 컸다. 임시정부 인사들의 반응은 경무국장 金九의 태도에 잘 나타나고 있다. 그는 2월8일에 안창호를 찾아가서 국민대표회를 준비한다는 사람들에게 「中傷策」을 쓰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가 말한 「중상책」이 무엇을 뜻하는 것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아마 「重傷策」, 곧 완력으로 이들의 행동을 제재하자고 제의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金九의 이러한 제의에 대해 안창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이들이 호의적으로 마음을 돌리게 하는 것이 유익하겠소이다. 할 수 있는 대로 청년들 가운데 불평적 행동이 있지 않기를 바랍니다』
닷새 뒤인 2월13일에 金九는 金奎植, 徐丙浩 등과 함께 박은식을 불렀다. 이들은 번갈아가며 박은식에게 분별없는 짓이라고 힐난하면서 『당신은 李完用보다 더한 역적이오』라고 매도했다. 박은식은 한마디도 대꾸하지 않고 있다가 집에 돌아가서 아들 始昌에게 말했다. 화가 난 시창은 김규식의 집으로 찾아가서 항의했다가, 도리어 金九 등으로부터 크게 얻어맞고, 보창로 보강리에 있는 中江醫院에 입원했다. 박은식 자신도 金九 등에게 구타당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④ 盧伯麟이 李承晩의 사퇴 권고
이동휘 그룹이 탈퇴한 뒤에도 임시정부는 총리 선임문제며 시국수습 대책과 관련된 제도개혁 문제 등을 놓고 논란이 분분했다. 매일같이 연석회의가 열렸고, 연석회의와는 별도로 제도변경 기초위원(안창호·신규식·김규식), 외교위원(안창호·노백린·김규식·신익희) 등이 구성되어 회의를 거듭했다. 그리고 임시정부 수립 이래의 일체의 회계감사를 실시하기로 하고 李承晩과 가까운 李喜儆과 신한청년당의 의정원 의원 趙尙燮을 검사위원으로 선임했다.
그러나 李承晩의 리더십은 이미 임시정부의 구심점이 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 큰 이유의 하나는 李承晩이 안창호를 경원하는 데서 기인한 것이었다. 여러 사람 앞에서 안창호에게 총리를 맡으라고 권하면서도 안창호의 측근들에게까지 누가 총리 적임자냐고 묻고 있는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는 뒷날 자서전 초록에 상해에 갔던 일에 대해 아주 간략하게 언급하면서 〈안(창호)은 나를 코너에 몰아넣으려고 했으나 실패했다〉고 적어 놓았다.
노백린과 김규식의 태도는 더욱 괘씸했을 것이다. 노백린은 이승만을 찾아가서 위임통치 청원문제로 성토문을 내겠다는 움직임이 있음을 알리고, 불미스러운 사태가 발생하기 전에 李承晩이 스스로 사퇴하고 다시 이동휘와 손잡고 독립운동을 계속하도록 하자고 건의했다. 李承晩은 자기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대답하면서 동의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23일의 국무회의에서 구미위원부 규정 수정안에 대해 토의하다가 마침내 李承晩의 불편한 심기가 폭발했다. 그는 사직하겠다고 말하고 이튿날에는 국무회의에 출석하지 않았다. 노백린과 김규식이 李承晩을 찾아가서 물러나는 방식과 물러난 뒤에 서로 협조할 방식 등을 물었다. 그러나 李承晩은 자신이 물러나더라도 몇 사람의 말에 따라 물러날 것이 아니라 국민대회나 국무원이나 의정원에서 탄핵을 해야 물러나겠다면서 사직을 거부했다.
27일 저녁에 열린 외교위원회는 李承晩의 거취문제를 놓고, 사직의 찬반론에서부터 만일에 李承晩이 스스로 사직하면 李承晩·이동휘·서재필 세 사람으로 정부 고문을 삼는 것이 좋겠다는 등의 논의가 계속되었다. 이튿날에는 李承晩이 임시의정원에서 연두교서를 발표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⑤ 議政院에서 年頭敎書 발표
2월28일 오후 2시에 제8회 임시의정원이 개원되었다. 이 자리에서 李承晩은 한 시간 가까이 연두교서를 낭독했다. 그것은 당면한 임시정부의 개혁방안과 시정방침에 대한 그의 비전을 공개적으로 밝힌 것이었다.
그는 먼저 미국에서의 자신의 활동을 비롯한 임시정부의 그동안의 활동 성과를 강조한 다음, 이동휘 그룹이나 임시정부 반대파들의 주장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민의」를 강조하고 있다.
〈무릇 共和의 正體로 논하건대, 정부의 제도를 변경하거나 행정 각원을 개선하거나 다 그 국민의 당당한 권한 안에 있는지라. 대통령과 국무총리 이하 일반 공복된 의원들은 물론 민의에 의하여 그 進退行止를 결정하거니와… 대저 민의라 하는 것은 혹 한두 개인이나 한두 단체의 의견과 언론을 말함이 아니오 다만 정식으로 조직된 기관을 달하야 정식으로 발표된 자를 전국의 민의라 칭함이니…〉
그는 임시정부가 그러한 「민의」에 의하여 수립된 정통정부임을 강조했다. 그리고는 당면한 임시정부의 개혁방안으로 정부직원 감축과 예산제도의 실행을 들었다.
〈정부의 응행방침을 논하건대, 행정쇄신을 도모하야 우선 직원을 감축하며 경비를 절약하야 유지책을 공고케 하고, 행정사무를 각기 기능에 따라 전담하여 시무하게 하되, 서로 복잡 또는 중첩되는 폐가 없게 할지며, 정부 경비예산표를 정밀히 조제하야 의정원의 협찬을 요할지니, 여러분은 열심 찬성하는 동시에 각지 인민으로 하여금 재정상 의무를 성심으로 부담하야 독립운동이 적극적으로 진행되게 할지며…〉
李承晩은 이러한 행정쇄신책에 이어 각국에 외교원을 파견하여 재정적·군사적 원조를 교섭하겠다고 천명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볼셰비키 정부에 특사를 파견하는 문제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외교원을 동서 제 우방에 파견하야 혹 비밀히, 혹 공연히 교섭 연락하야 우리 한족의 眞忠大意(진충대의)를 선포하는 동시에 재정상이나 군사상 원조를 얻어서 제2의 독일(곧 일본)의 무단적 貪暴(탐포: 탐욕스럽고 포학함)를 동아시아에서 근절하기를 기도할지며…〉
이어 그는 독립운동의 최후 수단인 군사정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자신의 소신을 피력했다.
〈우리의 성공이 결국은 무력에 있고 무력의 승리는 준비에 있는지라. 우리나라의 현금의 형편으로는 대략 民兵制를 채용함이 가할지니, 국내 국외의 일반 인민이 각기 소재지에서 직업에 종사하는 여가에 병사를 연습하며 무기도 가급적 각자 구득하였다가 시기를 승하야 정식 宣戰으로 일제히 결전할지며…〉
당장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 팽배한 분위기 속에서, 안창호의 준비론과도 내용에 차이가 있는, 李承晩의 민병제에 의한 준비론이 얼마나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졌는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李承晩이 마지막으로 강조한 사업은 각지에 연락기관을 튼튼하게 조직하는 문제였다. 그것이 〈최후 결전을 행하기에 필요하다〉고 그는 말했다.
李承晩의 교서에서 눈에 띄는 또 한 가지 내용은 폭탄투척 등의 의열투쟁 방법을 정면으로 배격하고 있는 점이다.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은 正義 人道를 주장하야 强暴無道한 적을 치는 데 있으니, 혹 개인이나 단체가 적국 인민에 대하야 비인도적 행동이 없기를 주의할지라.〉
개인뿐 아니라 단체까지 일본인들에게 「비인도적 행동」을 하지 말라고 한 것은 철혈단이나 의열단 같은 단체들의 행동을 지적한 것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임시정부 안팎으로부터 비판을 받고 있는 처지에서, 독립운동자들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들도 통쾌해하고 있는 의열투쟁에 대한 이러한 언급은 굳이 하지 않아도 좋았을 것이다. 자신의 신념에 대한 그의 확집을 이런 데서도 느낄 수 있다.
李承晩은 끝으로 최근에 몰지각한 자들이 경향에 출몰하여 부호들을 위협하고 정부 명의를 빙자하여 금전을 갈취하는 사례가 있음을 지적하고, 이러한 폐습을 엄금할 방안을 강구하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서는 이튿날로 「대통령 포고」 제1호가 별도로 발포되었다.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나서 처음 시행되었던 李承晩의 연두교서 발표는 미국의 정치관행을 본뜬 것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그것은 이때 한 번뿐이었다.
⑥ 議政院 중지하고 歐美委員部 기능 강화해야
위의 연두교서보다도 이 무렵의 李承晩의 비전을 더욱 명확하게 보여 주는 두 가지 문건이 있다. 하나는 임시정부의 당면과제를 1) 내정책, 2) 외교책, 3) 구미위원부와 임시정부 간 연락, 4) 재정책의 네가지로 요약하여 적은 두 쪽짜리 문건인데, 날짜는 없으나 李承晩이 연두교서를 발표할 무렵에 작성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다른 하나는 李承晩이 상해를 떠나기에 앞서 1921년 5월18일자로 임시정부 각료들에게 보낸 장문의 「臨時大統領諭告」이다. 두 문건 다 李承晩의 친필로 되어 있다.
첫 번째 문건의 「내정책」에는 다음과 같은 매우 혁신적인 내용이 제시되어 있다.
(1) 임시의정원을 완벽하게 조직하거나 그것이 불가능하면 편의한 시기가 될 때까지 정회할 것.
(2) 상해에 있는 인사들 가운데 有望有力者로 임시정부의 자문기관을 조직할 것.
(3) 임시정부 각원으로는 국무회의만 주관하여 정부의 대소사를 회의 판결케 할 것.
(4) 행정주무에 관하여는 정무위원회(Excutive Committee)를 조직할 것.
(5) 각 부서는 국무원·내무부·외무부·군무부·재무부의 5부만 설치하고 그 밖의 기구는 합칠 것.
(6) 각 부서에 정무위원 1인 외에 국장, 참사제도는 정지하고 서기 3인씩을 둘 것.
(7) 대통령 이하 각원과 각부 주무 이하 서기의 월봉을 시의에 적합하게 제정하여 실시할 것.
(8) 각 부서를 합하여 서양인의 사택 안에 비밀히 설치하고 내외국인 간에 정무 집행자 이외에는 출입을 못 하게 할 것.
(9) 상해민단 사업을 확장할 것.
대통령의 선출 및 탄핵권을 포함한 막강한 권한을 가진 의정원의 기능을 당분간 정지하고 그 대신 상해의 「유망유력자」들로 구성되는 자문기관만을 둔다는 구상은 초헌법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정부행정의 의결권과 집행권을 나누어, 각료들로 구성되는 국무회의는 의결권만 행사하고 행정권은 신임될 정무위원들이 맡도록 한다는 구상은, 현실적으로는 각료들의 권한을 축소시키고 그 대신에 대통령의 지위와 권한을 더 강화하겠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국권회복이 된 뒤에 정식국회가 소집될 때까지 「일체 내정」과 「일체 외교」를 담당할 권한을 임시정부, 곧 집정관 총재에게 위임한 한성정부의 정신과도 부합하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을 것이다.
⑦ 『幹部들의 私的收入은 財務部로 납입해야』
두 번째로 「외교책」에서는 외무부의 기능을 효율적으로 정비할 것과, 특히 외교응원단을 조직하여 중국과 소비에트 러시아에 대한 외교를 강화할 것을 강조했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임시대통령 유고」에서 더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러시아의 치타와 모스크바에 위원을 각각 파견하여 비밀히 교섭과 연락을 하게 하고, 중국의 남북정부(북경정부와 광동의 호법정부)에 위원을 파견할 뿐만 아니라 중국의 각 省과도 계통적으로 연락과 교섭을 하게 하라고 적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내외정책안」에서 언급된 구미위원부와 관련된 항목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외교사항은 외무부와, 미주·하와이·멕시코 교민 민단사항은 내무부와, 재정사항은 재무부와 연락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구미위원부 위원의 임명과 해임은 국무원에서 의결한 뒤에 대통령의 결재를 받는다는 것이었다. 첫 번째 항목이 실행되면 구미위원부는 미주지역과 유럽에서 외교와 재정뿐만 아니라 교민사업까지 관장하는 명실상부한 정부 대표기관이 될 수 있을 것이었다.
「내외정책안」의 재정책에서 강조하고 있는 점은 예산제도의 실시이다. 군사와 외교의 경비는 서로 절충해서 지출하고, 되도록 3개월에 한 번씩 재정상황을 공표하는 것도 언급되었다. 그러면서 「특별주의」 사항으로, 월봉제를 실시한 뒤에는 대통령 이하 각 각원 및 정무위원의 사적 수입은 재무부에 납입해야 한다고 적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또한 「임시대통령 유고」는 재정정책과 관련하여, 러시아와 중국 각지에 정부기관을 설치하고 이곳에 산재한 몇백만 동포들로 하여금 납세와 의연금을 직접 정부로 납부하게 하는 방법을 강구하라고 지시하고 있다.
⑧ 三一節과 美國獨立紀念日
3월1일에는 아침부터 부슬비가 내렸다. 감격해하는 동포들 사이에서 李承晩도 새로운 감회를 느꼈을 것이다. 金九는 이런 날일수록 더욱 긴장해야 했을 것이다.
李承晩은 오전에 의정원에서 거행된 축하식에 참석한 데 이어 오후 2시에 올림픽극장에서 열린 민단 주최의 축하회에 참석했다. 올림픽극장의 축하회에는 임시정부 간부들과 함께 김가진과 박은식도 참가하여 단상에 자리 잡았다. 33인의 한 사람인 金秉祚의 독립선언서 낭독에 이어 李承晩이 축사를 했다.
『오늘은 무슨 날입니까? 오늘은 압박과 부자유에서 끌어내어 자유와 독립으로 인도한 우리 2천만 동포가 소생한 날이외다.…
내지에 있는 우리 동포는 오늘 이날을 위하야 무수한 피가 흐르고 살이 떨어지며 생명이 없어지고 옥에 갇히고 파산당했습니다. 그러면 이와 같은 비참한 날을 기뻐 뛰며 축하하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몇몇 개인이 죽음으로써 우리 민족 전체가 삶을 누리게 되었으니 기뻐할 일이오… 우리의 많은 동포가 죽음으로써 얻은 다른 효과는 그만두고 다만 오늘 한 날이 있게 한 것만 생각하여도 장하외다』
이어 李承晩은 그 특유의 미국 예찬론을 폈다.
『미국사람들이 매년 7월4일의 독립기념일을 당하야 환호하는 것을 볼 적마다 나는 홀로 슬퍼하였소. 이는 그들의 조상들은 많은 피와 땀을 흘리고 살과 힘을 없이하였으므로 오늘 그들의 자손들에게는 안락과 기쁨이 있으되, 오직 우리 근대의 조상들은 자손들을 위하야 땀과 피를 흘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들의 자손인 우리는 고통과 슬픔으로 있게 된 것이외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를 미국에 보냈던 閔泳煥의 유서며 자기가 미국에서 지은 漢詩 등을 소개하면서, 결사의 각오를 강조했다. 李承晩은 중국의 남북이 화합하지 못하는 것의 폐단을 들어 독립운동의 결함을 말하고, 『이제 파괴의 시기는 지나고 지금은 오직 건설이 있을 뿐』이라고 역설했다.
축하회가 끝나자 일부 청중들은 학생들을 중심으로 대기시켜 놓았던 자동차 일여덟 대에 분승하여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를 부르면서 빗속을 달렸다. 그들은 일본인들의 집단거주지인 虹口에 이르러 일부러 일본 영사관 앞에서 만세를 부르며 시위운동을 벌였다. 자전차를 타고 외국 조계지를 돌면서 한문으로 번역된 독립선언서를 뿌리는 소년도 있었다. 이러한 일반 동포들에게는 李承晩은 무어니 무어니해도 자랑스러운 「우리 대통령」일 수밖에 없었다.
(3) 協誠會 결성하여 反對派들과 對決
반대파들의 이러저러한 비난과 모략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으로서의 공식 일정은 상해 한인사회에 李承晩의 이미지를 제고시키게 마련이었다. 그는 4월2일에는 城西門 밖 공동운동장에서 열린 상해 거류동포들의 춘계 체육대회에 참석했다. 이날 그는 어떤 서양부인을 동반하고 참석했다고 했는데, 그 서양부인이란 아마 크로푸트 부인이었을 것이다.
4월22일(음력 3월15일)은 단군의 어천(승천)을 기념하는 御天節(어천절)이었다. 의정원에서 열린 기념식에서 李承晩의 讚頌詞(찬송사)가 낭독되었다. 이 찬송사는 「獨立新聞」의 1면 머리에 큰 활자로 실려 눈길을 끌었다.
………………………
오늘을 만나 기껍고 고마운 중에
두렵고 죄 많음을 더욱 느끼도다
나아가라신 본 뜻이며
고루어라신 깊은 사랑을
어찌 잊을손가
불초한 승만은 이를 본받아
큰 짐을 메고 연약하나마
모으며 나아가
한배의 끼치심을 빛내고
즐기고저 하나이다.
① 『바다는 험하고 배는 외롭고…』
그러나 이러한 공식행사만으로는 반대파들의 도전을 극복할 수 없었다. 적극적인 대결이 필요했다. 구체적인 움직임으로 나타난 것이 趙琬九, 尹琦燮, 黃中顯 등 45명의 명의로 3월5일에 발포된 선언서였다. 이 선언서는 「결의 및 강령」에서
1) 임시정부를 절대로 유지할 것,
2) 현 대통령 이하 각 국무원을 신임할 것,
3) 언론 행동 등 일체 현 시국을 파괴하는 것과 같은 행위를 방지하도록 노력할 것의
세 가지를 천명했다.
그런데 이 선언서가 발포되는 바로 그날 아침에 李承晩은 장붕을 대동하고 상해를 떠나 남경으로 가서 닷새 동안 머물다가 돌아왔다. 남경에는 서울YMCA의 총무로 李承晩과 같이 활동했던 질레트(P.L. Gillet)가 있었다. 그가 와병 중이었으므로 그의 병문안을 겸하여 그곳에서 관광도 하면서 상해 정국과 관련된 여러 가지 구상을 할 시간을 갖기 위해서였다.
두 사람은 3월11일 아침에 상해로 돌아왔다.66) 그리고 이튿날 저녁 7시에 민단 사무실에서 3월5일의 선언서의 서명자들이 주동이 되어 연설회를 열었다. 이날 저녁의 연설회에는 200여 명의 청중이 모였다. 윤기섭과 조완구가 장시간의 연설을 했다. 윤기섭은 「험한 바다 외로운 배에 함께 실린 우리」라는 제목으로 감동적인 연설을 했다. 그는 임시정부는 〈우리 독립운동의 중추인 최고의 정치기관〉이라고 말하고, 그러한 임시정부의 중직을 담임한 지도자들을 신뢰하며 옹호하자고 역설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연설을 마무리했다.
『통틀어 말하면, 바다는 험하고 배는 외롭고 길은 머외다. 우리들은 서로 마음과 뜻을 같이하여 우리의 귀중한 중추기관을 붙들어 가고 당국 선배를 신뢰하여 絶長補短(절장보단: 긴 것을 잘라 짧은 것에 보탬)하여 가며 맡은 책임 힘껏 하여 우리의 거룩하고 위대한 광복사업을 하루바삐 이루어서 함께 건너가 같이 즐기기를 도모하옵시다』
② 金九도 協誠會 發起委員으로
두 사람의 연설에 이어 장붕과 尹宗植이 간단한 찬조연설을 했다. 참석자들은 모두 이들의 연설에 동의하면서 현 임시정부를 후원할 모임을 결성하기로 합의하고 위원 20명을 선정했다. 위원으로 선정된 사람들은 위의 두 연사를 비롯하여 황중현·박찬익·윤종식 등 기호파 인사들이 많았는데, 金九가 이 위원 명단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 매우 이채롭다.
金九가 이 연설회에 참석했는지, 또는 참석하지 않았더라도 사전에 의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비록 현장에 없었더라도 임시정부의 존재와 그 권위에 대한 金九의 확고한 충성심은 이 모임의 주동자들에게 으레히 그도 동조할 것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또한 「獨立新聞」이 윤기섭의 연설 내용을 한 면 전체를 할애하여 싣고 있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이렇게 하여 결성된 단체가 協誠會였다.
협성회는 적극적인 활동을 벌였다. 그들은 연설회를 열거나 인쇄물을 배부하여 임시정부 지지여론을 규합하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임시정부 간부들을 초청하여 연회를 열기도 했다. 또한 협성회는 회원 129명의 명의로 4개항의 강령을 발포했는데, 그것은
1) 임시정부를 절대로 옹호할 것,
2) 광복정신과 協進(협진)주의를 고취할 것,
3) 국세 납입을 이행할 것,
4) 군사의 목숨을 독려할 것의 네 가지였다.
협성회는 3월23일 오후에 정식으로 발회식을 가졌다.
③ 「獨立新聞」에 委任統治 請願문제 解明
李承晩은 남경에서 자신의 사퇴요구로까지 확대되고 있는 위임통치 청원문제를 정면 돌파하기로 결심했던 것 같다. 그는 「獨立新聞」과의 인터뷰 형식으로, 파리 강화회의가 열렸을 때에 국민회 중앙총회장 안창호로부터 전보를 받았던 일로부터 여권을 발급받지 못하고 워싱턴의 병상에 누워 있었을 때에 鄭翰景이 작성해 온 청원서에 서명하여 美 국무부와 신문에 발송했던 일까지의 과정을 사실 그대로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런 고로 이는 우리 독립선언 전의 구차하나마 시험하였던 일시 외교적 선전책에 불과한 것이오, 진정으로 위임통치를 희구한 것은 아니외다』라고 덧붙였다.
파문이 예상되는 자신의 위임통치 해명기사가 나기 하루 전인 3월25일에 李承晩은 다시 크로푸트 선교사 내외를 따라 여행을 떠났다. 크로푸트 내외는 부활절을 맞아 嘉定縣(가정현) 劉河(유하)에 안식교회가 세운 혜중병원을 방문하는 참이었다. 이처럼 李承晩은 여행을 좋아했다. 기차도 타고, 증기선도 타고, 세 시간 동안 걷기도 한 이틀 동안의 여행이었다.
④ 北京軍事統一會議는 臨時政府 否認
이 무렵 李承晩에게 가장 위협적인 존재는 그의 「사랑하는 아우」 박용만을 비롯한 신숙·신채호 등의 북경 그룹이었다. 1920년 9월에 군사통일촉진회를 발족시켰던 이들은 1921년 4월17일에 북경에서 다시 군사통일주비회를 결성했다. 이 회의는 연해주와 북만주 지방으로 흩어진 무장독립운동단체들의 통합을 표방한 것이었으나, 궁극적인 목적은 임시정부 타도였다.
주비회는 4월19일에 회의 명칭을 「군사통일회의」로 확정했다. 회의에는 박용만 지지단체인 하와이 국민군과 하와이 독립단을 비롯하여 북간도 국민회, 서간도 군정서, 대한국민의회, 국내의 통일당 등 국내외의 10개 단체 대표 17명이 참가했다. 박용만은 국내의 「國民公會」의 대표라고 했다. 전년의 군사통일촉성회 때에 참가했던 신채호, 張建相, 金大池 등은 이 회의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군사통일회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을 부인하고 3·1운동 당시에 국내에서 조직된 「대조선공화국 임시정부」를 계승하여 임시정부를 새로 조직하기로 결의하고, 이를 임시정부에도 통고했다. 이들은 상해 임시정부와 의정원을 불신임하는 이유로 李承晩의 위임통치 청원사실을 들었다.
북경에서 군사통일회의가 개막되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신채호, 김창숙, 장건상, 金元鳳, 李克魯 등 국내, 북경, 천진, 간도, 시베리아 각지의 독립운동단체를 대표하는 54명의 명의로 「성토문」이 발표되었다. 성토문의 명의자 가운데에는 의정원 의원도 6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성토문이 나온 경위는 분명하지 않으나, 그 내용은 군사통일회의의 성토문과 마찬가지로 李承晩의 위임통치 청원에 대한 매도였다.
북경 군사통일회의에 대한 대책을 논의한 4월 29일의 국무회의는 曉諭文(효유문)을 발표하기로 결의한 것이 고작이었다.
⑤ 잇따른 國務員들의 사퇴
이 무렵의 임시정부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는 간략한 회의록이 보존되어 있다. 4월16일의 구락부 만찬회와 18일의 비공식 국무회의 기록이 그것이다. 4월16일 저녁에 한 호텔에서 있었던 구락부 만찬회에서 李承晩은 미국으로 가겠다고 말했다. 미국에 일이 많고 또 상해에 있어 보아도 논란거리만 생기고 도움을 주지 못하여 송구스럽기만 하다는 것이었다. 『미국으로 가서 여러분을 힘껏 돕겠다』고 그는 말했다. 李承晩의 이 말에 대해 이동녕은 돌아간 뒤에 이곳 사람들이 정부에 남아서 후원할 것으로 기대하지 말라면서, 반드시 분리되고 말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틀 뒤인 4월18일 저녁에 열린 비공식 국무회의는 더욱 심각한 분위기였다. 와병중인 교통총장 南亨祐말고는 각료들이 다 모였다. 회의는 李承晩과 김규식의 논쟁으로 일관했다. 李承晩은 김규식과 노백린이 오랫동안 국무회의에 불참하는 것을 나무랐다. 그러자 김규식이 반발했다.
『무슨 정략이 있어야 시국을 정돈할 것이 아닙니까. 만일 대책이 있다면 나도 당연히 참여하여 돕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시일만 낭비할 필요가 없어요』
시일만 낭비할 필요가 없다는 말은 李承晩이 약속대로 빨리 사퇴하라는 뜻이었다. 李承晩이 대답했다.
『만일 상당한 민의가 있고, 그것이 상당한 민의 기관을 통하여 발표된 이후라야 사퇴하겠소』
『그 소위 민의기관이 무엇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의정원입니까, 국민대회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아니면 북경단체를 말하는 것입니까?』
李承晩은 몹시 화가 났다.
『이는 국무회의에서 토의할 바가 아니오. 또 시국정돈책으로 말하면, 모두 여러분이 團聚協商(단취협상: 화목하게 서로 모여 상의함)한 뒤라야 내가 결정하겠소. 여러분이 국무원의 소임대로 국무회의에 참석하여 종전대로 행공하겠소, 그것은 하지 않고 오직 교란하고자 할 뿐이오?』
그러자 김규식은 사직하겠다고 말했다.
『저는 여기서 구두로 사퇴를 청원합니다. 여러분은 이대로 시행해 주시기 바랍니다』
李承晩도 단호했다.
『여러분이 이를 다 들었소이다. 모름지기 그렇게 처리함이 좋겠소』
말을 마치자 李承晩은 자리를 떴다.
김규식은 이렇게 임시정부를 떠났다. 그의 사면이 발표된 것은 4월29일이었다. 김규식에 이어 남형우도 사직했고, 5월 들어서 마침내 통합임시정부 탄생의 산파역을 했던 안창호마저 임시정부를 탈퇴했다. 노백린은 자기는 李承晩 밑의 군무총장이 아니라 한성정부의 군무총장이라고 말하고 시베리아로 가겠다면서 사임하지 않았다.
4월24일에 城西門 밖 혜정전수여학교에서 협성회의 발회식이 다시 거행되었다. 의정원 의원 金泰淵의 사회로 오후 4시에 열린 이날의 집회에는 참석자가 많지 않았다. 조완구가 회원의 의무라면서 앞에서 본 협성회의 강령을 설명하고, 이어 윤기섭이 며칠 안으로 사무협의회를 개최할 예정이니까 그 날은 회원 전원이 참석하라고 말하고 나서 오후 5시에 폐회했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회원들의 열의가 식어 가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⑥ 玄楯이 駐美韓國公使館 개설해
李承晩이 서둘러 미국으로 돌아가기로 한 데에는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구미위원부가 격심한 혼선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李承晩은 미국을 떠나 올 때에 현순에게 위원장 대리 일을 맡기면서 새로운 일은 벌이지 말고 서재필과 돌프에게 상의해서 현상유지만 하라고 지시했었다(「月刊朝鮮」 2005년 3월호, 「李承晩의 上海 밀항」 참조).
그러나 현순은 이러한 李承晩의 지시를 무시하고 워싱턴에 한국 공사관을 개설하는 작업을 추진했다. 현순은 1921년 2월에 사무실 집기 서랍에서 「대한민국 대통령 李承晩」의 서명이 있는 「주미특명전권공사 현순」의 신임장을 발견하고 한국 공사관을 개설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는 李承晩에게 보낸 3월9일자 「업무보고」에서 〈公使館 설립하고 기회를 得하여 준비를 완전히 한 후에는 國務院(國務部)에 임명장을 제출하며, 대한민국 승인안을 제출하야 독립승인을 요구하며, 韓美條約을 증정하자 하겠사오며…〉라고 적었다.
현순이 공사관 개설을 서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미국의 새 대통령으로 하딩(Warren G. Harding)이 취임한 뒤에 美·日 관계가 악화되어 개전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한국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미국정부에 정식으로 독립승인을 요청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새 일을 시작하면 동포 열심이 다시 분기할 터〉이므로 침체에 빠진 미주, 하와이, 멕시코 동포들로부터의 자금 수합을 다시 활성화시킬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 것이었다.
미일전쟁을 기대한 것은 물론 현순의 단견이었다. 하딩 대통령 취임을 전후해서 태평양의 얍(Yap)도에 관한 문제로 美·日 사이에 외교분쟁이 일어나고 있기는 했으나, 그 때문에 전쟁으로까지 사태가 확대될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리고 한국문제는 일본 내정문제라는 미국 정부의 입장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현순은 공사관 개설을 추진하면서 서재필이나 돌프와는 상의하지 않고 구미위원부와 관계가 없는 스턴(S.W. Stearn)이라는 사람에게만 의논했다. 그러면서 필라델피아 사무소와 런던사무소도 폐쇄하겠다고 했다. 가뜩이나 임시정부 일로 고심하고 있던 李承晩은 현순, 서재필, 돌프 세 사람과 따로따로 편지와 전보를 주고받아야 했다.
그들은 모두 李承晩에게 빨리 미국으로 돌아오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때에 李承晩이 현순에게 〈비밀·원동에 있어야 노국(러시아)에 사람 보내겠소〉라고 타전하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그는 임시정부의 재정문제 해결을 위해 모스크바에 특사를 보내는 문제에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
⑦ 玄楯이 臨政에 당돌한 電報 쳐
현순이 각원들 앞으로 보낸 다음과 같은 당돌한 전보는 이때의 상황을 짐작하게 한다.
〈당신들 정략으로 일 안 하고 싸움질만 하므로 돈 안 들어오오. 공사 수임한 것, 공관 설립한 일 임시정부에서 속히 인증 전보하면 돈 빚얻어 보내리다. 오해 마오. 공사 일 광고 않소. 외교 일 준비 목적이오. 필라델피아, 런던 닫혔소. 임시정부로 매삭에 돈 좀 더 보내겠소. 서재필 믿지 마오. 돈만 아오. 황(기환) 믿지 마오. 하는 일 아주 없이 돈만 요구. 내 말 믿지 않고 시행 안 하면 정부, 위원부 다 없어지오. 대통령 사사로 내정일 서재필, 돌프에게 전보질 못 하게 하오.〉
공관개설을 망설이던 李承晩은 승인하는 듯한 전보를 보냈다가 곧 취소했다. 그는 마침내 4월17일에 현순에게 사직을 권고하는 전보를 친 다음 이튿날에는 다음과 같이 해임을 통보했다.
〈당신의 위원 해임. 공사 위임 취소하니 사무와 재정 서재필께 전장(轉掌)하오. 위임장은 급할 때에 쓰라 한 것이오. 공관하란 말 없었소. 4월4일 전보도 공전(公電) 기다리라 한 것이오. 공관일 허락 없소. 4월9일 정부에 보낸 전보도 대실수. 돌프(에게) 신임장 도루 주시오.〉
같은 날로 李承晩은 서재필을 구미위원부의 임시위원장으로 임명했다.
⑧ 玄楯은 解任에 불복
그러나 현순은 즉각 반발했다. 그는 이튿날 李承晩에게 다음과 같이 타전했다.
〈나라와 2천만을 위하여 해임 안 받소. 나는 33인의 대표자됨을 생각할 것이오. 서재필과 돌프는 외국인인 고로 내가 죽어도 외교 안 맡기오. 당신 전문 받기 전에 외교 시작하였으니 대통령이라도 고치면 대역부도.〉
현순은 4월14일에 공사관을 개설하고 美 국무부와 상하의원들에게 이 사실을 통보했다. 5월6일에는 국무부를 방문하여 한미국교의 회복을 요청하고, 5월11일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대통령 주미대표」 명의로 미국 대통령과 휴즈(Charles Evans Hughes) 국무장관 및 상하의원들에게 장문의 독립승인 요구서를 발송했다.
공교롭게도 이날 서재필은 한국친우회 회장 톰킨스(Floyd W. Tomkins) 목사 등과 함께 하딩 대통령의 비서 크리스찬(George B. Christian)에게 하딩과의 회견을 주선해 줄 것을 당부하고 있었다. 서재필은 정초에 오하이오州의 메리언에 있는 하딩의 사저에서 차기 대통령 당선자인 그를 만났었다.
현순의 이 독립 승인요구서는 5월12일자 「뉴욕타임스」지에 크게 보도되어 문제가 되었다.
서재필과 돌프는 5월17일에 각각 휴즈 장관 앞으로 현순의 행위는 독단에 의한 것이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그것을 승인하지 않았으며, 앞으로 현순과의 관계는 단절되었고, 이번의 경솔한 일을 사과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그러고는 「구미위원부 통신」을 통하여 현순이 「경거망동」으로 국가에 손해를 끼친 것과 대통령에게 불복한 것을 비난했다. 그리고 그가 구미위원부의 공금을 횡령하고 중요문서를 절취하는 등의 행위로 구미위원부에 4,000달러의 재정손실과 혼란을 끼쳤다고 주장했다.
구미위원부의 사태의 심각성을 우려한 許政, 林超, 趙炳玉 등 유학생들이 주축이 된 뉴욕의 대한인공동회는 워싱턴에 대표를 보내어 사태의 진상을 조사한 뒤에 「미주, 하와이, 멕시코, 원동 각처 동포들에게」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성명서의 내용은
1) 현순은 구미위원부 사무실에 보관되어 있던 공사 임명장을 자의로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대통령의 사직권고와 해임명령에 불복했다.
2) 현순은 공사관 설립을 구실로 구미위원부의 공금과 중요 서류를 사사로이 관할하고 불량한 내외국인과 공모하여 외교상 큰 손실을 초래했다.
3) 현순은 워싱턴을 떠나는 조건으로 여비 1,500달러와 공사관 설립경비 500달러를 구미위원부에 요구했다는 것이었다.
현순은 마침내 5월26일자로 李承晩에게 사임청원서를 보내고, 워싱턴을 떠나서 하와이로 갔다. 목적지는 상해였다. 임시정부 수립 초기에 李承晩을 정상으로 만드는 데 주동적 역할을 했던 현순은 이때부터 李承晩 반대파가 되었다. 〈나는 그(李承晩)의 정치권에서 기꺼이 작별했다. 다행히 나는 워싱턴 재임시에 약간의 저금이 있었다〉라고 현순은 그의 자서전에 적고 있다.
⑨ 共産黨의 金萬謙을 學務總長 代理로 지명
李承晩은 이제 사면초가에 빠졌다. 제도개혁 문제는 논란만 거듭하면서 아무런 결론도 맺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이 구상했던 정부 개혁 방안은 제대로 토론조차 해보지 못했던 것 같다. 줄줄이 사퇴한 총장들과 차장들의 자리를 메워 임시정부의 기능을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급한 문제가 되었다. 李承晩은 4월29일자로 국무총리 대리 이동녕에게 국무총리와 총장, 차장 인선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자신의 복안을 송부했다.
국무총리 대리 安昌浩
국무원 비서장 申翼熙
내무부 차장 李裕弼
외무총장 대리 李喜儆
차장 安恭根
법무부 차장 洪 鎭
학무총장 대리 金萬謙
재무부 차장 金仁全
노동국 총판 趙鏞殷(素昻)
교통부 총장 孫貞道
차장 金 九
그리고 5월1일에는 국무회의에 참석하지 않고 있는 노백린을 해임하고 협성회를 주도하는 尹琦燮을 군무총장 대리 겸 차장으로 선임하라고 통보했다.
李承晩의 이때의 인선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보이친스키와 함께 상해에 와서 한인공산당 창당을 주도했던 김만겸을 김규식의 후임으로 학무총장 대리로 지명한 점이다. 한인공산당은 김립이 가지고 온 모스크바 자금의 관리문제를 놓고 이동휘, 김립 등의 舊한인사회당 그룹과 김만겸, 呂運亨, 安秉璨, 趙東祜, 崔昌植 등의 그룹이 알력을 벌이다가 1921년 1월경에는 두 파로 분열되었다.
김만겸은 안병찬과 함께 5월에, 상해에서 이동휘 그룹을 중심으로 하여 열린 고려공산당대표회(20~23일)와는 별도로 이르쿠츠크에서 열린 통일고려공산당 창립대회(4~15일)에서 11명의 중앙위원의 한 사람으로 각각 선출된 인물이었다. 이러한 김만겸을 李承晩이 임시정부로 끌어들이려 한 것은 고차적인 정치적 포석에서였다.
그것은 이르쿠츠크파 공산당 그룹으로 하여금 임시정부의 파괴공작을 일삼고 있는 이동휘 그룹을 견제하게 하려는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모스크바에 임시정부의 특사를 보내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또 이르쿠츠크파 공산당 그룹으로서도 여러 가지 점에서 긍정적으로 검토할 만한 문제였으리라고 생각된다.
李承晩의 김만겸 지명은 그러나 국무회의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것은 아마 신규식·이동녕·이시영 등의 반공적인 정치성향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나, 특히 1919년 봄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한국민의회가 결성될 때에 이동녕이 당했던 불쾌한 경험이 큰 작용을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김만겸은 대한국민의회를 결성한 주동 멤버의 한 사람이었다.
⑩ 金九를 交通部次長으로 지명해
李承晩이 모스크바로 파견하기로 마음먹고 있는 이희경과 안공근을 외무총장 대리와 차장으로 지명하고, 연두교서와 「임시대통령 유고」에서 그 기능의 확충을 강조한 교통부의 업무를 맡길 인물로 의정원 의장 손정도와 함께 경무국장 金九를 지명하고 있는 점도 흥미롭다. 李承晩과 金九가 직접 만나기는 이때가 처음이었다. 金九는 李承晩에 대해 경무국장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고, 그러한 金九에 대해 李承晩은 신뢰감을 느꼈던 것이다.
5월7일자의 새 각료 임명에서 손정도는 그대로 임명되었으나, 金九는 빠졌다. 각료들은 金九의 현재의 임무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외무총장 대리 차장이었던 申翼熙가 임시정부 업무를 사실상 총괄하는 국무원 비서장으로, 협성회 주도자인 조완구와 윤기섭이 각각 내무부 차장과 군무부 차장으로 임명된 것이 눈길을 끈다. 학무총장 대리 차장에는 김만겸 대신에 재무부의 비서장 겸 공채관리국장인 金仁全이 임명되었다.
안창호가 고사한 국무총리 대리에는 5월16일부로 법무부 총장 신규식을 겸임 발령하고, 노동국 총판은 재무부 총장 이시영이 겸임하기로 했다.
5월 들어 북경 방면으로부터 테러리스트들이 속속 상해로 몰려오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들은 임시정부 지도자들의 암살을 호언하면서, 현상금까지 걸었다고 했는데, 李承晩과 안창호를 죽이면 1,000원, 손정도·이희경·김만겸 등을 죽이면 500원을 준다고 했다는 것이다. 암살 대상자 명단에 김만겸이 포함되었다는 것이 특히 주목된다. 그리하여 李承晩을 비롯한 임시정부 간부들에게는 계속 경호원이 배치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을 조선총독부가 관망만 하고 있을 턱이 없었다. 일본 밀정들의 준동이 기승을 부렸다. 그리하여 임시정부에서는 金九가 주축이 되어 임시정부 간부들의 동정을 정탐하려는 밀정들을 색출하여 소탕하기 위해서 각 요소에 청년들을 파견하여 사람들의 행동을 감시했다.
많은 사람들이 독립운동에 회의를 느끼고 국내로 들어가거나 미국으로 떠나거나 활동을 포기하고 생활방도를 찾아서 임시정부를 떠났다. 1919년 4월11일 밤의 상해임시정부 수립을 주도했던 독립신문사 사장 李光洙가 국내로 들어간 것도 이 때였다.
⑪ 볼셰비키 政府에 特使 보내기로
신규식을 국무총리 대리로 선정한 이튿날인 5월17일에 열린 국무회의는 「모스크바 파견 외교원」 韓馨權(한형권)을 즉시 소환하기로 결의했다. 결정은 말할 것도 없이 한형권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표로 파견되었고, 따라서 그가 볼셰비키 정부로부터 받아 온 자금은 마땅히 임시정부로 보낸 자금이라는 인식에 따른 것이었다. 그리하여 임시정부에서는 김립에게 모스크바 자금을 내놓으라고 계속 요구하고 있었다.
李承晩은 한형권 대신에 이희경과 안공근을 모스크바로 파견할 준비를 서둘렀다. 그러면서 직접 작성한 것이 「차관조건(주의)」이라는 두 쪽짜리 문건이었다. 이 문건에는 〈上海에서 발정시 국무원 제씨와 상의하다가 未完한 件〉이라는 그의 친필 메모가 적혀 있다.
문건의 내용은, 차관 액수는 200만 달러 이상으로 하고, 이자는 연리 4% 내지 6%이며, 담보로는 독립한 뒤의 철도부설권, 광산채굴권, 관세의 세 가지를 들었다. 차관 목적은 군사비와 외교 선전비 및 기업자본의 조달이었다. 상환기간은 독립 완성 후 5년으로 정했다.
차관을 얻은 뒤에는 즉시 3년 내지 20년짜리 정기예금으로 은행에 맡기되, 예금자의 명의는 임시대통령에게 일임한다는 것이었다. 차관 액수를 200만 달러 이상이라고 한 것은 아마도 한형권이 볼셰비키 정부로부터 약속받은 자금 액수가 200만 루블이라는 사실을 웬만큼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문건의 마지막에 있는 「비밀」이라는 항목에는 〈원래 차관이란 기밀을 요하는 바 우리의 금일은 더욱 특별하므로 비밀을 엄수할 일〉이라고 적혀 있다. 그것은 모스크바 자금을 둘러싼 임시정부 안팎의 여러 세력들의 경쟁뿐만 아니라 아직 소련을 승인하지 않은 미국 및 서유럽 제국과 일본을 의식한 조치였을 것이다. 새로 특사로 임명된 이희경과 안공근은 1921년 6월 초에 모스크바로 떠났다.
⑫ 申翼熙 대동하고 蘇州 여행
李承晩은 미국으로 돌아가는 데에도 모험을 해야 했다. 이때도 그는 여권이 없었다. 게다가 그의 신병을 노리는 것은 일본 밀정들만이 아니었다. 그는 임시의정원 앞으로 5월17일자로 〈외교상 긴급과 재정상 절박으로 인하야〉 미국으로 돌아간다는 짤막한 교서를 보냈다. 이 교서는 이튿날 의정원에서 낭독되었다.
그러나 李承晩은 이미 14일에 신익희를 대동하고 몰래 상해를 벗어나서 蘇州로 갔다. 이튿날 아침에 크로푸트 내외와 합류하여 劉園, 西園, 寒山寺 등을 관광하고 15일 저녁에 상해로 돌아왔다.
李承晩은 19일에 친지들과 작별인사를 하고는 혼자서 몰래 吳淞(오송)으로 가서, 그곳에 있는 영국인 경영의 작은 호텔에 머물렀다. 24일에 크로푸트의 집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모든 사람들이 그는 이미 미국으로 떠난 것으로 생각했다. 李承晩이 「컬럼비아」호(S.S. Colombia)에 승선한 것은 28일 밤 10시였다. 상해에 있는 피치(George A. Fitch) 목사가 1등석 선표를 구해 주었다.
李承晩에게는 행운이 따랐다. 그가 크고 작은 위험에 부딪힐 때마다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神戶(고베)에 기항하게 되어 있는 「컬럼비아」호에서 내려 마닐라에 상륙할 수 있었던 것은 우연히도 배 안에서 광동주재 미국영사 버그홀츠(Bergholz)를 만나서 도움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李承晩은 2주일 동안 필리핀에 머물면서 호놀룰루로 직항하는 배편을 기다려야 했다.
그동안 그는 기독교 관계자들도 만나고 관광도 즐겼다. 우연한 계기로 그곳의 미군사령부에 정중하게 초청되기도 했다. 「그래닛 스테이트」호(S.S. Granite State)로 14일 밤에 마닐라를 출발하여 호놀룰루에 도착한 것은 29일 아침 8시였다. 부두에는 많은 동포들이 마중나와 있었다. 화물선 바닥에 숨어서 떠난 지 7개월 반 만에 돌아온 것이다. 상해행을 가능하게 해준 보드윅(Borthick)도 그 인파 속에 서 있었다.
[출처](37)『임시대통령 각하, 上海에 오시도다』|작성자 이사람